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10화
847화
무심한 말 속에 든 음산함을 느낀 것일까.
은밀히 숲에서 막 벗어나던 정찰병이 황급히 달그림자에 숨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이드는 헛웃음이 나왔다.
“하하. 설마 내 말을 들었을 리는 없고…………. 감 좋네.”
왜 그런 거 있잖은가. 남이 내 이야기를 하면 귀가 가렵다고.
잠시 후 주변에 아무런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정찰병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감, 성능이 좀 달리나 보네요.”
라미아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가끔 점쟁이 수준으로 감이 좋아 섬뜩한 인간들이 있다. 어떤 상황에서도 귀신같이 위기를 피해 가는 놈들. 용병들 사이에서는 흔히 사신으로 불린다. 함께 임무에 나선 동료 용병들이 전멸한 전투에서도 혼자 말짱히 살아 귀환하기 때문인데, 귀환한 사신들은 하나같이 위험한 것 같아서, 안전할 것 같아서 자리를 옮겼을 뿐이라고 말한다. 자리 못 잡아 죽은 동료들 입장에선 기가 막힐 일인 것이다.
하지만 저 정찰병은 그 정도로 감이 좋지는 않은 것이 분명했다. 진짜 사신급으로 감이 좋았다면 지금 당장 뒤로 돌아 죽을 힘을 다해 도망치고 있었을 테니까.
그때 숲에서 멀어지는 정찰병의 모습이 유령처럼 사라졌다. 마치 그가 있던 자리를 붓으로 덧칠한 것 같았다.
“좋은 재주네.”
이드는 정찰병을 중심으로 한 뼘 정도의 공간이 일종의 보호색을 띠며 주변에 녹아드는 모습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비록 한 뼘의 좁은 공간이지만, 공간을 제어하는 것은 대단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색뿐 아니라 소리까지 완전하게 차단하는 이 기술은 은밀 기동이 필요한 직업군의 워너비 기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기술임에도 이드의 눈길을 떨칠 수는 없었다. 기술을 쓴 후에도 쓰지 않았던 때와 마찬가지로 이드는 정확히 정찰병을 눈에 담고 있었던 것.
분명 보호색 공간은 좋은 기술이기는 했다. 일반적인 감시병을 상대한다면 말이다. 이 기술의 약점은 보호색 공간을 만들기 위해 외부에 마나를 고착시켜야 한다는 점이었다. 폭발 마법처럼 마나를 퍼트리는 것은 아니지만, 외부에 일정하게 고정된 마나는 마나의 흔적에 예민한 고수나, 탐지 마법을 피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드는 단순한 고수를 넘어선 수준이었기에 마나를 열 탐지 카메라처럼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었고, 그 결과 정찰병을 보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진짜 특이하네. 프리실라 말처럼 저건 확실히 마법사의 행동 방식은 아니잖아.”
정찰병을 관찰하던 이드가 문득 생각나 말했다.
“그렇죠. 마법사라면 평범하게 패밀리어나 소환 마법, 고스트 같은 마법을 사용했을 테니까요. 저런 걸 보면 마법사들 중에 또라이들 정말 많은 것 같단 말이에요.”
“……”
이드는 그녀의 말에 네가 그런 소리 할 입장이 아닐 텐데, 하는 의미의 시선으로 라미아를 보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마법의 정수에서 태어난 라미아가 저런 말을 하는 것은 일종의 패드립이 아닐까? 거기에 또라이라니. 마법사 포지션에 있는 그녀의 말은 누워서 침 뱉기였다.
“왜요?”
라미아가 순진한 눈으로 바라본다. 아무래도 방금 전 자신이 했던 발언에 대한 자각이 전혀 없는 것 같다.
아니, 어쩌면 자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예 일반 마법사와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드래곤이 마법의 조종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법사로 분류되지는 않는 것과 비슷한 것이 아닐까?
“아니, 라미아는 마법사가 아니라 라미아구나 싶어서.”
“그게 무슨 소리예요?”
앞뒤 없는 대답에 가면에 떠올라 있던 라미아의 눈빛이 가늘어졌다.
“그런 게 있어. 그보다 저 정찰병도 베일록의 제자라면 골덴 기사단에 속한 기사겠지?”
“아무래도 그렇지 않겠어요?”
