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08화
944화
본인이 말해 놓고 마른침을 삼키는 탑주다. 그의 모습에서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쿠르르릉~
그 순간 바이트 타블렛이 전차의 바퀴처럼 구르기 시작했다. 이드의 뒤쪽에 있던 바이트 타블렛은 최종적으로 탑주의 등 뒤에서 멈췄다. 쿵.
목적지에 도착한 바이트 타블렛이 바닥에 놓이며 묵직한 소리가 났다.
그에 한순간도 바이트 타블렛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던 탑주는 새삼 놀란 듯 복잡한 시선으로 이드를 본다.
자주 본 사이는 아니라도, 처음 보는 모습.
왜 저러나 싶어 고개를 갸웃하는 이드.
“왜 그렇게 보시오? 무슨 문제라도?”
“아니오. 단지…… 단지 이렇게 순순히 돌려받을 수 있을 줄은 몰랐소.”
그 말에 직전 탑주에게서 보였던 긴장감이 이해 가는 이드다.
“내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라고 여겼단 말이오?”
“정보만 받고 바이트 타블렛은 억지를 부려 돌려주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여겼소. 사실 거의 확신하고 있던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아니, 사람을 어떻게 보고…….”
솔직한 탑주의 말에 기분이 나빠지는 이드다. 자신을 약속도 지키지 않는 사람으로 봤단 말인가.
하지만 따지고 보면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이기는 했다. 본래 돈은 빌려주는 것보다 돌려받는 것이 더 힘든 법 아니던가. 계약서를 쓴 거래 관계라면 다르겠지만, 그게 아니라 그저 아는 사이에 돈을 빌려준 경우엔 준 사람이 을이 되는 것이 보통이다.
하물며 지금 이드는 계약서는커녕 단순 채무 관계를 뛰어넘어 바이트 타블렛을 인질로 잡은 인질범과 같은 위치다.
멀쩡한 사람에게 돈 돌려받기도 힘든데, 인질범이 순순히 인질을 내어 줄 거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드가 당장 내놓은 정보가 부족하다며 돌아서도 어쩔 수 없는 것이 탑주의 입장이다. 물론, 그도 힘을 가진 만큼 얌전히 물러나진 않겠지만.
때문인가, 깔끔한 거래에 감동한 탑주가 다시 한번 정중한 예를 차렸다.
“명예 후작을 잘못 보고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구려. 약속을 지켜 준 명예 후작께 감사드리오.”
“어차피 거래에 대한 약속을 지켰을 뿐이오.”
팔랑팔랑 손을 흔드는 이드다
그런 한쪽에선 라미아가 아공간에 보물을 쓸어 담고 있었다. 수챗구멍에 빨려드는 물처럼 보물들이 차르르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열린 검은 아공간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탁자에 놓여 있던 수정구와 원통을 확인하는 라미아다.
가벼운 터치만으로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수정구를 보물과 함께 아공간에 던지고 원통을 열었다.
뽁!
원통 안에는 지형을 정밀하게 그린 그림과 함께 한 귀퉁이에 지명이 적힌 작은 지도가 들어 있었다.
지명을 확인한 라미아가 이드에게 지도를 건네주며 탑주를 향해 물었다.
“이 정보는 확실한 건가요?”
“내가 만든 초인 마법을 걸고서 확실한 정보요.”
초인 마법이라니, 그렇다면 마나를 건 맹세도 필요 없을 정도로 확실하다는 말.
“정말이지 생각지 못한 곳에 있었네요. 한데 이 상세한 지도를 보니 이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것 같은데. 초인파를 쭉 감시하고 있었나 보죠?”
“하하하.”
라미아의 말에 탑주가 웃었다. 그렇다고 답하진 않았지만 긍정이나 다름없다.
“생각보다 세 곳의 관계가 돈독한 것은 아닌가 보군요.”
그게 아니고서야, 검후를 가두고 있는 초인파의 중요 거점을 미리 조사해 두었을 턱이 없다. 설마하니, 초인파에서 알려 준 것도 아닐 테고 말이다.
“어디까지나 서로 필요에 의한 관계일 뿐이오. 후작 부인이 말하는 그런 끈끈한 관계였다면 애초에 토벌대가 조직되기나 했겠소? 거기에 청색 기사단과 발터가 토벌대에 합류했다는 것은 이번 기회에 마탑을 지우거나, 길들이겠다는 의미요. 그런 상황에 돈독이라니. 어림도 없는 말이지.”
