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21화
658화
케마란은 지금 상황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현재 이드와 은색 기사단을 중심으로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제만 해도 스폴과 데일리는 물론이고, 이드도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언제나 듣기 좋은 목소리로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일리나의 수업에 불만은 없지만, 자신이 따돌려졌다는 사실에 기분이 나빴다.
“마스터들끼리 치사하게 우리를 따돌리고 무슨 일을 벌이는 거야!”
케마란은 분한 기분에 콧김을 훅훅 뿜으며 이드의 저택을 노려보았다. 그 표정이 먹이를 노리는 표범처럼 맹렬해 보였다.
“어제 화원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해. 그게 아니라면 은색 기사 언니들이 우릴 막을 이유가 없지.”
은색 기사단이 돌아온 후 케마란과 네리베르는 화원에 대한 출입권이 있었다. 이드를 중심으로 몇 가지 일에 관여된 그녀들을 쉴라가 좋게 본 덕분이었다. 그런데 어제 수상한 느낌에 찾은 화원에서 처음으로 그 출입이 거부당했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아침 일찍 날 불러낸 이유가 고작 그건가요?”
네리베르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케마란에 의해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수련장에 끌려 나와 있었다. 마스터에 대해 중요한 얘기가 있다는 말에 이유도 묻지 않고 따라 나온 결과였지만, 연이어지는 불평불만에 섣부른 자신의 행동을 살짝 후회하고 있었다.
“고작이라니. 이건 명백히 우릴 무시한 처사야. 따돌림당한 거라고!”
네리베르의 말에 케마란이 발끈했다. 주변의 조롱 속에서 링스피어를 수련하며 강해진 그녀의 자주성과 자존심은 이런 상황을 그냥 넘기지 못했다. 그러나 사실 그녀가 이렇게 나오는 정확한 이유는 소외감 때문이었다.
케마란은 이드와 함께 화원에 잠입해서 검후의 일기와 숲을 찾아내고, 이드의 정체에 대해서 듣고, 클라인 백작이 합류하는 등의 일을 겪으며 느낀 흥분과 두근거림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땐 자신도 대륙을 떠도는 거대한 전설의 하나가 된 것 같은 느낌을 받았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 전설 속에서 낙오된 느낌을 받은 것이다. 지금 케마란의 진짜 속마음은 자신도 끼워 달라는 투정과 시위에 가까웠다.
“그렇게 불만이면 마스터의 말씀대로 스폴 경에게 허락을 받으세요. 그럼 되잖아요.”
“그, 그건………… 힘들어. 스폴 경 앞에만 서면 조심스럽단 말이야.”
툭 튀어나온 이름에 케마란이 살짝 꼬리를 말았다. 그렇게 말하는 네리베르 역시 은색 기사단을 목표로 하고 있는 만큼 은색 기사단의 수석 기사로 있는 스폴을 대하기가 쉽지 않았다. 내일부터 출근하게 될 회사의 직속 상사와 같이 있는 느낌이랄까?
“그런 넌 아무렇지도 않아? 분하지 않느냔 말이야.”
“좀………… 마음에 들지는 않아요. 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어요.”
한껏 교양 있는 투로 네리베르가 말했다.
그녀라고 케마란과 같은 마음이 없는 건 아니었다. 백작을 아버지로 둔 그녀는 백작이 가족에게도 비밀로 하고 진행하는 일이 많음을 알고 있었다. 그 이유가 가족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라는 것도.
“아직 나나 당신이 알아서 좋은 일이 아니라는 뜻이겠죠. 나는 마스터의 배려라고 생각해요.”
“칫. 잘나셨어. 그보다 계속 그렇게 존댓말을 쓸 거야? 이제 말을 틀 때도 됐잖아.”
“난 지금이 편해요.”
이드를 만난 이후로 지금까지 찰떡처럼 붙어 다녔는데도 네리베르는 아직 존댓말을 쓰고 있었다.
말투에서 오는 거리감은 둘째 치고 들을 때마다 어깨를 조이는 갑갑한 존대가 케마란은 너무 싫었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본인이 편하다는데. 케마란은 포기했다는 듯 혀를 차고 말했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하지만 난 존대 안 한다.”
“당신과 달리 전 강요한 적 없어요.”
“그래. 나는 강요나 하는 나쁜 년이다. 쓸데없는 소리 그만하고 마스터를 만나러 가자.”
“설마 마스터께 직접 알려 달라고 할 생각인가요? 하지만 이미 스폴 경에게 허락을 받으라고 하셨잖아요.”
