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0화
457화
“크헝!”
“그래, 나도 반갑다!”
콰아앙!
도끼와 검이 부딪치며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폭음이 주변에 서 있던 엘프들의 얼굴을 때렸다. 그 순간 악마가 떠난 자리에 남아 있던 검은 기운이 모여 손가락 크기의 네 마리 뱀으로 변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본래 하나였던 그림자가 둘로 나눠지면서 떨어진 작은 본능의 조각들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엘프들의 입에서 동시에 말이 쏟아져 나왔다.
“쫓아! 절대 봉인에 접근하지 못하게 막아!”
“에나는 나와 함께 움직인다!”
“브레임은 나와 같이 쫓는다!”
“펠과 틸라는 남아서 이드를 도와라!”
서로가 서로를 향한 명령을 쏟아냈다. 누군가 대표하는 자가 없었다. 그럼에도 짧은 순간에 쏟아진 명령들 사이에는 전혀 충돌점이 없었다. 아홉이 하나처럼 움직이는 정령수의 가지였다.
여섯 명의 엘프가 떠난 자리에는 둘이 남았다. 두 엘프는 가뜩이나 예민한 귀를 괴롭히는 쇳소리에 눈도 깜짝이지 않고 전투 현장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힘과 힘의 파괴만이 번쩍이고 있었다.
“이드! 밀리면 바로 들어간다!”
두 엘프는 일단 이드의 싸움을 지켜보기로 했다. 이드의 실력은 자신들 이상이다. 그 사실은 지난 며칠간 연무장에서 찐하게 확인한 바 있었다. 제대로 손발을 맞춰 보지도 않은 상태로 저 싸움에 끼어드는 것은 오히려 이드의 검을 방해하고, 상대에게 빈틈을 만들어 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렇지만 이드에게 맡겼다고 해서 두 손 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말했던 대로 조금만 이드가 밀리는 모습이 보이면 언제든 뛰어나갈 수 있도록 검을 든 손에 긴장을 풀지 않고 있었다.
“흡! 느긋하게 할 수 없겠는데, 서로. 안 그래? 사자 씨!”
펠의 외침을 들은 이드가 눈을 노리고 날아든 도끼를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피하며 말했다. 하지만 그림자는 아무런 대답 없이 이드만을 노리고 도끼를 휘두를 뿐이었다. 남은 펠과 틸라가 상당한 투기를 보이며 옆에 있지만, 전혀 시선을 돌리지도 않았다. 처음부터 집요하게 이드만을 노리고 있었다.
이드는 그 이유를 몰라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지만, 사실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앞서 홀리 블러드에 실려 있던 이드의 강기 그림자는 자신을 반쪽 내 버린 이드의 강기를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 부분은 그림자 스스로 의도한 행동이었으니 엉뚱한 화풀이 같지만, 이드가 그를 공격한 것도 사실이라 딱히 잘못된 일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찰나의 순간 움직임을 주도했던 사념은 둘로 나눠지면서 광기만 남아 판단력을 잃은 지 오래였다.
“크아악!”
지금은 그저 본능만이 남아 스스로를 공격한 기운을 따라 이드를 공격할 뿐이었다. 눈앞을 지난 도끼의 자루가 이드의 목을 노리고 찔러 왔다. 이성이 없는 듯 행동하는 그림자였지만 도끼를 다루는 솜씨만은 도저히 본능만 남은 자의 것이 아니었다.
치르르릉!
이드는 일라이져로 공격을 비켜 내며, 슬쩍 열린 가슴으로 검게 물든 철황권의 일격을 내질렀다.
터엉!
순간 이드는 가슴이 아니라 쇠를 두드린 것 같았다. 도저히 가슴을 두드려서 나올 수 있는 소리와 감촉이 아니었다. 과연 악마로 불리는 상위 마족의 신체다웠다.
‘과연, 적당한 힘으로는 턱도 없다는 말이지.’
그러나 이드에게는 놀라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충격을 받지 않은 놈의 꼬리가 옆구리를 찔러온 때문이었다. 얼굴과 같은 사자 꼬리 끝에는 사람 한둘은 충분히 꿰뚫어 버릴 것 같은 날카로운 뿔이 달려 있었다.
