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13화
550화
실망.
어벙하게 바보 흉내를 내고 있는 에단을 바라보는 케마란과 네리베르의 눈에 살짝 떠오른 감정이었다.
상당히 강렬했던 첫 인상과 소드 팰러스의 선배라는 위치로 인해서 가지고 있던 존경심이 연속되는 어벙한 행동에 상쇄되어 사라지다 못해 실망감으로 변해 버린 것이다.
다만 실망뿐인 케마란과 달리 네리베르의 반응은 조금 달랐다.
똑같이 실망했다는 기색이었지만, 네리베르는 미묘하게 재미있어 하고 있었다.
‘쿠쿡. 귀엽네.’
그녀의 눈에는 지금 모습에 겹쳐 어제 아침에 발랄하게 콧노래를 부르던 에단의 뒤통수가 떠올랐다. 뭔가 미묘하게 핀트가 엇나간 취향을 가진 네리베르였다.
“커흠.”
두 후배의 시선에 에단도 자신의 실수를 눈치채고는 급히 신색을 바로 했다. 하지만 얼굴에 떠오른 다급함은 가시질 않았다.
생각지 못한 사람들이 방에 있는 상황에 에단이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하자 이드가 나섰다.
“무슨 일이야? 괜찮으니까 말해 봐.”
이드의 허락이 떨어지자 에단은 댐의 수문이 열린 것처럼 참았던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이 신경 쓰였지만, 이드가 괜찮다고 하면 괜찮은 거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보고서 회수에는 실패했습니다. 저희가 갔을 때는 보고서가 이미 올라간 후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고서 포함, 제 이름과 마스터의 이름이 언급된 서류는 한 장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대신 급하게 이 소식을 마스터께 전하기 위해 서두르는 중에 뜻밖의 인물이 접촉해 왔습니다.”
“뜻밖이라면 누구?”
“삼검왕 중 철벽의 검왕 존 워스입니다.”
순간, 급박하게 보고되는 에단과 이드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던 세 아가씨의 입에서 ‘헉!” 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특히나 검후의 실종에 삼검왕이 관련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가지고 의심하고 있던 참이었는데, 갑자기 존 워스의 이름이 튀어나오니 역적모의를 하다가 걸려든 반도들의 심정이 이해되었다.
케마란과 네리베르, 그리고 데일리 경은 더욱 귀를 쫑긋 세우고 이어지는 말에 집중했다.
“접촉해 왔다고 하셨는데, 그럼 그 존 워스라는 사람이 에단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네요.”
일리나가 에단의 이야기 속 핵심을 짚었다.
에단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어서 이드에게 이야기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저희가 보고서를 찾기 위해서 팀장의 방에 잠입하는 것도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가 급하게 돌아가려고 하자 모습을 보인 것 같았습니다.”
“도둑으로 현장에서 잡혔다는 말이네?”
“그, 그것과는 좀 다릅니다. 마스터!”
워스에게도 찔렸던 부분이기에 에단은 힘겹게 대답했다. 무엇보다 이드의 명령에 의한 일이었기 때문에 에단은 얼굴 가득 억울하다는 표정이었다. 이드는 그런 표정을 못 본 척하고는 말했다.
“그래서 뭐래? 보고서가 없는 걸 보면 삼검왕에게도 그 보고서가 올라간 모양인데 네가 도둑질하려던 장면까지 확인했고, 그런 상황에서 모습을 보였단 말이지. 그런데도 넌 별일 없이 돌아왔고, 나한테 전할 말이라도 있대?”
도둑이 아닌데, 하고 웅얼거리던 에단은 이드가 재차 물어보자 고개를 끄덕였다.
“예. 빠른 시간에 마스터를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그리고 보고서는 자신이 가지고 있고, 읽은 사람은 없다고 했습니다.”
“협박인가?”
“예?”
“말이 그렇잖아. 보고서가 자기 손에 있으니까 다른 사람에게 알려지고 싶지 않으면 직접 보고 거래를 하자는 거 아냐?”
‘그건 어느 뒷골목 양아치인가요?’
에단은 이드가 삼검왕의 이름을 너무 가볍게 본다고 생각했다. 아무렴 그가 그런 뜻으로 말을 했을까.
