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10화
1046화
드드드드.
저택의 주방은 분주했다. 갑자기 돌아온 임시 주인과 많은 손님의 식사를 준비하려니 정신이 없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땅이 들썩거렸다.
“어? ……어어!”
“어떡해! 땅이 흔들려요!”
주방에 있는 이들 대부분이 지진이라는 것이 뭔지도 몰랐기에, 저마다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릇! 그릇부터 깨지지 않게 잡아!”
그런 중에 주방장이 외침과 동시에 몸을 날렸다. 탁자에 꺼내 놨던 접시가 떨어지려 했기 때문이다.
혹여 깨지기라도 하면 반년 치 급여를 날려야 하는 비싼 물건이었다.
푸짐한 몸을 깔아 접시를 구한 주방장은 급히 주변을 살폈다.
확실히 이 접시가 가장 비싸긴 하지만, 방금 꺼내 놓은 그릇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한 달 치 급여 혹은 그것을 상회하는 고급 식기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눈앞에 펼쳐졌다.
어찌 된 건지 자신의 명령에도 요리사들과 하인들이 움직이기는커녕 엉거주춤 서 있기만 한 것이 아닌가.
“뭘 바보같이 서 있어! 몇 년 동안 무급으로 일하고 싶냐?”
“주방장님, 그게 아니라…………… 흔들리던 게 끝난 것 같은데요.”
요리사 중 하나가 주방장을 일으키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땅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고, 그릇들도 덜그럭거리지 않았다.
주방장은 일어나서 자신의 가슴에 얌전히 안겨 있는 접시의 안전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숨을 쉬었다.
“휴~ 깨졌으면 큰일 날 뻔했네. 도대체 이게 무슨 난리야.”
“그러게 말입니다요.”
주방장은 잠시 떨리는 가슴을 가라앉혔다.
그러나 영 안심이 되지 않는지, 커다란 통에 물을 받고 그 안에 그릇을 몽땅 집어넣어 다시 땅이 흔들려도 그릇이 깨지지 않게 했다. 일련의 행동을 마친 주방장은 이 근처 저택 요리사 중에 자신보다 머리 좋은 사람은 없을 거라 혼자 뿌듯해했다.
외출 금지만 아니면 다른 주방장 놈들을 모아 놓고 자랑을 했을 텐데. 주방장은 아쉬워했다.
물론 진짜 그랬으면 졸았냐고 조롱을 당했을 것이다. 그를 식겁하게 만든 지진은 오로지 이 저택에서만 일어난 것이었으니까.
“하늘을 받치는 아틀라스의 그림자. 솔리드 콜룸.”
휘이잉-
낭랑한 시동어의 뒤를 따라 라미아의 머리 위 천장에 나타난 초록의 마법진이 넝쿨처럼 사방으로 줄기를 뻗어 나가며 천장을 가득 채웠다. 그와 함께 지상의 지진이 멈췄다.
“조금 늦었네. 놀란 사람은 있겠지만, 그래도 큰 진동은 아니었으니까.”
식은땀을 한 그릇이나 짜낸 주방장이 들었으면 충분히 억울해할 말이었다.
라미아는 터무니없는 속도로 넓어지고 있는 지하실을 바라봤다.
오른쪽은 이드. 왼쪽은 노르캄.
단단하던 벽이 가루처럼 무너지는 것은 양측이 똑같았다. 둘의 작업에 차이가 생긴 건 흙이 나온 뒤부터였다.
노르캄은 정령으로서의 능력을 활용해 흙을 뜻대로 부렸다.
녀석이 작은 손을 얍 하고 내밀자 흙벽이 주르륵 밀려들어 갔다. 누가 보면 그 아래 레일이라도 달아 놓은 것처럼 보일 정도로 매우 자연스러웠다.
다만 그 범위가 넓은 것은 아니었는데, 그게 문제가 되진 않았다. 노르캄이 ‘얍’을 몇 번만 더하면 되니까. 그의 일 처리는 깔끔하고 깨끗했다.
그에 반해 이드의 작업 방법은 거칠었다. 검은 쓰지 않았다. 대신 펼쳐 든 손끝에서 바람이 일었다.
휘리리릭.
직후 푸른빛이 바람을 따라 일렁이고 지나자 그 자리를 따라 벽면이 쩍쩍 갈라졌다. 그러더니 곧 툭 하고 뜯어지며 와르르 쏟아졌다. 일 미터가 조금 넘는 깊이였다.
파옥수를 철사분영편에 실어 낸 수법이었다.
동시에 이드가 무너진 흙더미를 밟으며 이동했다.
두껍게 쌓였던 흙더미는 이드가 밟고 지나갈 때마다 프레스로 누른 듯 압축된 흙벽돌이 되어, 확장된 지하실의 좋은 바닥재가 되었다.
