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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33화


670화

“황제 폐하께서 이드 님을 직접 거론하여 부르셨으니 황궁에 가면 중히 등용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이드 님의 높은 명성을 생각하면 절대 가볍게 쓰지 않으실 겁니다.”

이른 방문이 이드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 벤 자작이 수수하게 웃으며 은근한 아부의 말을 더했다. 그가 가진 아부의 기술은 상대가 부담스럽지 않도록, 자연스럽게 미소 짓도록 만드는 것. 그가 살핀 이드의 성향에 따르면 이드는 노골적으로 띄워 주는 것보다는 이와 같이 은근한 아부가 딱 맞았다.

그러나 이러한 벤 자작의 노력이 허무하게도, 제국의 권력에는 관심이 없는 이드로서는 황제에게 인정을 받아도 좋을 것이 없었다.

‘내가 뭐 얻을 게 있다고 황제를 위해 일하나? 귀찮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오히려 이런저런 큰일을 맡길 것 같으면 단박에 끊어 낼 생각이었다. 무엇보다 귀족이나 기사들이 황제에게 충성하는 이유는 명예나 권력, 재물 같은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인데, 명예는 마인드 마스터로서 높을 만큼 높고, 재물도 아공간에 쌓여 넘쳐흐르는 이드에게 황제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을까. 겨우 권력 정도가 다인데 이드는 권력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즉, 그에게 황제 아래 둥지를 틀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것이다.

“즉, 자작님의 말씀은 제가 이후 황궁에 머물게 될 거라서 여기 수련생들을 위한 수업이 더 없을 거라는 뜻이군요.”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되면 수업을 받던 수련생들이 가엽게 되지 않겠습니까?”

수련생을 걱정하는 이드의 말에 벤 자작이 모르는 말 하지 말라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그럴 리가요. 오히려 기뻐할 겁니다. 황제 폐하의 기사가 되신 이드 님께 무공을 배웠다는 것에 영광이라며 자랑스러워할 것입니다.” 

강한 자부심이 담긴 벤 자작의 말에 이드는 어이가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열심히 몸을 풀면서 이쪽을 향해 힐끔거리는 수련생들 몇몇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저기, 저기, 저기, 그리고 저 떨어진 곳에 있는 수련생들 보이시죠?”

“음? 그렇습니다만?”

“라일론 제국의 수련생입니다. 그리고 저기 모여 있는 수련생들은 드레인 출신이지요. 뿐만 아니라 일리나스와 마스에서 온 수련생도 있습니다.” 

갑작스럽게 수련생들의 출신 국가를 밝히는 이드의 모습에 벤 자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가셨다. 이드의 반응이 결코 긍정적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는 수련생의 절반 이상이 타국 출신입니다.”

“어째서 그렇게나 많이……………”

생각보다 훨씬 많은 타국 출신 수련생들의 수에 벤 자작이 크게 놀랐다. 그는 당연히 수련생의 대부분이 제국 출신일 거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드는 태연한 얼굴로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당연히 지원을 했으니까 뽑았지요. 소드 팰러스는 기사의 성지. 제국뿐 아니라 타국의 수련생도 많습니다.”

“그렇지만…………”

벤 자작은 말을 하려다 입술을 물었다. 이드와 이 많은 수련생 앞에서 아나크렌 제국의 수련생만 가르쳐야 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드는 벤자작이 하지 못한 말 속에 든 오만을 내심 비웃으며 말했다.

“벤 자작님의 말씀대로 제가 제국을 위해 일하게 된다면 과연 저들도 그렇게 생각할까요? 제 생각에는 절대 그렇지 않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제국의 수련생 중에도 그와 같은 자랑거리보다는 무인으로서 피와 살이 되는 수업을 원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을 겁니다. 이곳은 기사의 성지니까요.”

“크흠!”

반박하기 힘든 이드의 말에 벤 자작이 고개를 숙였다. 이드의 말처럼 타국 출신의 수련생들이 그렇게 많다면 자랑보다는 불만의 소리가 높을 것이 분명했다.

수련생의 요청으로 진행되는 수업이 의무인 것은 아니지만 책임은 있으니까.

