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41화
678화
데이노스는 화원에서 지내는 동안 사용하게 될 숙소를 배정받고 화원을 돌아보았다. 소드 팰러스 안에 있지만 검후의 처소이기 때문에 쉽게 들어올 수 없어 그 구조를 잘 모르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화원에서 할 일은 이미 단장에게 들었다.
그렇다면 혹시 있을지 모를 습격에 대비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자신이 지킬 화원을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최소한 습격해 오는 자들보다는 자신이 지키고 있는 곳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에 최선을 다하자는 주의였다. 할 것을 한 후에 여유 시간을 즐겨야 했다.
“중요한 일을 내버려 두고 기사단끼리 인사라니. 다른 곳이었다면 이러지 않을 텐데, 여기사들이 많기 때문인가 모두 긴장이 풀렸어.”
데이노스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다. 그는 뒤늦게 황색 기사단의 기사 중에도 화원에서 지낸다는 것 때문에 흥분한 동료가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동시에 항상 든든하던 동료를 흔들어 놓은 여기사들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과연 여기사는 약하다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방면에서도 전투에 방해가 된다는 단장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약하니까 타 기사단에 지원을 요청하는 거지. 우리 황색 기사단이었다면 외부의 도움 없이도 이 화원을 지켰을 텐데.”
그는 어디를 통해 습격이 올지를 고민하며 움직였다.
‘솔직히 어떤 간 큰 놈이 감히 소드 팰러스에서 문제를 일으킬 수 있을까마는, 목숨만 포기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지. 소드 팰러스의 문은 만인을 향해 열려 있으니까. 그게 허술하다고 생각하는 등신들이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고.’
데이노스는 반질반질 윤이 나는 폼멜을 쓰다듬었다.
‘아무리 만만해 보였다 해도 은색 기사단을 공격한 자들이 오색 기사단을 향해 검을 들었다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그러니 그 대가를 치르게 해 주어야지. 그 오만과 자만을 뿌리 뽑아 주마. 예쁘장한 여기사가 아니라 우리 진짜 오색 기사단이!’
데이노스는 계속 눈에 띄는 여기사들의 가느다란 팔다리와 비교되는 자신의 굵고 단단한 근육을 보고는 자신감이 솟구쳐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그가 창고 앞의 두 사람을 발견한 것은 화원 외곽을 모두 둘러본 후였다.
두 사람이 손질하고 널어놓은 무구의 번쩍이는 광이 데이노스의 눈을 찌른 것이다.
그 화려한 번쩍임을 살피던 그의 눈에 케마란이 기대 세워 놓은 링스피어가 잡혔다. 창과 닮은 기형 병기.
그가 알기로 저와 같은 창을 사용하는 여기사는 없었다. 대신 특이한 형태의 창을 사용하는 수련생에 대한 이야기는 알고 있었다.
“저 아이들이 어째서 여기에 있는 거지?”
눈을 번뜩인 데이노스가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마치 범인의 뒤를 덮치는 수사관처럼 조심스럽게. 그리고 물었다.
“자네들이 왜 여기 있지?”
“핫!”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케마란과 네리베르는 깜짝 놀랐다. 화원에서 남자 목소리라니. 하지만 남자 기사가 입고 있는 갑옷의 왼쪽 어깨에서 허리까지 직선으로 박힌 황금을 보고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황색 기사단의 기사’
“처음 뵙겠습니다. 은색 기사단의 수련 기사, 네리베르 폴 다임이 인사드립니다.”
“같은 은색 기사단의 수련 기사, 케마란 몰이 인사드립니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려다 자신들이 더 이상 수련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린 두 사람이 가슴에 손을 올렸다.
“수련 기사라고? 은색 기사단에서 신입 기사를 뽑았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언제 입단했나?”
인사에 대한 화답 대신 돌아온 질문에 네리베르가 답했다.
“어제 단장님께 입단을 허락받았습니다.”
“어제라고?”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데이노스의 눈썹이 꿈틀했다.
“설마 지금 그 복장인 이유가 각자 준비된 파츠 아머가 없어서인가?”
“……”
네리베르는 바로 답하지 못했다. 데이노스의 태도가 결코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수련 기사를 들이고 파츠 아머를 제때 구비해 두지 못했다는 것을 수긍하는 것이 혹 은색 기사단의 실책을 선전하는 것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수련생이 아닌 은색 기사단의 당당한 수련 기사에요. 은색 기사단 내부 일을 묻는 타 기사단 기사의 질문에 꼬박꼬박 답할 이유는 없어요!’
