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269화
706화
기사가 질투와 의심에 찬 눈을 하고, 초인이 웃으며 반기는 상황.
검증 당일 밤을 기점으로 뒤집어져 버린 모습. 그러나 이런 상황은 황제도, 레오날도 후작도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드가 소드 팰러스와 삼검왕을 대신해서 기사들의 지지를 황궁으로 돌리는 역할을 해 주길 바랐다. 또 그것을 위해 여러 가지를 준비했고, 이드의 조건을 수락했다.
그런데 검증을 마친 당일에 그 모든 노력 중 절반이 날아가 버렸다.
그것도 이드가 등장하기 전까지 애지중지 잘 돌보던 게일이라는 남자가 언급한 소문에 의해서 말이다.
이 예상치 못한 사태에 황제와 레오날도 후작이 마주 앉아 고심하고 있었다. 도대체 이 사태를 수습하고 원래 의도대로 상황을 돌리려면 얼마나
애를 써야 할까.
“빌어먹을 놈. 내 뜻을 알 만한 놈이 일을 이리 망칠 줄이야.”
“폐하의 뜻을 알기 때문에 나선 것일 테지요.”
황제의 심기를 살핀 레오날도 후작이 말했다.
“내가 그리 아껴 주었거늘………….”
“폐하의 그러한 총애가 자신을 떠날까 두려웠기 때문에 더욱 이리했을 것입니다. 특히, 밀리아리아 황녀가 검증에 직접 나타나 더욱 그러했겠지요.” 이드가 나타나기 전, 황제는 검후에 이어 소드 팰러스에 대한 지배력을 유지하기 위해 다음 대 후계자로 주목받고 있던 게일과 황실을 혼인으로 이으려 했다. 그 대상이 바로 첫째 황녀 밀리아리아다.
그러나 이드의 등장 후 황실에서 게일의 지분과 함께 밀리아리아와의 관계도 흔들리고 말았다. 이드를 처음 만난 밤 후작이 꺼내 놓은 이드의 혼인 대상 역시 밀리아리아였다.
황녀에게는 어떨지 모르지만 본래 황녀나 공주의 역할이란 그런 것이다. 아니, 황녀뿐 아니라 황태자라 해도 마찬가지다. 권력자의 결혼이란
그러한 것이니까.
철저한 정치 논리와 실익에 따른 결혼. 마음에 드는 여자, 사랑에 빠진 상대를 찾는 것은 그 후다. 물론 황녀의 경우 그것도 어렵지만.
당연히 이드에게 건넨 조건이 외부로 밝혀진 바는 없다. 게일은 물론이고 밀리아리아 본인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밀리아리아 황녀가 이번 검증을 진행함으로써 그럴 가능성이 생겼음을 알게 되었다. 게일에게는 황녀의 존재가 지금까지 그가 세상에서 쌓아 올린 모든 것의 상징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레오날도 후작은 그렇게 판단했다.
“야망은 있어도 멍청해 보이지는 않았거늘. 후작, 내가 잘못 보았던가?”
황제가 혀를 차며 말했다.
“잘못 보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어린 자는 아직 경험이 부족하지요. 때때로 질투에 눈이 멀어 실수하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 실수 때문에 내 본래의 뜻이 왜곡되지 않았나.”
“질투에 눈이 멀어 경외해야 할 폐하의 심기를 어지럽히다니, 그의 큰 실수지요.”
황제는 후작의 말에 심유한 눈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잠시 침묵하다 말했다.
“그렇지. 가장 큰 실수지. 온전히 내 사람이 되기를 원했거늘,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야.”
본래 황제는 게일을 통해 소드 팰러스를 품에 두려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게일이 온전히 황제의 사람이 되는 게 먼저다.
하지만 아직 게일은 완벽한 자신의 사람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같은 일을 벌였다. 만약 온전히 자신의 사람이었다면 자신을 믿고 기다렸으리라. 황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반면 레오날도 후작은 게일의 운이 안타까웠다.
어차피 이드는 혼인을 거절했다. 무엇보다 이런저런 조건을 걸어 황제와의 거리를 분명히 두었다. 현재로서는 이드를 온전히 품에 안았다고 할 수 없었다. 이후로도 꾸준히 이드를 품에 두기 위해 노력하겠지만, 좌우간 지금은 그랬다.
이드가 기사들의 지지를 모으는 중심점이 될 수는 있어도, 소드 팰러스를 황제의 손에 넣기 위해서는 게일이 더 나은 상황이었다.
