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32화
968화
검이 먼저 공간을 가르고, 그에 끌려가듯 일리나가 뒤를 따른다. 절정에 이른 검기 운신법은 마치 얼음 위를 미끄러지는 듯 보이게 했다. 이드 눈엔 그 모습이 선녀처럼 보였지만, 마법사들에게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힘없이 추락하는 길을 본 마법사들의 낯빛이 퍼렇게 질렸다.
“오, 오지 마!”
그들은 두려움에 외쳤다. 하지만 동네 꼬마들 다툼도 아니고, 멈추란다고 멈추면 그게 싸움인가. 마법사들은 일리나를 막기 위해 필사적으로 마나를 쥐어짰다.
그중 한 놈은 뒤돌아 벽을 두드렸지만, 막혀서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음이 급해 생각지 못한 것이지만, 일리나와 토벌대가 도망치는 것을 막기 위해 자신들이 신나서 조치했었다.
지금에 와서는 스스로 목을 조른 결과가 되었지만.
“자, 장로님! 부관주님!! 도망가야 합니다!”
“아둔한 놈 닥치지 못하겠느냐!”
버럭 고함을 지른 케닐이 들고 있던 지팡이를 부러트렸다. 그런 지팡이 안에서 튀어나온 것은 하얀 벼락과 깊고 푸른 물이었다. 짜자작.
출렁.
번개를 휘감은 해일이 폭풍처럼 쏟아지는 마법을 파훼하고 막 통로 끝에 발을 들이는 일리나를 덮쳤다.
일리나는 발을 빼는 대신 중심을 낮추고 난화십이식의 검강을 피워 냈다.
검 끝이 파르르 떨렸다. 그리곤 곧 무겁고 음습한 비혼의 강기가 물길을 갈랐다.
뱃머리에 부딪힌 듯 갈라진 물줄기가 일리나를 비켜 통로 밖으로 쏟아졌다. 그 모습이 마치 쌍둥이 폭포 같았다.
떨어지는 물방울 사이사이 하얀 번개가 번쩍였다. 하지만 정작 일리나에게 물방울 하나 튀지 않는데 아무리 번뜩여 봐야 무슨 소용인가.
“이런 불똥이 나한테 튀네.”
오히려 뒤에서 구경 중이던 이드가 자리를 옮겨야 했다.
“부관주 길 장로가 죽었습니다. 지금 전력으로는 작전을 진행할 수 없습니다. 후퇴해야 합니다.”
자신이 보유 중이던 비장의 수단 중 하나를 꺼내고도 일리나의 발을 잠깐 멈추는 것에서 그쳤다. 그 모습에 케닐은 계획의 실패를 인정했다. 요르문간드를 뒷산 꽃뱀처럼 손쉽게 처리한 이드도 그렇고, 눈앞의 소검후 역시 예상하고 있던 것보다 강했다. 강한 것도 그냥 강한 것이 아니라, 매우 강력했다.
그렇기에 케닐은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이번에도 부관주가 공격을 명령한다면 따르지 않을 생각까지 했다.
제발 그러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 일은 탑주께서 내리신 명령이오. 후퇴는 있을 수 없소.”
저런 대답이 나오면 어쩔 수 없다.
케닐은 이 와중에도 마나를 쥐어짜고 있는 두 제자를 잡아채고는 그 자리에서 블링크 마법을 사용했다.
“제기랄! 그럼 멀뚱히 서 있지 말고 그렇게 말하는 부관주가 직접 싸워 보시오!”
“저, 저도!”
벽을 두드리던 멍청이의 목소리가 멀어졌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저 멍청이는 자신의 제자도 아니다. 세 사람이 사라짐과 동시에 일리나를 밀어내던 물과 번개가 사라졌다. 두 제자가 쏟아 내던 마법의 폭풍과 함께. 부관주에게 엿을 먹이기 위해, 동시에 자신을 제재하지 못하도록 케닐이 캔슬시킨 것이다.
앞을 막아서던 마법이 사라지자마자 쿵 하는 소리와 함께 돌가루가 튀었다. 그리고 돌연 일리나의 신형이 사라졌다.
음성의 전달까지 막아 주던 보호 마법이 사라져서 왜 공격이 멈췄는지를 알았기 때문이다.
적의 분열은 언제든 반길 일이다. 그리고 분열된 순간을 놓치는 아까운 짓을 할 이유도 없다.
사라진 일리나가 나타난 것은 벽에 붙어 돌처럼 굳은 마법사의 목을 벤 검이 멈출 때였다. 마법사는 자신의 목이 잘렸음도 인지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 순간 다시 검과 일리나가 사라졌다. 그녀의 검이 향한 상대는 해더웨이.
