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11화
448화
치잉. 치이잉.
무언의 교감이 있었다. 그래서 내력을 최소한으로 사용하면서 검법만을 겨루었다. 그런데 두 사람의 검에서 나는 소리가 이상했다. 쇠와 쇠가 부딪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맞물리지 않은 톱니바퀴가 헛바퀴를 도는 느낌이었다.
‘굉장한 검법이다.’
이드는 크게 감탄했다. 동시에 자신이 전한 무공이 잘 전해졌다고 생각했다.
정보나 지식을 전달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고대의 정보 전달 수단은 사람이었다. 그 이후 풀잎과 나무, 가죽을 거처 종이가 쓰이고, 음성과 영상을 이용하게 되었다.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의 발전과 함께 인간의 문화도 발전했다. 인간은 기록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지식과 지혜를 후대에 남기는 작업을 꾸준히 해 왔기 때문이다. 정보의 전달 방법은 당시 문명 수준에 의해서 결정되고, 문화의 수준은 사람들 사이에 공유되는 정보의 질이 결정하는 법이다.
중원에서는 정보 전달을 위해서 주로 사람과 종이를 이용했다. 하지만 시중에 떠도는 정보는 소문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했고, 종이는 한정된 사람만이 사용 가능했다. 글을 읽을 수 있는 사람조차도 마을 안에서 손에 꼽혔다.
그런 상황에서 무공도 대부분 종이에 기록되어 전해지고 있었다. 하지만 무공이란 종이에 적는 것만으로는 전체를 전달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적을 수 있는 것보다 적을 수 없는 부분이 더 많았던 것이다. 때문에 핵심과 정확한 초식의 의미는 종이보다는 사람에 의해 전달되어 왔다.
이드가 볼 때 문화와 사상 등의 부가적인 부분을 제외하고 기술적인 부분만을 생각한다면, 자신이 가 봤던 세 곳의 세상 중 중원이 가장 정보 전달 능력이 떨어졌다. 다른 두 곳에는 각각 과학이라는 기술과 마법이라는 신비가 발달되어 있어서 정보를 음성과 영상을 포함한 복합적인 방법으로 전달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은 글로 전할 수 없는 세세한 부분은 물론이고, 당시의 감정 등 추상적인 부분도 일부 전달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드도 일리나에게 무공을 전할 때 이런 마법의 힘을 이용했다. 느긋하게 무공을 전수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드는 무공의 핵심인 내공의 운용은 그녀의 몸에 각인시키고, 무공의 형태는 마법을 이용해서 영상으로 남겼다.
이 작업을 하면서 이드는 마법의 편리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서적으로는 미처 전할 수 없는 초식의 정교한 운용과 형태를 마법은 완벽하게 전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중원에 이런 마법이 존재하고 있었다면 무공은 대륙 전체에 퍼져 나갔을 거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게 전한 무공이 수라삼검과 난화십이식이다.
타탕. 깡. 깡.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그렇다고 어느 한 곳이 모자란 것도 아니다. 방금 전 힘을 흘리던 칼날이 강하게 맞물리며 귀를 울리는 소음을 만들었다. 시원한 쇳소리가 울렸다. “제가 전했던 검법의 흔적이 보이네요. 검법도 손을 보셨습니까?”
이드는 부딪혀 오는 초식 속에 담겨 있는 수라삼검의 흔적을 느꼈다. 잘 다듬어진 살기와 투기는 수라삼검의 특징이었다. 원래 이드가 일리나를 통해서 접한 엘프의 검법은 빠르고 변화가 많았지만 살기와 투기가 적었다.
그런데 지금 윌이 사용하는 검에는 그 모자란 부분과 함께 힘과 무게가 채워져 있었다.
따앙!
검이 튕겨 나오는 힘으로 뒤로 훌쩍 물러선 윌이 숨을 정돈하며 말했다.
“네. 수라삼검이라는 특이한 검법은 저희들이 그대로 사용하기에는 성격적으로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서, 일리나에게 해 주신 충고대로 저희에게 필요한 부분만을 쪼개서 저희 검법에 받아들였습니다.”
이드가 전한 무공 중 벌써 두 개가 엘프들의 손에 산산이 분해되어 재조립된 것이다.
“좋은 검법이 되었습니다. 잠시 겪었지만 공수 모두 균형이 잘 잡혀 있어요. 수라삼검의 원래 모습을 볼 수는 없지만 그 점이 아쉽지 않을
정도입니다.”
“감사합니다. 하지만 난화십이식이라는 완성된 좋은 모델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입니다. 그걸 기준으로 삼았지요. 이드가 좋은 검법을 전해 준 덕분입니다.”
이드가 아니라는 듯 손을 저어 보였다. 자신은 검법을 전했지 그걸 개조하는 방법을 전하지는 않았다.
“난화십이식도 익히셨나요?”