“당연하지. 그게 아니면 이렇게 일찍 올 필요가 없지. 그리고 저번에 물었을 때는 나 혼자였지만 지금은 네가 같이 있잖아.”
네리베르가 전력으로 황당한 감정을 내보이며 말했다.
“…………지금 날 보고 마스터께 부탁, 아니 사정하라는 말인가요? 그래서 날 데려온 거고?”
케마란이 당연한 걸 왜 묻느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리베르가 작게 한숨을 쉬며 몸을 돌렸다.
“그런 예의 없는 일은 혼자 하세요. 전 전혀 관심 없으니까요.”
“잠깐 잠깐만. 마음에 없는 소리 마. 화원과 은색 기사단이 움직였다면 분명 검후님의 일이라고. 너 정말 검후님의 일에 관심 없어? 절대 그렇지 않을 텐데.”
“윽…….”
어깨를 붙잡은 케마란의 말이 네리베르의 발을 잡았다. 케마란의 말대로 그녀 역시 호기심과 분함을 참고 있을 뿐이지, 궁금하지 않고 서운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특히 검후의 일이라면………….
“거봐. 너도 알고 싶잖아. 며칠 전에는 마스터가 이야기해 주지 않았지만, 둘이서 같이 매달려서 눈물 찔끔 짜면 분명 이야기해 주실 거야.”
“누, 눈물이라고요? 당신 기사 체면에 그런 짓까지 하겠단 말이에요?”
“괜찮아. 난 아직 기사 아니니까. 무엇보다 눈물도 나름대로 무기인데, 기사가 무기를 가려야 쓰겠어? 이럴 때 써야지.”
케마란이 알 수 없는 연륜이 느껴지는 반짝이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처구니가 없네요. 눈물이 기사의 무기일 리가 없잖아요. 수치라면 몰라도!”
“우린 아직 수련생이니까 괜찮아. 가자, 가자.”
네리베르가 기가 막힌 듯 바락 소리쳤다. 케마란은 그런 반응에 상관하지 않고 그녀를 잡아끌었다.
적극적으로 반항하지 못한 네리베르는 힘없이 그녀의 손에 끌려갔다.
하지만 두 사람은 얼마 가지 못하고 멈춰야 했다. 바람처럼 저택의 문을 넘은 워스가 두 사람의 앞을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이드를 만나기 위해서 왔다. 그는 저택에 있느냐?”
“……모릅니다.”
삼검왕을 의심하고 있는 네리베르가 딱딱한 얼굴로 답했다. 그러나 그 속을 모르는 워스는 그녀들이 자신의 등장에 놀랐다고 생각해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겠지. 그보다 일전 수련장에서 본 아이들이구나. 이른 아침부터 수련을 시작하다니 기특하구나. 분명 뛰어난 기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수련에 힘쓰거라.”
실력 함양에 힘쓰는 것을 기사의 미덕으로 보는 워스는 기특하다는 듯 덕담을 건네고는 저택으로 걸어갔다.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보던 네리베르가 물었다.
“마스터를 만나러 갈 건가요?”
“……저 사이에 낄 수는 없지. 오늘은 포기. 하지만 더 알고 싶어졌어. 어제는 화원에 가시고 오늘은 철벽의 검왕이 직접 찾아왔단 말이야.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그에 대한 생각은 아침을 먹은 후에 하겠어요. 돌아가요. 무례한 당신이지만 아침 식사 정도는 대접하죠.”
저택에서 아침을 먹을 작정을 한 케마란 덕분에 식전에 끌려온 네리베르가 말했다. 힘든 수련을 위해 식사는 필수였다.
그러나 케마란이 그런 네리베르를 다시 잡았다.
“아니, 이대로는 못 가.”
“쓸데없이 끈질기네요. 오늘 마스터를 만나는 건 포기라고 했던 것 같은데 내가 잘못 들었나요?”
“마스터는 그렇지. 지금 막 떠오른 건데, 마스터보다 라미아와 이야기하는 게 말이 더 잘 통할 것 같단 말이야.”
네리베르는 최근 연구로 얼굴 보기가 힘들어진 작은 새를 떠올렸다.
“가자!”
“꺅!”
그리고 네리베르가 어떻게 반항하기도 전에 케마란이 그녀를 질질 끌고 마법사의 연구실이 되어 버린 지하실로 향했다.
“이렇게 불쑥 연락도 없이 찾아가는 건 예의가 아닌데………………”
“흥, 말만?”
“당신이 강제로 끌고 왔잖아요!”
