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54화
691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당황한 벤자작이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후작의 눈치를 살핀 그의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반대로 후작은 무표정으로 침묵했다.
직전까지 대륙에서 가장 마음씨 곱고 인자한 귀족인 것처럼, 어떠한 무례한 발언에도 싫은 기색 하나 보이지 않던 후작은 심유한 눈으로 이드를 노려보았다.
‘무슨 속셈이냐.’
그와 함께 후작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것이 본모습이라는 듯 고위 귀족 특유의 오만하고 고고한 위엄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급변한 후작의 기색을 알아챈 벤 자작이 급히 자리에 앉아 바짝 웅크렸다. 그리고는 이드가 더 이상 이상한 헛소리를 하지 않도록 열심히 눈치를 주었다.
하지만 이드는 그런 벤 자작의 노력을 웃어넘겼다.
후작의 위엄? 이드에게는 산들바람보다 가치 없게 느껴졌다. 물리력이라는 실체적인 힘을 가지지 못한 위엄은 결국 같은 카테고리 안에서나 통용되는 것이다.
한 나라의 장관도 여행객 신분으로 타국에 가면 그저 나이 많은 노인에 지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잠시 노려보던 두 사람이었지만 결국 먼저 말을 꺼낸 것은 후작이었다.
이드 앞에서 자신의 권위가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빠르게 이해한 그였기에 취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지금 경은 이 검증을 받지 않겠다는 것이오?”
“꼭 받을 필요가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아 다르고 어 다르다지만, 결국 같은 의미가 아닌가!
앞서의 무례했던 말과는 질적으로 다른 발언에 후작이 침중하게 물었다.
“내 방문은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 안에는 황제 폐하의 뜻이 있음을 알고 있소?”
“충분히 이해하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황실의 일원으로 들인다는 결정을 황실의 사람도 아닌 이가 함부로 할 수는 없을 테니까요.”
후작의 눈썹이 꿈틀했다.
황제의 뜻을 이해하고도 거부했다고? 이것은 즉 황제를 알현한 자리에서도 이렇게 태도를 취했을 게 아닌가.
꼴깍.
‘미쳤구나, 미쳤어! 이 인간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감히 누구 앞이라고!’
벤 자작은 미친 듯이 펄떡이는 심장에 가슴이 아파왔다. 후작의 초청이라는 말에도 즉답하지 않는 모습을 보고 황궁에 있는 후작과 황제 폐하 앞에서도 그럴 수 있는지 두고 보자는 마음이었지만, 설마 정말 저런 모습을 보일 줄이야!
그는 후작의 분노가 자신에게 튀지 않기를 간절히 빌었다.
하지만 벤 자작의 걱정과 달리 후작은 곧장 분노를 내보이지 않았다. 대신 이전의 온화한 모습과는 달리 제국을 움직이는 권력자로서의 위엄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경의 말은 당장 목이 떨어져도 모자라지 않은 무엄한 말이라는 것을 아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할 말은 해야지요. 그나마 황제 폐하 앞이 아니라는 것이 다행이지 않습니까?”
이드가 느긋한 표정으로 말했다.
실로 어이없지만 후작은 다행이라는 말이 자신과 황제를 향한 말 같았다. 물론 알현한 자리에서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황제의 위엄을 해하긴 하겠지만, 정작 목이 떨어지는 것은 이드일 텐데 왜 자신이 다행이라 느낀 것일까?
비이성적인 느낌을 무시한 후작이 말했다.
“그래서, 경이 그런 말을 한 이유는 무엇이오?”
“제가 검증을 통해 인정을 받아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몰라서 묻는 것이오? 당연히 진정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가려 제국이 후예를…..”
정말 모르는 것이라면 뼛속에 박힐 정도로 설명해 주겠다는 기세로 후작이 입을 열자 이드가 손을 들어 막았다.
“그것은 제국이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검증해야 하는 이유이지, 제가 인정을 받을 이유는 아닙니다.”
이드에 의해서 말이 끊어졌지만 후작은 불만보다는 난감한 침묵에 빠졌다.