그가 휘두르던 검에는 난화십이식의 특징이 들어 있지 않았다.
“아쉽게도, 익히지 못했습니다. 새롭게 만들어 낸 검법을 익히는 것만도 힘든 일이었으니까요. 대신에 난화십이식만을 익힌 엘프도 있습니다. 대단한 실력들이죠. 이드의 난화십이식과 어울리면 어떨지 저도 보고 싶군요.”
윌의 말에 주변에 앉아 있던 수십 명의 엘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는 그들의 모습에 기분 좋게 웃어 보였다.
“이거 기대되는군요.”
“그럼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흡!”
후후훙~
윌은 이야기하는 시간이 아깝다는 듯 작은 기합 소리와 함께 다시 이드를 향해 뛰어들었다. 복잡하게 휘둘러지는 검을 따라 그의 신형이 흔들리더니 검의 뒤로 모습을 감춰 버렸다. 작은 검망 속에 자신을 감춘 모습이 마치 수라삼검의 수라섬광단과 비슷해 보였다. 이드가 아닌 다른 상대라면 윌의 움직임을 볼 수 없어 당황했을 것이다.
‘윌이 보이지 않는 건 상관없지. 어차피 사람을 베는 것은 검이니까. 칼은 그대로 있거든.’
이드는 윌의 모습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난화십이식의 비혼으로 검망의 맥을 하나하나 잘라 나갔다. 이드의 검을 피해 검망이 살아 있는 듯 출렁였지만, 이드의 비혼을 피하지 못한 그물은 금세 그 모습을 잃고 윌의 모습을 드러내고 말았다. 윌은 빠르게 판단해서 검망을 버렸다.
“조심!”
윌의 경고성과 함께 여기저기 구멍이 뚫린 검망이 이드를 덮치고, 그 뒤를 따라 윌의 검이 빈틈을 매우며 이드의 급소를 찔러 들어온다.
“그쪽이야말로.”
끼아악!
크게 휘두르는 이드의 검에 성긴 그물이 힘없이 찢어졌다. 이어진 두 걸음에 그 뒤를 따르는 윌의 검을 피한 후 쳐 내고, 반걸음에 그의 옆으로 돌아가 가슴을 베어 내면, 윌은 검을 거두어 막고 반격한다. 막고, 피하고, 공격하기가 반복되면서 두 사람의 공방이 급격히 빨라지기 시작했다. 그만큼 서로의 검에 걸리는 힘이 강해지면서 수련장 안은 연이어지는 쇳소리로 가득 찼다.
이드는 주변을 가득 매우는 검광 속에서 엘프라는 종족이 대단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실감했다. 자신에게 어느 정도 기초를 익힌 일리나는 둘째치더라도 다른 엘프들이 과연 무공을 잘 익힐 수 있을까 의심을 했었다. 마법의 힘을 빌려 자세히 전하기는 했지만, 한 번도 접해 본 적 없는 무공을 영상만으로 잘 익힐 수 있을 턱이 없다. 영상은 어디까지나 영상일 뿐이다. 스승처럼 곁에서 때에 맞는 충고를 더하거나 실수와 오류를 바로잡아 주면서 배움을 이끌어 주지는 못한다.
하지만 지금 그런 생각이 기분 좋게 틀렸다는 것을 윌의 검을 통해서 확인했다. 엘프들은 그들이 가진 엘프의 검에 수라삼검을 절묘하게 섞어서 작품을 만들어 낸 것이다. 물론 이것도 90년의 시간이 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 시간 동안 얌전하고 날카로운 엘프의 검에 잔인한 야수를 한 마리 분양받는 데 성공한 것이다.
“하하하. 좀 더 본격적으로 갑니다.”
이드는 오랜만에 흥분되는 기분을 느꼈다. 이드의 말에 윌이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양손으로 검을 쥐었다. 부딪혀 오는 검날에 힘이 더해졌다. 두 사람의 검날에 푸른 검기가 흐르기 시작했다. 검이 부딪치던 쇳소리가 음악처럼 흐름을 타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주변으로 푸른 검기가 넘실거렸다.
“휘유~ 정말 볼 만하잖아. 마오, 넌 아직 저기에 끼기는 힘들겠다.”
아이들이 한참을 뛰어다닐 만큼 넓은 연무장이 비좁게 느껴질 정도로 바쁘게 돌아다니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입을 벌리고 바라보던 채이나가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조만간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루인 피스트는 강하니까요.”
마오는 다른 사람 모르게 손에 흐른 땀을 닦고 대답했다. 두 사람의 검이 격렬해지는 순간부터 자신도 모르게 힘껏 쥐고 있던 주먹에 긴장으로 인한 땀이 가득했던 것이다. 그리고 대답하는 그 순간에도 그의 두 눈은 이드와 윌에게서 단 한 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두 사람의 대련은 그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수준 높은 것이었다.
