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55화
492화
“그대들이 내 골칫거리를 해결해 준 영웅들이로군. 어서 오라. 내 성을 방문한 그대들을 환영한다.”
하이탈 자작에게서 지배자의 권위가 깃든 자연스러운 하대가 흘러나왔다. 번들거리던 그의 눈에 어린 탐욕 역시 어느샌가 사라지고, 그 자리에는 여느 귀족과 같은 꼿꼿한 자존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아름다운 엘프여. 엘프가 이 성에 방문한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소. 이렇게 방문해 주어 영광이오.”
이드와 에단의 인사에 답한 하이탈 자작이 일리나의 인사에도 고어가 섞인 말로 정중히 답했다. 엘프는 평민에게는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로 경외를 받고, 귀족에게는 환영받는 존재였다. 귀족 사회에서 엘프와 친분이 있거나 엘프가 성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은 큰 자랑거리인 동시에 이야깃거리였다.
자작은 세 사람에게 자리를 권했다.
십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탁자의 끝에 앉자 이드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하이탈의 지배자께서 미숙한 여행객들을 성에 초대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원래는 어제 초대에 응해야 했으나 마침 급한 일로 자리를 비워 자작님께 결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해서 사죄의 의미로 작은 선물을 마련했으니 부디 받아 주시기 바랍니다.”
이드는 그 말과 함께 에단이 들고 왔던 검은 나무 상자를 탁자 위에 올려두었다. 원래 이런 일은 에단이 나서서 해야 할 일이었지만, 괜히 포식자의 눈에 띄고 싶지 않은 에단의 거부로 이드가 직접 나선 것이었다. 덕분에 에단은 라미아에게 겁쟁이라는 놀림을 제법 받아야 했다.
하지만 과연 그럴 만하다 싶었다. 이드에게 검은 상자를 건네주는 에단이 살짝 식은땀을 흘리며 얼굴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눈에 별이 은은하게 회전하는 것이 간파의 눈에 보이는 자작의 모습이 꽤나 강력해 보이는 모양이었다.
이드도 처음 자작을 보는 순간 그에게서 느껴지는 심상치 않은 기도에 내심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거대하지만 깊이를 알 수 없는 기운이 뱀처럼 자작을 휘감고 있었다.
‘흡성대법은 특성상 다른 내공을 하나로 합치지 못해서 기운이 난잡하고 난폭한데, 포식자인 자작의 기운은 처음부터 하나였다는 듯이 자연스럽고 무거워 보인다. 과연 흡성대법과 포식자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이구나. 에단의 눈에는 자작이 어떻게 보일까.’
이드는 상대의 힘을 색깔과 형태로 보는 에단의 시야가 궁금했다. 뭐, 하얗게 질린 얼굴을 봐서는 썩 좋은 모습이 아닌 것은 확실해 보이지만 말이다.
그사이 이드가 놓아 둔 상자를 집사가 들어 자작 앞에 내려놓았다. 자작은 그 상자와 이드를 번갈아 보다가 호탕하게 웃으며 가볍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하하. 아니다. 어찌 내가 청할 것이라고 그대들이 알 수 있었겠는가. 어제 오지 못한 것은 그대들의 잘못이 아니다. 오히려 하지 않아도 될 사과의 선물이니 이는 과하다”
이미 집사의 보고로 사실은 이와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치미를 떼는 자작이었다. 그리고 이는 이드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어제 일부러 오지 않았다는 사실을 자작이 실제로 아는지 모르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가 아직도 모르고 있는 태도를 취한다는 것이 중요했다. 지금까지 모르고 있는 모습을 보이는 이상, 아무리 그가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해도 그것은 더 이상 사실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말한다고 한번 내어놓은 선물을 돌려받는 것도 웃긴 일이다.
“마음이 넓으시군요. 허면 그 선물은 하이탈 자작님과의 만남을 기념하는 뜻에서 드리는 것으로 하지요. 그러니 부디 받아 주십시오.”
“하하하. 이드라고 했던가. 그대는 듣기 좋은 말을 잘하는군. 좋아, 이 선물은 내가 받도록 하지.”
검은 상자 안에는 주먹 두 개 크기 정도 되는 화려한 색채의 상자가 들어 있었다. 자작은 알록달록한 색깔의 상자를 한 바퀴 돌려보고 상자의 색에는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을 파악하고 뚜껑을 열었다.
상자의 뚜껑에는 깨끗한 거울이 끼워져 있었다. 상자의 내부에는 성냥 정도의 크기에 조금은 조잡해 보이는 남녀 인형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다음 순간 두 인형이 제자리에서 회전하면서 세 개의 음이 어울린 서정적인 음악이 상자에서 흘러나왔다.