이드는 이 작업을 반복했다. 한번 왔다 갔다 할 때마다 속도가 확연히 빨라지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띄었다.
‘좋네. 확실히 12대식보다 쉽게 손에 붙어.’
작업에 열중하는 한편, 이드는 부드럽게 돌아가는 연계에 내심 흡족했다.
이전에도 그는 이종의 무공을 문제없이 연계해서 사용해 왔었다. 하지만 지금처럼 걸림 없이 부드럽기는 처음이었다.
아마도 메르시오와의 전투에서 12대식을 연환함으로 인해 그릇이 넓어진 것이 분명했다.
이드의 무공은 분명히 말해 원경의 경지를 넘어서고 있었다. 끝을 알 수 없는 재능도 영향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는 그래이드론이 남겨 준 유산 때문이었다.
끝없는 내공과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강인한 신체.
아무리 재능이 없어도 손쉽게 무림 최고수에 오를 수 있을 만한 혜택이 주어지자 거침없이 날아오른 이드였다.
그러나 그런 이드에게도 벽이 있었다. 무한정 성장할 수만은 없던 것이다.
이드는 그레센으로 돌아오기 전부터 그런 한계에 답답함을 느꼈지만, 집착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거기에 부담을 가지는 순간, 벽이 더욱
두꺼워진다는 사실을 경험과 가르침을 통해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마음가짐 덕분인가. 이드는 최근 벽을 넘어설 단서를 얻을 수 있었다. 앞서 말했듯 메르시오와의 전투가 그 계기였다.
조심스럽게 도전만 하고 있던 12대식의 연환을 실전에서 성공해 버린 것이다. 역시 무인에게 가장 좋은 수련 방법은 실전이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이드는 이때 얻은 감각과 깨달음을 그냥 흘려보내지 않았다. 머리로 되새기고, 손끝으로 재현하길 반복했다.
이번에 메르시오를 쉽게 처리한 것 역시 이런 노력을 평소에 반복해 왔기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순간 파옥수와 철사분영편이 한 몸인 듯 공존하는 것도 그런 수련의 결과였다.
그렇게 기분이 좋아진 이드의 기운이 가벼워지자 자연 손과 발이 빨라졌다.
그러자 무너지는 흙의 깊이가 깊어졌고, 손이 뻗어 나가는 범위가 넓어졌다. 간단히 말해 지하실이 확장되는 속도가 50% 이상 빨라진 것이다. ……!!
무엇보다 이런 사실은 누구보다 땅의 정령이 노르캄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 이드가 땅을 파내는 속도가 자신을 앞지른 것이다. 아무리 이드가 왕의 계약자라지만, 중급 정령의 체면이 있지. 땅파기에서 계약자에게 밀리다니!
두 볼을 감싸 쥔 노르캄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정령계로 돌아가는 순간 친구 정령들의 놀림거리가 될 걸 상상하기라도 한 건지, 발갛던 볼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마침 그런 노르캄의 모습을 확인한 라미아가 녀석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그냥 두긴 불쌍해 보인 탓이다.
“왜 멈춰 있어? 빨리 해. 계속하면 이기지는 못해도 명령을 완수할 수 있지만, 포기하면 내기에도 지고 명령도 끝내지 못한다고.”
……!
노르캄이 라미아를 올려다봤다.
“내가 이드 몰래 조금 도와줄게.”
……!
순간 갈등하는 노르캄이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거야? 라고 말하는 것 같다.
“애초에 내가 도와주면 안 된다는 규칙은 없었잖아?”
……!!
깨달음을 얻은 표정의 노르캄이었다. 그런 모습에 라미아가 귀엽다는 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 험한 세상, 계약의 허점을 노리는 건 기본인데 말이다.
“그러니 어서 파!”
라미아의 응원 덕분일까.
다시 반짝이는 얼굴이 된 노르캄이 두 주먹을 야무지게 말아 쥐고는 흙벽으로 달려들었다.
우르르르-
마음을 다졌기 덕분인가. 흙벽이 단숨에 이 미터나 밀려났다.
라미아는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더니 툭툭 로브를 털고 일어났다. 노르캄이 다시 일하기 시작했으니, 이제 자신이 도와줄 차례다.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 하지 않겠나.
“순진한 정령을 괴롭히는 못된 어른을 퇴치하겠습니다. 얍!”
직후 라미아는 귀여운 기합을 내지르며 손을 뻗었다.
“어어? 야! 이게 무슨 짓이야!”
이드를 향해서 말이다.
그런 이드의 허리와 머리 위에는 은색의 마법진이 족쇄처럼 채워져 있었다.
