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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235화


672화

이드가 결국 일리나의 화원 잔류에 동의했다.

말끝에 이어진 미소의 힘이 실로 컸다. 잔잔한 미소가 몇 마디 말보다 까칠해진 이드의 마음을 잘 쓰다듬어 주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조심해야 해요. 거기다 그것 말고도…………….”

그래도 불안한 마음은 남았는지 이드는 잔소리 같은 당부를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 모습을 흐뭇하고 평화롭게 바라보던 쉴라는 이드의 당부가 길게 이어지자 섭섭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기사들도 화원에 남는데, 그들은 걱정해 주지 않으시나요?”

“은색 기사단의 기사들은 쉴라 경이 충분히 걱정해 주고 있을 텐데, 저까지 더할 필요가 있나요. 그리고 다른 사람보다 가족이 더 걱정스러운 것이 당연한 일 아니겠습니까?”

일리나의 어깨를 감싸 안은 이드의 말에 클라인이 껄껄 웃으며 공감을 표했다. 새초롬한 눈으로 클라인을 노려본 쉴라가 입술을 삐죽이다 진지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그런데 일리나 님만으로 괜찮을까요? 화원에 기어들 침입자들은 모두 소수 정예로, 그 안에 렉터와 같은 강자가 두 명 이상 끼어 있을 수도 있습니다.”

당연한 걱정이었다. 그러나 일리나가 나서 준 덕분에 계획의 빈틈을 겨우 메꾼 클라인은 달랐다. 한껏 당혹스런 표정을 한 그가 이게 무슨 훼방이냐는 듯 쉴라를 돌아보았다.

그러는 중에 이드는 의외로 덤덤하게 대답했다.

“내가 걱정한 것은 혹시 있을 만약의 상황이에요. 렉터와 같은 자라면 열 명이 몰려와도 시간은 걸리겠지만, 일리나가 처리할 수 있어요. 진짜 문제는 생명의 관에서 만난 부관주 같은 자가 나타나는 건데…………”

“그런 대단한 자가 이런 일에 직접 나서는 경우는 거의 없지요.”

이드는 자신의 말을 이어받은 클라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의 경우가 있지만 가능성이 적고, 그렇게 일이 커지게 되면 삼검왕도 나서지 않을 수 없게 되니 오히려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테지요.”

“하하하, 전 그때 삼검왕이 어떤 낯짝을 할지 궁금해서라도 그런 대난동이 벌어지기를 기대해야겠습니다.”

“클라인 백작, 그런 말씀은!”

쉴라가 강하게 클라인을 노려보았다. 그런 대소동에 기사들의 희생이 없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아, 너무 과민하게 듣지 마시오. 가벼운 농담일 뿐이니까.”

클라인이 별거 아니라는 듯 말했다.

그와 같은 행동이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농담을 걸고넘어지는 것도 멋없는 일이라 쉴라는 가볍게 혀를 차고 말았다.

“자자, 그런 농담과 이후의 자세한 계획은 두 분이 따로 이야기하시고, 그만 돌아가세요. 저는 내일 있을 아내와의 잠시간의 이별을 대비해서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습니다.”

용무가 끝났으니 이제 그만 가 보라는 듯 휙휙 손을 내저었다.

“준비………… 아! 준비! 그렇죠. 준비해야죠.”

과연 그 말에 쉴라가 무엇을 떠올렸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순식간에 귓불까지 붉힌 그녀는 이드와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럼 좋은 시간 보내십시오. 백작님도 눈치 없이 방해 말고 함께 나가시지요.”

그리고는 멀뚱히 자신을 바라보는 클라인의 뒷덜미를 잡아끌어 저택을 나가 버렸다.

“도대체 무슨 상상을 한 거야?”

순식간에 멀어지는 쉴라의 등을 보며 이드는 과연 그녀가 무슨 상상을 했는지 심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글쎄요. 하지만 죽어도 말해 주지 않을 것 같지 않아요?]

“그렇지?”

대충 무슨 상상을 했는지 짐작이 되어서 더 궁금했다. 그러나 라미아 말대로 그렇기 때문에 죽는 한이 있어도 말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녀 머릿속의 이드와 일리나는 뭘 하고 있었을까.