하지만 앞서와 달리 일리나의 공격은 성공하지 못했다.
기묘한 진동이 검을 타고 흐르며 공격이 막혔다.
띠이이이-
일리나는 해더웨이를 쉽게 보지 않았다. 경계하고 있던 대상이기에 극쾌의 뇌정화의 검력을 실었다. 그럼에도 공격이 실패했다. 그것도 처음 보는 방어수단으로 인해.
거기에
띠이잉-
공격까지 겸하고 있다. 진동음이 높아짐과 동시에 소리가 칼날이 되어 공격해 왔다. 소리가 사방에 번지듯 공격은 전방위를 노렸다.
일리나는 조금 더 긴장의 끈을 조이며 잠영화와 혈화를 연달아 펼쳐 냈다. 물샐틈없는 검막과 함께 핏빛 검강이 해더웨이를 노렸다. 실로 훌륭한 공방일체.
꽈르르릉!
엄청난 속도로 공격과 방어가 교차하니 귀가 먹먹한 폭음이 났다. 폭염이 뿜어지고, 통로가 부서지며 파편이 튀었다.
“흥, 자신만만하시더니 보시오. 결국 부관주 당신도 별수 없었던 거잖소.’
검과 마법의 무시무시한 격돌. 멀리서 그 모습을 본 케닐은 고집만 부리던 부관주를 비웃었다.
“자, 장로님. 그런데 여기도 안전하지는 않은 거 아닙니까?”
“나도 밖으로 나가고 싶지만, 어쩌겠느냐. 출입 권한은 부관주가 쥐고 있는데.”
“하지만 여기엔…….”
마법사는 차마 말을 다 하지 못하고 건너편을 힐끔거렸다. 거기에는 이드가 그들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명예 후작이 있지.”
요르문간드를 두드려 잡던 모습이 아직 눈에 아른거린다. 어쩌면 늑대를 피해 호랑이 굴에 머리를 들이민 걸 수도 있다. 그러나 통로 안에 있어도 죽는 건 마찬가지다.
오히려 뒤가 막혀 있어 피할 수도 없다. 그보단 무서운 호랑이가 있어도, 넓은 석실 안이 생존 확률이 높을 것이라는 것이 케닐의 생각이다.
“명예 후작이 공격하면 라운드 실드로 막고 즉시 이동한다. 내가 보유한 아티팩트라면 연속 이동도 가능하니, 도망치는 것은 문제가 아니지. 그러니 너희는 내 명령만 확실히 따라라.”
저 싸움의 결과가 나올 때까지만 견디면 된다. 어느 쪽이 이겨도 케닐의 입장엔 반가울 게 없다. 그래도 내심 바란다면 부관주의 패배와 죽음이다. 만약 운이 좋으면 자신이 그의 빈자리를 노릴 수 있으니까. 물론 그것도 무사히 후퇴한 후의 일이겠지만 말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한시도 눈을 떼지 말고 명예 후작의 움직임을 지켜봐라. 그게 우리가 사는 길이다.’
케닐은 싸움이 치열한 통로 안을 바라보며 다짐하듯 말했다.
그러나 그의 그런 당부는 조금, 아주 조금 늦은 것이었다. 케닐의 말이 끝나기 전, 강렬히 부딪히는 검과 마법에 마법사들이 잠시 눈을 빼앗겨 버린 것이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누군가에겐 아주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드가 그런 경우다.
“헐~ 내 영역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서 눈까지 돌려?”
신종 자살법이라도 되나? 아님, 여성 혐오가 있어서 죽을 때 죽더라도 일리나가 아닌 자신의 손에 죽고 싶다는 것일까?
“아무렴 무슨 상관이야. 죽고 싶다면 죽여 줘야지.”
그런 요구라면 망설임 없이 들어줄 용의가 있다. 이드가 분뢰보를 밟으며 질주했다. 그 앞에 있던 공기가 압축되어 부서지며 일그러진 궤적을 만든다.
0.2초 만에 실드 앞에 멈춰 선 이드가 실드를 쓰다듬었다. 푸르게 물든 파옥수에 실드의 일부가 가루가 되어 부서졌다.
잠깐 한눈을 팔던 마법사가 고개를 돌려 이드를 본 것도 그때였다. 눈알이 튀어나올 듯 경악한 마법사에 이드가 소리 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히익! 자, 장로님, 뒤, 뒤에……!”
“이ᄃ…….”