그녀는 자신의 마음을 전하듯 나란히 선 케마란의 발끝을 꾸욱 밟았다.
“내 질문이 들리지 않나, 수련생!”
“경! 주의해 주십시오. 저희는 더 이상 수련생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런 신호가 의미 없게도 케마란이 발끈하고 소리쳤다. 네리베르는 자신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한 그녀의 반응에 ‘끙.’ 하고 신음했지만, 케마란의 말에는 공감했다.
데이모스의 질문에 답하지 않는 네리베르나 수련생이 아니라 반박하는 케마란의 행동 모두 자신감과 자존심에 의한 것. 결국 본질은 같다.
“수련생이 아니라면 상급자의 질문에 똑바로 답해! 아무리 억지로 밀어 넣은 수련 기사라도 그런 기본조차 알지 못하나!”
데이노스는 케마란의 말을 차갑게 비웃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한 가지 가설이 세워지고 있었다.
반대로 네리베르와 케마란은 억지 수련 기사라는 말에 발끈했다.
“억지 수련 기사라니요! 경의 말이야말로 억지 주장입니다!”
“흥, 억지가 아니면 뭐야! 기사단의 상징인 갑옷과 검도 준비되지 않았다는 것이 증거가 아니겠나!”
“윽……”
왜 갑옷과 검이 없냐는 것에는 답할 수 없었다.
입단 후 무구를 맞추는 기사단도 적지 않지만, 오색 기사단은 다르니까. 수많은 기사들의 목표인 오색 기사단이 신입을 뽑을 때면 언제나 수많은 기사가 몰리고, 그들 중 입단할 기사를 뽑고 입단 날짜를 잡는 것에는 이미 체계가 잡혀 있다.
그런데 수련 기사를 뽑는다는 말도 없이 들인 수련 기사가 무구도 없다? 아마 데이노스처럼 정당한 입단 절차 없이 사사로운 이유를 위해 입단했다는 의심을 가질 기사는 적지 않을 것이다. 새삼 자신들이 큰 혜택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 무엇보다 우리 실력은 은색 기사단 모두가 인정한 거라고!’
불끈 치솟는 고집에 케마란이 막 뭐라고 하려는 순간, 그녀보다 조금 먼저 부드럽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세 사람 사이를 가르고 들어왔다. “목소리가 높아지는 것 같은데. 무슨 문제가 있나요?”
일리나였다. 마침 두 사람에게 다가오던 차에 높아지는 목소리를 듣고 끼어든 것이다.
“으음.”
데이노스는 갑자기 등장한 일리나를 보고 신음했다. 두 사람을 추궁하는 데 정신이 팔려 타인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은 변명이고, 진짜는 향수를 뿌린 것처럼 우아함을 온몸에 휘감은 일리나가 평소 그가 꿈꾸던 이상형이었기 때문이다.
“황색 기사단의 기사 데이노스 하벤입니다. 레이디는 누구시오?”
마른침을 삼킨 데이노스가 어깨를 펴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했다. 화원에 와서 흐트러진 동료 기사들을 탓한 그이지만 정작 자신의 이상형을 앞에 두자 본능이 먼저 반응해 버린 것이다.
“저는 쉴라 경의 손님이에요. 동시에 이 두 수련 기사의 선생님이자 보호자죠.”
그와 동시에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엄마를 찾는 소녀처럼 일리나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의 곁으로 다가갔다.
일리나, 보호자. 손님. 쉴라. 선생님. 여러 단어가 뒤섞였다. 케마란과 네리베르가 누구의 수업을 듣고 있더라……………
뜨뜻해지던 가슴과 반대로 등허리에 서늘하고도 기분 나쁜 예감이 기어올랐다.
“은색 기사단의 기사가 아니라 외부인이시군요. 혹시 이드라는 분의………….”
“아내예요.”
까득!
일리나의 답에 데이노스가 이빨을 갈았다.
막 불꽃이 튀려던 연정에 찬물이 끼얹어졌다. 작은 불똥 몇 개 튕긴 대가로 대야를 가득 채운 얼음물을 뒤집어쓴 것 같다. 불이 제대로 붙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배신당한 느낌에 기분이 나빴다.
그렇지 않아도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자처하는 이드에게 가지고 있던 반감에 갑자기 생긴 질투심이 더해졌다. 거기에 위험한 상황에 수련 기사와 외부인을 들였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 한데 합쳐지며 시뻘겋게 불타올랐다.
“은색 기사단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이 중요한 시점에 외부인을 들이다니! 더구나 은색 기사단을 돕기 위해 지원을 온 우리에게도 알리지 않다니. 이것은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오! 하여간 여자들이 문제야. 이래서 안 돼!”
