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33화
470화
이드는 이마를 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자유를 위한 작은 선물이 오히려 그녀를 억압하는 족쇄가 될 줄은 몰랐고, 스스로도 그레센을 그렇게 오랫동안 떠나 있을 거라고 생각지 못했던 탓이었다. 이드는 갑자기 시르피를 보기가 미안해졌다. 그녀에게 큰 잘못을 한 것이다.
사실 이드의 선물이 꼭 족쇄라고만은 할 수 없었다.
시르피와 결혼한 혼백작가는 그 힘이 있었기에 후작의 작위를 받았고, 황궁을 제외하고 가장 강력하고 많은 기사 전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것은 그대로 시르피의 힘이 되었다. 무엇보다 글로 전할 수 없는 가르침을 받기 위해 그녀를 찾는 기사들에 의해서 그녀는 기사 여황으로 추앙받았다. 그녀는 그녀에게서 시작된 가르침과 함께 대륙에서 손꼽히는 강자로서 조용히 알려졌다.
그러나 그녀의 삶이 항상 풍요롭고 명예롭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나밖에 없던 아들을 몬스터에게 잃고, 막 오십에 접어들 무렵 남편 역시 잃어 혼자가 되어 버렸던 것이다. 무엇보다 그녀의 높은 경지는 그녀를 오랜 세월 홀로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혼자가 된 시르피는 무공에 깊이 빠졌다.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곳이 무공이기 때문이었다.
별다른 일만 없다면 그녀는 그대로 검과 시간에 묻혀 잊혀 갈 것만 같았다. 시르피의 몸도 세월을 따라 늙어 가고 있었던 탓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그녀가 바라는 바였을지도 몰랐다. 아들과 남편, 그리고 핏줄이었던 황제마저 이 세상을 떠난 후였기 때문이다.
그녀는 하늘이 자신을 그들의 곁으로 데려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행운인지 불행인지 그녀의 무공에 대한 재능이 너무 컸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어느 순간 위대한 한 걸음을 내딛고 다시 젊음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야기 속 초인들이 겪는다는 바디 체인지가 일어난 것이었다.
그녀의 주변에 머무르던 기사들은 열광했다. 하지만 그저 먼저 떠난 가족들을 만날 때를 기다리던 그녀에게는 불행이지 않았을까.
그렇게 절대자의 경지에 들어서자 그녀의 주변으로 검을 배우기 위해 모였던 기사들이 하나둘 머무르기 시작했다. 그들의 숫자는 빠르게 늘어났다. 그러나 그들은 그저 시르피를 존경하고, 그녀에게서 배움을 얻고 그녀와 함께 수련하고자 모인 기사들이기 때문에 세력화되지는 않았다. 대신 그들은 자신들이 머물고 있는 성을 검성, 소드 팰러스라고 부르며 서로에 대한 친근감을 표시했다. 공식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아닌 그들만이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그 이름이 공식 석상에서 거론되게 되었다.
바로 초인에 의해서였다.
“라미아, 초인이 뭘까.”
[글쎄요. 신들의 장난감이나 실수 같은 건 아닐까요?]
“아, 그거 그럴듯하다.”
신전에서는 초인의 존재에 대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초인의 등장 시기는 정확하지 않았다. 다만 아나크렌의 서류에서 그 이름이 공식적으로 등장한 것은 대륙력 5649년으로, 이드가 그레센에서 사라지고 25년이 지난 후였다.
이들이 처음 등장하고 세상은 많이 놀랐다. 반응 또한 뜨거웠다. 덕분에 초기에 등장한 많은 수의 초인들은 사람들의 호기심에 의해서 잔혹하게 죽어 갔다. 그들이 능력을 가진 이유를 알고 싶어 하고, 자신들이 그 능력을 가지기를 원하는 귀족과 마법사에 의해서였다.
이때의 기록을 보고 에단은 이 시기의 마법사들은 모두 흑마법사 혹은 네크로맨서 같았다고 말했다.