만약 이번 일만 없었다면, 황제는 게일이 섭섭해하지 않을 정도의 의사를 표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먼저 일을 터트려 버렸다. 이번 일로 게일은 황제의 심중에서 이드보다 더 멀어져 버렸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이어진 황제의 말은 레오날도 후작의 생각을 확신으로 만들었다.
“오늘부로 게일 경의 내궁 출입을 불허하겠네.”
그 말은 즉, 밀리아리아와 편히 만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다. 생각보다는 약한 징계였다.
‘아닌가. 뜨겁게 불타는 청춘에게는 가혹한 벌일지도 모르겠군.’
그게 아니라면, 아직은 황제가 게일을 버릴 생각이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었다. 레오날도 후작이 황제의 명을 받들었다.
“명대로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게일 경이 친 사고의 수습도 잘해 두게. 파티 전까지 가능하겠나?”
황제의 물음에 레오날도 후작이 머리를 굴린 후 대답했다.
“파티가 끝날 때까지는 수습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좋군. 이번에도 잘 처리해 주게.”
“맡겨 주십시오.”
그 말에 황제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보고 레오날도 후작은 황제의 집무실을 나섰다.
방을 나서자마자 가장 먼저 게일을 부르리라 결심했다. 황제가 내린 처벌이 무엇인지 전하고, 사건을 벌인 이유에 대해 추궁할 것이다. 결코 개인적인 감정은 아니었다.
“잘도 내 일을 늘려 주었겠다.”
황제의 심기까지 어지럽힌 이 사건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소란스러웠지만, 정작 소문의 주인공은 그 소문을 저녁이 되어서 접할 수 있었다. 저녁 시간이 되어 돌아온 사무엘이 눈치를 보며 게일의 소문에 대해 이야기하였기 때문이다. 소문은 그 주인이 가장 늦게 듣는다는 말이 틀리지 않았다.
[어쩐지 오후부터 찾아오는 사람이 조금 줄었다 했더니, 그거 때문이었구나.]
짝!
라미아가 손뼉을 쳤다. 풀리지 않던 문제의 답을 찾았다는 표정이다.
그 모양을 멀뚱히 바라보던 이그렌이 말했다.
“그런 소문에 비하면 사람이 많이 줄어든 건 아니지 않나요?”
“소문 따위로 날 포기하기에는 너무 가볍지. 그런 것에 흔들리는 건 바보들뿐이야.”
초청장을 날리려다 취소한 귀족들이 졸지에 바보가 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초청장을 보냈던 자들에게는 소문이 사실이라고 해도 바뀌는 것은 없었다. 어쨌든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인 것도 사실이고, 삼검왕을 꺾은 것도 사실이다. 검증을 통과한 이후 황제의 이름으로 후작의 대우를 받고 있기도 하다.
이 정도라면 이드가 정말 초인기를 각성한 초인이라고 해도 귀족들이 초청장을 거둘 이유가 없다. 그들에게는 기사냐 초인이냐의 문제보다 권력과 작위의 힘이 더 중요했다.
사무엘은 반사적으로 일리나스 출신의 귀족 중 몇 명이나 바보가 되었을까를 생각하다 말했다.
“그런데 이 소문은 막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째서요?”
이유를 모르겠다는 이드의 말에 오히려 사무엘이 당황해 외쳤다.
“당연히 후작님의 명성에 해가 되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감히 마인드 마스터의 정당한 후예로 인정받은 후작님의 실력과 정체성에 대해 의심을 품고 있으니,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드의 가치에 따라 일리나스에서 바라보는 자신의 가치가 달라지기 때문인지, 사무엘은 마치 자신이 소문의 주인공이기라도 한 것처럼 열을
올렸다.
이드로서는 퍽 재미있는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당연한 일이 아니지요, 백작.”
“예?”
태연한 이드의 대답에 사무엘의 입이 벌어졌다.
“백작은 그 소문이 사실이라고 생각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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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당연히 거짓이지요.”
혹시 자신이 소문을 의심해서 이런다고 생각할까 싶은 사무엘이 다급하게 대답했다.
“그렇지요. 그럼 돌기 시작한 지 이제 하루도 되지 않은 거짓 소문에 후작이 안절부절못해야겠습니까?”
“하지만 귀족들과 기사, 초인들에게 언급되는 소문은 단순한 소문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상위 계급 사이에서 언급되는 소문은 거짓이 진실이 될 수도 있다. 정치란 힘에 의해서.
그러나 이드에게는 정치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든든한 배경이 있었다.
