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32화
669화
은색 기사단장으로 언제나 든든하게 버티고 선 그녀에게 이런 면이 숨어 있을 줄이야.
가만히 웃는 쉴라를 보면 그녀에게 이런 면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일 것 같았다. 알았다면 소문이 나도 벌써 나서 귀에 들어왔을 테니까.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드 팰러스에 대해서는 빠삭한 록과 에단이 곁에 있는 이드가 아닌가.
한편으로는 그녀가 참 힘들게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세 사람에게만 살짝 보였던 모습이 그녀의 진짜 성격이라면, 그것을 감추고 항상 절제하며 사는 삶이 얼마나 불편하고 힘들까 짐작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온전히 하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만……………’
짊어지고 있는 것이 많은 만큼 제약도 많은 것이 세상이다. 그나마 자신이 숨기고 있던 일면을 보여 줄 사람이 있어 다행이었다.
어쩌면 쉴라가 자신의 숨겨진 면을 보였다는 것은 그만큼 이드를 믿고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
그 사이 록은 예상치 못한 볼거리에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쉴라의 평상복 모습은 그가 한 번도 보지 못한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드는 그런 모습에 쉴라가 곧 돌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데 그녀가 예상치 못한 말을 꺼냈다.
“새 검을 손에 익히시는 데 도움이 필요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잠시 쓰고 버릴 무기가 아니라면 확실히 필요한 단계였다. 물론 일라이져 대신에 쉴라가 준 검을 쓸 생각이 없는 이드에게는 관계없는 일이지만, 그리고 그 일을 돕겠다는 말은 딱 한 가지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대련을 하자는 말입니까?”
설마하니 검후의 수련장에서 그렇게 깨지고 먼저 대련 이야기를 꺼낼 줄이야.
“설마요. 지금은 파츠 아머도 장비하지 않았는걸요. 그저 검형에 따른 대련의 상대가 될 기회를 얻고 싶을 뿐입니다.”
은색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가져야 할 당당함을 버리고 자신을 낮춘 쉴라의 말이었다.
대련이라고 표현했지만 그 안에는 이드를 상대로 순수한 검법을 시험해 보고 싶어 하는 욕심과 승부욕이 내재되어 있었다.
‘그렇게 철저하게 지고도 다시 대련을 하자고 하다니.’
사실 이드도 화원에서 있었던 쉴라와의 대련에 대해서는 내심 반성하고 있었다.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라는 사실을 알고 이에 대한 가르침을 받고자 대련을 요청했음에도 난감한 오해에 발끈한 이드가 과하게 손을 쓰고 말았었다.
이유가 어찌 되었든 그건 대련을 요청한 사람에 대한 예의는 아니었다. 물론, 어떤 식으로 대련을 해 주느냐는 요청받은 사람의 마음이기는 하지만, 그간 쌓은 쉴라와의 관계를 생각하면 그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거기다 압도적으로 패배한 후에는 다시 대련을 요청하기 힘든 일인데, 이렇게 먼저 말을 꺼낸 쉴라의 의기도 마음에 들었다.
“그럼 쉴라 경의 도움을 받도록 하죠. 수련장으로 갈까요?”
혹시나 쉴라에게 말을 붙여 볼 기회가 있을까 살피던 록은 난데없는 대련에 서둘러 일리나의 뒤를 따르며 물었다.
“이 밤중에 대련이라니. 도대체 무슨 일입니까?”
“쉴라 경이 이드가 황궁에 갈 때 쓰라고 검을 하나 가지고 왔어요.”
록은 그제야 이드의 손에 들린 롱소드와 검집에 새겨진 문양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엇! 저건 흑색 대장간의… 설마, 저거 카일란 단장님이 직접 만드신 검인 겁니까?”
“검신에 카일란이란 이름이 적혀 있다고 하네요.”
“과연, 그렇게 된 거군요.”
록은 황궁과 카일란의 이름이 연이어 나오자 쉴라가 검을 가져온 이유를 단번에 이해했다.
‘확실히 일라이져보다는 흑색 기사단장과의 인연이 수도의 귀족들에게는 더 크게 느껴질 테니까.’
록은 쉴라의 꼼꼼한 배려와 깊은 마음에 은근히 감동했다.
표면적인 이유 뒤에 숨은 쉴라의 은밀한 내심을 모르기 때문에 온전히 느낄 수 있는 감동이었다.
즈즈즈즉.