떨리는 마법사의 목소리에 대한 케닐의 반응은 빨랐다. 그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아티팩트를 사용하려 했다.
하지만 이미 실드에 구멍을 낸 이드의 손가락이 케닐의 뒤통수에 닿는 것이 더 빨랐다.
검지와 중지. 두 손가락 끝이 살짝 닿았다 떨어지는 순간.
주르르륵.
아티팩트를 잡은 케닐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얼굴에 있는 모든 구멍에서는 피와 함께 내가중수법에 의해 크림처럼 변해 버린 뿌연 뇌수가 흘러내렸다. 이드는 남은 두 마법사에게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다.
마력이 끊어지자 실드 마법이 사라졌다. 바닥으로 추락한 세 사람은 곧 케닐이 만들어 낸 물속으로 가라앉아 사라졌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다 토벌대가 있는 통로를 돌아보았다.
어쩌면 토벌대에선 생포를 원했을지도 모르지만, 이드는 굳이 죽이는 것을 택했다.
이 이상 제국에 초인 마법이 넘어가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견물생심이라고, 아무리 강한 제국이라도 있으면 쓰고 싶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연 희생자가 나올 테니까. 그런 악순환은 사양이다. “그럼 부관주만 처리하면 끝인데.”
이드가 고개를 들었다.
통로 안에서는 아직 두 사람이 치열하게 부딪히고 있었다.
묘한 균형이 오래갈 것 같은 순간, 장검과 단검을 동시에 든 일리나가 승부를 건다.
시계추같이 일정하던 패턴이 일그러지고, 십자의 검화가 해더웨이의 방어를 빠르게 갉아먹는다.
그 결과.
쨍!
유리가 갈라지는 듯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더니 뿌연 폭연과 함께 통로를 중심으로 회오리 같은 균열이 생겼다. 난화십이식에 저런 효과는 없으니 해더웨이의 마법에 의한 결과이리라.
잠시 폭연을 노려보던 이드가 움직였다.
동시에 폭연을 휘감은 일리나가 통로 안에서 튕겨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이드는 재빨리 그녀를 받아 살피고는 안도했다.
상처는 있지만 치명상은 없다. 신관의 치료를 받으면 흔적도 남지 않을 거다.
“괜찮아요? 일리나가 이 정도로 다친 건 처음 봐요.”
“저 해더웨이라는 부관주, 저와 싸우면서 전력을 다하지 않고 있어요. 굉장한 강자예요.”
일리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실제로 그녀는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전력을 다하지 않는 상대에 자존심이 조금 상한 것이다. 이드는 그런 점을 알아차렸지만 언급하지 않았다.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 말이다.
“생명의 관 부관주도 강했으니까요. 그리고 결국 전력을 꺼내게 만들었잖아요.”
“먼지투성이가 된 보람이 있었죠.”
그때 폭연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일렁이며 나타났다. 통로에 남았던 유일한 사람이 하나뿐이니 당연히 해더웨이의 그림자여야 했다.
“뭐지? 비정상일 정도로 머리가 너무 거대한데?”
그렇다. 그냥 크다 정도가 아니라 거대했다.
그렇게 이드와 일리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중에 해더웨이가 통로 밖으로 나왔다. 플라이 마법으로 허공에 떠 있는 그는 여전히 한 발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이드와 일리나는 그런 것에 전혀 신경 쓰지 못했다. 두 사람의 눈은 해더웨이의 거대한 머리에 가 있었다.
빛이 이상하게 비쳐 그림자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 실제 해더웨이의 머리가 커다랗게 부풀어 있었다.
얼굴의 크기는 그대로인 데 반해, 뇌가 들어 있는 머리는 성인 남성이 웅크리고 있는 정도로 커져 있었다. 거기에 멀쩡해 보이던 머리카락도
사라지고, 대신 혈관들이 흉측한 모습으로 복잡하게 엉켜서는 펄떡거리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정상적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다. 거기에 기도도 동일인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기괴하게 변해 있다.
“과연 그 모습이 전력을 다하기 위해 필요한 형태인 모양이오.”
“제 연구의 결정체입니다.”
“과연 초인 마법인가. 베일록 장로는 등에 초인의 뇌를 집어넣어 놨던데. 당신은 머리에 넣어 놓은 모양이군. 크기만 비교해서는 당신 쪽이 월등한데 말이야.”
“오시지요. 월등한 것은 크기만이 아니란 것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까딱까딱.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해더웨이다.
한데 머리가 무거워 고개는 돌리지 못하고 눈만 굴리는 모습이 우습게 보이기도 해서, 긴장감은 크지 않다.
그저 징그러워 보일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