그것은 자작이 처음 들어 보는 곡이었다. 작은 상자처럼 크지 않은 음악 소리가 테이블 주변을 채워 나갔다. 짧은 시간 정원에 모여 있던 이들에게
작은 음악회가 열린 듯했다.
길지 않은 곡이 끝나고 다시 처음부터 곡이 시작되자 자작이 상자의 뚜껑을 닫아 음악을 껐다.
그의 얼굴에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굉장하군. 이런 물건은 처음 본다.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저장된 음악을 들을 수는 있지만 이건 그것과는 다르구나. 무엇보다 처음 들어보는 이 곡이 매우 뛰어나다. 이것은 어떻게 구한 것이냐?”
자작은 뮤직 박스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는지 상자를 이리저리 뒤집어 보고 있었다.
“어느 상인을 통해 구했습니다. 오래전 죽은 어느 장인의 유작이라더군요. 신기하기도 했지만 저 역시 곡이 좋아 샀습니다. 상자의 바닥을 보시면 그의 독특한 사인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드는 자신 있게 웃으며 말했다. 상자를 돌려보던 자작이 상자를 뒤집자 바닥에 섬세한 음각으로 새겨진 글자가 보였다.
Made in China
“장인이 이미 죽어서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그만의 독특한 사인이라고 하더군요.”
“과연, 독특하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문양이야. 글자 같기도 한데, 휘하 마법사에게 연구해 보게 만들어도 좋겠군.”
“그것도 좋은 생각입니다.”
이드는 그럴 듯하다는 듯이 말했다. 하지만 그 속마음은 전혀 달랐다.
‘백 년을 뒤져 봐라. 뭐가 나오나.’
이드는 내심 콧방귀를 꼈다. 파이온에게 들은 일이 있는데, 자작에게 제대로 된 물건을 주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는 이드였다. 한창 저쪽 세상을 여행할 때 눈에 뜨이는 대로 사 놓은 물건들 중 그럴 듯한 걸로 골라서 들고 온 것뿐이었다.
[…………이드는 의외로 거짓말을 잘하는 거 알아요? 저거 5만원 주고 산 장난감이라구요.]
이드는 기억에 없는 뮤직 박스의 가격을 잘도 기억하고 있던 라미아의 말이었다.
‘음? 저거 5만 원이나 했던 거야? 비싸네. 좀 더 싼 걸 고를 걸 그랬나?”
심술궂게 대답하는 이드의 말에 라미아가 졌다는 듯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음. 이런 선물을 받고 그냥 있을 수는 없지.”
자작은 정말 선물이 마음에 들었는지 옆에 서 있던 집사를 통해서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자작의 명령을 받은 집사가 자리를 비우자 자작이 본격적인 이야기를 꺼내 들었다.
“오늘 자네들을 부른 것은 좀 골치 아픈 일을 해결하고자 함이네.”
이드의 5만 원짜리 선물이 효과를 발휘한 듯, 그대들이라고 부르던 자작의 호칭이 자네들이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바뀌어 있었다.
“자네들도 알겠지만 며칠 전 밤에 내 체면을 구기는 일이 있었네. 한동안 파티에 나가고 싶지 않은 일이지.”
“며칠 전 밤이면, 영주성이 공격받은 일이군요.”
은근히 말을 돌린 자작이었지만 이드는 일부러 적나라하게 말로 뱉었다. 그 말에 자작의 눈썹이 거꾸로 솟아오르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이드의 말이 어쩔 수 없는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네. 참담한 일이지. 조사해 보니 자네들이 생포해 온 벤이라는 산적과 한패였던 놈들의 짓이더군.”
“수비대장께 내어 드린 벤이 이곳에 있었던 모양이군요.”
“그렇지. 그동안 하이탈에 많은 피해를 끼친 놈이라 내가 직접 보기 위해서 성에 가두었지.”
“정보력이 좋은 놈들이군요. 그런 사실을 알아내서 성을 노리다니 말입니다.”
“그래. 그리고 실력도 뛰어난 놈들이지. 내 휘하의 기사들의 실력을 의심하고 싶지는 않지만, 결국은 의심하게 만들 정도로 말이야. 놈들의 공격을 막아내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아직도 그놈들을 찾지 못하고 있다니.”
“아닙니다. 기사분들께서도 곧 놈들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미 도시의 출입이 통제된 상황이라 도시를 탈출할 수도 없을 테니까요.”
