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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51화


887화

라스갈이 작은 가슴을 탕탕 두드리는 모습이 귀엽다. 문제없다는 것 같다.

하기야 불의 정령이 불을 조종하는데 어려울 리가. 새가 하늘을 날고, 물고기가 헤엄치는 것이 어려운 일이던가. 거기다 빵빵한 이드의 마나까지 뒤를 받쳐 주고 있는데, 라스갈이 자신만만하다 못해 신이 난 것은 당연하다.

“그럼 간다.”

신호를 준 이드가 무극신기를 움직였다.

무극신기는 너무도 쉽게. 그리고 귀신도 모르게 폭발 직전까지 똘똘 뭉친 노심에 빨대를 꽂았다.

찌이이잉.

순간 노심, 발동체, 변형 초인력의 세 층으로 나뉘어 있던 돌탑의 내부가 무극신기에 의해 하나로 이어졌고, 노심에서 솟아오르는 강력한 초인력을 따라 돌탑이 진동했다.

빨대를 통해 솟아오르는 초인력이 성난 오우거처럼 사납다. 하지만 그래 봤자 무극신기 앞에서는 드래곤 앞의 오크다. 빨대라는 조련 단계를 거친 초인력은 거세된 오우거처럼 얌전해진 상태로 라스갈에게 넘어갔다.

파르르륵!

동시에 이드의 마나를 듬뿍 퍼간 라스갈의 불길이 파랗게 변하고 돌탑을 디딘 발아래서 불길이 치솟았다. 잘못 보면 화형의 한 장면 같다. 크아!

그때 라스갈이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크게 입을 벌렸고, 발아래서 시작된 불길이 그 입 앞에 모이며 실처럼 가늘게 하늘로 뻗어 올라갔다. 마치 드래곤이 브레스를 발사하려는 듯한 모습이다.

구구구구.

다음 순간 빗줄기처럼 가늘던 붉은 빛줄기가 순식간에 그 덩치를 키우며 빛의 기둥을 만들었고, 기둥은 천장을 녹이고 솟아오르며 구멍을 만들었다.

“저게 브레스야. 레이저야.”

뭔들 어떤가. 형태가 어떻게 되었건, 위력은 어느 쪽에도 뒤지지 않는다. 드래곤의 브레스는 8클래스의 마력을 뛰어넘는 것이지만, 한 점에 집중된 힘을 보면 브레스도 뛰어넘을 법해 보인다.

그렇게 이드가 감상을 하는 동안 3층에 가득하던 화염이 빠른 속도로 약해지기 시작했다. 같은 근원을 가진 화염이라서일까. 하늘로 뻗어 나가는 강력한 힘의 줄기에 3층에 가득하던 화염이 딸려가기 시작한 것이다.

“밖에서 좀 당황하겠는데?”

이드는 보지 않아도 땅에서 솟은 붉은 빛줄기에 당황할 토벌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졌다.


그리고 그런 이드의 생각은 틀렸다. 조금 과하게.

“부관은 적의 공격에 대비해 적색경보를 울려라!”

“전군 경계!”

“마법사를 불러라!”

탑 바깥에서 대기하던 중, 땅을 뚫고 솟아오르는 빛줄기를 본 토벌대는 당황한 정도가 아니라 뒤집어졌다. 난리가 났다. 기사는 놓고 있던 검을

잡고 뛰었고, 초인들은 초인기를 준비했으며, 마법사들은 적의 공격을 대비하는 동시에 정체불명의 빛줄기를 분석했다.

그래 봤자 분석할 것 없이 순수한 화력이 집중된 것일 뿐이지만, 오히려 너무 속이 훤해서 혼란스러워했다.

“마법사, 마법사들은 아직 저 빛이 뭔지 알아내지 못했나?”

“마법사들 말로는 그저 직선으로 뻗어 나가는 강력한 화염이라고 합니다. 어떤 의도인지 알 수 없다고 합니다.”

“모르겠다고 하면 끝인가! 저 던전 안에는 지금 황녀 전하께서 계신단 말이다!”

마법사와 지휘부 사이를 급하게 뛰어 왕복하는 부관의 말에 록마틴 후작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통신은? 삼조 마법사에게 통신을 넣어 물어보았나?!”

그런 모습에 덩달아 마음이 급해진 귀족 하나가 후작을 따라 부관에게 소리쳤지만, 곧 사방에서 쏟아지는 눈총 세례를 받아야 했다. 던전에서는 마법 통신이 어렵다는 것은 가장 먼저 알아낸 사실이었고, 모르는 사람이 없는 일인데 이제 와 저런 소리를 하다니.