비웃음을 머금은 탑주의 반응은 차가웠다.
그 모습에서 소드 팰러스와 초인파 양측과 선을 그으려 한다는 느낌을 받은 이드다.
‘외교관들을 상대로 마탑을 유치하도록 권유한 것도 그런 목적일 수 있겠구나.’
아나크렌을 제외한 제국이나 외국에서 마탑을 받아 준다면 소드 팰러스와 초인파의 지원이 끊어지더라도 대륙에 홀로 설 수 있는 잠재력을 가진 것이 미완의 마탑이다.
던전 공략에 상품을 걸어 놓은 것도 각국에 초인 마법의 대단함을 알려 유치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만들려는 장치일 수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가능성은 충분하지. 가만, 그러고 보면 마스 하고는 이미 교류가 있는 것 같던데. 이거 어쩌면 토벌이 계기가 된 게 아니라 그보다 한참 전부터 마탑에서 홀로서기를 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네.’
만약 이 토벌이 끝나고 마탑이 제국이나 왕국의 소속이 된다면 어떨까? 아마도 소드 팰러스와 초인파는 닭 쫓던 개가 될 것이 확실할 것 같다. 거기에 마스가 있으니, 그 가능성도 높다.
그저 마탑을 쓰기 좋게 길들이려 했던 소드 팰러스와 초인파로서는 그 난감함을 말도 다 할 수 없을 지경일 것이다.
“후후후. 아무렴 당하고 살 수는 없는 일이지.”
그 얼굴을 상상하니 흐뭇한 웃음이 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이드다.
그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는 탑주다. 그리고 바이트 타블렛으로 다가가 천천히 쓰다듬다 손이 멈칫한다.
그에 라미아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더했다.
“아, 말하는 걸 한 가지 빼먹었네요. 아무래도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서 말이죠. 그냥 두면 여러 가지로 정보가 샐 가능성이 있어서 다양한 방법으로 묶어 두었어요. 원한다면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이 자리에서 풀어 드리죠.”
듣기에 따라서는 ‘마탑에서는 이 봉인을 풀 능력이 없다’라고 말한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는 소리다.
“사양하겠소. 이 정도는 풀어내는 것이 크게 오래 걸리지 않소.”
당연히 고개를 저어 거부하는 탑주다.
거기에 쉽게 돌려준 것이 고마운 게 사실이기도 하지만, 끝까지 방심할 수 없는 일.
봉인을 풀다가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이 귀한 바이트 타블렛을 또 적의 손에 넘긴단 말인가.
거기에 순순히 돌려준 것과 달리 바이트 타블렛에 어떤 수작을 부려 두었을지 모르는 일.
“눈을 떠라 바이엘.”
시동어로 아티팩트의 아공간을 연 탑주가 바이트 타블렛을 아공간으로 밀어 넣고는 돌아섰다.
“이것으로 거래는 끝이오.”
“그럼 다음에는 토벌하는 자와 토벌당하는 자로 만나게 되겠구려.”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는 일이 아니겠소.”
미완의 마탑이 국가 마탑이 된다면, 정치적 상황에 따라 토벌을 계속하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다만 이드가 듣기엔 어림없는 소리다. 토벌이 멈출 수는 있어도, 과연 라미아를 향하던 탑주의 살의도 멈출까.
그리고 라미아에게 살기를 보인 대가를 받으려는 이드가 멈춰 설까?
‘날 멈추려면 사과의 대가를 산더미처럼 가지고 와서 라미아 앞에 엎드려 빌어야지.’
가능성이 없다고 봐야 할 것이다.
“두고 보면 자연 알게 될 일. 그럼 또 봅시다.”
“잠시만, 명예 후작에게 해 드릴 말이 하나 더 있소.”
“거래는 끝났소만 입탑 권유라면 미리 사절이오.”
“나도 같은 자리에서 또 거절당하고 싶은 생각은 없소. 그저 깔끔한 거래에 대한 답례의 의미로 정보 하나를 더 드리리다.” 서비스란 말이다. 공짜라는데 싫을 이유가 없다.
“그렇다면 거절할 이유가 없지. 미리 고맙다는 인사를 하지. 어떤 정보요.”