찌이익-
이드는 기겁하며 몸을 피했지만 옷이 찢어지는 것을 피하지는 못했다. 지금까지 여러 상대와 싸워봤지만 이런 식으로 꼬리를 사용하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암기를 이용한 어설픈 암습 따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속도며 사각을 찌르는 의외성과 힘까지. 그것은 검은 도끼만큼이나 조심해야 할 위험한 무기였다.
하지만 그런 무기보다 더 문제인 건 이드 자신이었다. 오랜만의 전투에 대한 흥분과 격하格下)의 상대에 대한 느긋한 마음에 꼬리를 완전히 피하지 못했던 것이다.
전장 밖에 서 있던 두 엘프의 기운이 크게 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뛰어들려는 것 같았다.
‘그대로 있어!’
이드는 손을 흔들어 두 엘프를 막고는 느슨하던 마음을 단단히 조이고, 텐션을 높였다. 동시에 도도히 흐르는 내력의 기어를 바꿔 속도를 높였다.
일라이져의 은빛 검신에 빛이 더해지자 이드가 뛰어올랐다.
“그 몸, 얼마나 단단하지 한번 보자!”
타탕!
허공중에서 몸을 튼 이드의 검이 그림자의 머리 위에서 도끼와 연이어 부딪혔다. 그리고 그 반탄력을 타고 검기가 흘러 그림자의 가슴과 등을 두드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이드의 검은 그림자의 단단한 몸에 막혔다.
“좀 더!”
이드는 검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타당! 타타탕!
세 번, 다섯 번. 처음에는 천천히, 그러면서도 급격하게 속도를 더한 검과 도끼는 채 열 호흡이 넘기 전에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빨라졌다. 그러는 중간중간 이드는 그림자의 도끼 사이로 보이는 빈틈을 놓치지 않고 검과 주먹을 찔러 넣었다. 조금씩조금씩 힘을 더해 가면서 말이다.
‘이놈의 몸뚱이는 도대체 얼마나 단단한 거냐! 도대체 어느 정도의 힘을 써야 할지 정말이지 미묘하다.’
처음 그림자를 보고 몇 번의 공방을 나눈 후, 이드는 상대가 자신보다 약하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심상으로 전해지는 라미아의 말에 함부로 칼질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무형의 존재에서 유형의 존재로 육신을 형성한 그림자가 이드의 힘에 의해서 육신이 무너질 경우 모래처럼 흩어져 봉인 속의 악마에게 흡수될 수 있다고 말했다. 아무리 이 자리에 많은 엘프들이 모여 있다고 하지만,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모래를 모두 주워 담을 수는 없듯이 작은 기운이 봉인 속으로 흘러드는 것을 완벽하게 막을 수 있다고는 장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봉인에 대한 처치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러나 이드도 마냥 손 놓고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서 힘의 가감을 보려고 두드렸는데, 이놈의 몸뚱이가 엄청나게 단단한 것이다. 더구나 인간의 몸과 달라서 얼마의 힘을 더하면 파괴될지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결국 시간이 걸리겠지만 조금씩 힘을 더해 가며 두드려 볼 수밖에 없었다.
“이제 알았다. 철사배격이라면.”
그렇게 몇 차례 두드리기를 반복하고 나자 마침내 손에 이드가 찾던 감각이 찾아왔다. 그 사이 계속해서 두드려 맞던 그림자의 도끼는 검은 광기를 가득 품고서 폭풍처럼 이드를 향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드와 그림자 주변으로 부영(斧影)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하지만 그물 같은 도끼질로도 이드의 공격을 완전히 막을 수는 없었다. 본능만 남은 도끼질로 이드의 손에 담긴 묘수를 상대한다는 것은 불가능했던 것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가슴을 찔러 오는 도끼를 밀어내고 날아든 이드의 손이 그림자의 옆구리를 두드리는 순간, 지금까지 아무리 두드려도 열리지 않던 그림자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투웅!
“끄아아악!”
고통으로 힘이 더해진 도끼에 이드가 주르륵 밀려났다. 그러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아무런 공격이 통하지 않던 지금까지와 달리, 철사배격은 그림자의 옆구리에 작은 주먹의 흔적과 그것을 중심으로 방사형의 거미줄 같은 실금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오래 기다렸다. 본격적으로 부숴 주마!”
살이 찢어지는 것도 아니고 유리처럼 금이 가는 일은 생물의 몸에서 있을 수 없는 현상이지만, 타격이 들어갔다는 점은 확실하다. 원래
철사배격이라는 초식이 겉보다 속을 부수는 힘이 크다. 보이지는 않지만 그림자의 뱃속 일부가 가루가 되어 부서져 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이드였다.
