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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490화


926화

“싸울 수 있을 정도로?”

중상을 입고 바로 움직일 수 있는 건 분명 대단하지만, 전투를 할 수 있는 것과는 별개였기에 물었다. 이곳에 관광하러 온 것도 아니고, 싸울 수 없다면 움직일 수 있다고 해도 의미가 없다.

“아무래도 그건 몇 명을 빼곤 힘들 것 같아요.”

“……아닙니다. 싸울 수 있습니다!”

라미아의 말에 빠르게 정신을 차린 기사가 거친 목소리로 소리쳤지만, 이드는 손을 들어 말을 막았다. 자고로 아프지 않다는 무인의 말은 믿을 게 못 되는 법이다. 긴 시간 단련한 신체에 대한 믿음인지, 자만인지, 그것도 아니면 싸우다 죽겠다는 고집인지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건 여섯 명 정도네요. 그런데 정확한 건 아니에요.”

아니나 다를까. 그 말과 함께 라미아가 가리켜 보이는 사람 중에 싸울 수 있다던 기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괜찮아. 내가 확인해 보면 되니까.”

마법으로도 혈도의 상태 등을 살필 수 있지만, 시간이 걸리는 섬세한 작업이라 이곳에서 하기엔 적당치 않은 것이다.

그에 이드가 나섰다. 내부를 살피기엔 마법보다 무공이 훨씬 뛰어나다. 이드가 부상당한 기사들의 손목을 잡고 상태를 파악했다. 기사들은 손목이 잡힐 때마다 ‘싸울 수 있습니다!’라고 소리쳤지만, 귓등으로 흘린 이드는 무심히 확인을 마치고 일어났다.

“다섯 명이네. 나머지는 복귀시켜야겠어.”

“한 명 줄었네요?”

“응, 혈도에 무리가 간 상태라서 마법으로는 확인이 어려웠을 거야.”

그에 이드에게 열외 선고를 받은 기사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줬다 뺏은 것 같은 상황이라 그 실망이 더욱 큰 것 같다.

“그럼 부상자들은 복귀시키도록 하겠습니다.”

딜런이 말했다. 임시지만 지원조의 기사들은 그의 지휘하에 있었으니, 부상자들의 안전한 복귀 역시 그의 책임이었다.

그에 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그 일은 내가 하도록 하지. 아무래도 그게 빠를 테니까.”

입구에서 가깝다고 해도 부상자를 챙기며 기습을 경계하다 보면 왕복 시간은 세 배 이상 늘어난다. 거기에 실제 기습이 있을 경우 그 피해는 예상하기도 힘들다.

거기에 이드가 직접 하겠다는데, 반대할 사람도 없다. 다만 라미아와 일리나를 제외한 이들이 빠르다는 게 무슨 소린가, 하고 궁금해할 때 이드가 노드를 불러냈다.

새로운 정령의 출현이지만, 이미 라스갈과 범고래를 불러냈던 이드였기에 기사들은 따로 놀라지는 않았다.

대신 노드가 부상자들을 안아 올리는 모습에는 짝, 하고 손뼉을 쳤다. 과연 백문이 불여일견이라고 할까?

“확실히 저렇게 날아가면 왕복도 금방이지.”

빠르다고 한 이드의 말이 바로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그럼 갔다 올게.”

짧은 말과 함께 이드가 실드 밖으로 나갔다. 그런 이드를 따라 끈에 묶인 풍선처럼 허공에 뜬 기사들이 줄줄이 끌려 갔다.

그렇게 이드와 부상자들이 사라지자 라미아가 기사들을 불러 모았다.

“그럼 나머지 기사분들은 적들의 시신을 가져와 주세요. 아무래도 귀중한 증거이자 연구 자료가 될 것 같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라미아님.”

복창한 기사들이 무리를 지어 실드 밖으로 나섰다. 그러자 실드에 막혀 있던 비릿한 혈향이 코로 들이닥쳤다. 어둠 속 혈향만 가득한 공간은 음산했다.

그러나 기사들에겐 이게 차라리 나았다. 분위기는 음산할지언정 새로운 적의 기척은 없었기 때문이다.

죽은 시신을 챙기는 일은 어려울 것이 없었다. 처음 공격해 왔던 자들과 이후 송곳을 쏘며 나타난 자들. 각자 네 구씩의 시신을 챙긴 기사들이 실드 안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명예 후작님?”

