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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19화


456화

홀리 블러드는 공간의 경계를 넘어 순식간에 그림자를 공격했다.

화아악!

순간 색이 존재하지 않는 회색 시공의 경계에 찰나지간 빛이 스쳐 갔다. 신의 힘이 발현된 증거였다. 그 힘은 그림자라는 대척되는 존재를 두드렸다. 그 모습을 감각적으로 인지하고 있던 세 마법진의 세 운영자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러나 빛이 지나가고 여전히 느껴지는 그림자의 존재에 곧 실망하고 말았다. 구름이나 안개처럼 형태가 없는 그림자의 모습이 처음과 같이 건재했던 것이다.

홀리 블러드 때문에 잠시 주춤하던 그림자는 금방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우디는 섬뜩함을 느꼈다.

‘신성력의 공격을 받고, 어째서 멀쩡할 수 있다는 말인가.’

우디는 홀리 블러드를 다시 요청했다. 그에 제2, 제3의 홀리 블러드가 그림자를 공격했다. 그러나 그림자는 건재했다. 전혀 타격을 받은 모습이 아니었다. 형태만 바뀌어 있었다. 게다가 형태가 바뀌었다고는 하지만 상처를 입은 모습이 아니었다. 오히려 외부의 공격에 자극받아 쓸모없는 부분을 버리고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모양새였다. 덕분에 특정한 형태가 없던 그림자는 아직은 알아볼 수 없지만 점차 어떠한 모양을 갖춰 가고 있었다.


-크르르르

그 모습을 보고 있던 트론이 웃었다. 사막같이 메마른 그의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흘렀다. 도대체 이 빌어먹을 상황에 처한 것이 몇백 년째인가. 자신을 부르는 광기에 혹해서 소환에 응했다가 머저리처럼 당했다. 얼마 전부터는 빌어먹을 것들이 저열한 흡혈귀들처럼 감히 자신의 진혈을 빠는 통에 소멸까지 생각할 정도였다. 제대로 된 전투조차 없이 소멸당한다는 것은 그에게는 최악의 치욕이었다. 그러던 와중에 천운으로 공간이 부서지며 이 개 같은 봉인에서 탈출할 가능성이 생겼다. 밖에 있는 것들이 그 사실을 알고 발악을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소용없는 일. 그따위 권능의 찌꺼기로 감히 자신의 칼과 권력의 복귀를 막을 수는 없다. 트론은 잠시 후 저들의 피로 메마른 몸을 적시고 살찌울 쾌감에 몸을 떨며 웃었다.


“홀리 블러드가 효과가 없어?”

우디는 생각과 다른 결과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홀리 블러드는 신성한 피를 뿌려 죄인이 지은 죄를 밝히고 그 죄만큼 영혼을 무겁게 함으로써 스스로 굴복하게 만들어 악을 물리치는, 고위 사제만이 사용 가능한 신성력이다. 그림자를 다시 마계로 되돌려 보내기에 꼭 맞는 힘인 것이다. 그런데 세 번의 홀리 블러드에도 변화가 없다. 일이 잘못됐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이쪽은 두 번이 한계일 듯합니다.”

세 명의 엘프 신관 모두 힘이 다해 있었다. 신의 힘은 무한하지만 그 힘을 빌려 사용하는 존재들은 한계가 분명했다. 신관들이 힘들어하는 모습이 한눈에 보였다.

-크르르르

순간 그들의 사정을 알고 조롱하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마치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 같았다.

“빌어먹을.”

조용한 가운데서 들리는 누군가의 욕설이 모든 사람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했다.

[그림자는 마계의 존재인데, 어째서 홀리 블러드에도 멀쩡하죠?]

라미아가 가장 큰 문제점을 짚었다.

마계의 존재가 신성력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다르게 말 하면 세상이 정한 법칙에서 벗어났다는 말과 같은 것이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실로 무서운 일로, 대륙의 심각한 위기였다

지금까지도 마계의 존재를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성력이다. 간혹 신성력의 도움을 받지 못할 경우에도 순수한 마나의 힘으로 격퇴가 가능한 것이 마계의 존재였다. 하지만 개중에는 특별한 개체들이 있는데, 바로 신성력에 의해서만 퇴치가 가능한 존재들이 그러하다. 그들을 퇴치할 때는 마나를 기초로 한 공격은 소용이 없으니 신성력이 필수다.