이드가 노골적으로 말을 돌리자 라미아는 의아하긴 했지만, 곧 의문을 접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평소처럼 추궁하기에는 장소가 좋지 못하니까.
당연하지만 골덴 기사단에 대한 정보는 프리실라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그렇다고 새로 기사단 전력이 더해진 것은 아니고, 베일록의 제자들에게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당연히 베일록이 직접 붙인 이름인데, 프리실라는 이걸 열등감의 폭발이 낳은 결과물이라고 평가했다.
꼽추로 태어나 고생이 많았던 베일록이 자신과 정반대 선상에 있는, 완벽한 신체의 증명이나 다름없는 기사라는 존재에 대한 애증을 담아 제자들에게 붙인 이름이라는 것이다.
뭐, 결과적으로 명예나 기사도와는 한 푼의 관계도 없는 골덴이라는 노골적인 이름을 붙인 것을 보면 사랑보다는 증오하는 마음이 훨씬 큰 것 같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런 베일록의 개인적인 생각이야 뒤로 밀어 놓고.
골덴 기사단의 이름이 중요한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현재 제자 하나가 척후의 임무를 받고 정찰병으로 나선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이들의 행동 방식이 묘하게 기사나 용병의 색을 띤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명확했다. 베일록을 비롯한 그의 제자 기사단이 마법을 사용하는 방식이 마법사라기보다는 초인이나 용병들에 가까운 형태를 보이기 때문이었다.
“임플란트 브레인. 정말이지 이놈의 마탑 놈들은 제정신인 인간이 없어.”
베일록과 제자들이 마법을 사용하는 방식인 임플란트 브레인에 대해 떠올린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사이 정찰병이 능선 가까이 다가서고 있었다. 하지만 이드와 라미아는 움직이지 않고 그 모습을 지켜보기만 했다. 아무렴 어렵게 물색해 찾은 곳에 단순히 마커만 옮겨 놓았을까.
신중히 능선을 살피던 정찰병이 능선을 넘는 순간 라미아가 정성스럽게 묻어 둔 함정이 발동했다.
푸푸푸푹.
“…………”
정찰병이 반응할 틈도 없이 땅에서 솟아오른 스톤 엣지가 몸 곳곳을 관통했다. 정찰병은 제대로 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피를 토했다. 그리고 그 숨이 채 끊어지기도 전에.
사라락 사라락.
빗소리를 닮은 모래 움직이는 소리와 함께 스톤 엣지 채로 땅속으로 가라앉았다.
개미지옥에 온 걸 환영한다던 이드의 말은 비유가 아니라 정확한 사실적 표현이었던 것이다.
이드는 정찰병을 집어삼킨 후 시치미를 떼고 있는 지면을 바라보다 베일록이 있는 숲으로 고개를 돌렸다.
“첫 개시는 했는데, 얼마나 더 오려나 모르겠네.”
“두 번은 더 올 거예요.”
“너, 아주 확신하는구나?”
“일단 같은 마법사니까요. 마법사라면 세 번 확인은 기본이죠. 기본!”
아무리 기본이라도 연구도 아니고, 전투에 세 번은 좀 심하다 싶다. 두 번까지는 만약의 사고를 생각해서 정찰을 시도할 수 있겠지만, 두 번째 정찰병까지 소식이 끊어지면 들켰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나 마찬가지니까.
그런데 다시 정찰병을 보낸다면 그건 마법사가 아니라 바보다.
그땐 세 번째 정찰병을 보낼 것이 아니라, 공격이나 후퇴의 양자택일을 하는 것이 맞다.
“뭐, 그거야 기다려 보면 답이 나올 일이고. 그보다 어때? 따라붙은 눈이 있는 것 같아?”
이드가 프리실라를 따라붙었던 원견 마법을 생각하며 물었다.
사실 이드나 라미아, 둘 중 하나만 나서도 베일록과 그 제자들을 처리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두 사람, 특히 라미아는 태어날 때부터 숫자로 이길 수 있는 경계점을 아득하게 넘어섰기 때문이다. 다르게 이야기하면, 아무리 적이 많이 모여 있어도 두 사람을 상대할 수 있는 실력자가 없다면 이드와 라미아가 모두 처리하고 목적한 것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지 못하는 것은 혹시 그 모습을 정신이 관에서 보고 있을 것을 염려한 것이다.
