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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066화


1501화

손을 내미는 황제. 당연하지만 악수는 아니다.

이드는 사전에 익힌 예법에 따라 한쪽 무릎을 굽히고, 반지를 낀 손에 이마를 가져다 댔다.

“라일론의 지고한 영광께 아나크렌의 명예 후작 이드 예천화가 인사 올립니다.”

“라일론에 온 것을 환영하오. 명예 후작.”

짧은 인사를 주고받은 이드는 식탁을 사이에 두고 황제와 마주 앉았다. 그러자 준비된 식전주가 나오고, 황제가 즐거운 듯 먼저 잔을 들었다. “드시오. 명예 후작을 위해 특별히 준비한 술이라오.”

귀한 술이라며 자랑하는 황제라니.

이런 소탈한 행동들이 제법 친근하게 느껴졌다.

만약 이것이 공식적인 자리였다면, 절대 볼 수 없는 모습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철저하게 제국의 황제로서 위엄을 보였겠지.

물론 꾸밈이 덜할 뿐, 지금 모습이 황제의 진짜 성정이라고 장담할 수도 없었다.

‘당연하지. 날 언제 봤다고 그러겠어.’

반려에게도 쉽게 속내를 털어놓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 세상이다. 언제 봤다고 자신에게 진짜 속내를 내보이겠는가.

이드는 섭섭하다 생각지 않고 적당히 황제에게 맞춰주기 위해 술잔을 들었다.

“좋습니다. 입안이 상쾌하게 정리되는 기분입니다.”

“식전주로는 최고지. 황실의 자랑이라오.”

황실에서 만든 술이었나?

그럼 좀 더 칭찬해 보자.

그랬더니 기분이 좋아진 황제가 시원한 웃음을 터트린다. 이 술이 뭐라고 제국의 황제가 저렇게나 좋아할까.

“명예 후작 부인들도 함께 맛보았다면 좋았을 것을, 참으로 아쉽구려.”

“황공합니다. 초대는 영광이나, 긴 여행에 피로가 쌓여, 좋은 모습을 보여드릴 수 없을 것 같다 하니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여인이란 그렇지. 이해하오. 시종을 통해 이 술은 따로 보낼 터이니, 느긋하게 즐기시오.”

“아내들을 대신해 감사드립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니, 요리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스프, 샐러드, 스테이크, 디저트로 이어지는 지극히 평범한 코스. 황궁의 식사라기보단 평범한 가정식 같았다.

다소 특이한 점이라면 그 과정에서 술이 계속 바뀌었다는 것 정도일까. 그러고 보면 황제가 애주가라던데. 이런 모습을 보면 진짜 그런 모양이다. 그렇게 다양한 종류의 술을 맛보며 꽤나 즐거운 식사를 마친 이드는, 또 새로운 술을 앞에 두고 황제와 마주 앉았다.

“식사는 만족스러웠는지 모르겠소.”

“아주 좋았습니다.”

진심이었다.

화려하고, 자극적인 요리보다 정갈해서 마음에 들었다. 또 설령 그렇지 않다고 해도 누가 황제와의 식사에 불만을 말할까.

“평소 내가 먹던 대로 차린 것인데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오.”

심지어 평소 식단이란다.

함정 카드였냐고!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이 부분에서 식은땀을 한 바가지는 흘렸을 것 같다.

“매우 검소하시군요.”

“그런 의도는 아니오, 그저 업무가 바빠 식사를 간단히 하다 보니, 그리되었을 뿐이니까. 사실, 다른 사람 앞에 내어놓은 경우는 이번이

처음이라오.”

다른 이들과의 식사에서는 흔히 생각하는 화려한 식탁이 준비되는 편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자신만?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읽었는지, 황제가 손짓으로 시종을 부르며 말을 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명예 후작을 가벼이 여기는 것은 아니니, 섭섭하게 생각지는 마시오. 그저 마음이 급해서 식사 시간도 아까워서 그랬으니까.” 

“혹시 저 때문입니까?”

“그렇소. 명예 후작과 검후 때문이지. 내가 이 서신을 받은 다음부터 호기심이 일어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아마 짐작도 못 할 거요.” 

시종에게 서신을 넘겨받은 황제는 그것을 이드에게 건넸다.

이드는 황제의 허락을 받고 서신을 펼쳤다. 내용은 그도 익히 아는 것이었다. 이전 검후가 말했던 그대로다. 대신 좀 과장이 심했다. 가령 이런 부분이다.

라일론과 아나크렌 양국의 존속이 달렸다거나.

인류와 대륙의 존망을 논의할 때가 왔다거나.

부디 현명한 선택으로 제국의 존속을 이어 가자는 부분 말이다.

황제도 정확히 그 부분을 지적했다.

“어떻소, 참으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내용이 아니오?”

“……”

이드는 어색하게 웃었다.

분명 틀린 내용은 아니다. 혼돈의 파편이 곧 멸망이니까. 하지만 정확한 사정을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선 호기심 이전에 황당한 내용이었다. 뜬금없이 제국의 존망에 인류와 대륙의 미래가 왜 나온단 말인가.

아마 다른 사람의 서신이었다면 황제는 서신을 찢고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후가 보낸 서신을 어찌 무시하겠소. 무엇보다 그 검후가 직접 저런 내용을 적다니. 심상치 않다 싶었지.”

“그럼 사신을 기다릴 것이 아니라, 통신구를 열지 그러셨습니까?”

황제라면 굳이 호기심을 참고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궁금하다면 언제든 답을 들춰 볼 수 있는 권력과 힘이 그에게는 있었다.