“물론 그렇게 되겠지. 그런데 말이야, 상황이 그렇게 되니 자네들이 생각이 나더군.”
자작은 남은 찻잔을 비우고 이드와 에단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일리나에게는 처음 인사를 제외하고 한 번도 시선을 향하지 않았다. 그 집요한 시선에 에단이 흠칫 몸을 떨었다.
“비록 세 명뿐이기는 하지만, 초인이 아닌가. 일반 기사들은 손대지 못하는 그들을 물리치고 한 명을 제압했으니 말이야. 아, 물론 초인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겠지?”
자작은 은근히 세 사람의 실력을 띄우며 초인에 대해서 말했다. 초인을 언급하는 그의 말투에서는 초인에 대한 자부심이 느껴졌다.
[이제 본격적으로 나오는 모양인데요?]
초인에 대해서 언급하는 자작의 모습에 라미아가 말했다.
“잘은 모르지만 기본적인 사실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드는 바로 자작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슬쩍 발을 빼 봤다.
“하하하. 좋아, 좋아. 그래. 실력을 함부로 내보일 수는 없지. 하지만 내게까지 숨길 필요는 없어. 난 이미 벤이라는 산적을 심문하면서 자네들에 대해서 들었거든. 거기 자네는 감지 쪽으로 특화된 특수형이라지?”
“커험……..그……………렇습니다.”
갑자기 자작에게 지목된 에단이 내키지 않는 모양으로 대답했다. 이미 산적들에게 다 전해 들었다는데 다른 방법이 없었다. 예의에는 맞지 않는
모습이지만 자작은 오히려 좋은 태도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좋아했다.
“그리고 자네도. 후후후.”
그리고 뒤이어 이번에는 이드를 지목하는 하이탈 자작이었다.
하지만 이드 일행으로서는 황당할 따름이었다.
‘저 인간이 돌았나?”
“아, 아닙니다. 자작님. 전 검사입니다.”
“하하하. 더 이상 숨길 필요는 없다는데도 그러는군. 이전 시대였다면 모르지만 지금 초인은 시대의 주목을 받는 위치야. 당당하게. 무엇보다 자네는 산적들 중 가장 강력한 능력을 지닌 벤을 압도적인 실력으로 쓰러트렸어. 이게 어중간한 기사 나부랭이의 힘으로 가능할 것 같은가? 천만에. 내가 자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자네는 공격 쪽으로 특화된 특수형의 초인이 분명해.”
이미 답을 정해 두고 말하는 자작의 말에 이드는 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그의 말투에서 느껴지는 초인에 대한 지독한 우월의식을 느끼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하이탈 자작은 그 모습을 자신에게 스스로의 능력을 들켜 난감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역시, 초인이 맞았구나. 좋다. 그대는 내가 가지도록 하지.’
하이탈 자작은 이드를 바라보며 깊은 미소를 지었다. 벤과 티티, 파이온에게서 이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장 관심을 가진 것은 바로 이드였다. 에단도 초인이기는 하지만 감지형의 초인기는 그다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압도적인 힘으로 벤을 몰아붙인 이드의 정체가 궁금했다. 말로만 전해 들었지만 그에게서 강렬한 힘의 향기가 느껴졌다.
검을 수련하는 기사의 실력으로는 벤을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이 하이탈 자작의 생각이었다. 물론 높은 경지에 오른 기사는 초인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하지만 저와 같이 젊은 나이의 기사 중에는 그럴 만한 사람이 절대 없다고 생각했다. 초인은 특별하며, 강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정체는 무엇인가.
하이탈 자작은 스스로 던진 물음에 순식간에 들려오는 답을 들었다.
초인이다. 강력한 초인기를 각성한 초인이기 때문에 벤을 쓰러트린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하이탈 자작은 이 젊은 초인을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그가 먹어치운 어중간한 초인이 아니라, 자신처럼 특별한 초인인 그를 자신의 곁에 두고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이 선물도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무턱대로 속내를 다 털어놓고 내게 오라고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의 실력도 조금 더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하이탈 자작은 손에 든 뮤직 박스를 조심스럽게 내려두고 이드와 에단을 바라보며 말했다.
“사실, 내가 자네들을 부른 이유는 자네들이 초인인지 확인하고 한 가지 부탁을 하기 위해서네.”
“부탁이라시면?”
“마침 서로 가진 초인기도 내 부탁을 들어주기에 알맞아. 감지형과 전투형, 그 힘으로 도망친 산적 놈들을 잡아와 주게!”
“ . . . . . . !”
이건. 솔직히 생각 못한 일이다.
이드는 눈을 크게 뜨고 자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