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462화
898화
“괜찮지만 괜찮지 않은, 절반의 통과예요.”
“절반의 통과요?”
역시 깨끗한 물건은 아닌 것 같다. 그래도 일리나가 통과라고 하는 걸 보면, 분해해서 안식을 줘야 할 대상이 남은 것도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추가 설명이 필요할 것 같네요.”
마침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줄 라미아도 있겠다. 세 사람의 등장에 시끄럽게 하던 케마란과 비올라도 조용하다.
그러는 중에 케마란이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우물쭈물하며 쉴라의 눈치를 살핀다. 그러다 막사 전체를 쩌렁쩌렁 울리는 큰 소리와 함께 꾸벅 허리를 숙인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갑자기 죄송하다는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없는데?”
쉴라가 산뜻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케마란의 사과를 받지 않은 것도 아니다. 케마란이 알아서 사과를 하고, 단짝처럼 붙어 있는 네리베르가 가만히 있다면 분명 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는 것이니까.
두 사람의 성향에 대한 것이라면 벌써 오래전에 파악을 마치고 있는 쉴라였다.
“그래 여기 와서 말해 봐. 무슨 일이야?”
이드가 자리에 앉으며 재촉했다.
“그게 사실은요. 둥지에 문제가 없고, 사용할 수 있다고 하니까, 직접 사용하면 어떨지 궁금해서 무례하게 조르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재차 꾸벅 허리를 숙이는 케마란이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의 행동은 분명한 실례였다. 당장 대단치 않은 선물도 타인이 뜯으면 기분이 나쁘다. 그런데 기사의 생명과 같은 무구에 제삼자가 먼저 손을 댄다? 결투장이나 날아오지 않으면 다행이다.
“그렇다는군요.”
어떻게 된 일인지 안 이드가 쉴라를 바라보았다. 허락 없이 타인의 무기에 손을 대는 것은 무림에서도 금기. 까딱하다간 변명하기도 전에 목이 날아갈 일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완벽한 타인이거나, 적대적인 인물일 때의 일이고.
이번은 다르다.
“기사의 법도를 지키지 못한 케마란 경에게 은색 기사단 법규집 암송 200번을 명령한다.”
“충!”
단장과 단원이라는 관계 때문일까. 의외로 가벼운 처벌이다.
아무래도 내일부터 토벌이 다시 시작되는 것을 감안한 듯하다. 바로 복명한 케마란이 바로 막사를 나갔다. 쉴라의 명령을 즉시 이행하기 위해서다. 네리베르가 꾸벅 고개를 숙이고 그 뒤를 따른다.
두 사람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이드는 소음의 나머지 원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케마란은 이유를 알았고, 너는 무슨 시답잖은 이유야?”
“큼큼.”
이드의 추궁에 헛기침으로 외면하는 비올라다.
그러나 상관없다. 이 자리에는 그가 아니라도 대답해 줄 입이 있었으니까.
라미아가 이드의 옆에 붙어 고자질 하듯 말했다.
“비올라에 비하면 차라리 케마란의 호기심은 귀엽다구요. 비올라가 쉴라 경이 오기 전에 황금 둥지를 한번 뜯어 보게 해 달라고 얼마나 매달렸는지 알아요? 금방 뜯어 본 다음에 원상 복귀하겠다고 헛소리를 하는데. 기가 막혔다니까요.”
한 번 써 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분해라고?
분명히 말해 케마란의 그것보다 지극히 질이 나쁘다. 케마란의 요청은 물건이 상하지라도 않지.
비올라의 요구는 까딱 잘못하면 멀쩡한 물건이 쓰레기가 될 수 있다. 영혼이 들었을까 봐 분해하겠다고 할 때는 적극 반대하더니, 괜찮아서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려하니, 이제 와 분해란다. 쉴라의 손에 넘어가면 연구할 기회도 사라질 것이니 입장을 바꾼 것이다.
“회의를 마치고 올 동안 분해 후 조립까지 하겠다고? 네가 말하고도 쪽팔리지 않냐?”
“크흑.”
회의가 아무리 길어도 2, 3시간이다. 조립은커녕 분해라도 온전히 끝낼 수 있을까?
스스로도 조악하다 싶었는지, 저러다 올빼미가 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고개를 돌려 시선을 외면하는 비올라의 머리가 삶은 문어처럼 붉다. 아무래도 더 들어 볼 말은 없는 것 같다. 그사이 라미아가 황금 둥지에 대해 말했다.
이드는 비올라에 대한 신경을 끄고 그녀의 말을 경청했고, 그러다 물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진짜 영혼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는 거지?”
“네. 영적으로 완전히 깨끗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이 정도는 그냥 평범하게 저주받은 물건으로 볼 수 있는 정도죠.”