수련장에 올라서 이드는 자신을 중심으로 작은 원을 그렸다.
“대련은 이 원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하도록 하죠. 서로 간의 최소 거리는 이 보(二步)로 하고.”
“반 호흡 정도의 간격이면 되겠지요.”
척하면 착이다.
단번에 이드의 뜻을 알아챈 쉴라가 선 위에 발을 올리고 검을 뽑아 들었다. 그레센에도 이와 비슷한 대결 방법이 있기 때문에 이해하기 쉬웠다.
이드는 새로 얻은 롱소드를 한 바퀴 휘둘러 본 후 쉴라의 검과 마주 대었다.
칭!
맑은 쇳소리를 신호로 두 사람의 검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공을 사용하지 않고 속도는 물론 힘과 거리까지 제한한 대련이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와 오히려 더욱 화려해 보였다.
특히나 밤하늘 달빛이 더할 수 없는 최고의 조명이 되어 검날이 보석처럼 반짝이게 했다.
달빛이 구름에 숨을 때마다 검도 그림자 사이로 숨었지만, 수련장에 있는 사람 중 그 정도의 어둠에 구애받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느려졌다가 빨라지고, 끊어졌다가 이어지며 검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북소리처럼 수련장을 채워 나갔다.
그러기를 이십 분 정도 지났을까.
이드는 손바닥을 간지럽히는 기분 좋은 진동을 느끼며 쉴라를 살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이 맺힌 그녀는 지금 대련에 푹 빠져든 듯했다. 겨우 이 정도 대련에 숨이 흐트러지지는 않았지만 격렬한 움직임으로 인해 땀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건 이드도 마찬가지.
‘지금쯤이면………..?
그녀가 이번 대련에서 얻는 것이 있으면 좋고,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 기사단장이라는 직함에 부끄럽지 않은 강력한 그녀의 무공에 유일하게 모자라 보이는 부분.
이드는 달밤의 대련에서 그녀가 그것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단순 교정을 위해서는 수년간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실전을 통해 무의식에서부터 자신의 모자람을 채우고자 갈망한다면 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이 무너지며 쉴라의 무공은 한순간에 진일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드는 대련이 절정에 오르자 원을 따라 쉼 없이 흐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검을 잡은 손으로 크고 작은 원을 만들고, 검 끝으로는 끊어지지 않는 선을 이어 갔다.
정중동에 면면부절.
대련은 그 뒤 한 시간 더 이어졌다.
라미아와 일리나는 어느새 저택으로 돌아갔고, 오로지 록만 남아 앉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작게 신음하며 두 사람의 움직임에 깊이 빠져들었다.
“흐음.”
이드는 그 모습을 보고 쉴라를 위한 일인데 정작 열매는 록이 가져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물론 두 사람 중 누구라도 얻는 것이 있다면 이드로서는 기쁜 일이다.
그 밤, 인테그란 후작은 갑자기 달려온 수하의 보고에 눈썹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드 아래 있는 록이라는 자가 벤 자작을 만나고 돌아갔습니다.”
“자작은?”
“움직임 없이 숙소에 머물고 있습니다. 첩보에 따르면 록을 웃으며 배웅했다고 하는데, 작게 들리는 말이 내일 이드와 만난다는 내용이었다고 합니다.”
“흐음.”
이를 악문 인테그란 후작이 책상을 두드렸다.
그러자 또 다른 수하가 말했다.
“후작님의 말씀대로 이드가 황궁에 가기로 마음을 굳힌 듯합니다.”
“이건 이미 결정된 일이나 마찬가지야. 그보다 문제는 벤 자작이 지금까지 날 만나고자 하지 않았다는 것이야.”
소드 팰러스의 후계로 주목받던 게일이 황궁에 머문 이후 수도에서 나온 사람치고 자신을 만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게일의 중요성과 위치가 그만큼 높다는 뜻이었다. 검후의 후계자로 가장 주목받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다. 황제조차 검후 이후를 헤아려 그를 아끼고 있으니, 권력에 예민한 자들이 후작과의 관계에 기름을 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황궁의 명령을 받고 내려온 자가 자신을 찾지 않았다는 것.
오로지 삼검왕과 이드만을 만났다는 사실에 인테그란 후작은 의도적으로 자신을 멀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차 한 잔 마실 시간을 만들지 못할까?
인테그란 후작은 어쩌면 자신의 생각보다 훨씬 더 황궁에서 이드를 중요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분명히 그러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황제의 사위로 첫손에 꼽히는 게일의 아버지인 날 이렇게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지.’