그래서 이드도 자신의 실력을 보고 놀라 정신의 관에서 의외의 반응을 보일까 적당한 선에서 날뛰었던 것인데, 지금 전력의 일부를 보인다면 그때의 노력이 허사가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만약 따라붙은 눈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면, 그땐 프리실라가 어쩌다가 제힘도 다 써 보지 못하고 당했는지 알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확인을 라미아에게 맡기고 있었던 것.
그에 라미아는 베일록들이 멈춰선 순간부터 그들을 중심으로 탐지 마법을 시전 중이었다. 그녀에게 탐지 마법은 물 한 잔 마시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지만, 혹 베일록들이 탐지 마법에 사용된 마나를 느끼고 그들의 존재를 눈치챌까 제법 조심하고 있어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결과는 별로 유쾌하지 못했다.
“역시 있네요. 아쉽게도 확실하게 따라붙은 것 같아요. 원견 마법의 마나 구성만 세 개가 있고, 패밀리어를 붙였는지, 마나 내포도가 제법 강한 살쾡이도 가까이 있어요.”
“처리할 수 있지?”
“쉽죠. 문제는 베일록이나 제자들이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눈이죠. 그건 확인하기 전까지는 처분하기 힘들어요.”
아무리 다른 눈을 처리해 봤자, 그들이 가진 눈이 멀쩡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쩝. 그럼 아쉽지만, 어쩔 수 없겠네. 눈만 없으면 빨리 처리하고 돌아가는 건데 말이야.”
특히 살아 있는 육체로 변하고 싶어도 변하지 못하는 라미아와 달리 일리나는 빨리 돌려보내 쉬게 해 주고 싶었던 이드였다. 물론 강인하고 조화로운 엘프의 육체에 강력한 무공을 익힌 일리나라면 며칠 밤을 새워도 쌩쌩하겠지만, 가족이자 남편인 그로서는 조금이라도 더 쉬게 해 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사이 또 다른 정찰병들이 다시 능선을 넘다 개미지옥의 먹이가 되었다.
라미아가 말한 대로 정확하게 세 번째다.
“바보냐! 도대체 마법사들이 다 똑똑하다는 말은 어디서 나왔나 몰라.”
이드는 이번 역시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모래 속으로 사라지는 두 명의 정찰병을 보며 혀를 찼다.
“이젠 저쪽도 깨닫기 시작하려나?”
“함정이군.”
베일록이 바위산을 노려보며 말했다. 라미아의 장담과 달리 베일록과 제자들은 첫 번째 정찰병이 돌아오지 않는 것에 함정을 의심했고, 두 번째 정찰병이 돌아오지 않자 확신했다.
“마스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으음.”
제자의 질문에 베일록은 엄지손가락을 깨물었다. 그가 정찰병으로 보낸 제자들은 모두 특별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발각당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그들이 발각되어 당했다면 적이 처음부터 자신들을 노리고 유인해 함정을 팠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면 마커가 발각되었을 확률이 높다. 혹시………… 프리실라도 알았으면 어쩌지.’
그 경우를 상상한 베일록은 내심 신음했다. 상상만으로도 얼굴이 녹아 없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고민도 프리실라를 구하고 난 후 할 일이다.
“마스터, 진짜 함정이라면 저희들은 유인당한 것이고, 프리실라 장로님께선 이곳에 계시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확실히 그럴 가능성이 있지.”
제자의 말에 잠시 고민하던 베일록이 품에서 작은 수첩을 꺼내 들었다. 언뜻 봐서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표지에는 베일록만이 알아볼 수 있는 암호로 ‘프리실라의 하루 일과’라고 적혀 있었다.
이 수첩은 프리실라에게 붙인 마커에서 전해지는 정보를 자동으로 기록하는 마법이 걸려 있어서, 프리실라가 5분 이상 머물렀던 곳의 위치와 함께 머문 시간이 자동으로 기록된다.
스토킹 자료 수집용으로 쓰기에는, 도저히 쓸데없는 고퀄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런 걸 재능의 낭비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은 그 재능의 낭비와 쓸데없는 고퀄이 빛을 발했다.
수첩의 마지막에 적힌 마커의 위치와 시간을 확인하던 베일록은 곧 몇 줄 위에서 단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눈앞의 바위산보다 더 오랫동안 머물렀던 곳의 위치와 시간.
“여기다. 프리실라는 여기 있는 것이 분명하다.”
베일록이 눈을 번뜩이며 확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