왕국의 수련생 중에는 혹시 그런 자들이 있을지 몰라도, 타 제국 출신의 수련생들은 결코 자랑으로 생각하고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이드가 황제의 기사가 되어서 좋을 게 하나도 없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기사의 성지라는 이드의 말도 마음에 걸렸다.

‘그랬지. 여긴 일반 영지가 아니라 소드 팰러스. 명예와 권력보다 스스로 발전하고자 하는 기사들이 모여드는 곳. 그들이라면 한 잔 술에 들이킬 자랑보다는 무공을 살찌울 수업을 원할 테지.’

벤 자작은 과연 자신이 소드 팰러스의 특수성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쯧, 내가 정계에서 너무 권력 지향적인 놈들만 보아 생각이 굳었던 모양이군.’

그는 느슨해진 마음을 조였다. 동시에 이드가 가지고 있는 생각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과연 이드 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소드 팰러스의 수련생들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군요. 한데 지금 말씀은 꼭 황제 폐하께서 내리는 말씀을 거절하겠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만?”

“뭐, 황제 폐하께서 어떤 이유로 절 부르셨는지 알지 못하니 확답은 할 수 없지만, 여기서 수련생들을 가르치는 일보다 매력적이지 않다면· 무례하지만 거절할 생각입니다.”

벤 자작은 이드의 느긋한 대답에 기가 막혔다.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하지 못할 소리다. 감히 황제의 제안을 평가하고 거절하겠다니.

“어허허. 이거 돌아가는 대로 이드 님이 절대 거절하지 못할 대단한 제안을 준비해야 한다고 건의를 해야겠습니다.”

만약 이드가 아니었다면 대단한 제안이 아니라 치도곤이 내려질 건의였다.

“저도 기대하지요. 과연 어떻게 절 잡으실지 말입니다.”

“이런, 실망시켜 드리지 않으려면 제가 잘해야겠습니다. 한데, 이렇게까지 말씀하시는 것을 보면 황궁으로 가겠다는 뜻으로 알아도 되겠지요?” 

“그렇지 않다면 자작님을 부르지 않았겠지요. 네, 황궁에 가겠습니다.”

이드의 확답에 벤 자작이 기뻐하며 손뼉을 쳤다.

“그럼 언제 출발하면 좋겠습니까?”

“제가 준비할 일은 크지 않습니다. 하지만 오늘은 수련생들을 위해서 써야 하니, 이후라면 언제라도 좋습니다.”

이드가 온전히 결정권을 넘기자 벤 자작이 고마워했다.

“과감한 결단에 감사드립니다. 급하기는 하지만 내일 출발해도 되겠습니까?”

“내일이요?”

생각보다 급한 일정에 이드가 의외라는 듯 돌아보았다. 결정권을 넘겼지만 이렇게 과감하게 지를 줄이야.

‘이 사람, 자신이 가진 권한을 쓰는 데 거침이 없구나? 혹시 남이 깔아 준 멍석 위에서 날아다니는 타입?”

아니다.

이번엔 오히려 그 반대였다. 황궁의 명령에 심기가 상한 삼검왕의 분노를 피하고 싶은 마음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너무………… 빠르겠습니까?”

“아뇨. 뭐, 그럼 내일 출발하기로 하죠. 동행인이 있어도 되는 거겠지요?”

“물론입니다. 그럼 내일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편히 수업하십시오.”

“원래는 차라도 한잔하며 이야기하려 했는데, 어쩔 수 없지요. 그럼 내일 뵙죠. 아, 그리고 내일은 좀 느긋하게 찾아와 주십시오.”

“아하하.”

자신의 당부에 어색하게 웃은 벤 자작이 돌아가자, 이드는 때마침 준비 운동을 끝낸 수련생들 앞에 나서서 말했다.

“주목. 오늘은 내가 여러분들에게 양해를 구할 일이 있다.”

이드의 말과 함께 수련장이 고용해졌다. 그렇지 않아도 평소와 다른 분위기와 급작스레 방문한 손님으로 인해 무슨 일인가 궁금해하던 수련생들이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이드는 그들에게 벤 자작의 신분과 그가 가져온 소식, 그리고 이에 대한 자신의 결정을 전했다.