“죄송합니다. 제가 말을 잘못 전한 것 같습니다. 그때의 말투나 표정, 그리고 분위기를 봐서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합니다.”
“일단 그렇다고 두고 다른 건? 그게 다야?”
“네. 그 외에는 저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하고 마스터를 만나고 소드 팰러스까지 오면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보고서에 대한 내용 확인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보고서에 내 이야기만이 아니라 그런 세세한 것까지 다 적은 거야?”
이드의 말에 에단은 헛기침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라는 사실이 보고되면 이드와 있었던 일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조리 이야기해야 할 것이라는 생각에 번거로움을 피하고자 적을 수 있는 것은 거의 빠트리지 않고 작성한 에단이었다.
“그럼 그게 끝이야?”
“아, 그 외에 제가 마스터에게 어떤 기술을 배웠는지, 그 기술을 어떻게 배웠는지를 물었습니다. 좀 집요할 정도로 물었지만 대답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단 말이지. 무공 욕심은 대단한 모양이네.”
[그러게요. 처음부터 마인드 마스터의 무공을 보여 보라고 소리친 작자들답네요.]
라미아는 긴급대책위가 보였던 행태들을 말하며 비웃어 주었다.
그때 자신의 이야기가 끝났다는 생각에 에단이 세 아가씨를 확인하고는 물었다.
“그런데……… 제가 없는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있었지. 클라인 백작이 데일리 경을 보고 갔으니까.”
이드는 데일리에게 들었던 일을 간단히 추려 말해 주었다.
이야기를 들은 에단은 케마란과 네리베르를 복잡한 눈으로 바라보다 우묵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이미 결정을 했다지만 다시 잘 생각하길 바란다. 너희들에게 직접 이야기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일했던 곳에서는 너희들처럼 우연히 일에 휘말려 다치고, 죽는 사람을 많이 봤다. 특히나 한번 사건에 휘말리면 자신이 싫다고 빠져나올 수도 없다. 무엇보다 관련된 사건이 끝이 나도 한동안 그에 관련된 일들이 진흙처럼 끝없이 달라붙을 거다.”
꼴깍!
케마란과 네리베르의 목이 크게 울렁이며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에단의 말은 너무 무겁고, 무서웠다. 말 속에서 텁텁한 땀 냄새와 철과 피가 섞인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살짝 소름이 돋았다.
조금 전 봤던 바보 같던 모습이 거짓말같이 느껴졌다.
하지만 똑똑한 두 아가씨는 에단의 말이 없어도 그와 같은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에 대한 각오는 이미 마친 후입니다. 선배님!”
에단은 단단한 대답에 내심 한숨을 쉬었다. 귀엽고 이쁜 후배들이 고생하지 않길 바라지만 스스로의 생각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대신 한마디 충고를 더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음이 그렇다면 알았다. 하지만 마음을 정한 이상 절대 후회하지 마라. 그리고 미리 각오를 굳혀 둬라. 자신의 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각오.
죽지 않겠다는 각오.”
[분위기 너무 잡네요.]
필요 없이 무거워지는 분위기에 라미아가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귀여운 후배들인데 당연하지.”
“그런데 밖에 세워 둔 사람은 저렇게 둘 거야? 록이라던 사람 같은데.”
이드는 에단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을 보다가 문밖을 가리켜 보였다. 에단과 함께 달려와서 계속 문 앞에서 서성이는 기척이었는데, 느껴지는 기감이 기억에 남아 있었다.
에단이 아차 하는 표정이 되어서는 오늘 하루 종일 함께 움직였던 록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특히 록이 자신처럼 이드를 위해서 움직이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자세하게 풀어 설명했다.
그 나름대로 록과 함께하고 싶은 마음을 내비친 것이다.
“소드 팰러스에서 활동할 때 아마 저놈만큼 큰 도움이 되는 사람도 드물 거라고 생각합니다.”
록에 대한 에단의 평가들이 생각나는 이드였다.
“네가 그렇다고 한다면 그런 거겠지. 들어오라고 그래.”
이드는 에단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이드로서는 오랫동안 보아 온 것도 아니고, 가까이 있는 것도 아닌 록이란 사람을 판단할 근거가 부족하다 못해 없었다.
그에 대한 판단이나 믿음은 에단을 기준으로 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드가 생각하기에 최소한 에단의 사람 보는 눈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마스터.”
