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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16화


853화

자신이 이렇게나 작고 초라한 존재였던가.

베일록은 자신의 힘이 통하지 않는 이드의 모습에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깊은 회의감이 들었다.

최선을 다한 공격에도 한 점 흔들림 없는 모습이 그에게는 마치 까마득한 절벽처럼 느껴졌다. 아니, 차라리 절벽이라면 부술 수라도 있지.

젖 먹던 힘을 다했는데도, 기스도 나지 않는 것이 완전 오리하르콘 벽이다. 이대로는 도저히 답이 없는 상대다.

‘하, 내가 상황을 너무 얕보고 실수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군.’

베일록은 후회했다. 하지만 뒤늦은 깨달음이었다. 거기다 꼭 베일록의 분석력을 탓할 수만도 없었다. 누가 감시조 따위에 이런 실력자가 있을 거라고 생각이나 하겠는가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즉흥적으로 양동 작전 같은 걸 쓰는 것이 아니었어.’

어차피 이런 검왕급의 강자에게는 숫자가 큰 의미가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자들이 온전히 함께하고 있었다면 이런 최악의 위기는 피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상황은 이미 벌어졌고, 후회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없다. 후회한다고 해결되는 말랑한 세계는 천국밖에 없다.

‘그렇다고 이대로 싸움을 이어가 봤자, 결과는 뻔하다.’

죽음. 운이 좋아야 포로 신세다.

‘어떻게든 도망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베일록의 눈이 바쁘게 움직였다. 이길 수 없다면 물러나는 것이 당연했다. 어차피 전장이란 전진과 후퇴의 양자택일밖에 없는 곳이 아니던가. 문제는 그에게 도망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드의 공격을 막아내기도 벅찬 상황에 무슨 수로 도망을 칠 수 있을까. 등을 보이는 순간 당하고 말리라.

자연히 베일록의 시선이 한쪽에 진흙 인형처럼 굳어 있는 비히더와 티엔을 향했다.

자체적인 해결이 불가능할 때 외부의 힘을 빌리는 것은 오랜 시간에 걸쳐 검증된 지혜였다. 경우에 따라 뜻밖의 부작용을 가져오기도 하지만, 죽음이란 결과 앞에 사소한 부작용 따위 누가 신경을 쓸까. 생존은 모든 문제에 우선하는 법이다.

베일록은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메시지 마법을 사용했다.

[비히더, 이자는 내가 상대할 수 없는 강적이다. 이대로는 이길 수 없으니, 후퇴해야겠다. 도망칠 방법을 찾아라.]

베일록이 장로 체면도 잊고 대놓고 도망을 입에 올렸지만, 바로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비히더는 결코 그를 겁쟁이라고 생각할 수 없었다. 오히려 당연한 판단이라고 여기며 답했다.

[위험은 있지만, 현재 선택 가능한 수단이 하나 있습니다.]

[지금은 어떤 위험이 있어도 시도해야 할 때다. 결정은 내가 할 테니, 설명해 봐라.]

코앞으로 다가온 죽음을 피할 수 있다면 어떤 위험인들 감수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무슨 방법이 있는지 궁금하기도 했다. 자신도 찾지 못한 방법을 어떻게 찾은 것일까?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이란 뭘까?

하지만 그에게 들려온 것은 비히더의 대답이 아니었다.


떠러러렁!

“여유가 넘치나 보네. 딴생각도 하고 말이야.”

차근차근 베일록을 쪼아 가고 있던 이드는 그가 공방에 집중하지 못하고 틈을 보이는 순간, 망설이지 않고 주먹을 밀어 넣었다.

그렇지 않아도 파괴적인 강기에 닿을 때마다 짧아지던 촉수 몇 개가 단숨에 뿌리 뽑혔다.

그 순간 베일록의 신형이 휘청이며 흔들렸다.

그가 사용하는 촉수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그의 마나 써클에 직접 연결된, 마나 로드의 변형으로서 무인으로 치면 내공이 흐르는 혈도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이 미처 재생될 시간도 없이 한순간에 망가졌으니, 충격이 없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라고 봐야 했다.

“유령이 귓가에 속삭이기라도 했나 보지?”

“무슨 말이… 쿨럭!”