“그런 멍청한 헛소리나 할 것 같으면 당장 여기서 나가!”

아니나 다를까! 록마틴 후작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위급한 상황에서는 귀족 간의 예의고 뭐고 없다. 다른 사람도 록마틴 후작을 탓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런 헛소리에 오래 관심을 가지는 사람도 없다.

“우선 어찌 된 일인지, 황녀 전하께서는 안전하신지 그부터 급히 알아봐야지 않겠습니까.”

옳은 말이다.

그리고 현재 가장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기사단은 후작가의 프랑 기사단이다.

“단장은 급히 기사단을 이끌고 던전에 돌입해 황녀 전하의 안전을 살펴라. 부관은 사조와 함께 추가 돌입 인원을 준비한다. 급하다. 서둘러라!” 록마틴 후작이 단숨에 명령을 쏟아냈다.

순간의 망설임에 황녀의 생명이 달렸기 때문이다. 물론 착각이지만.

하지만 프랑 기사단과 토벌대는 다행히 헛걸음하는 상황은 피할 수 있었다.

준비를 마친 프랑 기사단이 막 돌입하려는 때에 밖으로 달려 나오는 기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휴~ 다행입니다. 혹시나 이럴까 싶어 명예 후작님의 명을 받고 급히 왔는데. 늦지 않았군요.”

그는 다름 아니라 이드의 명령으로 소식을 전하기 위해 달려 나온 초인 기사단 소속의 초인이었다. 어지간한 경공보다 빠른 가속 능력이 그의 초인기였다.

살벌한 분위기를 풍기던 토벌대는 그가 전한 소식에 빠르게 안정을 찾기 시작했다.

“허허, 명예 후작, 참으로 괘씸한 사람이구만. 계획도 없이 3층을 공략해서 이렇게 놀라게 하다니.”

록마틴 후작이 이제 좀 진정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이미 세상 끝까지 뻗어 갈 것 같던 빛줄기도 사라진 후다. 그저 빛줄기가 나온 자리에 땅이 녹아내린 구멍만 남았을 뿐이다.

“그나저나 명예 후작께서 정령사였을 줄은 정말 꿈에도 몰랐습니다.”

“무공도 뛰어난데, 정령까지 다루다니. 부럽습니다. 부러워요.”

“그나저나 정령을 다루시면 좀 빨리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 것을 말입니다. 3층 공략을 위해 마법사들이 준비하던 것이 헛일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 말과 함께 사람들이 힐끔힐끔 토리빈 마법사의 안색을 살피는데, 과연 표정이 좋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온전히 나쁘지도 못했다. 토리빈 마법사로서는 놀림을 당한 것 같아 화가 나는 한편, 보기 드문 정령사의 출현에 호기심이 발동된 탓이다.

‘괜히 일을 복잡하게 만든 걸 명목으로 정령사에 대해 좀 알아볼 수 없으려나.’

과연 호기심에 노구를 이끌고 토벌대에 끼어든 노마법사다운 생각이랄까?

토리빈 마법사가 침묵하자 사람들은 기사가 가져온 다른 소식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나저나 대단하지 않습니까. 모이엔 경이 이끄는 이 조가 2층의 문을 열긴 했지만, 사상자가 적지 않았는데, 명예 후작과 황녀 전하께서 이끈 삼 조는 2층은 물론이고 3층까지 해결했으니 말입니다.”

“거기에 사상자도 거의 없이 말입니다. 자작도 그렇게 생각지 않습니까?”

말이 사상자지. 사망자는 없고 부상자만 네 명이고, 심지어 그중 하나는 3층에서 바닥을 굴러 찰과상을 입은 메이슨이다. 다른 세 명 역시 본대로 올릴 필요 없이 현장에서 바로 치료가 되는 수준의 경상이었다.

사실상 사상자는 없었다고 해도 좋은 상황.

그에 주걱턱을 가진 자작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억지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보며 질문을 던진 갈색 머리의 자작이 속 시원한 웃음을 쏟아 냈다. 이 소식이 있기 전까지 주걱턱이 청색 기사단과 모이엔의 공을 치켜세우며 은색 기사단을 깎아내렸기 때문이다.

무려 자신의 딸이 속해 있는 은색 기사단을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명예 후작과 삼조의 활약이 전해지면서 앞선 모이엔의 지휘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이 증명된 것과 다름없으니 얼마나 속이 시원한지.

“으허허허허허!”

시원한 웃음소리가 지휘부의 막사를 떠나가라 울렸다.

록마틴 후작도 그 웃음이 거슬리지 않았다. 황녀가 다쳤을까 덜컹하던 마음이 진정되니 모든 것이 좋아 보였다.