그럼에도 참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검후의 서신이기 때문이오. 검후가 사신을 보냈다면 호기심 해결에 꼭 필요하기 때문일 테니까.”

그 인내의 정체는 믿음이었다.

라일론의 황제가 아나크렌의 검후를 믿고 기다린 것이다.

“자, 이제 내가 참고 기다렸던 의문을 풀어 주겠소?”

“원하신다면 그러겠습니다. 이야기가 좀 길긴 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제 말을 어디까지 믿으시는가가 문제일 뿐. 대신 그 전에 저도 폐하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무엇이오?”

황제는 이드가 꺼낼 질문이 궁금하다는 듯 기대감을 보이며 술잔을 들었다.

이드는 그런 황제를 잠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길 소영주.”

“음.”

“굳이 그를 마중으로 보내신 이유. 그 이유가 제가 짐작하고 있는 것이 맞습니까?”

길 소영주를 언급한 순간 눈을 반짝이던 황제는 질문이 이어지자 오히려 편안한 표정이 되었다.

그리고는 말없이 술잔을 비웠고, 시종을 불러 새로운 술을 가져오도록 했다. 이드의 술잔도 동시에 바뀌었다. 이름을 알 수 없지만, 묵직한 나무 향이 인상적인 독주였다.

“명예 후작이 짐작한 것이 만약 ‘청산’이라면, 그것이 맞을 것이오.”

“폐하께선 제가 그를 죽이지 못할 것을 알고 보내신 것입니까?”

“전혀, 나는 그대를 모르니까. 살면 사는 대로, 죽으면 죽는 대로. 길 소영주는 임무를 완수한 것일 뿐. 라일론과 명예 후작의 관계를 위해서는

사소한 문제가 아니겠소.”

길 소영주의 목숨을 그저 하나의 숫자로 보는 것 같은 말.

더 이상 그 자리에는 애주가 황제는 없었다. 마치 지금 잔에 담긴 독주처럼 강인한 제국의 황제가 있을 뿐,

잠시 말이 없던 황제는 곧 원래 모습으로 돌아가 편안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것이 질문이었소?”

“그렇습니다.”

“흠, 의외로군. 그것을 궁금해할 줄은 몰랐소.”

“그저 제 짐작이 옳은지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동시에 황제가 어떤 사람인지 이 질문을 통해 살펴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제법 만족스러웠다. 눈앞의 황제는 거대한 제국을 다스림에 모자람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런 인물이기에 나람 공작이 그런 충성을 보인 것이 아니겠는가.

이드는 정말 그뿐이냐는 듯 눈으로 물어 오는 황제의 모습을 흘려 넘기며 말을 이었다.

“그럼 이제 제가 답할 차례로군요.’

“내 귀를 기울이지.”

“사실 이 설명은 본래 검후 님의 몫이었습니다.”

“설명이 검후의 몫이다? 그럼 사신이 맡은 임무는 무엇이오?”

“제 임무는 확인과 증명입니다만. 굳이 애써 나눌 필요는 없겠지요. 일단 한가지 확인하겠습니다. 황제께선 백 년 전에 있었던 혼돈의 파편과의 전투에 대해 아시는 바가 있으십니까?”

이드의 물음에 황제의 얼굴에 놀람이 차올랐다.

직후 황제는 들고 있던 술잔을 탕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내려놓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네? 무슨…….”

“혼돈의 파편을 알고 있다는 말이오. 명예 후작이 대륙에 모습을 보인 이후, 난 마인드 마스터의 기록을 다시 찾아보게 되었소. 믿기지 않는 내용이 많았지만, 그 내용은 적지 않았소. 그리고 혼돈의 파편도 그 속에 있었고 말이오.”

이드는 황제의 반응에 놀랐다.

자신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았다는 이야기는 그러려니 했다. 당연한 과정이니까. 하지만 혼돈의 파편에 대해 말하는 모습은 조금 판단하기

어려웠다. 지금 반응이 과연 놀람인지, 흥분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달까.

그러는 사이 술잔을 비운 황제가 멀찍이 선 시종을 향해 소리쳤다.

“그로불린을 가져오라.”

“예, 폐하.”

시종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한 술병을 가져왔다.

그로불린을 찾는다는 것은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뜻.

이드의 잔에도 그로불린이 채워졌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며 내심 혀를 내둘렀다. 벌써 열 잔이 넘어간다.

이 자리에서 마신 술만 아홉 종류다.

정말이지 술에 진심인 황제가 아닌가.

이드는 살짝 흥분한 듯 보이는 황제를 위해 술잔을 기울이며 잠시 기다렸다.

‘아, 이건 별로…….?’

그로불린.

그다지 자신의 취향은 아니다. 오늘 마신 술 중 가장 별로다.

황제가 알았다면 굉장히 섭섭해할 생각을 떠올린 이드가 입술만 축이고 술잔을 내려놓는다.

그사이 빠르게 생각과 감정을 정리한 황제가 술잔을 입가에서 때지 않고서 눈을 번뜩였다. 술기운이라고는 티끌만큼도 없는 모습.

“그대의 이야기를 듣기 전에 하나만 먼저 확인하겠소. 혼돈의 파편이 실존하는 존재들이오?”

“당연합니다.”

“그럼 그들에 대한 이야기도?”

“죄송합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제가 알 수 없어 답할 수 없습니다.”

“그럼 달리 묻겠소. 검후가 서신에 적은 내용이 혹시 혼돈의 파편과 연관이 있소? 그들로 인해 벌어질 수 있는 일에 대해 적은 것이오?” 검후의 서신이라면 이드도 좀 전에 읽었다.

그렇기에 쉽게 답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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