생명을 건 전장에서 잠시 한눈을 판 대가에 괴로워하며 겨우 충격을 참고 있던 베일록은 갑작스러운 이드의 말에 놀라 참았던 피를 토했다.

메시지 마법을 사용한 다음 순간, 우연히 저런 말이 나왔다고 생각하는 것은 너무 형편 좋은 해석일 테니 말이다.


이드는 바람피우다 현장을 걸린 것 같은 사람의 얼굴을 한 베일록을 보며 말했다.

“내가 촉이 좀 좋아서 말이야. 느껴지거든.”

전음을 도청할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기감을 가진 이드에게 메시지 마법의 사용 흔적을 감지하는 것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이드의 기준에서다.

“…….”

당장 베일록만 해도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소리치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원래 메시지 마법이란 은밀성이 기본인 마법이었다.

애초에 이 메시지 마법이란 것이 다른 사람이 모르게, 은밀하게 말을 전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마법이기 때문이다. 그저 촉이 좋아 느꼈다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메시지 마법을 간파하려면 6클래스 이상의 마법사가 미리 잡아낼 준비를 하고 있어야 했다.

그런 준비 없이는 6클래스의 마법사도 바로 잡아내기 힘들다.

그리고 이 방법도 이곳처럼 마나가 뒤엉키며 폭풍처럼 휘몰아치는 전투 현장에서 사용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데, 그걸 알아차렸다니! 마법사도 아니고, 정령사인데 그것이 가능한 일인가? 혹시, 정령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인가!

무엇보다 정령사 주제에 무공은 왜 이렇게 강력하단 말인가!

‘도대체 정체가 뭐냐고!’

이드를 보는 베일록의 심경은 복잡했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이드의 정확한 정체가 아니었다. 당장 이 자리를 빠져나가는 것. 보면 볼수록 인간 같지 않은 이드와 한시라도 빨리 떨어지는 것이 최우선 사항이었다.

그런데 메시지 마법이 발각되면서, 시도도 하기 전에 망하게 생겼다. 베일록은 이드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임플란트 브레인의 출력을 한계치까지 높였다.

부우우우-

진동과 함께 등에서 뜨거운 열기가 솟았다. 등의 혹에 심어진 임플란트 브레인이 높아진 출력에 뜨거운 열을 뿜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반대로 베일록을 보호하며, 촉수형의 마나 로드와 함께 공방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바람은 점점 푸른색을 띠기 시작했다. 단순한 압축의 단계를 넘어 정의 단계에 이르러 속성력이 깃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와 동시에 비히더에게 메시지 마법을 사용했다.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좋다. 내가 신호하는 순간 사용해라]

[준비하고 있겠습니다.]

준비한 것이 어떤 수단인지 자세히 설명을 들을 시간이 없었다. 그것을 알기에 비히더도 길게 설명하지 않고 짧게 답했다.

그 순간 단단하게 방어에 치중하던 베일록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기질이 바뀐 걸 보니, 이야기는 잘 끝났나 보지?”

이드는 메시지 마법이 이어지고, 바람의 질이 바뀌는 것을 확인하고는 베일록을 바라보았다. 당장 그를 중심으로 이드를 밀어내던 바람의 방향이 끌어당기는 쪽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래, 덕분에. 그럼 이제 기다려 준 보답을 해 주마.”

베일록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푸른 바람에 냉기가 서리며 주변의 기온이 급강하하기 시작했다.

허공에서 저절로 얼음이 맺히며, 푸른 바람이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이드를 공격해 들었다. 바람과 얼음.

무형과 유형의 동시 공격이었다.

“겨우 이 정도가 보답이라면 실망인데?”

하지만 유형의 공격이 더해지건 말건 수신으로 몸을 다루고, 철황기를 두른 이드에게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애초에 강기라는 것이 무형의 진기가 유형화된 것, 유형, 무형의 경계를 넘어선 것이 강기다.

강기가 특별한 이유는 단지 강력한 파괴력 때문만이 아닌 것이다. 괜히 화경의 기준이 온전히 강기를 얻었는지 아닌지로 갈리는 것이 아니다. 

“아니, 이제 시작이다.”

베일록도 애초에 고작 얼음덩이가 더해진다고 큰 효과가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이어질 공격을 위한 사전 작업일 뿐이었다. 

“더스트 컨퓨전!”