‘기운은? 흩어지지도, 새어 나오지도 않는다. 다행이다. 이러면 할 수 있다!”
이드는 철사배격이 들어간 자리를 가만히 지켜보다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나름대로의 대책에 따라 움직여도 좋을 것 같다는 확신을 얻은 것이다. 이드는 그림자에 대한 공격에 속도를 더했다. 힘을 써야 할 적정선을 알았기 때문에 그림자를 두드리는 주먹에 망설임이 없었다. 사실 보통의
생명체라면 일격에 속이 부서져 절명할 타격을 받고도 변함없는 기세로 반격하는 모습에는 이드도 질리는 면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끝나지 않는 잔치는 없다는 생각으로 이드는 주먹에 힘을 더했다. 그림자의 거대한 덩치가 차츰 부서지기 직전의 도자기 인형처럼 실금으로 가득 채워져 가기 시작했다.
그러다 이드가 그림자의 하체를 이루고 있는 괴수의 얼굴을 노렸을 때였다.
“엇!”
이드는 순식간에 그림자의 분위기가 변하는 것을 느끼고는 놀랐다. 그와 동시에 처음 등장 이후 아무런 반응이 없었던 괴수의 입이 어깨까지 찢어지며 벌어졌다.
쩌어억!
얼마나 큰지 이드의 상체가 통째로 들어가고도 남을 것 같은 입안에는 손바닥만 한 이빨들이 빼곡히 박혀 있었다. 그 안으로 다리가 들어간다면 아무리 튼튼한 이드의 다리라도 온전히 나오기는 힘들 것 같았다.
이드는 급히 몸을 틀고 괴수의 얼굴을 향하던 발끝으로 그림자의 복부를 찍었다. 그러나 그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 허공으로 튕겨진 도끼날이 길어지며 덮치는 바람에 이드는 그대로 땅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쿠웅!
제법 길었던 자루를 가지고 있던 도끼는 이 순간 살벌한 쌍날개의 핼버드로 변해 있었다. 정말 생각지 못했던 무기의 변화였다. 또한 빈틈을 정확히 유도하고 찌르는, 유능한 살인자의 공격이었다. 급하게 바닥을 디딘 이드의 발이 손가락 길이만큼 땅에 박혀 들었다.
“카르르…………… 죽……인다!”
“말했다? 어이, 사자 씨. 의식이 있는 거냐?”
어느새 완벽한 형태를 이룬 강기로 자신을 누르는 도끼를 막고 있던 이드가 그림자의 눈을 바라봤다. 유리알 같은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었다. 그 눈이 이드를 노려보며 다시 말했다.
“끄르르・・・・・・ 저열한 것들이…………… 갈가리 찢어 주마!”
글자 하나하나에 광기와 분노가 가득한 말이 끝나는 순간, 괴수의 얼굴에 두 개의 뿔이 돋아나며 이드를 향해 박치기를 해 온다. 이드는 냉정하게 그 모양을 바라보다 검은 강기에 물든 다리로 괴수의 얼굴을 차올렸다. 그 힘이 얼마나 강한지 커다란 그림자의 몸과 함께 이드를 내리누르던 도끼가 살짝 허공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예기를 죽인 무형극의 힘이 괴수의 얼굴을 짓이기며 뒤로 처박아 버렸다.
“아쉽네, 사자 씨. 그러기에는 당신 레벨이 딸려! 라미아!”
이드는 라미아를 부르며 다시 그림자에게 달려들어 검을 날렸다. 내부를 부숴 나가던 일은 중단했다. 그림자가 변한 이유가 혹시 그것 때문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그건 아니에요.”
이쪽 상황을 계속 확인하고 있던 라미아가 메시지 마법을 통해서 이드의 의문에 대답했다.
“이제 막 봉인 조정이 끝났어요. 지금 건 악마의 마지막 발악 같은 거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날려 버려요!”
봉인의 재조정으로 그 속에 든 악마를 철저하게 세상과 단절시킨 것은 물론이고, 혹시 한 푼의 기운이라도 새어 들까 봉인을 다시 봉인시킬 기세로
라미아와 엘프들이 그 주변을 철저하게 마법으로 막아 놓은 상황이었다.
라미아가 이런 세세한 상황에 대한 설명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이드에게는 그녀의 GO 사인이면 충분했다.
“오케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