그들은 벌써 돌아와 있는 이드의 모습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큰 상처가 없는 적당한 시체를 찾아 돌아오는 데 걸린 시간이 결코 길지 않았음에도 벌써 이드가 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까지 이동해 왔던 시간을 생각하면 입구에 도착은커녕 절반도 가지 못했을 시간이었다.

“시체 찾느라고 고생하는군.”

그런데 이드는 벌써 돌아와 태연하게 고생했다 말하고 있지 않은가.

“깜짝 놀랐습니다. 벌써 돌아오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부상당한 기사들도 빠르다면서 놀라더군. 그리고 이렇게 빠르지 않았으면, 딜런 경의 할 일을 빼앗지도 않았겠지. 결코 딜런 경이 믿음직스럽지 않아서 나선 게 아니란 말이지.”

그에 갑자기 지목된 딜런이 두 손을 흔들었다.

“오, 오해십니다. 절대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습니다.”

“하하. 나도 농담이었네. 그러니 너무 긴장하지 말아. 딜런 경은 나름 잘하고 있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정말 대단하십니다. 절대 가깝지 않은 거리인데. 전 지금까지 명예 후작님만큼 빠른 사람은 보지 못했습니다. 명예 후작님 옆에서 그런 경험을 한 부상자들이 부러울 정도입니다.”

“맞습니다. 복귀하면 어떤 느낌이었는지 물어봐야겠습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기사들이 한둘이 아니다. 하지만 그들은 알까?

노드에게 안겨 이드의 뇌전전궁보를 간접적으로 경험한 동료 기사들이 아직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두운 중에도 주변 광경이 길게 늘어지며 뿌옇게 섞이던 모습과 전신을 내리누르는 기이한 압박감. 그리고 귀에 가득한 이명과 함께 찾아온 메스꺼움까지.

이후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남은 지원조의 호기심을 알았다면 적극 나서서 만류할 것이다.

귀한 경험이긴 하지만, 얻을 것 없이 충격밖에는 남는 것이 없다고.

뭐, 그게 아니라도 부상자들은 지원조를 생각할 여유 같은 건 없을 것이다.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기 위해 그들이 정신을 차리길 기다리고 있는 황녀와 스폴을 비롯 삼조의 주요 인물들이 이미 그들을 둘러싼 채 모여 있었기 때문이다.


기사들이 라미아 앞에 여덟 구의 시신들을 늘어놓았다.

“연구 자료로 쓸 생각이야?”

“네. 시신을 만지는 건 좋아하지 않지만, 마탑의 초인 마법을 알려면 어쩔 수 없죠.”

물론 라미아에겐 비올라도 있고, 바이트 타블렛도 있지만 대외적으로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니까.

그런 라미아를 바라보다 이드가 뒤늦게 떠오른 듯 적에게서 빼앗은 호각을 꺼내 보였다.

“참, 이거. 위기에 몰리니까 대장으로 보이던 놈이 꺼내 불려고 하더라고. 내 생각엔 여기 이 키메라 같은 초인들을 폭주하게 만드는 물건이 아닌가 싶은데.”

“흐음.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네요. 그럼 시험해 볼까요?”

말과 함께 어서 달라는 듯 손을 까딱거리는 라미아. 이드는 그녀의 손 위에 호각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시험해 보는 거야 문제가 없지만, 이미 죽었는데 의미가 있어?”

그에 조용히 서 있던 기사들도 다 같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죽음에 대해선 잘 아는 기사들이다.

살아 있을 땐 뭐든 할 수 있지만 죽은 후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혹시나 싶어 주변을 둘러봐도 생존자는 보이지 않는다.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단 하나의 적도 남겨 두지 않았다.

“제 추측이 맞다면 효과 정도는 확인할 수 있을 거예요.”

알았어. 한번 해봐.”

자신만만한 라미아의 말에 이드가 일리나 옆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내심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나 싶어 확인했지만, 산자는 없었다. 심장이 멈추고, 피와 산소의 공급이 끊어지면서 뇌도 기능을 다하고 죽어 버렸다.

컴퓨터로 치면 파워가 망가지고, CPU가 타 버린 상황이다. 두 부품이 망가지면 기술자 할아버지가 와도 컴퓨터를 되살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이것이 라미아 앞에 놓인 시신의 상태였다.

‘하지만 뭔가 생각이 있으니까 저렇게 서두르는 거겠지.’