“그건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 문제는 저보다 더 제 이름이 필요하신 분들이 처리해 주실 테니까요.”
“후작님보다 더 후작님의 이름값이 필요한 분이라면…….”
“황제 폐하와 레오날도 후작 말입니다.”
“아…… 하…… 하…….”
고개를 갸웃하던 사무엘은 이어진 대답에 어색하게 웃었다. 설마 자신의 문제를 제국의 최고 권력자에게 처리하라며 던져두겠다고 할 줄이야. ‘이것이 마인드 마스터라는 이름이 가진 힘인가.’
사무엘은 그 강대한 명성에 오스스 소름이 돋았다.
과연 이런 이드의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당장 이드가 사무엘로부터 소문을 접한 다음 날부터 수도를 떠들썩하게 하던 소문은 평민들 사이에서 퍼지지 못하고 진정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거짓으로 판명되어 해결된 것이 아니라, 눈치를 보며 쉬쉬하고 있는 형태였다.
그러나 입심을 받지 못하는 여타 소문처럼 금방 생명이 다해 사라지지는 않았다.
유난스럽게도 기사들과 초인들이 미련을 놓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게일이 레오날도 후작에게 호출을 당한 후, 각 기사단의 단장이 헛소문에 주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기사들은 그것을 이드에 대한 황궁의 과보호라고 보았다.
그러나 황궁의 이와 같은 태도는 특별하지만 특이한 것은 아니다. 이전 게일도 지금 못지않게 황궁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위와 상관없이 열등감과 질투 때문에라도, 소문을 믿고 싶은 기사들에게 그 모든 것이 게일 때와 달리 부당해 보이고, 불쾌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기사들은 게일이 그저 소문을 언급했을 뿐인데도 레오날도 후작에게 추궁을 받았다고 여겼다.
그들의 모습에 폴럼은 전력을 다해 비웃어 주었다.
“뇌도 근육으로 만들어진 새끼들. 그걸 말이라고 하냐. 대전 밖에서 새 후작을 뒤에서 깠는데 추궁으로 끝난 게 오히려 이상한 거지. 그나저나 게일 이 자식은 새 후작이 나타나면서 뒤로 밀려나나 했더니, 추궁으로 끝난 걸 보면 어부바한 도련님인 건 여전한 모양이네. 사고를 쳐도 처벌이 달라.”
“그래서, 부럽니?”
“어. 개부러워! 나는 사고 칠 때마다 단장님한테 죽도록 얻어맞았다고?”
절절히 묻어나는 폴럼의 진심 어린 말에 에나가 긴 한숨을 쉬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넌 참 좋겠다. 생각이 단순해서.”
물론 다음 순간 폴럼이 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는 사이 이틀이 순식간에 지나 버렸다.
소문에 휩쓸린 사람도, 소문을 잡고자 하는 사람도 서로 바쁜 시간이었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도 황궁에서는 차근차근 파티를 준비했다. 제국의 귀족들에게 초대장이 날아갔고, 파티에 쓰일 갖가지 물건들이 황궁으로 쓸려 들어갔다.
말 그대로 쓸려 들어갔다. 수도의 고급 재료점이 순식간에 텅 비어 버렸으니 말이다.
이드도 파티를 준비했다. 정확히는 집사가 바쁘게 준비했다.
옷은 검증 때 입었던 장포를 그대로 쓰기로 했다.
“오랜만에 꺼내 입었더니 기분이 새롭더라고.”
흡족한 미소를 더한 이드의 말에, 라미아와 집사도 다른 옷을 권하지 않았다. 대신 이드가 사용할 장신구는 따로 준비되었다.
보물과 보석이야 아공간에 쌓여 있지만, 유행이라는 것이 있고 트렌드라는 것이 있다.
라미아는 집사를 불러 몇 가지 마음에 드는 장신구를 꺼내 보이며 제국 유행에 맞는 물건을 골라냈다.
어차피 유행이란 돌고 도는 것. 현재 제국의 유행도 결국 과거에 유행했던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공간에 있던 보석들은 그 가치도 가치지만, 대부분이 드워프의 손을 탄 것이었다. 몇 세대의 유행은 가볍게 씹어 먹을 수 있는 품격이 있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따지면 아무거나 써도 상관이 없지만, 될 수 있으면 에드를 가장 멋지게 보이고 싶은 라미아의 마음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그러는 한편 라미아는 이그렌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주로 집사를 통해 준비한 것이지만 이그렌은 매우 고마워했다.
그리고 파티 당일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