에단의 마치 자신의 일인 듯 인사를 하고는 문을 열어 록을 방으로 들였다.
록은 바로 이드를 확인하고는 고개를 숙이다 두 후배와 데일리를 보고는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허! 내가 늙긴 늙었구나. 후배들보다 권력의 판도를 읽는 눈이 나빠지다니. 그래도 아직 일등공신에 들어갈 순번은 되겠지?”
퍽!
“마스터 앞이다. 이 자식아!”
에단은 벌게진 얼굴로 헛소리를 지껄이는 록의 옆구리에 주먹을 꽂았다. 왜 이놈을 마스터께 추천했을까. 왜 이놈의 부끄러움을 자신이 담당해야 하는 걸까.
평소 록의 모습을 알고 있는 두 후배들의 숨죽인 웃음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죄송합니다, 마스터.”
이드는 에단의 말을 가볍게 웃어넘기고는 록을 바라보며 물었다.
“에단에게서 어떤 생각이 있는지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쩝니까? 나는 공신을 만들 생각이 없는데. 공신보다는 검후를 찾을 생각입니다.”
“하하하. 검후님이 돌아오시는 것은 저도 가장 원하고 바라는 일입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세상의 흐름이라는 것이 있지 않겠습니까? 아무래도 그때는 마스터께서 검후님의 자리에 서 주시기를 바랍니다.”
직접 나선 록의 말은 에단의 설명보다 급진적인 생각을 담고 있었다. 만약 그런 일이 생긴다면 록의 말대로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공신이라고 불릴 가능성이 아주 높았다.
갑자기 튀어나온 공신이란 말에 두 어린 아가씨가 숨도 쉬지 않고 눈을 반짝였다.
그 모습이 귀여워 살짝 웃음 지은 이드가 진지한 록의 눈을 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와 같은 민감한 일은 확실히 해 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미안하지만 그럴 수 없습니다. 나는 이보다 중요한 일이 있습니다. 대신 검후의 뜻을 이어서 소드 팰러스를 이끌어 갈 사람을 뽑는 일이라면 제가 도와줄 수는 있습니다. 당신이나 에단이 도전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요.”
순간 록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가볍게 말씀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드 님이 겪으신 일에 대해서는 에단을 통해 들었지만, 그래도 소드 팰러스는 대륙 모든 기사들의 성지와 같은 곳입니다. 이 일은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록의 눈에는 칼 같은 진실이 담겨 있었다.
이드는 그 눈을 마주하고 있다가 에단에게 물었다.
“분명 워스라는 자가 보고서를 확인했다고 했지? 그럼 나에 대해서도 알고 있겠지?”
“확실합니다.”
“그럼 적으로 생각되는 인간도 아는 사실을 내 사람들에게 숨길 수는 없겠지? 무엇보다 다들 보고서가 뭔지 궁금해하는 것도 같고.”
슬쩍 돌아보는 이드의 시선에 모두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보였다.
“어………… 전 은색 기사단의 기사인걸요?”
그중 데일리가 살짝 난감한 표정으로 두 아가씨를 돌아보다 손을 들었다.
“음…………… 아무래도 지금 결정하긴 힘드시겠죠?”
“저희 은색 기사단은 모두 한마음으로 움직이고 행동합니다. 죄송하지만 지금 이야기되는 일에 대해서는 저희 은색 기사단장님만이 답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후 이야기, 특히 워스의 존재가 끼어든 덕분에 이드에 대해서 알지 못하면 이야기가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다.
이드는 데일리를 먼저 돌려보냈다. 그녀는 결과가 나오거나 논의할 일이 생긴다면 내일 다시 방문하기로 했다.
그녀가 자리를 뜬 후 두 아가씨와 록이 나란히 자리에 앉고 그 반대편에 이드와 일리나가 나란히 앉았다. 라미아는 이드의 무릎 위에 올라앉았다.
다만 에단은 능글능글한 웃음과 기대 어린 표정으로 자리를 마다하고 이드의 뒤에 서서는 맞은편 세 사람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세 사람의 얼굴에 의심 어린 표정이 가득 떠오를 때 이드의 말이 이어졌다.
“일단 제 소개를 다시 하도록 하죠. 제 이름은 이드. 지금은 마인드 마스터로 불리고 있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