권력의 냉혹함이야 잘 알고 있지만, 그 칼 같음을 자신이 접하게 될 줄이야.
인테그란 후작은 무리해서라도 게일의 위치와 입장을 확실히 해야 했다고 후회했다. 저 이드가 나타나기 전에 말이다.
“계획을 수일 당겨야겠다. 당장 내일부터 검후의 실종에 대한 소문을 뿌리기 시작해라.”
후작의 명령에 두 수하가 서로를 돌아보며 잠시 망설이다 말했다.
“….검후님에 관련된 일입니다. 이리 서둘러도 되겠습니까?”
수하의 얼굴에는 검후에 대한 두려움과 존경이 섞여 있었다.
“문제없다. 실행하도록!”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인테그란 후작은 수하들이 나간 문을 바라보며 깍지 낀 손에 턱을 올렸다.
“서둘러야 한다. 이대로 검후가 나타나면… 모두 끝날 수가 있다.”
그는 좀 전 수하들의 얼굴에 나타났던 표정을 떠올렸다. 게일에게 소드 팰러스의 패권을 바치기 위해 삼검왕과 대립하는 자들이면서 검후의 이름 앞에서는 마치 수련생처럼 두려워했다.
검후의 명성이 그대로 있는 한 아무리 발버둥을 치고 노력해도 한순간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인테그란 후작은 이번 일로 검후에 대한 절대성도 지워지길 바랐다.
이드는 다음 날 일찍 수련장에 나와 있었다.
평소라면 데일리와 록의 지도 아래 수련생들의 몸이 충분히 풀린 후에야 나섰겠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은 수업이 아니라 수련생들에게 양해를 구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 오늘은 이드님이 먼저 나와 계시네?”
“무슨 일이 있나?”
그런 변화를 느낀 듯 수련생들이 서로를 돌아보며 작게 소곤거렸다.
하나둘 모여든 수련생들이 수련장의 절반을 채웠을 때쯤, 수련생들을 따라 수련장으로 들어서는 의외의 인물이 이드의 눈에 들어왔다.
‘벤 자작? 아니, 오늘 보자고 하기는 했지만 왜 이렇게 일찍 온 거지?’
너무 이른 그의 등장에 이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아침은 이드가 온전히 수련생들을 위해 쓰려고 했는데 그게 틀어질 것 같아서였다. 무엇보다 자신이 나서면 수업이 흐트러질 수 있다는 것을 알면서 이런 시간에 찾아온 것은 분명히 수련생들을 무시한 처사였다.
“쭛!”
혀를 찬 이드는 그에 대한 불만의 표시로 그를 보지 못한 척 무시했다.
‘음? 분명 눈이 마주쳤는데………… 이런, 내가 실수했구나.’
벤 자작도 이런 사실을 뒤늦게 알아채고 후회했다.
이드의 미래를 보고 어떻게든 그와 좋은 관계를 만들어 나갈 생각을 하고 있던 그의 입장에서는 여간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레오날도 후작의 명령을 완수했다는 기쁨에 깊이 생각지 못하고 섣불리 행동한 것이 잘못이었다.
그는 나서서 자신의 실수를 사과하기보다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난감함을 무마하고는 이드와 한발 떨어진 뒤에 최대한 조용히 서서 수련생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시간 개념은 없어도 눈치는 제법 있는 인물이구나.’
분위기 파악을 못 하는 자였다면 무시하는 거냐며 따지고 들었을 텐데 말이다.
이드는 알아서 잘 처신하는 벤 자작의 모습에 그에 대한 신경을 껐다.
그리고 수련생들이 데일리 경과 록의 지휘에 따라 꼼꼼히 몸을 푸는 것을 한참 동안 지켜본 후 고개를 돌렸다.
“수업이 있는 날은 언제나 수련생들이 가장 먼저라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제가 오늘 만나자고 청하기는 했지만 굉장히 일찍 오셨군요?”
“아닙니다. 수업에 집중하시는 게 당연하지요. 오히려 방해가 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이곳에서 이드 님이 수업을 진행하는 모습을 보지 못할 것 같아서 서둘러 버렸습니다.”
이드의 표정이 묘해졌다. 분명 사과를 담은 말인데 그 뜻이 묘했던 것이다.
“말씀하시는 것이 꼭 제가 여기서 더 이상 수업하지 않을 것처럼 말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