그렇게 불릴 정도로 그들은 수없이 많은 초인들의 배를 갈랐고, 그로 인해서 지금까지도 마법사와 초인은 원수지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덕분에 지금도 어떤 마법사들이 배를 가를 수 있는 초인들을 찾아 떠돌아다닌다는 말이 괴담처럼 퍼져 있다고 한다.
이런 괴담이 도는 이유는 당시 많은 초인들이 죽었음에도 마법사들이 알아낸 것이 거의 없기 때문이었다. 그들이 알아낸 것이라고는 초인들이 가진 힘이 정령이 가진 힘과 몇몇 유사한 점이 있다는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 변화가 일어나게 된 계기는 마스 왕국과의 전쟁이었다.
그 전쟁에서 마스는 초인들을 모아 기사단처럼 사용했는데, 처음 접하는 새로운 형태의 강력한 힘에 아나크렌은 굉장한 희생을 치르는 것은 물론, 상당 기간 고전해야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아나크렌 역시 초인들을 실험실의 쥐가 아닌 새로운 힘의 기준으로서 인정하고 그들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기 시작했다.
마법사들이 초인을 연구하는 일도 당연히 금지되었다.
이때부터 이들은 초인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그들은 그저 특이한 능력을 가진 실험체일 뿐이었다.
초인의 가장 뛰어난 점은 일단 각성만 하면 바로 능력의 사용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것은 확보만 되면 즉시 전력(戰力)으로 사용이 가능하다는 말이다. 기사나 마법사처럼 그들을 훈련시키고 가르치는 데 따로 비용과 시간이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은 예산 역시 절감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자연히 나라에서는 더욱 초인의 확보에 열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초인으로 확인만 되면 나이와 출신에 상관없이 기사와 같은 계급으로 인정받으며 나라에서 데려갔다. 그것은 개인을 포함한 한 가족의 성공을 보장하는 복권과도 같은 것이었다.
강력한 힘이 빠르게 모여들자 그들은 순식간에 하나의 세력으로 변신했다. 핵심 전력으로 취급되는 마법사와 기사의 뒤를 잇는 세 번째 힘의 축이 탄생한 것이다.
그것은 아나크렌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거의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일이었다. 그 세력이 큰 가 작은가의 차이만이 있을 뿐이었다.
그들은 거칠고 과감하게 자신들의 영역과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이들의 등장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은 것은 기사들이었다. 마법사들과는 나라에서 서로 관계하지 못하게 막고 있었기 때문에 오히려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기사들이었다.
겁 없이 세력을 키워나가는 초인들에 비해서 기사들은 그들을 이끌고 중심을 잡을 인물이 없어 헤매고만 있었다. 무공으로 인해 실력이 비슷하게 성장하고 있어서 생긴 문제였다. 모든 기사들을 납득시킬 수 있을 정도로 월등한 실력을 가진 인물이 없었던 것이다.
이 상황의 해결책으로 나온 것이 바로 시르피였다. 시르피는 여러 기사들의 스승이라고 할 수 있었고, 또 황가의 사람이었다. 무엇보다 황실의 혈통이지만 여성이면서 나이가 있기 때문에 황실에 우환이 될 수도 없었다.
기사들은 그녀를 중심으로 뭉쳤다.
언제부턴가 소드 팰러스라는 이름이 사람들 입에 공공연히 오르내리고, 수백의 기사들이 그녀의 성에 머무르기 시작했다.
황제는 기사들이 진행하는 일을 묵묵히 지지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귀족과 황실의 ‘힘의 근간’은 기사이기 때문이었다. 기사들의 기사도와 맹목적인 충성은 귀족들에게 큰 힘이었다. 절대 그들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빠르게 세력을 불려 가는 초인들도 한번 기를 눌러 줄 필요가 있었다. 무엇보다 기사들의 중심에 자신의 고모님이 서 있었다. 그녀는 황위를 노릴 만한 이유가 없기 때문에 황제 입장에서는 안전한 인물로 평가되는 사람이었다. 선대 황제가 생전에 항상 미안해하고 안타까워했던 사람인 동시에 가장 믿었던 사람이기도 했다.
