이드 2부 – 105화


542화

데일리가 돌아간 후 이드가 지친다는 듯 목을 주무르자, 일리나가 뒤로 다가와 이드의 어깨를 부드럽게 풀어 주며 말했다.

“피곤한가 봐요?”

“아무래도 고민거리가 많이 생겼으니까요.”

이드는 일리나에게 몸을 기대며 눈을 감았다.

“생각보다 소드 팰러스에는 좀 더 오래 있어야 할 것 같아요.”

처음에는 이곳에 오래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저 실종된 시르피를 찾을 시작점으로 생각했을 뿐이었다. 시르피를 수색하는 일에 있어서 서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으면 좋을 것 같다는 정도. 물론, 마음 한편으로는 자신이 제대로 무공을 전수한 시르피를 중심으로 무공이 어떻게 변하고 발전했는지 보고 싶기도 했다.

당장 엘프들이 발전시킨 무공만 해도 얼마나 대단했던가.

그 작은 엘프 마을에서 일어난 일이 그렇다면 거대한 제국,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무공을 발전시켜 나간 소드 팰러스에서는 도대체 얼마나 바뀌고 발전했을까.

더구나 대륙에는 중원과 달리, 무공 연구에 있어서 치트키라고 할 수 있는 신성력과 마법이 있었다.

‘치트키가 뭐야. 그냥 반칙이지, 반칙이야.’

만약 중원이었다면 엘프 마을은 멸족하거나 무공을 버려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신성력을 다루는 사제와 마법사의 도움으로 무공을 파헤치고 분석해서 실험한 끝에 새로운 무공들을 만들어 냈다.

만약 중원에 사제와 마법사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무공평천하! 정말 무공이 세상을 지배했겠지.’

이드의 머릿속에서 세상은 이제 고작 중국 대륙을 이르는 말이 아니었다. 거대한 지구라는 행성 전체를 칭하는 말이었다.

신을 믿는 사제와 마법사가 있다고 해도 그들은 세상이 무공으로 뒤덮이는 것을 막지 못한다. 아니, 그들도 그 축의 하나가 되고 말겠지.

신에 대한 무조건적인 믿음과 사랑으로 자신을 던지는 사제와 특별한 재능에 뛰어난 두뇌, 그리고 부차적으로 연구를 위한 자금이 필수인 마법은 피땀 어린 노력만 있다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확실한 성과를 보장하는 무공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물론 이를 위해서는 무공의 완전한 개방이 필수 조건이기는 하다. 하지만 그 부분을 바로 사제와 마법사가 해결해 줄 수 있다. 그들의 도움을 받는다면 수많은 무공이 손쉽게 탄생하고, 빠르게 발전해서 모든 무공이 상향평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숫자가 많아지고 수준이 비슷해진 무공들은 삼류무공처럼 더 이상 한 문파와 개인의 비전이 되지 못하고 세상에 뿌려질 것이다. 어쩌면 저 유명한 무당의 태청검법을 서점에서 구매하는 세상이 될 수도 있다.

물론 그 속에서도 신공이라 칭해지는 최상위 무공들은 특별하게 빛날 것이다.

그런 신공들은 단순한 ‘try─error’를 통해 태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상위의 신공은 그 대부분이 신의 전지와 같은 예감과 직감, 그리고 제작자의 영혼에 담긴 깨달음과 천지자연의 교감 속에서 태어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시도 횟수만 많다고 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아,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지.’

일리나의 부드러운 손길에 피로와 긴장이 너무 풀려 버린 나머지 이상한 곳으로 생각이 샜다.

이드는 생각을 되돌렸다.

처음 에단의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소드 팰러스도 시르피를 간절히 찾고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직접 눈으로 본 그들은 이미 포기한 상태에 가까웠다. 특히 긴급대책위라는 인간들은 속에 무슨 생각을 꿍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을 확인하는 순간 소드 팰러스에 오래 머물 생각을 버렸다. 솔직히 말해 이곳과 이드는 아무런 직접적인 인연도 없었다. 소드 팰러스가 개판으로 돌아가든 콩가루 집안이 되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저 시르피가 쌓아 올린 세월이 무너지는 것이 안타깝다, 정도의 감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사라지는 순간 무너질 성이었다면 차라리 그녀가 없을 때 일찍 무너지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번 화원에의 잠입도 소드 팰러스를 떠나는 마지막 준비였다.

화원에서 시르피에 대한 단서를 찾든 못 찾든 미련 없이 소드 팰러스를 떠날 생각이었다.

