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19화
856화
비명이 그치자 주변이 절간처럼 조용하다. 이드는 베일록을 챙기다 문득 주변을 돌아보았다.
가장 먼저 비히더와 갈기갈기 찢긴 티엔의 시체가 보였다. 라스갈을 불러 둘의 시체를 태워 버리려던 이드는 잠시 생각한 후 비히더의 시신은 따로 챙겼다.
그가 사용한 단거리의 공간 이동이 마법인지, 초인기인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만약 초인기라면 프리실라나 베일록과는 다른 형태로 보였기
때문이다.
“라미아에게 주면 좋은 연구 소재가 생겼다고 좋아하겠지.”
어렵게 왔는데 빈손으로 보낼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시체를 선물로 주는 건 다양한 의미에서 위험한 상태 같지만, 어쩌겠는가. 라미아를 비롯한 마법사의 취향이 그런 것을.
[나 그냥 가?]
라스갈이 옷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아무래도 불러 놓고 아무 말도 없어 지루했나 보다.
“당연히 아니지. 저기 계약을 잘못한 불쌍한 용병 씨가 있으니까. 편히 안식하게 해 줘.”
[불쌍해라. 계약은 중요한 건데.]
“그러게 말이다. 너도 아는 걸 저 용병 씨는 몰랐던 모양이야.”
정령사와의 계약을 통해 중간계로 나오는 정령에게 계약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라스갈의 불길에 티엔의 시신이 순식간에 한 줌 재가 되었다. 땅에 묻어 두면 나중에 추적해 온 정신의 관 마법사들이 혹시라도 조사를 하겠다고 파내 뒤적일 수도 있으니 이러는 편이 죽어 버린 그를 위해서는 좋을 것이다.
마지막 할 일을 마친 이드가 베일록을 들고 숲으로 이동했다. 고치로 만들어 매달아 둔 마법사를 회수해서 돌아가기 위해서다.
다시 발을 들인 숲은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짝퉁 프로즌 템페스트의 영향이었다. 딱 봐도 얼어 버린 숲은 다시 살아나기 힘들어 보였다.
“일리나가 알고 마음 아파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괜히 걱정이 됐다. 물론 괜한 걱정이다.
엘프도 필요하면 나무를 잘라 쓰고, 숲을 개간하기도 한다. 그들은 그저 이유 없이 숲을 훼손하는 것을 싫어할 뿐이다.
무조건 나무를 베는 것을 반대했다면 엘프라는 종족은 이미 이 대륙에 없었을 것이다. 불을 사용하는 거의 모든 종족과 전쟁을 벌여야 했을 테니까. 이드의 걱정은 그저 엘프를 아내로 둔 남편의 버릇 같은 것이었다. 또 엘프에 대한 고정 관념이 거든 것이기도 하고.
“그나저나 숲이 이래서야 얼어 죽지 않았으려나?”
죽었으면 제 운이 거기까지인 거지만. 그런데 용케 죽지 않았다. 고치처럼 감고 있던 넝쿨이 그를 보호한 것.
동상이 좀 걸렸지만, 동사하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다.
“뭐, 꼭 살아서 좋은 것은 아니겠지만.”
토벌대에 넘기면 어떻게 굴러도 편히 살지는 못할 것이다.
이드는 고치 상태 그대로의 마법사와 베일록을 들고 라미아들이 기다리고 있는 협곡을 향해 달렸다.
생각대로 라미아가 먼저 돌아와 있었다.
“수고했어. 골덴 기사단은?”
“끝까지 살려 달라는 사람이 없어서 원하는 대로 해 줬죠.”
“처리는?”
“떠난 자리가 깨끗해야 아름다운 사람 아니겠어요? 깔끔하게 정리하고 화장해 줬죠. 다시 가 봐도 싸운 흔적은커녕 아무것도 못 찾을 거라고 장담할 수 있다고요.”
부창부수, 부부는 닮는다고 했던가. 아마 라미아도 자신과 같은 생각으로 시체를 묻지 않았을 것이다.
“고생했어. 그런 의미에서 선물.”
이드는 아공간에 담아 온 비히더의 시신을 꺼내 놓았다.
“일 킬로미터 단위로 연속 순간 이동을 사용하던 마법사야. 마법인지 초인기인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일단 초인기라면 정신의 관 특성상 초인은 아니고 이식받은 걸 거야.”
“선물로는 멋이 없지만, 재미있기는 하겠네요. 그런데 손에 든 건 제 선물 아니에요?”
아나콘다가 송아지를 삼키듯 비히더를 아공간으로 삼켜 버린 라미아가 이번엔 이드가 들고 온 베일록과 그 제자까지 욕심냈다.
“이놈들은 아니야. 쓸데가 있거든.”
“쓸데요?”
“응. 꽤 대인원이 나왔고 짝퉁 프로즌 템페스트까지 터졌는데, 소리 소문 없이 사라지면 관에서 가만히 있을까 싶어서.”