제국이 아닌 이드가 굳이 검증을 거쳐서 인정을 받아야 할 이유? 없다. 아니, 모른다는 것이 정확했다.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색다른 시각을 강요하는 질문에 후작은 적잖이 당황하고 말았다.
당연했다. 그런 쪽으로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공을 세웠지만 포상을 하사받지 못하고 사라진 마인드 마스터에 대한 공은 그대로 남아 후예에게 이어졌다. 흐지부지될 수도 있었지만, 당시 황제가 이를 단호히 거부하고 조치한 까닭이었다.
그 포상을 노리고 수많은 가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나타났다. 결국 검증을 통해 가짜로 밝혀져 모조리 목이 잘렸지만 말이다.
물론 그 외에도 이유는 있다. 가짜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일을 막는다는 것도 그 이유의 일부이다. 그러나 이것도 이드의 질문에 대한 답이 되지는 않는다. 지금 이드가 묻고 있는 것은 그가 검증을 받을 이유였다.
후작은 이드가 검증을 거부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분명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에게 약속된 포상 이외에 원하는 것이 있으리라.
“그렇다면 경이 검증을 받으려 한 이유는 무엇이오? 검증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면 초청에 응하지 않았을 것이 아니오?”
“옳습니다. 제가 원하는 바가 있었습니다. 후작께서는 제가 소드 팰러스에 든 이유를 아십니까?”
이드의 질문에 후작의 눈동자가 살짝 떨렸다.
“……검후님 때문이지.”
“그렇습니다. 실종된 검후님을 대신하여 소드 팰러스를 안정시킬 자. 절 찾아온 에단이 그리 말했지요. 하지만 저는 소드 팰러스보다 검후님을 찾는 일에 집중했습니다. 삼검왕이 요구한 일라이져 이상의 증거를 보이지 않은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었습니다. 증거를 보일 경우 소드 팰러스에 묶이게 되니까요. 물론, 검후님을 찾는 것에 대한 간절함보다는 제 것을 탐하는 이들의 욕심과 욕망이 보기 싫어서이기도 했지요.”
“그러나 증명하지 못함으로 인해 오히려 소드 팰러스에 묶이지 않았소?”
“대신 그로 인해 소드 팰러스 안에 남은 검후님의 흔적을 충분히 살필 수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제가 정말 소드 팰러스에 묶여 있었겠습니까?”
“허허.”
“그런 차에 마침 벤 자작님의 방문을 받았습니다. 차라리 잘되었다 생각했지요. 마침 검후님을 찾기 위해 외부로 나갈 필요가 있었으니까요. 그리고 황실의 어른을 찾는 일에 황제 폐하의 도움을 받을 수 있기를 기도했고요.”
후작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렇다면 오히려 검증을 통해 인정을 받고 황제 폐하께 고하는 것이 적절하지 않겠소?”
이드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럴까 했습니다. 하나 후작님과 대화를 하니 그러기 어려워 보이더군요. 중간중간 보여 주신 모습과 그 사본을 통해서 느꼈지요. 불민한 일을 막기 위해서라지만, 제가 구술한 것을 적어 황궁에서 확인하면 될 일에 굳이 필요한 물건은 아니라 판단되더군요.”
움찔.
처음으로 후작의 얼굴에 숨기지 못한 당혹감이 떠올랐다.
이드는 자신의 짐작이 정확했음을 확신하고 말했다.
“그래서 저는 그 사본이 검증을 위한 것이 아니라, 가짜를 만들기 위한 물건이 아닐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황궁에서 공식적으로 검증할 때를 위해 가짜에게 외우게 만들 물건 말입니다. 물론, 이것은 후작님이 판단하시기에 제가 가짜로 보였을 때 사용되었겠지요. 그렇게 가짜를 만들면서까지 황제 폐하께서 하려는 일이, 과연 제 부탁으로 바뀔 수 있겠습니까?”
마치 확신한 듯한 이드의 말에 후작은 반박하지 않았다. 이드의 말이 사실임을 증명할 수도 없지만,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할 수도 없다. 무엇보다 이드의 말처럼 사본을 가져오는 것보다 이드가 알고 있는 난화십이식을 적은 뒤 가지고 돌아가 확인하는 것이 가장 안전한 방법이라는 것은 반론이 불가능한 일.