퍼퍼퍼퍼퍽!

마치 중국 춘절에 터지는 폭죽 같았다.

허공에 떠 있던 얼음은 물론이고, 이드의 손에 부서진 얼음까지. 베일록의 시동어와 함께 모래알처럼 작게 부서져 주변을 가득 채웠다. 순간 하얀 얼음으로 만들어진 안개가 시야를 가렸다. 작고 날카로운 얼음 알갱이는 쉼 없이 안구와 호흡기 등. 신체의 약한 부분을 공격했다. 그러는 중에 다시 주문과 함께 베일록이 마법을 사용했다.

“프로즌 페더! 으윽!”

마법이 시전되는 순간 베일록은 이를 악물었다. 그와 연결되어 있던 바람과 얼음의 촉수가 모두 뽑혀 허공으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것은 생살을 한 점 한 점 뜯어내는 것과 같은 고통을 베일록에게 주었다. 하지만 지금은 느긋하게 고통에 힘들어할 시간이 없었다.

기이이익-

허공에 떠오른 촉수는 곧 원형의 고리를 만들며 회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수십의 작은 고리가 모여 커다란 원을 그리며 변칙적으로 움직여 나갔다.

당연하게도 그 커다란 원의 중심에 있는 것은 이드였다.

구우우우~

봉황의 울음소리 같은 소리를 내는 거대한 얼음의 폭풍 속에선 이드는 프로즌 페더가 끊임없이 수신으로 이룬 경계를 두드리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이거 실망했다는 말은 못 하겠는데? 제법이야.”

하지만 이드와 달리 밖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비히더는 해연히 놀라고 있었다.

“이, 이건 프로즌 템페스트가 아닌가!”

“그게 뭡니까? 대단한 마법 같은데.”

옆에 선 티엔이 창을 단단히 잡고 물었다.

하지만 비히더는 그걸 설명해 줄 정신이 없었다. 정상적인 형태의 발현은 아니지만, 지금 눈앞에 출현한 것은 8클래스의 프로즌 템페스트가 확실했다. 8클래스에 이른 마법사조차 시전하기 위해서는 공을 들여야 하는 강력한 마법.

설마 그걸 이제 7클래스 초입에 들었다고 알려져 있는 베일록이 사용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이야. 이건 2클래스 마법사가 3클래스의 마법을 사용하는 것과는 근본적으로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2클래스 마법사의 3클래스 마법 사용은 단순히 무리의 수준에서 끝나지만, 8클래스의 9클래스 마법 도전은 백 번 목숨을 걸면 99번은 죽음으로 이어지는 것이 확실한 무모한 도전, 즉 기적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지금 눈앞에 그 기적이 일어났다.

마법사로서 마법에 절대적인 믿음을 가진 비히더는 어쩌면 도망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저 절대영도의 공간에서 멀쩡할 존재는 극히 드물다고 배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바람일 뿐이었다.

[비히더, 지금이다!]

“하지만 적은 이미…….”

[서둘러라. 저런 방법으로 물리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다!]

가능하다는 계산이 나왔으면 이렇게 당하기 전에 벌써 시도했을 것이다.

비히더는 베일록의 연이은 재촉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자신보다야 베일록의 판단이 더 나을 테니까.

티엔의 어깨에 손을 올린 비히더가 정신을 집중하자 그의 눈에 검은자위가 사라지고 하얗게 변하더니 얼음 안개로 가려진 시야를 꿰뚫었다. 그리고 그 시선 끝에 베일록이 나타나는 순간.

슛.

비히더와 티엔이 그 자리에서 사라지고, 베일록의 뒤에 나타났다.

그리고 다시 그 자리에서 사라진 세 사람은 현장에서 일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다시 나타났다.

그러길 두 번 더 반복했을 때,

세 사람은 이드로부터 삼킬로미터 떨어질 수 있었다.

“이 정도라면……”

비히더가 어지러운 듯 머리를 흔들며 말을 할 때였다.

쩌어억!

갑작스러운 고요와 함께 거대한 은색의 프로즌 템페스트가 회전을 멈추며 반으로 쪼개졌다. 그 순간 세 사람은 환상처럼 프로즌 템페스트 안에서 번뜩이다 사라진 거대한 검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세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소리쳤다.

“다시 이동해!”

“더!”

“잡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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