“그래. 열심히 해라. 그런데 조만간에 따라 잡을 상대는 어느쪽인데?”
“…..”
자부심 가득한 마오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채이나가 흐뭇해하는 모양으로 물었다. 하지만 마오는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슬슬 한쪽으로 기울기 시작하는 대련에 모든 신경이 가 있는 때문이었다.
대답 없는 아들의 모습에 채이나가 일리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걱정돼요, 일리나?”
채이나의 말처럼 일리나는 굳은 얼굴로 연무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요. 이드에 대해서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는 아무런 상처 없이 윌을 제압할 거예요.”
확신에 찬 일리나의 대답에 채이나가 입맛을 다셨다. 그녀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쩝. 그래도 윌도 대단한 실력이네요. 검을 다루는 모습이 굉장히 능숙해 보여요.”
“당연해요. 그는 오랫동안 마을을 수호해 온 수호수의 가지니까요.”
수호수는 엘프 마을을 둘러싸고 있는 철목의 별칭이고, ‘수호수의 가지’는 마을을 수호하는 일을 하는 엘프들에게 내려지는 칭호였다.
“그는 강해요. 다만 이드가 더 강할 뿐이죠.”
같은 수호수의 가지로서 윌을 존중하는 일리나였지만, 그 이상으로 이드를 향한 마음을 가진 일리나의 말은 가차 없었다.
그런 일리나의 말을 증명하듯 이어지는 폭음과 함께 윌의 몸이 허공에 떠올랐다.
펑!
이드는 허공에 떠오른 윌을 보고는 이쯤에서 마무리를 하기로 했다. 무방비 상태로 허공을 유영 중인 윌의 가슴을 일라이져로 두드려 준 이드는 연무장 끝으로 돌아와서는 반대쪽을 향해 외쳤다.
“다음!”
이드는 오랜만에 타올랐다. 열정적인 엘프들의 모습에 생각보다 길게, 또 생각보다 많은 인원을 상대하고 말았다. 윌을 포함해서 이 날 이드가 상대한 엘프는 18명, 하루 할당량을 아주 가뿐하게 초과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오후의 피크닉은 이미 예전에 파투났다. 하지만 이드도 일리나도 아쉬워하지 않았다. 이드는 오랜만에 수련으로 흘리는 땀이 즐거웠고, 일리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흐뭇해했다.
다만 오후의 일정에 맞춰서 간신히 아이들을 따돌리고 돌아온 라미아는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연무장 위에서 엘프들을 상대하고 있는 이드의 모습에 어쩔 수 없음을 알고는 깨끗이 포기하고 말았다. 대신 일리나의 무릎 위에 앉아 아이들을 상대하며 쌓인 피로를 풀었다.
다행히 아이들은 연무장으로 돌아온 라미아를 찾아 연무장 안까지 쫓아오지는 못하고 멀리서 분해하며 바라만 볼 뿐이었다. 연무장이 라미아에게는 안전지대로 등록되는 순간이었다.
“칼마론은 뛰어난 검법입니다.”
칼마론은 깊은 숲에서 자라는 덩굴식물이다. 강인하면서도 작은 가시를 수없이 가지고 있어서 누구도 이 식물에 손대지 않는다. 또 얼마나 질긴지 칼마론에 감긴 어린 나무는 올바르게 자라지 못해서 기형적인 모습을 하고 있거나 덩굴의 줄기에 잘려 죽고 만다. 엘프들은 수라삼검을 더해서 만든 그들의 검법이 칼마론처럼 질기고 강인하길 바라며 그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칼마론은 불완전합니다. 수라삼검에서 가져온 야수가 불완전하기 때문입니다. 수라삼검의 야수는 어디로 튈지 모르고, 욕망대로 날뛰는 악마입니다. 하지만 칼마론의 야수는 잘 길들여진 야수였습니다. 잘 정돈된 살기와 투기를 가지고, 어디로 튈지 모르는 욕망마저 거세된 이름뿐인 야수죠. 정리된 기세는 상대에게 쉽게 그 속을 읽힐 수 있는데, 현재의 칼마론이 그렇습니다. 뛰어난 검사라면 칼마론 속에 들어 있는 규칙적인 흐름을 발견하고 공략할 수 있을 겁니다. 칼마론을 잔인한 야수로 조련하세요. 그러면 칼마론은 완벽해질 거라고 생각합니다.”
어두워지기 전 마을로 돌아가기에 앞서 엘프들 앞에서 땀에 젖은 이드가 말한 칼마론에 대한 총평이었다. 턱 선을 따라 땀이 뚝뚝 떨어지는 중에도 이드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한가득 담겨 있었다.
“저 녀석, 욕구 불만이라도 있었던 거야?”
후덥지근한 눈으로 이드를 바라보던 채이나의 총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