“거부한 적도 없으면서.”
“…….”
지하실 입구에 잠시 멈췄던 두 사람이 지하실로 내려갔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던전은 두 사람을 막아서지 않았다. 이전 라미아의 안내로 구경할 때 출입 등록을 해 둔 덕분이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계단에 발을 디딘 순간부터 지옥을 맛봤을 것이다.
“여기 더 이상 지하실이 아닌데?”
이전에 방문했을 때와 많이 달라진 지하실의 모습에 두 사람은 혀를 내두르며 감탄했다. 과연 그녀들도 마법사의 던전은 본 적이 없었다.
“더 복잡해진 것 같아요. 잘못하면 길을 잃을지도 몰라요.”
이리저리 꺾이는 통로를 본 네리베르의 말에 케마란이 피식 웃었다. 저택 지하실에서 길을 잃는다는 말이 우습게 들려서다. 하지만 따로
반박하지는 못했다.
그녀도 마법사의 연구실이 위험한 곳이라는 상식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저 라미아가 있는 연구실이 자신들을 공격하지 않기만을 간절히 빌었다.
아니, 그 전에 라미아가 자신들을 찾아 주길 바랐다.
“라미아!”
“뭐예요?”
“아니, 부르면 마중 나와 주지 않을까 해서.”
아쉽게도 마중은 없었다.
두 사람은 천천히 좁은 통로를 걸어 들어갔다. 무슨 마법을 사용했는지 저택 지하실에 만들어진 통로는 굉장히 길었다.
길을 잃는다는 말이 괜한 말이 아니게 되었다. 다행히 통로는 길기는 했지만 복잡하지는 않았다.
몇 개의 방을 들여다봤지만 이상한 기구만 있을 뿐 라미아는 없었다.
“라미아, 우리 왔어!”
케마란이 다시 소리쳤지만 대답은 없었다.
“마스터 옆에 있는 거 아닐까요?”
“그럼 곤란한데.”
가능성 높아 보이는 네리베르의 추측에 케마란이 미간을 좁혔다.
그때였다.
으아아앙!
멀리서 아이의 비명 같은 소리가 작게 들려오자 네리베르와 케마란이 움찔 놀랐다.
“이, 이게 무슨 소리야?”
“글・・・・・・쎄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떨렸다. 지하실이라는 공간과 묘하게 섬뜩한 비명이 심각하게 공포심을 자극했다. 전장에서 죽음을 마주한 무서움과는 완전히 질이 다른 두려움이었다.
아아악!
두 사람이 긴가민가하고 있을 때 다시 비명이 들렸다. 어느새 용맹한 기사를 목표로 하는 두 수련생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하, 하, 라, 라미아가 누굴 고문이라도 하나?”
“지금 그걸 농담이라고 하는 거예요?”
의외로 케마란이 정확히 짚었지만, 정작 두 사람은 그런 사실을 몰랐다.
“일단 어디서 들렸는지 한번 찾아봐요. 혹시 라미아가 곤란을 겪고 있는 걸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라미아의 목소리 같지는 않은데.”
케마란이 살짝 거부감을 보이자 네리베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째려보았다.
“설마 당신, 겁먹은 건 아니겠죠?”
“말도 안 돼. 전혀 아니거든?”
속마음이 들킨 케마란이 발끈하며 오히려 앞장서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의 보폭은 이전에 비해 절반으로 줄어 있었다. 너무 확연한 차이였지만 네리베르는 전우의 정으로 못 본 척해 주었다.
그 후 짧고 긴 비명이 꾸준히 이어졌다.
덕분에 비명을 이정표 삼아 길을 잃지 않고 찾아갈 수 있었다. 몇 번 통로를 돌자 갑자기 밝은 빛과 함께 좁은 통로로 인해 답답했던 눈을 시원하게 만드는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여기가 어디래?”
“바보 같은 질문이네요.”
툭 쏘듯 답했지만 네리베르도 이곳이 저택의 지하실이 맞는지 헷갈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지금까지 지나온 공간만 해도 상당한데 지금 눈앞에 보이는 공간은 이전 지하실의 온전한 넓이만 했다.
‘확장한 걸까?’
그리고 방의 중앙에는 사방의 벽면과 이어진 검은 쇠사슬에 묶여 허공에 떠 있는 애처로운 작은 빛 덩이가 있었다.
아아악-
그리고 사람 오싹하게 만드는 비명이 그 빛 덩이에서 나오고 있었다.
“…저거 뭐지?”
“오늘 유일하게 같은 생각이네요. 나도 궁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