그런데 어이없는 일이지만, 지금 올라오고 있는 그림자에게는 그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다. 마나가 통하지 않는 존재는 있어도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마계의 종자는 듣도 보도 못했다.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저 그림자에게 마나의 공격은 통할 것인가? 만에 하나 마나의 영향도 크게 받지

않는다면 지금 세상에 이 존재를 상대할 방법이 없다는 말과 같은 상황이 된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런 경우는 아닌 모양이었다. 하염없이 흐르는 땀을 겨우 수습한 노신관이 말했다.

“그것은 아마 그림자라는 존재가 비어 있는 자이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비어 있다고요?”

“예, 너무 멀고도 험한 곳에서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분께서 저를 통해서 발현하신 힘 덕분에 희미하게 느낄 수는 있었습니다. 홀리 블러드에 모습을 보여야 할 그림자의 본질이 비어 있는 것을요. 처음에는 긴가민가했지만, 여러 번 이어지니 확실히 알겠더군요. 비어 있는 것은 의지가 없는 것. 의지가 없는 것은 도구와 같아서 그 자체로는 죄가 없지요.”

“칼은 죄가 없다는 말과 같군요.”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죄인의 손에 있다면 그것 또한 삿된 물건이기 때문에 죄가 없다 할 수 없습니다. 지금의 그림자가 그렇지요. 본질과 연계되는 점이 있기 때문에 죄가 완전히 없지는 않습니다. 또 그에 깃들어 있는 악한 사념도 홀리 블러드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일 것입니다.”

그 말대로였다. 정말 아무런 죄가 없다면, 홀리 블러드는 그림자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홀리 블러드는 그림자를 공격했고, 그림자는 분명히 공격을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홀리 블러드에 당하고도 크게 타격을 받지 않은 것이군요.”

문제를 알면 답은 나온다.

우디는 다시 홀리 블러드를 떨어트릴 신호를 보냈다.

“둘, 하나, 지금!”

쑤욱!

노신관과 나란히 서 있던 이드는 검은 공간 속으로 사라지는 황금색의 홀리 블러드를 바라보며 이번에는 성공하기를 기도했다.

이드를 포함한 이들이 급하게 만들어 낸 대책은 악하지 않으면 악하게 만들자는 것이었다. 그림자가 홀리 블러드의 영향에서 자유롭다면 사악하게 만들어서 홀리 블러드의 영향을 듬뿍 받을 수 있도록 만든다는 것이 핵심이었다.

우선 홀리 블러드를 다시 만들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신성력을 있는 대로 들이부었다. 이 홀리 블러드를 이드의 금령강기가 감싸고 라미아가 강기 위에 애니메이트 이블과 이블 리인포스라는 두 흑마법을 만들어 올렸다.

이 두 마법은 각각 사악한 존재에게 생명을 불어 넣어 각성시키고, 그 존재를 강화하는 마법이었다. 이 두 마법으로 그림자가 가진 악마의 사념을 각성시키고 증폭시켜, 홀리 블러드에서 벗어날 수 없도록 만든다는 것이 목표였다.

중간에 들어가게 된 이드의 강기는 사용 목적이 아무리 좋아도 일단 흑마법이다 보니 신성력이 담긴 홀리 블러드에 의해서 두 마법이 소멸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방어벽과 같은 역할이었다. 거기에 소소한 노림수를 더하자면 각성한 사념의 광기를 강기가 더 폭발시켜 주기를 바라는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금령강기가 흑마법 위에 덧씌워졌다. 두 마법이 공간을 넘으며 변형되거나 약화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

“제발 이번에는 얌전히 상황이 마무리되기를.”

라미아는 신성력과 내공과 마법의 샌드위치가 공간을 넘는 순간부터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다. 복합적인 힘의 작용이 가해지는 만큼 어떤 효과가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그레센에서 찾은 보금자리가 안전하기를, 꼬맹이들이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쉽게도 라미아의 바람은 불발되고 말았다. 자고로 큰일은 조용히 마무리되는 경우가 드문 법이다.

-쿠아아악

-끼아아악

라미아는 금령강기의 황금빛 폭발과 동시에 그림자의 존재가 둘로 나눠지는 모습을 지켜봤다.

‘…………역시 좋게 넘어가긴 틀렸구나.’