이곳에 무거운 엉덩이를 걸치고 있어 봤자 어떠한 결과물도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확신한 후였기 때문이다.

에단이 여전히 미련을 질질 끌고 있긴 하지만, 그가 굳이 소드 팰러스를 고집한다면 강제하지 않고 오랜만에 아내들과의 화기애애한 여행을 즐겨 볼 생각도 있었다.

아, 물론 본래 목적을 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란 말이지………..?’

시르피는 책에 여러 가지 골치 아픈 일을 많이 적어 두었다. 그녀도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이 아니라서 세세하게 적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알고 있는 것들과 전해 들은 것들에 대해서는 최대한 자세하게 적고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자서전 형식을 띠고 있는 일기였다. 어쩌면 시르피의 한숨일 수도 있다.

그녀가 책을 쓰기 시작한 것은 세레니아가 사라진 후부터였다.

처음에는 시르피도 세레니아를 기다렸던 것 같았다. 책의 중간중간 그녀가 돌아오기를 바라고, 그녀를 걱정하는 말이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그런 내용이 없어지기 시작했다.

어쩌면 시르피는 자신의 사후에도 세레니아에게 들었던 이야기들을 전하고 싶었던 것인지도 몰랐다. 특히나 그녀의 수련실에 만들어 놓은 밀실을 여는 방법을 생각하면, 누가 이 일기를 찾아 주기를 바랐는지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일이었다.

[이드, 그거 자의식과잉이에요.]

사방으로 뻗어가는 이드의 생각에 라미아가 태클을 걸어왔다. 좋은 기분으로 일리나의 손길을 즐기던 이드는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말에 고개를 들다가 움찔했다.

탁자 위에 오른 라미아 앞에 분명히 데일리에게 들려 보냈던 책이 떡하니 펼쳐져 있는 때문이었다. 안에 들어 있는 문젯거리를 생각하면 가히 저주받은 책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행히 실물은 아니었다. 라미아가 마법으로 꺼내 놓은 영상이었다.

“내가 어때서?”

이드가 책을 무시하고 라미아를 바라봤다.

[제 생각에는 이드보다는 황궁에 전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요. 대륙을 뒤집어엎으려던 괴물들이 있었고, 현재도 존재하고 있으니, 자신이 죽은 후에라도 제발 엉뚱한 곳에 삽질하지 말고 항상 경계라는 뜻으로 말예요. 이드가 시르피에게 난화십이식을 전수하긴 했지만, 그녀의 정수는 다시 황궁으로 이어졌잖아요. 아무래도 스승보다야 자신이 가르친 제자가 사랑스럽지 않겠어요? 내리사랑이라는 말도 있고.]

피식.

“그렇게 따지면 황궁이 아니라 내가 확실한 거 같은데? 행운은 아래로, 불행을 위로, 보통은 그렇잖아?”

이드의 길지 않은 인생 속에서는 그랬다.

성공하면 자식에게 베풀고, 불행과 고생이 찾아오면 부모님에게 기대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행동 패턴이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책 속에는 행운이 아니라, 불행이 가득했으니까.

[그건 이드의 단순한 생각이구요. 시르피와 황궁의 관계가 일반적인 가족 관계는 아니잖아요.]

“앞의 말하고 다르잖아!”

[뭐, 그렇다고요. 정확한 건 시르피에게 물어보지 않으면 모르는 거죠. 여자 맘은 여자도 몰라요.] 

결국 이도 저도 아니라는 거다.

“뭐야 그게.”

이드는 피식 웃고는 몸을 뒤집어 일리나의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일리나는 어떻게 생각해요?”

“어떤 거요? 혼돈의 파편? 초인? 정령? 세레니아? 아니면 소드 팰러스?”

이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묻는 일리나의 말에 이드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일리나는 어떤 일이 가장 신경이 쓰이는데요?”

“정령이요.”

“끙. 내가 당연한 걸 물었네요.”

이드는 일리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고개를 돌리자 라미아가 종이 위에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뭐해?”

[요점 정리요.]

“역시 우리 모범생 라미아! 그래서 뭐가 나왔어?”

[요점 정리라니까요. 답을 구한 게 아니에요.]

“아무튼!”

따지기 귀찮다는 듯 살랑살랑 손을 흔드는 모습에 라미아가 입을 삐죽였다.

[일단 혼돈의 파편이 그레센을 떠난 건 아닌 것 같아요. 세레니아는 초인의 탄생 뒤에 그들이 있는 것이 아닐까 의심하고 있었나 봐요.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요. 일리나를 걱정하게 만든 정령 문제도 이때쯤 시작되었죠. 이후 세레니아와 드래곤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였고, 모두 사라졌죠. 결국 혼돈의 파편이 모든 문제의 핵심이라는 거예요.]