“……그거 평범하게 찝찝할 것 같은데?”
도대체 평범한 저주라는 게 어느 정도란 말인가? 쉴라도 썩 좋은 표정은 아니다. 저래서야 선물을 주고도 욕먹을 것 같다.
이드가 추가 설명을 요청했다.
“일단 미완의 마탑의 물건답게 평범하게 초인을 재료로 사용한 건 맞아요. 하지만 신체의 일부나 영혼이 남아 있는 건 아니에요. 그저 영혼을 이루는 가장 아래 단계인 아스트랄 베릭 단계의 정신체, 음, 좀 이해하기 쉽게 말해서 좀 찐~한 잔존 사념만 남아 있는 상태죠. 황금 둥지의 기능들은 이 사념이 움켜쥐고 있는 초인기에 그 근간을 두고 있고요. 그리고 이건 추측인데, 이 황금 둥지는 우연히 운이 좋아 만들어진 아티팩트일 거예요.” “어떤 점에서?”
“마탑이 목표로 하는 건 궁극적으로 현시대의 마법과 같은 것일 거예요. 파이어볼을 쓰기 위해 불을 지피는 마법사는 없잖아요? 하지만 현재 초인 마법은 초인의 몸을 잘라 붙이고, 영혼을 주무르잖아요. 그런 면에서 영혼의 대부분을 날리고 사념에 초인기를 남겼다는 것은 영혼에서 온전히 초인기만 떼어 낼 수 있는 전 단계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남겨진 흔적이 너무 거칠어요. 영혼 수술의 흔적도 없고. 그건 즉 저들이 의도한 변화가 아니라는 거죠. 그리고 그 증거라고 하긴 뭐하지만 비올라가 영혼의 관의 수준이 아스트랄바디에 대한 간섭이라고 했고요. 그러니 우연히 태어난 물건이죠.”
“그럼 이걸 연구용으로 써야지. 왜 상품으로 내줘?”
우연이건 어떻건 목표에 가장 가까운 물건이 나왔으면 그걸 연구하는 것이 옳지 않은가. 세상의 많은 물건이 우연이 겹친 행운에서 태어나고, 그걸 연구해서 온전한 제품이 세상에 나오는 경우가 적지 않다.
“필요한 건 다 뽑아먹었다는 거지 뭐겠어요? 그리고 이런 운에 운이 겹친 우연의 산물이 옆에 있으면 아무래도 차근차근 기초를 쌓아 나가야 할 마법이 사도로 흐를 수 있으니 상품으로 치워 버리겠다는 거겠죠.”
아무래도 사람인 이상 옆에 쉬운 길이 있으면, 눈이 가는 것이 인지상정. 어려운 문제가 있으면 뒤에 있는 답을 보고 싶은 법이다.
하지만 그렇게 답만 적어 내다 보면 정작 문제를 풀 능력을 기르지 못하게 된다. 탑주는 그것을 경계한 것이다.
“그리고 하는 김에 겸사겸사 외부적으로 자신들의 초인 마법이 이런 물건까지 만들어 낼 정도로 대단하다. 자랑도 하고 말이지.”
“그런 거죠.”
“역시 마법사. 최소 일석이조는 노린다는 건가.”
그나저나 사도를 경계한단다. 인체 실험이라는 사도 중의 사도에 깊이 발을 들이고서. 소똥이 묻나 개똥이 묻나 거기서 거기가 아닌가 말이다. 정말이지 이제와서라는 말이 입에 맴돈다.
“어차피 미친놈들의 생각이야. 이해 못할 것이고. 그럼 문제없다는 결과도 나왔으니. 황금 둥지는 쉴라 경이 쓰도록 하세요.”
이드의 말을 따라 라미아가 황금 둥지를 쉴라 앞으로 내 밀었다.
“방패를 드는 팔의 팔목에 가져다 대면 자동으로 장착돼요.”
“그런데 사람을 재료로 사용한 이런 물건을 써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영혼은 없다지만, 분명 초인의 희생으로 탄생한 물건인 것은 분명하다. 모를 땐 그렇게 탐나게 보더니, 세상 당당한 기사가 사용하기에는 아무래도 찝찝한 모양이다.
그에 물 한 잔을 비운 이드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섰다.
“뻔한 말이지만, 그러니 더욱 쉴라 경 같은 사람이 써 줘야 하지 않을까요?”
“제가 이 방패를 들고 던전을 공략하면, 그게 희생자들에 대한 복수가 된다는 말씀이시겠죠.”
“뭐, 그런 거죠.”