“삼검왕에 대한 것이오. 아마도 검왕 페시딘을 제외하고 다른 검왕도 모르는 정보일 거요.”
“이런 반가울 데가.”
슬슬 그들과의 관계를 끊으려는 탑주가 내놓는 정보다. 진짜 고마움도 있을 수 있겠지만, 정말 순수한 의도는 아니리라.
이드와 소드 팰러스의 관계가 좋지 않다고 하니, 그것을 이용하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러면 어떤가? 받아서 잘 써먹으면 그만이지.
이드의 입가에 진한 미소가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탑주의 입가에도 비슷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상태로 잠시간 더 이야기를 주고받은 후 헤어졌다.
슈우우우-
탑주를 찾아갈 때와 마찬가지로 허공을 날고 있는 이드와 라미아다.
“들키진 않은 것 같지?”
조용히 비행하던 중 이드가 물었다. 앞뒤 없는 갑작스러운 말이지만, 무엇을 말하는지 알고 있는 라미아가 이해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물론이죠. 아까 보셨잖아요. 만져 보고도 모르는 거.”
우쭐한 표정으로 턱을 치켜드는 라미아다. 그리곤 곧 악동 같은 얼굴로 쿡쿡거리며 웃었다.
“봉인도 있으니 눈치채는 건 아마 한참 후일 거예요. 알고 나면 분해서 혈압으로 쓰러질지도 몰라요.”
“그래 주면 고맙지. 정말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좌우간 우리가 넘긴 바이트 타블렛이 쓸모가 없다는 건 확실하지?”
“그렇다니까요. 몇 번을 물어요. 완전히 쓰레기가 된 건 아니지만, 탑주가 원하는 목적으로는 절대 사용할 수 없는 건 확실해요.”
그 말대로다. 바이트 타블렛을 이루고 있는 물질적인 부분과 마법적인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에고가 분리되어 있다. 그리고 분리된 에고는 현재 케마란과 함께 있고.
에고가 빠진 바이트 타블렛은 OS가 빠진 컴퓨터라고 할 수 있다. OS가 없는 컴퓨터로 뭘 할 수 있을까.
“그런데 만에 하나 끝까지 모르고 사용하면?”
“그땐 정말 손 안 대고 코 풀기죠. 실패한 마법의 반동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텐데. 바이트 타블렛의 목적을 생각하면 탑주가 아니라 드래곤이라도 무사하기 힘들걸요. 그리고 만에 하나 기적적으로 성공하더라도 마법에 불완전성이 각인될 테니. 그것도 볼 만하겠죠.”
이드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완성되지 못한 미완의 신공들을 떠올렸다.
익히기만 하면 천하제일이 된다는 전설이 붙어 있는 그런 신공은 많지는 않지만, 몇 개나 있다.
그에 매달려 스러지는 무림인이 얼마나 많던가. 라미아의 말은 온전한 마법이 아닌, 그런 미완의 신공 같은 마법이 만들어진다는 말이다. 초인 마법의 이론을 가지고 만들어진 모든 마법들이 말이다.
초인 마법사들의 입장에서는 이보다 끔찍할 수 없는 일.
“그런데 그거 초인들에게도 영향이 있는 건 아니겠지?”
“없어요. 방식이 다른걸요.”
저만한 확신이다. 이드는 고개를 끄덕였다.
“참, 추적은 어때?”
“아공간에 들어 있는 탓인지 아직 아무런 신호도 없어요. 하지만 아공간에서 나오기만 하면 주기적으로 신호가 올 거예요.”
“부디 탑주에게 걸리지 않기를.”
그 순간이다.
우르르르릉~
천둥 치는 소리와 함께 세상이 흔들렸다. 정확히는 지하 공간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조금 더 시간을 줄 줄 알았더니. 벌써 시작하나 보네.”
갑작스러운 변화지만 크게 놀라지 않는 두 사람이다.
이미 이 일에 대해서도 탑주의 서비스의 하나로 들었던 것.
불량품을 받았다는 것도 모르고, 서비스를 넉넉히 넘긴 탑주다. 만약 사실을 안다면 정말 목덜미를 잡을지도?
“일단 좀 더 속도를 올리자. 최대한 빨리 조원들과 합류해야지.”
“맡겨 주세요.”
라미아의 대답과 함께 두 사람의 신형인 검은 공간을 빛살처럼 뚫고 나갔다.
콰콰콰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