그리고 자신이 자리를 비운 시간 동안 수련생들이 해야 할 수련 내용을 공개했다. 그에 수업 중단으로 실망하던 수련생들은 안심하는 한편 아쉬워했다.

이드가 황궁에 머물지 않고 돌아올 거라는 사실과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편히 쉬지 못한다는 사실에 말이다.

이후 차례차례 한 사람씩 이드에게 주의 사항과 함께 수련 계획표를 전달받은 수련생들이 저택 밖으로 뛰어나와 이 소식을 알렸다. 그들은 자신이 전령이라도 되는 듯 착각에 빠져 묻지도 않은 사람을 붙잡고 이야기를 퍼트렸다.

덕분에 이드가 황제의 부름으로 황궁에 간다는 사실이 순식간에 퍼져 나가며 소드 팰러스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저 블러디 혼 마르텔을 꺾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누구나 관심을 가지고 주목하는 화제의 중심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렇게 화려한 이야깃거리가 생긴 덕분에 작은 술집을 중심으로 조용히 퍼지는 소문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다름 아닌 검후에 대한 소문인데도 말이다.

“자네 소식 들었나? 검후께서· 변을 당하셨다는 소문 말이야.”

“쉿! 자네 미쳤나. 소드 팰러스에서 그딴 헛소문을 흘리다간 죽는다고! 보나 마나 헛소문이지.”

처음엔 소문을 전하는 자와 듣는 자가 모두 조심스러웠다.

“이 자식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감히 그분이 어떤 분인데 그딴 소문을 입에 올려!”

개중에는 헛소리를 들었다며 화를 내는 자도 있었다.

“듣기로는 검후께서 실종되어서 은색 기사단이 찾으러 나갔던 거라던데? 결국 찾지 못하고 복귀했고.”

“그렇다더군. 다른 오색 기사단은 혹시 있을지 모를 일을 대비해서 소드 팰러스를 지키는 것이고 말이야.”

하지만 소문이 몇 사람을 건너자 그에 혹하는 사람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혹시 말이야………… 이번에 은색 기사단이 찾아낸 흑마법사 놈들에게 검후님이 납치를 당한 것은 아닐까? 아니, 그렇잖나. 이번 검후님의 수련은 너무 갑작스러웠다고.”

“글쎄. 그놈들보다는 초인파 쪽에서 손을 쓴 건 아닐까? 소드 팰러스와 초인파가 으르렁거리는 것은 길에서 노는 아이들도 아는 사실이잖나.”

결국에는 소문에 살을 더하고, 쓸데없이 사실에 가까운 추측을 더하는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본래 말이 가벼운 자들의 근거 없는 헛소리지만, 그런 것일수록 사람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하며 빠르게 퍼져나가는 법이다.

또한 소문이 너무 자연스럽게 흘러, 인테그란 후작의 명령으로 은밀히 소문을 퍼트리던 자들이 어리둥절해할 정도였다. 그들이 만든 소문은 얼음 아래 흐르는 계곡물처럼, 소란스러운 이드의 소문 아래에서 조용히 사람들 사이로 퍼졌다.

아마, 며칠이 지나면 누가 처음 소문을 접했는지도 알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혹시, 후작님은 이러한 사실을 아시고 오늘 움직이라고 하신 것인가!”

그리고 개중에는 쓸데없는 확대 해석으로 감탄하는 자도 있었다.


당분간 진행되지 않기 때문인지 오늘 수업은 평소보다 늦게 끝났다. 주의 사항과 수련 방법을 알려 주는 일이 의외로 많은 시간을 잡아먹은 탓이다. 특히, 어린 수련생과 달리 오후 수업을 받는 기사들은 계획표에 있는 수련 방법과 그 효과에 대해 꼼꼼히 질문해서 이야기가 길어져 버렸다. 그러는 사이 소문은 퍼지고 퍼져 소드 팰러스에서 이드의 황궁행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뒤늦게 소식을 들은 사무엘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황궁에 가신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만, 어찌 된 일입니까?”

애써 점잖게 묻는 그의 얼굴에는 짜증과 불안이 동시에 떠올라 있었다.

“아, 이런 제가 연락을 드린다는 것을 깜빡하고 있었군요. 들으신 소문은 사실입니다.”