역시 너무 뻔한 말인가 보다. 이드가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그러나 가장 옳은 말이기도 했다. 황금 둥지에 영혼이라도 담겼으면 안식을 주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들이 남긴 힘으로 복수라도 대신해 주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복수가 부질없다는 건 다 헛소리다. 분명 복수를 두려워한 자들이 만들어 낸 말일 거라는 것이 이드의 생각이었다.
뻔한 말이지만 그래서 빠르게 납득한 것일까.
쉴라가 황금 둥지를 손에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저 던전에서 나올 물건을 생각하면, 황금 둥지는 차라리 깨끗한 물건일 겁니다. 탑주가 말했던 상품이 황금 둥지처럼 모두 영혼의 관에서 만든 것이 아니라면, 모든 상품에 초인이 재료로 쓰였을 테니까요.”
“…………가련한 이들에게 안식을 주면 좋겠지만.”
“욕심 때문에라도 그럴 리는 없죠.”
특히나 외교관들은 제국에 비해 부족한 초인 마법에 대한 자료로서 상품을 얻어 가려 침을 질질 흘리고 있을 것이 뻔하니 말이다.
“뭐, 우중충한 이야기는 그만하고. 한번 써 봐요. 정확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네요.”
“그래요. 저도 보고 싶네요.”
“그럼 명을 따르겠습니다.”
이드에 이어 황녀까지 요청하자 쉴라도 가만히 있지는 못했다.
탁자와 적당히 거리를 둔 후 라미아의 말에 따라 황금 둥지를 팔목 부위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황금 둥지의 일부가 슬라임처럼 늘어나며 팔목에 달라붙는다.
“전혀 이물감이 없군요. 마치 붕대를 조금 강하게 감아 놓은 느낌입니다.”
그 상태로 이리저리 팔을 움직인 쉴라가 감상을 말했다.
“사용법은 간단해요. 사용할 때마다 방패에 내공을 주입하면 돼요. 내공의 양은 크든 적든 상관이 없어요. 대신 이미지가 중요해요. 방패의 크기도. 비올라가 말했던 기능도 모두 이미지에 달렸어요.”
“이미지라는 말이죠.”
몇 번 라미아의 말을 되새기던 쉴라는 곧 짧은 기합과 함께 불끈 주먹을 쥐었다.
탕!
순간 눈 깜짝할 사이에 길쭉한 카이트 실드로 변한 황금 둥지의 아래쪽이 바닥을 찍으며 맑은 소리를 냈다.
쉴라의 모습은 방패에 온전히 가려진 뒤다.
“반응 속도가 좋은데?”
이드가 눈을 크게 뜨고 말했다. 저 정도면 대부분의 공격은 방패를 움직이지 않고도 막아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죠? 하지만 놀라운 건 쉴라 경의 빠른 내공 주입과 정확한 이미지의 구현이에요. 그게 정확하지 않으면 저러기 힘들거든요.”
“기사에게 있어 무기와 방어구란 자신의 몸과 같습니다. 그 구석구석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죠.”
쉴라의 짧은 대답이다. 그러는 중에도 카이트 실드의 형태이던 황금 둥지가 다양한 방패로 변신을 거듭했다.
그중에는 이드도 처음 보는 종류의 방패도 적지 않았다.
“좋군요. 그런데 가볍군요?”
“아쉽지만 무게 변환 기능은 없어요.’
아무래도 묵직한 방패일수록 강력한 공격를 방어하기에 용이하다. 하지만 그것도 쉴라 정도의 기사에게는 큰 문제는 아니다.
케마란이었다면 문제였겠지만.
“쉴라 경. 돌로 된 갑옷부터 꺼내 보세요.”
부러운 듯 보고 있던 황녀의 요청이다. 쉴라는 즉시 갑옷기능을 활성화시켰다.
즈즈즉.
그러자 회백색 암석질의 고대 전신의 것 같은 갑옷이 쉴라의 전신을 휘감았다. 파츠 아머가 대세가 된 세상에서 보기 힘든 풀 플레이트 아머의 형태다.
“가볍군요. 움직임에 아무런 지장도 없고, 갑옷이라기보다는 조금 두꺼운 옷을 입은 느낌입니다. 비올라의 말대로군요.”
이드는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는 쉴라와 그녀가 걸친 갑옷을 유심히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곤거렸다.
“저 갑옷, 내 금속을 다루는 초인기와 느낌이 비슷한데?”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다루는 속성이 다를 뿐이지. 아마 같은 계통의 초인기일 거예요.”
“그럼 초인기가 능숙해지면 이드도 즉석에서 저런 갑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겠네요.”
“가능하죠. 대신 그럴 필요가 있을지 의문이지만요.”
그렇게 세 사람이 속닥거리는 사이.
쉴라는 거침없이 황금 둥지의 나머지 기능들도 사용하며, 그 능력을 완전히 파악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