이성적으로 타오른 처음과 달리 감성에 뜨거워진 데이노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물론 그냥 목소리만 컸으면 문제가 없지만, 흥분한 나머지 평소 빌런이 쓰던 말버릇이 딸려 나온 게 문제였다.
여자들이 문제라고 소리치다니! 다른 곳도 아니고 은색 기사단의 둥지인 화원에서!
“호오! 그 말 진심인가? 여자들이 문제라니. 도대체 어떤 어마어마한 문제가 있어서 우리 모두를 걸고넘어지는 걸까? 검증 없이 절대 그냥 넘어갈 수 없겠는데?”
사아아아
차분하지만 서늘한 기괴한 분위기가 주변을 가득 메웠다.
비웃음과 짜증이 묻은 목소리와 함께 스폴이 나타났다. 그녀뿐 아니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수십 명의 여기사들이 데이노스를 노려보았다.
아무리 여기사를 깔보는 자라도 지금까지 화원에 방문한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할 수 없었던 말을 당당히 소리치다니!
“네가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편하게 죽는 방법도 많은데 왜 하필 여기서 이러니? 짜증 나게!”
수십 명의 뜻이 합쳐져서 그런가. 분명 기사들은 입도 열지 않았건만, 시선이 소리가 되어 귀에 들리는 것 같다. 데이노스는 지금이 자신의 인생 최대의 위기라고 생각했다. 이런 위기는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으리라! 지금까지 치른 가장 치열한 전투에서 느낀 압박감보다 열한 배 더 강한 압박감이 느껴졌다.
진짜 목이 떨어지지는 않아도 사회적으로 매장이다.
실력보다 더 강력한 인맥과 지지도를 가진 은색 기사단에게 매장당하는 순간 여자와의 인연은 포기해야 한다. 연애는 물론이고 결혼도 끝이다. 대를 이을 수도 없다.
은색 기사단이 땅을 파고 묻어 버린 남자를 돌아볼 여자는 제국에 없다. 은색 기사단은 모든 여성의 우상이니까! “아……………버지. 어머…………니……………
검에 찔리고도 찾은 적 없는 부모님이 저절로 떠올랐다. 데이노스는 두 분의 모습에 겨우 정신을 붙잡았다. 여기서 삐끗하는 순간 정말 자신은 끝장이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남자를 움직이는 것은 여자다. 여기서 말을 잘못하면 여성뿐 아니라 제국의 모든 기사들에게 나라는 존재는 끝이다.’
쩌저적—
짧은 시간 바짝 말라붙어 있던 입이 떨어지며 살이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피 나는 거 아닐까?
“크흠, 스, 스폴 겨허어엉………….”
너무 긴장했나 보다. 겨우 떨어진 입술에서 스폴의 이름이 나왔지만 발음이 새고 목소리가 튀었다.
“뭐야! 여자인 내가 문제라서 내 이름도 제대로 부르지 못하겠다는 건가?”
“커험! 실례했습니다. 존경하는 스폴 수석 기사를 앞에 두고 긴장한 때문입니다.”
“존경한다고? 아까하곤 말이 틀리네? 나도 여자인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어느 누가 위대한 기사와 은색 기사단을 존경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언급했던 여자들이란 어디까지나 복수의 특정 여성을 가리킨 것일 뿐입니다. 지금 스폴 경께서 오해하고 있는 그런 뜻은 절대 없다고 생각합니다!”
“호~ 그렇단 말이지?”
“네, 그렇습니다.”
“진심으로?”
재차 묻는 스폴의 표정이 야릇하다. 순간 움찔할 뻔했지만 데이노스는 곧장 대답했다.
“저는 은색 기사단을 존경합니다!”
그도 안다. 스스로의 태도가 비굴하고 멍청하다는 것. 그러나 자신은 약하다. 생각대로 세상을 살아가려면 빌런 단장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그때까지는 참아야 했다. 그게 사회생활이다. 무엇보다 그는 평생을 홀로 늙고 싶지 않았다.
언제고 빌런과 같은 실력자가 되겠지만, 그때까지 연애도 결혼도 못 한다면 늙어 실력자가 되어도 무슨 소용인가.
필사적인 얼굴로 대답하는 데이노스의 모습을 살피던 스폴이 김빠진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롭다.
어떻게 둘러대도 이미 알아 버린 그의 속내가 감추어지는 것은 아니다. 여기사에 대한 그의 차별을 알아 버렸다.
‘넌 이제 끝났어, 멍청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