라미아는 작게 혀를 차고는 바쁘게 소리쳤다.

“반으로 나뉘었어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준비하세요.”


-이런 천박하고, 교활한 것들이!

트론은 분노했다. 네 번째의 공격이 부딪치는 순간 자신이 잠재운 사념이 깨어나는 모습에 밖에 있는 놈들의 얄팍한 노림수를 읽은 것이다. 그는 분노했다. 자신이 움직일 수 없는 상태에서 피할 수 없는 공격이 들어왔다. 겨우 잡은 지금의 기회가 이렇게 흘러가 버리면 자신은 또 가만히 앉아 소멸을 기다릴 수밖에 없다.

-끄아악! 반드시 갈기갈기 찢어 죽인다!

하지만 지금 트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분노하는 일뿐이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트론과는 다르게 마법으로 강화된 사념은 트론의 분노를 느끼고 행동했다. 스스로를 각성시키고, 강화시킨 마법에 뒤이어지는 강기의 공격에 스스로의 몸을 던져 몸을 나눈 것이다. 그뿐만 아니었다. 이후 이어지는 홀리 블러드와의 반발력을 이용해서 나눠진 반신을 한순간에 중간계로 날려 보냈다. 남은 반쪽이 마계로 추락하는데도 말이다.

과연 악마에게서 태어난 사념다운 난폭하고, 광기 어린 행동이라고 할 만했다. 그러나 그 행동은 분노에 날뛰던 트론을 제외하고 누구도 좋아하거나, 인정해 줄 수 없는 행위였다.


라미아도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공간을 넘어오는 그림자의 존재에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반쪽이 이쪽으로 넘어오고 있어요. 급한 대로 우리 쪽으로 유도할게요!”

“봉인을 강화하겠네. 그쪽을 부탁하네.”

절반의 성공과 절반의 실패를 바라보며 우디가 소리쳤다.

“이드, 실력 발휘할 때예요!”

“역시, 난 이쪽이 편하단 말이야. 맡겨 두라고!”

급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벌써 일라이져를 뽑아 들고 있던 이드였다. 그렇지 않아도 이드는 보이지도, 손댈 수도 없는 상황에 답답해하던 차였다. 확실히 자신은 육체파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드는 라미아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몸을 날렸다. 라미아의 시야 안에서 봉인지와 최대한 멀리 떨어진 장소였다. 그곳에는 이미 라미아에게서 유도된 마법진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부우웅-

이드와 함께 몸을 날린 정령수의 여덟 가지가 마법진을 둘러싸는 순간 마법진에 변화가 일어났다. 누워 있던 마법진이 세 개로 분리되어 일어나더니 회전하며 커다란 원을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온다!”

이드는 마법진 안에 펜으로 찍어 놓은 듯한 검은 점이 생겨 난 것을 봤다. 그것은 잉크가 번져 가듯 순식간에 마법진을 가득 채웠다. 츄화악!

그리고 검은색으로 마법진이 가득 차는 순간 그림자가 창과 같이 마법진을 깨고 쏘아져 나왔다. 그것은 정확하게 이드를 노리고 불꽃처럼 날아왔다.

처엉!

“푸른 나무 마을에 온 걸………… 환영한다!”

이드는 강하게 공격을 되받아치며 씨익 웃었다. 잘게 떨리는 검신을 느끼며 지금까지 뜬구름 같던 상황이 명쾌하게 변하는 느낌에 기분이 좋았다. 그러나 기분이 좋은 것은 이드뿐이었던 모양이다.

“끄아아아악!”

검은 그림자는 더 이상 무형의 모습이 아니었다. 다음 순간 검은 안개 같던 그림자가 강하게 수축하며 하나의 모습으로 변했다. 그것의 모습은 켄타우로스와 비슷했다. 그러나 절대 켄타우로스 같은 친근한 것이 아니었다. 말이 아닌 곰을 닮은 괴수의 하체와 철갑 같은 오우거의 몸에 뿔이 달린 사자의 얼굴을 한, 그야말로 악마와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것의 손에는 이드를 향해 쏘아진 검은 도끼가 들려 있었다. 마지막 검은 그림자 한 줄기가 검은 도끼 끝에 맺히며 사라지는 순간, 도끼가 번개처럼 이드를 향해 뻗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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