그 순간 라미아는 빠르게 호각을 살피고 있었다. 더 볼 것도 없이 불면 될 것 같지만, 혹시 특이한 작동법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호각을 가지고 있던 자의 능력을 헤아린 것일까. 다른 기능이나 작동법은 없어 보였다.

그에 라미아가 호각을 입에 물었다. 아니, 무는 척을 했다. 애초에 가면 안에는 호각에 숨을 불어 넣을 폐가 없으니까.

대신 폐보다 더 정교한 마법이 있다. 윈드 마법에 따라 가면의 입술과 호각 사이에 바람이 모여들더니,

삐이이익-

귀를 찌르는 높고 날카로운 소리가 났다.

아무리 시끄러운 싸움 중이라고 해도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소리.

그러나 이드는 그 소리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여덟 구의 시신을 노려보았다.

“반응이 없는 걸 보면 아무래도 틀린・・・・・・ 어?!”

아무런 반응이 없자 고개를 흔들던 이드. 하지만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키메라 초인들의 몸에서 검은 안개 같은 것이 뿜어지자 그것을 노려보기 시작했다.

“움직였다!”

모두의 눈이 검은 안개를 바라보았다. 시신이 반응한 것은 신기하지만 지금은 안개에 집중할 때였다.

그런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시신으로부터 일 미터가량 솟아오른 검은 안개는 흩어지지 않고 이리저리 일렁였다. 마치 갈 곳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다른 시신에서 솟아오른 안개들과 가까워지며 하나로 모여 뭉친다 싶더니.

파스스.

힘이 다한 듯 다음 순간 흔적도 없이 허공 중에 녹아 사라져 버렸다.

“시신이 어떻게…….”

“대답은 잠깐 기다려요.”

그와 함께 질문하려던 이드를 막은 라미아가 키메라 초인의 시신을 살피기 시작했다. 일에 집중한 그녀 주변으로 크고 작은 마법진이 나타나 그녀의 작업을 보조했다.

그에 이드들은 라미아가 일을 끝낼 때까지 조용히 침묵을 지켜야 했다.

그러길 이십 분.

“휴~ 끝났어요.”

라미아가 확인 작업을 마친 여덟 구의 시신을 갈무리해 아공간에 집어넣고는 일어났다.

그에 고생했다는 마음을 담아 라미아의 어깨를 안마하듯 주무르며 이드가 물었다.

“고생했어. 끝난 거야?”

“급하게 확인할 부분은 끝났어요.”

“잘했어. 그런데 아깐 어떻게 한 거야? 시신이 어떻게 호각에 반응하지?”

이드가 가장 궁금하던 것에 대해 물었다. 그게 궁금하긴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

라미아는 어떻게 설명해야 이드와 일리나는 물론이고 근육 뇌의 기사들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를 잠시 고민한 후 말을 이었다.

“그건 일종의 조건 반사 같은 건데. 잔존 마나로 인한 기계적인 반응이에요.”

“잔존 마나?”

“네. 사람이 죽는다고 그 사람이 가지고 있던 마나가 즉시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마법진이 파괴되었다고 마나석이 바로 쓸모없어지지 않는 것처럼요.”

지구식으로 말하면, 배터리만 무사하면 차가 부서져도 배터리에 충전된 전기는 즉시 사라지지 않고 완전히 방전될 때까지 일정 시간 남아 있는 것과 같은 이야기다.

그리고 그렇게 체내에 남은 잔존 마나를 동력으로 삼아, 키메라 초인의 몸에 심어진 초인기를 부여하는 장치가 호각에 반응했다는 것이었다. 

“사용자가 죽었는데도 그게 가능해?”

“가능해요. 진짜 몸의 일부가 아니라,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외부에서 부착한 장치잖아요. 그러니 미리 설정해 둔 신호에 사용자의 의지와 상관없이 반응을 일으킬 수 있는 거죠. 대신 반응에 필요한 마나가 별로 남아 있지 않아서 중간에 흩어지긴 했지만.”

“그거참・・・・・・ 섬뜩한 이야기네.”

이드가 고개를 저었다.

저 말대로라면 이후 마탑에 의해 초인기를 얻어 초인이 된 사람은 계약 때문이 아니라도 언제든 마탑이 원하면 폐기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닌가.

“그렇죠. 아마, 마탑의 초인 마법에 침 흘리던 나라들도 이걸 알면 흠칫할걸요.”

“그거야 그렇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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