‘대충 한번 추측해서 따라해 볼까?”

문득 그런 생각도 들었지만, 그보다 중요한 일들이 있었다. 그 일들의 준비가 끝나고 나면 쉴라의 머릿속에 있던 일부의 재현을 시도해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말이다.

“그럼 우리가 없는 동안 일리나가 쓸 만한 장비와 물건들을 미리 챙겨 볼까요?”

“장비요?”

[유비무환이라잖아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까 안전하도록 준비해 둬야죠. 없으면 모르겠지만 아공간에 일리나가 쓸 만한 물건도 쌓여 있으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말만 해요. 개인적으로 내가 추천하고 싶은 것도 있어요.]

“물건이 하도 많아서 고르는 것만 해도 제법 시간이 걸릴 거예요.”

이드는 라미아와 함께 일리나의 손을 잡고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수백 개의 가지각색의 물건들을 늘어놓고 라미아와 함께 각각의 용도와 기능을 설명하며 세일즈맨처럼 일리나에게 구매를, 아니 사용을 권유했다.

다음 날 이드는 살짝 늦잠을 잤다.

늦은 시간까지 물건을 고른 후 새벽까지 쉴라의 상상을 현실로 이끌어 내는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라미아는 두 사람만의 시간을 위해 일찍 눈을 감고 꿈나라로 잠시 자리를 피해 주었다.

다행스럽게도 벤 자작에게 미리 일러두었기 때문에 그를 기다리게 만드는 민망한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황궁에 가져갈 물건들은 모두 챙기셨습니까?”

늦은 아침을 먹으며 록이 물었다.

이드와 달리 평소처럼 일찍 일어난 그였지만, 이드가 밖으로 나오기 전까지 방에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았다.

아마 쉴라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지 않았을까 싶지만, 사실이니까 따로 언급하지 않은 이드는 허리에 달린 두 자루의 검을 두드려 보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챙길 건 이것뿐이야. 필요한 물건들은 모두 아공간에 들어 있으니까.”

“그러고 보니, 에단과 함께 소드 팰러스에 오실 때도 빈손이셨지요.”

“그래. 오히려 소드 팰러스에 와서 개인 물품이 생겼지. 이 저택. 하지만 이걸 가져갈 수는 없잖아? 그러니 록이 잘 관리해 달라고.”

“그럼 일리나 님은 역시 화원에서 머무시는 겁니까?”

“아무래도 그렇지. 놈들이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데 화원과 떨어진 저택에 있을 수는 없잖아. 화원에 일리나가 쓸 만한 방도 많으니까 차라리 거기에 머무는 게 나아. 일단 화원에 나와 연락 가능한 통신구를 따로 둘 테지만, 그렇다고 저택에 있는 통신구를 치울 건 아니니까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통신구 옆에 록에게 필요할 만한 스크롤도 챙겨 뒀으니까 필요한 일이 있으면 아끼지 말고 써요.]

이드와 라미아의 당부에 록이 고개를 숙였다.

“말씀대로 저택과 수련생을 잘 관리해서 마스터를 귀찮게 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이드가 자리를 비운다는 사실에 긴장을 한 듯 록의 말에 기합이 들었다. 이드는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보이고는 식사를 마쳤다. 그 후 가벼운 티타임을 가졌다.

오늘 이드의 출발을 아는 사람은 겨우 한 줌밖에 되지 않아 배웅을 위해 찾아오는 사람도 없어서 조용했다. 클라인과 쉴라와도 어제 간단히 인사를 마쳐 두었다.

먼저 도착한 것은 사무엘과 이그렌을 태운 마차였다.

감히 이드와 벤 자작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 늦지 않도록 일찍 나온 듯했다.

그런데 꾸벅 인사를 하는 이그렌의 옆으로 사무엘이 피로가 가득한 얼굴로 다가왔다.

이드는 사무엘의 턱까지 늘어진 다크서클을 보며 물었다.

“얼굴이 말이 아닌데, 간밤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안면이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느라………….”

“아하! 참, 열심이십니다.”

너무나 귀족다운 이유에 이드는 피식 웃고는 관심을 끊었다.