침묵하던 후작은 한쪽에 굳어 있는 벤 자작을 밖으로 내보냈다.
툭!
벤 자작이 나가고 문을 닫자 후작은 소중히 무릎에 올리고 있던 사본을 탁자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경의 말이 사실은 아니지만, 그런 오해를 할 수 있다는 부분은 인정하오. 그럼 그 오해를 사실로 가정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해 볼까.”
이드는 후작의 눈동자가 차갑게 번뜩이는 모습을 확인하고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두 사람은 냉정하게 서로 원하는 것과 양보할 수 있는 일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야기는 일방적으로 이드에게 유리한 쪽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후작이 원하는 것은 황제의 신하로서 이드의 모든 것이었고, 이드가 원하는 것은 토벌의 참가와 자유였을 뿐이니까.
처음부터 후작의 패배가 확정된 논의였다. 하지만 이드가 황제를 통해 검증을 받는 것만으로도 의미는 있는 일. 후작은 최소한의 선에서 만족했다.
‘어차피 이후 그를 황제 폐하 아래 둘 기회는 많을 것이다.’
아쉽기만 한 논의를 마친 후작은 다시 인자한 귀족의 얼굴을 했다.
과연 냉혹한 얼굴이 진짜일까, 인자한 얼굴이 진짜일까.
이드는 황궁에서 마주하게 될 후작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이드는 후작과 벤 자작을 저택의 입구까지 배웅하고는 마차가 떠나는 것을 바라보았다.
“아~ 힘들지만 만족스런 만남이었네요.”
“고생하셨습니다. 목욕물을 준비할까요?”
배웅에 따라 나온 집사가 물었다. 후작을 상대로 진땀을 흘렸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럴 필요는 없어요. 밤늦게까지 고생했습니다. 그만 쉬세요. 저도 쉬어야겠습니다. 내일은 아마 바쁠 것 같네요.”
저택으로 들어가는 이드의 말에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황궁 방문에 빈틈없도록 준비하겠습니다.”
“……”
황궁을 나설 때와 달리 저택을 떠난 마차 안에서는 괴로운 침묵이 가득했다.
특히 가짜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를 만들려 했을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벤 자작의 안색은 꺼멓게 죽어 있었다. 진실인지 아닌지에 관계없이, 이후 논란이 될 수 있는 일을 알았다는 것은 그로서 매우 부담이 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오늘 일은 잊으시오. 수일간 휴가를 줄 테니 저택에서 쉬는 것도 좋겠지.”
초조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벤 자작은 갑자기 들려온 후작의 말에 깊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후작 각하!”
초조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던 벤 자작은 갑자기 들려온 후작의 말에 깊이 고개를 숙였다. 마차 안에는 다시 말발굽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려왔다.
그러기를 얼마일까 문득 후작이 눈을 감고 말했다.
“아무래도 그가 마인드 마스터를 닮아 바람 같다는 자작의 평가는 틀린 것 같지 않소?”
떠나가는 마차와 저택 안으로 사라지는 이드를 바라보던 사무엘이 창문을 닫았다.
그의 반대편에는 이그렌이 앉아 사무엘을 바라보고 있었다.
“레오날도 후작이라. 거물의 방문이야. 아쉽군. 후작과 인사를 나눌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렇지 않나?”
“…..”
사무엘은 대답이 없는 이그렌의 모습에 크게 상관치 않고 말했다.
“역시 큰 인물 곁에 있으니 대단한 분들을 뵐 기회가 많아. 아주 좋아. 바람직한 일이야.”
그는 대답 없는 이그렌을 향해 말하고는 고급스럽게 치장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시온 자작을 내성으로 모셨네.”
치익-
그의 말에 흠칫한 이그렌은 사무엘이 물고 있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작이 머물기에는 별채가 초라해 보여서 말이야.”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사무엘이 말했다.
그러나 자작을 배려했다 말하는 사무엘의 눈은 차갑게 번들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