마침 그의 눈에 아직 대기 중인 기사가 보였다.

“그럼 명예 후작은 이제 복귀한다고 하더냐?”

2층과 3층. 두 개의 층을 클리어했다. 오늘 할 일은 차고 넘치도록 마쳤으니, 당장 돌아와도 된다.

“아닙니다. 아직 삼조의 시간이 남았으니, 4층까지 클리어하겠다 전하라 하셨습니다.”

“하하하. 명예 후작이 불이 붙었구만. 아무렴 사기가 올랐으면 몰아붙여야지. 좋아. 아직 시간도 남았으니, 뜻대로 해도 좋다 전해라. 시간을 좀 넘겨도 상관없고.”

앞서 많은 사상자를 내고, 주어진 시간조차 다 사용하지 못하고 불려 올라온 모이엔에게와는 백팔십도 다른 모습을 보여 주는 록마틴 후작이다. 과정과 결과 모두 좋으니, 저런 반응도 당연했다.

다만 그럴수록 상대적으로 모이엔의 과실이 더 부각되어 보인다. 그에 적지 않은 귀족들이 청색 기사단의 막사를 보며 혀를 찼다.


“뿌드득. 빌어먹을!”

갑작스러운 일에 밖으로 나와 사태를 지켜보던 모이엔은 새어 나오는 웃음소리에 살벌하게 지휘부 막사를 노려보고는 획 몸을 돌려 막사 안으로 들어섰다.

퍼석.

그와 동시에 분노한 그의 발에 걸린 의자 하나가 산산이 부서졌다. 모이엔의 뒤를 따르던 부단장은 자신의 한 달 봉급과 맞먹는 의자가 가루가 되는 모습에 내심 한숨을 쉬었다.

“감히 어중이떠중이가 모인 토벌대 따위가 나와 청색 기사단을 평가하려 하다니!”

화를 참지 못한 모이엔의 손에 또 하나의 의자가 가루가 되었다. 그에 부단장이 나섰다.

그냥 두면 막사 안의 물건들이 모두 사라질 판이다.

단장을 보좌하는 한편 기사단의 살림을 책임지는 부단장에게 그건 피해야 할 일이다. 전 대륙적으로 유명한 청색 기사단이 돈에 쪼들리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 기사단의 지출을 소드 팰러스에 보고해야 하는 만큼 괜한 일거리를 늘리고 싶지는 않은 것이 그의 마음이다.

“저치들이야 단장님과 소드 팰러스의 뜻을 모르니 저러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리석은 자들의 말은 귀담아들으실 필요가 없습니다.”

“후~ 그렇지. 어리석은 놈들이지.”

심호흡으로 마음을 다잡은 모이엔이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실 많은 사상자를 낸 것에 대해서는 크게 상관치 않았다. 의도적으로 정신의 관의 위험성을 부각시키고, 네 개로 나눈 조의 인원을 재구성하기 위해 희생자를 만든 측면이 어느 정도 있으니까.

다만 모이엔이 화가 나는 것은 평소 반감이 있지 않고서는 보일 수 없는 눈빛을 보이는 작자들과 함께 제대로 일하지 않는 정신의 관 때문이었다.

“얼마나 어설프게 준비했기에 순식간에 3층까지 내어 주느냔 말이야. 3층까지! 새 마법을 개발하기는 무슨, 얼어 죽을. 멍청한 마법사들 주제에!” 

“멍청한 마법사라는 걸 알긴 아는구나.”

두 사람만 있는 공간에 제삼의 목소리가 출현했다.

모이엔과 부단장의 호흡이 멈춤과 동시에 두 사람은 목소리가 난 곳을 향해 검을 들었다. 정말이지 군더더기 없는 번개 같은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당장이라도 섬뜩한 검기를 뿜어 댈 것 같은 기세로 대상을 찾던 두 사람은 곧 검을 내려야 했다. 검 앞에 서 있는 사람.

그는 두 사람이 믿고 따르며 충성하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워, 워스 님!”

“철벽의 검왕을 뵙습니다.”

철벽의 검왕 존 워스.

소드 팰러스를 가출한 그가 모이엔의 막사에 나타난 것이다.

모이엔은 검을 거두며 내심 한숨을 삼켰다.

페시딘과의 통신에서 존 워스가 토벌대에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듣기는 했으나, 그래도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건만.

‘바로 날 찾아오실 줄이야.’

존 워스가 있으면 아무래도 자신 마음대로 일을 처리할 수도 없다.

모이엔은 난데없이 나타난 상전에 가슴이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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