시합이 끝났다.
0.5 미터의 차이였다. 실로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아니, 이건 아니지. 일대일 시합에 다른 사람이 끼어드는 게 어딨어?”
이드가 뾰로통한 얼굴로 불만을 제기했다. 라미아는 키득거리는 한편 주름이 생긴다며 이드의 얼굴을 꾹꾹 눌러 폈다.
“그건 그런 규칙이 있다고 말하지 않은 이드의 잘못이죠.”
“기본이잖아, 기본! 그리고 너도 정도가 있지. 슬로우, 그래비티에 패럴라이즈의 삼 연타라니. 다른 사람이었으면 죽었을 거라고!”
정말 농담이 아니라 일반인이면 사망하고도 남았으리라. 세 마법 모두 단순히 제압용이 아니라 공격용으로 느껴질 정도로 강력하게 펼쳐졌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드에게 사용했죠. 그 정도가 아니면 영향이나 있었어요? 그걸 겪고도 잘만 움직였으면서.”
잘만 움직이다 뿐인가. 그런 제약을 몸에 두른 상태로 아슬아슬할 정도로 노르캄을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물론 그럴 수 있었던 것도 노르캄이 중간이 포기 상태로 잠시 손을 놓은 덕분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쟤 얼굴을 보고도 규정 위반이라고 투덜거리고 싶어요?”
“…..알았어. 졌다고. 내가 졌다.”
자신이 확장해 놓은 지하실을 보며 볼이 발개질 정도로 우쭐해 있는 노르캄이다.
시합이 무효라고 말하면 저 얼굴이 어떻게 변할까? 그렇게 생각하면 이드도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말을 기다린 듯 노르캄이 우다다 달려와서는 이드의 다리에 얼굴을 비볐다. 이드는 잘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녀석을 돌려보냈다.
“이겼는데 우승 상품도 안 줘요?”
“다음에 줄 거야. 누가 끼어든 벌로. 그나저나, 이 정도면 되겠지?”
대충 대답한 이드가 확장 공사의 결과물을 살폈다.
이전보다 7배 정도 넓어진 지하실이다. 저택과 정원은 물론, 이웃집 정원도 절반쯤 침범한 결과였다. 물론 여긴 지하라 이웃 쪽에선 아무것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이곳의 특이점은 기둥이 없다는 것이다. 대신 기둥보다 수십 배 비싼 마나석이 아홉 개 사용되었다.
수련 중 생기는 충격파와 외부의 탐지를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지출이었다.
아공간에 쌓여 있는 재물을 생각하면 티도 나지 않는 수준이었지만, 그럼에도 라미아는 이후에 설치비를 받아 내겠다고 야무지게 다짐했더랬다. 이드는 지하실의 벽을 두드려 강도를 확인했다. 잘 다듬어지긴 했어도 누런 흙벽에 불과하거늘, 금속과는 다른 단단함과 함께 약하지만 반탄력마저 느껴졌다.
“이 정도면 가다듬지 않은 검기쯤은 충분히 막을 수 있겠네.”
“강도뿐이 아니에요. 수련 중에 결계가 일부 파괴되어도 금방 복구할 수 있어요. 마나석을 쓴 이유죠.”
사실 여길 이용하는 이들에게 좀 더 강조해서 조심해 달라고 당부하면 될 뿐,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설치비를 받아 내느니 어쩌니 하지만, 말과는 달리 검후에 대해 최대한 신경을 쓴 게 티가 났다.
이드와 마찬가지로, 어린 시절의 시르피가 연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지하실을 꼼꼼히 둘러본 두 사람은 검후와 쉴라를 불러왔고, 몇 시간 만에 완전히 달라진 지하실의 모습에 둘은 놀라움을 숨기지 못했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부리신 거예요?”
“우리가 애 좀 썼지. 넓이는 마음에 들어?”
“완벽하게요. 제가 원한 것보다 더 넓어요. 방법이 있다더니 헛말이 아니었네요. 정말 감사해요.’
검후는 흥이 나는지 당장 쉴라의 검을 빌려 지하실을 누볐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다 물었다.
“그런데 토벌대는 어디쯤이래요?”
이드 일행과 달리 아직 수도에 도착하지 못한 토벌대였다.
아무렴 인원이 인원이니 당연한 일이다. 거기에 성공적인 토벌에 들르는 영지마다 축하한다며 잡기도 할 것이고
“집사에게 듣기로는 삼 일 후면 도착할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그건 갑자기 왜 물으시는지?”
“별건 아니고, 토벌대가 도착하면 가 볼 곳이 있어서 말입니다.”
별일 아니라는 듯 가볍게 답하는 이드에 고개를 갸웃했지만 더 묻지는 않는 쉴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