황제는 그 믿음을 근거로 그녀를 태대공녀라 칭하고 소드 펠러스라는 성을 그녀에게 하사했다. 또 그녀에게 기사들의 양성을 맡겼다. 황제의 허락을 받은 정식 기관이 된 것이었다.
기사들의 생각대로 소드 팰러스는 기사들의 온전한 지지를 받으며 그들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역할을 해 주었다. 크지도 않은 역할이었지만 그것이 큰 힘이 되어 초인들을 견제하는 핵심이 되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외부의 일에 크게 관심을 보이지 않던 시르피가 황실의 일에 참여하게 되면서 소드 팰러스는 황실을 수호하는 비밀 단체의 성격까지 띠게 되었다.
세력 간의 균형이 다시 안정을 찾는 듯했다. 하지만 그런 모습이 영원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흐르자 초인들은 점차 오만해졌고, 그 오만은 폭력과 방종을 낳았다. 이에 소드 팰러스가 그들을 적극 견제했고, 양 세력은 한시도 가만있지 못하고 다투게 되었다.
칼부림도 심심치 않게 일어나며, 피를 보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즉시 전력감이라는 초인의 특징이 독이 된 경우였다. 그들에게 충성심이나 규범, 인성을 제대로 교육할 시간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외부에 드러날 만큼 큰 충돌은 없이 서로 일정한 선만은 넘지 않은 상태로 힘겨루기를 이어 오고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번에 시르피가 사라지면서 문제가 되었다. 정말 갑작스러운 실종이었다. 평소처럼 사람이 찾지 않는 소드 팰러스의 심처에서 홀로 수련하던 그녀가 말 그대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었다.
그녀의 실종을 두고 에단을 포함한 일단의 인물들은 납치를 생각했다. 이미 절대자의 경지에 이른 시르피의 실력을 생각한다면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갑작스러운 증발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땅으로 꺼지거나 하늘로 솟기도 했다는 말인가? 말도 되지 않는 소리였다.
더구나 현 아나크렌의 상황과 소드 펠러스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는지 알고 있는 그녀가 모든 책임을 한 번에 던져 버리고 모습을 감춘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았다. 차라리 절대자를 납치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서 납치당했다는 소리가 더 믿음이 가는 이유였다.
일단 시르피가 납치를 당한 것이든 가출을 한 것이든 그녀를 찾아야 했다. 그것이 최우선 사항이었다.
소드 팰러스는 전력을 기울여 수색에 들어갔다. 아무런 단서도 없었지만 그저 손 놓고 기다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우왕좌왕하는 사이 들려온 것이 이드에 대한 소식이었다.
소드 팰러스로서는 지금의 상황을 벗어나서 다시 안정을 찾을 수 있는 천금과 같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시르피를 대신할 수 있는 최고의
인물의 등장이었다. 기사들이 시르피에게서 나온 무공을 배웠지만 그녀를 가르친 존재는 마인드 마스터였다. 그런 마인드 마스터의 후계라면 충분히 시르피의 자리를 매우고 소드 팰러스를 안정시킬 수 있었다. 또, 시르피를 찾는 데 도움을 받을 수도 있을 것이고, 충분한 시간을 벌 수도 있을 것이다. 이에 소드 팰러스는 은밀히 사람들을 움직였고, 에단 역시 그런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꽤나 거창하고 긴 이야기였다. 중간중간 이드의 질문에 대한 답까지 하면서 더욱 길어진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드로서는 만족스러운 내용이었다. 초인에 대한 이야기만 해도 헨리에게 듣지 못했던 내용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다지 반갑지 못한 내용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드는 우디에게 자신들이 들었던 내용들을 간추려 전했다. 하지만 초인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이드의 이야기를 듣고 우디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다른 마을의 소식을 알아봐야겠다고 말했다. 외부와 거의 단절하고 생활한 덕분에 초인에 대해서 알지 못한 것은 둘째 치고, 지금까지 엘프 중에서 초인이 나타났다는 소식도 들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혹시 초인은 인간에게서만 나타나는 것일까, 아니면 엘프에게서만 나타나지 않는 것일까.
우디는 후자가 아니길 바라면서 한숨을 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