두 사람이 도착하고 좀 더 시간이 흐르자 벤 자작이 저택 앞에 도착했다.

똑같은 귀족인데도 그의 얼굴은 사무엘 백작는 달리 쌩쌩했다. 그것이 제국과 왕국의 차이인지, 뒷배의 차이인지는 알 수 없었다.

“오늘은 적당한 시간에 오셨군요.”

저택 밖으로 나온 이드가 말했다.

“하하하, 그렇습니까. 삼검왕께 인사를 올리느라 늦는 게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입니다.”

멀리 검성을 돌아본 이드가 물었다.

“제 이야기도 하셨습니까?”

“예. 일전 명령이 있어 이드 님을 먼저 찾는 무례를 보였지만, 이번에도 그럴 수는 없는 일이지요. 뭐, 이드 님을 황궁으로 모셔 가는 일이 삼검왕께서 좋아할 일이 아니기 때문에 눈 밖에 난 것은 여전하지만 말입니다.”

“그것참, 곤란하시겠습니다. 하지만 명령받은 대로 움직이는 것을 아실 텐데 자작님께 화를 내겠습니까? 거기다 황궁 소식이시고요.”

“허허, 황궁에 있다고 그분들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건 아닙니다. 기사들이 있는 곳에는 필히 그분들의 영향력이 닿는다고 보아야 하는데, 황궁만큼 기사가 많은 곳은 없으니까요. 어중간한 힘을 믿고 소드 팰러스를 무시했다가는 정말 두고두고 곤욕을 치릅니다.”

목소리를 죽인 벤 자작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다는 듯 이마를 짚고는 이드의 주변을 살피며 말했다.

“그런데 뒤에 있으신 분들이 동행할 분들 같은데 짐은 보이지 않는군요?”

“짐은 따로 보관이 가능한 아티팩트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아, 저도 구하고 싶은 물건인데, 부럽습니다.”

벤자작이 숨김없이 부러운 표정을 지었다. 제국의 자작인 그도 아티팩트는 쉽게 손에 넣을 수 없었다.

“값은 후하게 매겨 드릴 수 있으니, 생각이 있으시면 팔아 주십시오.”

평소 제국 각지로 출장이 잦은 그로서는 꼭 가지고 싶은 아티팩트인지라 간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하하, 염두에 두지요. 그보다 서로 인사를 나누시죠. 이번에 저와 같이 황궁에 동행할 분들입니다. 일리나스 왕국의 사무엘 백작님과 시온 자작가의 이그렌 경입니다.”

이드의 소개로 세 사람이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았다.

벤 자작은 두 사람을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고, 반대로 사무엘은 벤 자작을 앞에 두고 최대한 조심하고 있었다.

작위는 아래였지만 제국의 귀족인 데다 황궁의 명령을 받들어 행동하는 벤 자작은 왕국 변방에 영지를 가진 백작이 함부로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그럼 바로 출발하지요.”

세 사람이 인사를 마치자 이드가 말했다. 이드는 벤 자작의 마차에 함께 탔다. 이그렌과 사무엘의 마차가 그 뒤를 따랐다.

이드는 천천히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멀어지는 일리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 모습이 의외인지 벤 자작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함께 동행하지 않으십니까? 저는 동행인을 언급하셔서 당연히 아내분을 말씀하시는 것인 줄로 알았습니다.”

“그녀는 따로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말입니다.”

짧은 답에 그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뜻을 안 벤 자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어차피 그의 임무는 이드를 데려가는 것이지, 그의 가족에 대한 일은 명령받은 적이 없었다. 괜히 함부로 입을 놀려 마차를 돌리라고 하면 곤란했다.

가족의 일에 예민하지 않은 사람은 없으니 무조건 조심하는 것이 좋았다.

이드를 태운 마차가 소드 펠러스의 정문을 통과했다.

그 소식은 가장 먼저 삼검왕과 인테그란 후작에게 전해졌다.

“좋다. 오늘부터 이드에 대한 소문을 뿌려라. 검후에 대한 소문과 함께 은밀히 구석구석까지 퍼지게 만들어라.”

“옙!”

인테그란 후작의 명령에 그 앞에 대기하고 있던 부하들이 복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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