“아하.”
라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는 그녀를 지나 프리실라 옆에 들고 온 두 사람을 내려놓고 일리나를 보았다.
“미안해요. 숲이 많이 상했어요.”
“전 이드가 무사하면 그걸로 족해요. 어차피 숲은 땅만 살아 있다면 다시 회복하니까요.”
역시 사랑이 최고다. 보통 엘프도 아니고, 하이엘프에게 숲보다 짝이 우선하게 만들었으니까.
“별일은 없었죠?”
“이드가 싸우는 소리에 아래에 있던 감시조가 놀라서 이드를 찾았어요.”
이곳과 싸움터는 제법 거리가 있었지만, 역시 프로즌 템페스트가 문제였다. 광범위 마법이라 규모가 어지간했어야지. 그나마 천황천신검이 찰나의 순간 현현하고 사라졌으니 다행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전음으로 이드 흉내를 좀 냈어요. 현 상태를 유지하라고.”
일리나가 샐쭉한 눈으로 이드의 목소리를 흉내 내며 대답했다. 제법 비슷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이드가 박수를 쳤다.
언제 저런 걸 연습했는지. 하지만 따로 연습한 건 아니었다. 그저 이드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다 보니 저절로 따라할 수 있게 된 것뿐. 어쨌든 그녀의 임기응변 덕분에 큰 소동은 없이 넘어간 듯하다.
그때 프리실라가이드를 불렀다.
“이봐. 이놈 좀 떨어트려 줘. 이 스토커를 왜 하필 내 옆에 눕히는 건데?”
그녀는 성치 않은 몸으로 베일록의 몸을 밀어내고 있었다. 움직일 힘도 없을 텐데. 정말이지 어지간히도 싫은 것 같다.
“적당히 익숙해지라고. 사람도 많지 않은데, 포로를 따로 둘 수는 없는 일이니까.”
“그럼 최소한 이 자식 자리라도 바꿔 줘.”
“뭐, 그 정도야.”
적극 협조해 준 대상인데 그런 사소한 부탁 정도야 들어줘야지.
즉시 베일록과 제자의 위치를 바꾼 이드는 바로 기절한 베일록을 깨웠다. 강렬한 고통으로 인해 기절했기 때문인지 그는 깨어난 후에도 제대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당연했다. 침투경에 내부가 가루가 되었는데, 멀쩡하면 그게 이상한 일이다. 그가 임플란트 브레인으로 몸을 강화하긴 했지만, 바로 그 임플란트 브레인에 이상이 생겼으니. 멀쩡할 수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냥 두어서는 이야기 진행이 안 된다.
“페럴라이즈.”
라미아가 마법으로 통각을 마비시켰다. 아무래도 토벌대가 올 때까지 이 상태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에 중간중간 점검해야 하는 점혈보다는 마법이 나을 것 같아서다.
“크으……. 여기가 도대체 어디냐?”
“고개 돌려 봐. 찾던 사람을 볼 수 있을 테니까.”
이드가 겨우 눈을 뜬 베일록의 눈앞에 손을 흔들며 말했다.
“뭐? 프, 프리실라? 오오~ 역시 살아 있었구려.”
프리실라를 본 베일록은 방금 전까지 그녀를 잊고 있었던 주제에 감동한 듯 입을 열었다.
“흥, 지랄, 징그러우니까, 내 이름 함부로 부르지 마. 도대체 어떻게 마커 같은 걸 내게 붙여 둘 생각을 한 거지? 미친 거 아냐?”
“그것은 내가 그대를………….”
그냥 두면 하루 종일 말싸움이라도 할 기세라, 이드가 나서서 베일로의 고개를 정면으로 돌렸다.
“자자, 남은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우리 사이의 일부터 끝내야겠지?”
“도대체 당신은 정체가 뭐요?”
베일록이 아득한 눈으로 이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말하지 않았던가?”
“토벌대 감시조? 소드 팰러스의 삼검왕이라고 해도 당신보다 강할 것 같지 않은데. 그 말을 믿으라고?”
베일록의 목소리에는 불신이 가득했다. 아무리 위명이 자자한 삼검왕이라도 프로즌 패더로 재현한 프로즌 템페스트를 그렇게 쉽게 갈라 버리진 못할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인간은 했다. 그에게 그런 강자에 대한 정보 같은 건 없었다.
“어쩌겠어. 그게 사실인걸. 그보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나 봐?”
“그 이드라는 마인드 마스터를 딴 흔하디흔한 이름… 설마?”
인상을 찡그리고 말하던 베일록이 말문이 막힌 듯 놀란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이드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그건 옆에서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프리실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설마 당신이 그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 은색 기사단장과 함께 생명의 관을 붕괴시킨, 그 장본인이 당신이라고?”
아직 자신을 이 꼴로 만든 이드가 누군지도 모르던 그녀의 눈과 입이 동시에 쩍 벌어졌다.