미안한 듯 사과의 말을 건넨 이드는 속으로 혀를 빼물었다.

‘본래 아쉬운 놈이 우물을 파는 법이지.’

말과 달리 일부러 연락을 하지 않았다. 아쉬운 사람이 누구인지 인식시켜 매달리게 하기 만들기 위해서.

과연 생각대로 이드의 확인을 받은 사무엘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하, 하면 우리 문제……아니, 이그렌 경의 일은 어찌 되는 것입니까? 이렇게 황궁으로 가 버리시면………… 선대의 인연을 보아서라도 그의 일을 무시하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사무엘은 이드가 황궁에 가면 다시는 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지, 마지막 기회를 잡는 심정으로 애원하듯 말했다.

과연 다급하긴 했던 모양이다. 첫 만남에서 점잔 빼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하하하, 물론입니다. 하지만 황제 폐하의 부름을 거부할 수도 없고, 한번 가면 얼마나 있을지 모르는 일. 그래서 이그렌 경을 함께 데려갈까 생각했습니다.”

“이그렌 경을 황궁에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이그렌 경과 사무엘 백작님의 의향을 물어 결정하려 했는데, 알리는 것이 늦어 버렸습니다.”

이드가 고개를 끄덕이자 사무엘이 웃는 듯 우는 듯 애매한 얼굴이 되었다.

“그것은………… 감사한 일입니다만, 이전 말씀드린 바와 같이 이그렌 경의 입장이 입장이다 보니 홀로 황궁으로 보내는 것은 아무래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곤란하지 않을지………….”

쯧쯧거리며 이드가 혀를 찼다. 제국의 황궁에 가는 데 곤란할 게 무언가. 전쟁 중인 적국도 아닌데.

“어렵다면 어쩔 수 없지만, 두 분께서 언제까지 소드 팰러스에서 절 기다릴 수도 없지 않습니까. 아, 그럴 게 아니라 사무엘 백작께서도 이그렌 경과 동행하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뜻밖의 제의에 서서히 일그러지던 사무엘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저까지 말입니까?”

“네. 물론 이그렌 경처럼은 아닙니다. 일리나스의 백작께서 아무 일 없이 궁에 머무실 수는 없으니까요. 대신 곧 있을 큰 사건에 백작께서 한 손 거드신다는 뜻으로 참가하신다면 제가 그것을 이유로 사무엘 백작님의 동행을 허락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흐음, 큰 사건이라면 무슨 일이?”

“아직 발표되지 않아 자세히는 말씀드리기 어렵지만, 간단히 말해 악당의 토벌입니다.”

“오호, 악당……입니까?”

“네.”

‘당신 같은.’

이드는 발표되지 않은 정보라는 말에 혹시 있을지 모를 이익으로 사무엘이 눈을 번뜩이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여기까지 이야기했으니 선택은 그의 몫이다. 그의 선택에 따라 그에 대한 처분도 바뀔 것이다. 남는다면 원래 클라인의 계획에 따라 그의 실수와 꿍꿍이를 잘 포장해서 일리나스 정계에서 축출시켜 버릴 것이다. 그의 행동이 일리나스의 명성과 이익에 해를 끼치는 것이니 명분은 충분했다. 귀족의 작위만 사라지면 이그렌과의 악연도 끝이 날 테니까. 이그렌이 원한 것처럼 완만하게.

‘그래도 목숨은 건지겠지. 하지만 무공을 손에 넣을 욕심대로 따라나선다면 토벌에 나서야 할 테고, 그 위험한 전쟁터에서 무슨 일이 있을지 누가 알겠어?”

개인적으로 이드는 그가 욕심을 부릴 것이라고 보았고, 그 예측은 정확했다.

“가겠습니다. 무엇보다 악당의 토벌이라니. 기사로서 가슴 떨리는 일에 참가할 수 있다면 이그렌 경의 일이 아니더라도 가야지요. 하하하.”

“하하하, 그렇지요? 가슴 떨리는 일이지요.”

이드는 마주 웃으며 사무엘의 말을 받아 주었다. 그리고 사무엘이 몇 마디 말을 더 하려는 순간이었다.

[이드, 에단에게 급한 연락이 왔어요!]

사무엘 따위보다 수십 배 중요한 소식이 전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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