딱콩!

“……답이 없잖아… 아얏!”

불퉁한 이드의 말에 라미아의 꿀밤이 날아들었다.

[정리라고 그랬죠.]

“그럼 내 정령 계약이 사라진 것도 그것 때문이려나?”

[・・・・・・ 어쩌면?]

그레센에 돌아온 날을 생각하는 이드의 말에 라미아는 확답을 해 주지 못했다.

이드는 눈을 감고 이름표가 사라진 영혼 속 바구니를 바라봤다. 바구니의 이름은 정령 친화력, 다른 말로 속성력이라고도 한다.

이드는 이 바구니에 정령왕의 이름을 적어 놓고 있었다. 그들의 존재를 이 바구니에 담아 자신이 온전히 그들의 존재력을 감당하고서 세상에 정령왕의 힘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그레센에 돌아온 이드는 그 바구니에 적혀 있던 정령왕의 이름이 사라진 것을 알았다. 다만 바구니가 사라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령왕과의 계약 때와 마찬가지로 넓은 바구니에서 놀다 가는 세상의 정령들에게 부탁해서 정령을 부릴 수 있었다.

이드는 정령왕과의 계약이 사라진 이유를 자신의 차원이동에서 찾았다.

지구에 갔을 때도 정령왕과의 계약이 사라진 상태였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다시 돌아오면 계약이 부활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실제 돌아오니 생각과 달랐다.

하지만 이드는 다시 정령왕을 소환하는 시도를 하지는 않았다.

계약이 끊어졌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고, 무엇보다 혼돈의 파편에게 자신의 복귀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정령왕의 소환과 같은 세상의 흐름을 흔드는 일이라면 그들이 관심을 가질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꼭 정령왕을 소환해야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

아쉬울 것이 없다면 괜한 어려움을 자처할 필요가 없었다.

정령왕을 소환할 수 없다고 했지.’

세레니아는 시르피에게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드래곤보다 나이가 많고, 드래곤과 농담 따먹기 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더 이상 부름에 답하지 않는다고.

초인도 초인이지만 이 문제가 시간 개념 제로인 드래곤들의 마음을 바쁘게 만들었다. 정령왕은 세상의 가장 핵심적인 구성 요소와 같은 존재들이다. 그들이 사라진다는 말은 땅이 사라지고 공기가 없어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세레니아는 이 일이 혼돈의 파편이나 초인과 관련이 있다고 확신하고 달려든 것 같았다. 그리고 사라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세레니아의 걱정과는 달리 정령왕이 답하지 않는 상태에서도 수십 년간 세상이 별 탈 없이 잘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생물에게도, 이드에게도 참 다행한 일이었다.

세레니아의 말을 따르면 어쩌면 이드는 바다 위가 아니라 텅 빈 우주 공간에 떨어졌을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미안하고 사랑스러운 일리나도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끙.”

이드는 복잡한 마음에 몸을 뒤척였다.

그레센에 돌아온 만큼 혼돈의 파편에 대한 일을 마무리 지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급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혼돈의 파편은 모습을 감췄고, 세상은 잘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저 세레니아가 사라진 사실이 마음 한편에 걸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차근차근 알아가자 싶었다.

그러던 차에 시르피의 소식을 듣고 인연을 따라 그녀를 찾고자 나선 길이었다. 그런데 그 길에서 커다란 똥 덩어리를 마주쳐 버렸다. 좀 더 천천히 차근차근 알아가고 싶어서 미뤄 두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니 그놈의 책 표지 색깔이 딱 똥색이었지.’

철컥!

이드의 생각이 다시 삐딱선을 탈 때 데일리를 배웅한 에단이 돌아왔다.

그의 얼굴에는 고민의 흔적이 한가득이었다.

“저기, 마스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무슨?”

“……일전에 제가 보고서를 쓰면서 마스터에 대해서 어떻게 써야 할지 물었던 일말입니다.”

끄덕끄덕.

그런 일이 있었지.

이드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스터께서 마음대로 쓰라고 하셔서 사실대로 보고서를 올렸는데………… 배신자가 있다면 그 일이 다른 곳에도 알려질 거 아니겠습니까!”

“……………네가 한 일이니까 알아서 해결하세요.”

멀뚱히 에단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이드가 짧은 말과 함께 일리나의 무릎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마, 마스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