이드의 강함에 대한 의문이 풀렸다. 하지만 결코 반가운 정보는 아닌 듯하다. 바로 그의 손에 생명의 관을 붕괴당했기에 이드의 힘에 대해 제국이 알고 있는 것보다 더 잘 알고 있는 미완의 마탑이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어마어마한 강적이 대문 앞에 어슬렁거리고 있었던 것이다.
“좋아. 내 소개는 따로 하지 않아도 되겠네.”
두 사람의 표정을 본 이드가 흐뭇하게 웃었다.
“그보다. 베일록 장로, 당신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부탁이 아니라 요구겠지.”
베일록의 표정이 단단해졌다. 포로에게 요구는 언제나 일방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그럼 요구라고 하고. 당신 정신의 관에다 연락을 좀 해 줬으면 해. 적과 교전 후 추적 중이라고.”
무슨 말이 나올까 두려워하던 베일록이 그 말에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과연, 관에서 나올 추가 병력이 걱정인 게로군. 좋다. 들어주겠다. 대신 나와 프리실라를 풀어 다오. 그렇게 해 주면 추가 병력도, 추적도 없다고 약속해 주겠다.”
“쯧쯧. 개소리도 적당히 하자. 나한테 이 꼴을 당하고서 그런 말이 나오나? 내가 한 마리씩 기어 나올 두더지 따위를 무서워할 것 같아? 난 그저 귀찮을 뿐이라고. 그리고 잘 못하면 토벌대가 와서 할 일이 없어질지도 모르잖아. 그런 민망한 일은 피해야지.”
“…..”
잠깐 헛된 희망을 품었던 베일록이 입을 닫았다. 새삼 이드의 힘이 떠오른 것이다. 거기에 더해 생명의 관을 붕괴시키고, 랜달 부관주를 패퇴시킨 장본인.
생명의 관이 세관 중 가장 힘이 약하고, 격이 떨어지지만 결코 가진 힘이 약하지는 않다. 특히 다른 마법사는 몰라도 랜달 부관주의 능력은 다른 관의 부관주들과 큰 차이가 없다고 알고 있다.
그런 생명의 관을 붕괴시킨 자를 상대하려면, 정신의 관에서도 대대적으로 나서야 했다. 그러나 아직 상대가 이드라는 것을 모르는 정신의
관에서는 찔끔찔끔 일부 병력만을 덜어 내 보낼 것이고, 그렇게 되면 피해만 늘어 갈 것이 뻔했다.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오히려 정신의 관에 이드의 존재를 알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딴생각을.’
하지만 능청스러운 말투와 달리 날카롭게 베일록을 살피던 이드는 그 눈빛을 놓치지 않았다.
“아, 행여 다른 생각은 말고, 당신 손에 프리실라의 생명이 달렸다고.”
“까드득, 명예 후작이라는 자가 겨우 힘없는 여인의 생명을 가지고 협박을 하다니.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로서 부끄럽지 않느냐!”
“전혀!”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 본인인데, 누구에게 부끄러워하라는 말인가. 그나마 중원에서 넘어온 직후라면 좀 달랐겠지만, 이후 다녀온 미래의 지구에서 온갖 치사한 모습을 보았기에 제법 뻔뻔해진 지금의 이드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말이었다.
·기사들이 알면 통탄할 일이군. 네가 그러고도 기사냐!”
한 치의 망설임 없는 대답에 베일록이 기가 막힌다는 듯 한탄했다.
“나, 기사 아닌데? 그게 아니라도, 죄 없는 초인을 잡아다 실험한 당신이 할 말은 아니지. 자, 그러지 말고 빨리 정하라고. 추가로 이야기하자면, 거절할 경우엔 프리실라의 목숨은 물론이고 당신 심장의 마나 써클을 부순 후에 등에 있는 혹도 잘라 버릴 거야. 그런 후에 더러운 빈민가에 던져두려고 하는데 어때?”
속삭이는 듯 목소리를 낮춘 이드의 말에 베일록이 부르르 떨었다.
프리실라의 이름만 나왔을 때와는 반응이 달랐다. 그가 프리실라에게 집착하는 것은 맞지만, 마나 써클과 등의 혹에 심은 임플란트 브레인의 존재는 또 다른 것이었다.
그것이 있기 때문에, 그에 담긴 힘을 믿기 때문에 프리실라에게 집착하는 것도 가능했다.
그저 힘없는 천한 꼽추였다면 행여 그런 마음을 품을 기회라도 있었을까.
마나 써클과 임플란트 브레인은 지금 그에게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한 것이었다.
“시키는 대로.. 하겠다.”
이드를 향한 눈을 내리깐 베일록이 개미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 라미아~”
역시 힘에 기대는 놈에게는 힘을 빼앗는 게 최고다. 베일록의 마음이 완전히 꺾인 것을 확인한 이드가 한 톤 높은 목소리로 라미아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