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611~612화
1047화
존 워스가 아직 어둡기만 한 이른 새벽하늘을 이고서 움직이고 있었다.
현재 그가 있는 장소는 작은 마을 인근 수도 림몬에서 한참 떨어진, 마스의 작은 자작령에 속한 이름조차 없는 곳이었다.
묵묵히 마을을 지난 존 워스가 허름한 울타리 앞에 멈췄다. 크기만 할 뿐, 가축도 몇 마리 보이지 않는 보잘것없는 목장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서 있었을까.
스스스스-
새벽을 반기는 풀벌레 소리가 한순간 사라지고, 알 수 없는 위압감이 주변을 채워 나가기 시작했다.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본능적인 풀벌레가 반응한 것만 봐도 그렇다.
당연히 존 워스도 이런 변화를 모를 수 없다. 아니, 오히려 벌레 따위보다 더 빠르고, 민감하고,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하늘, 땅, 전후, 좌우. 존 워스의 눈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주변을 살폈다.
사방은 물론 공기의 결에서 땅속에 이르기까지, 공간을 잡아먹는 듯 압도적이면서도 은밀하게 자신을 향해 조여드는 살기. 후우~ 존 워스는 본능처럼 올라오는 혐오감에 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미완의 마탑의 탑주께 전하라. 소드 팰러스의 존 워스가 볼 일이 있어 방문했으니, 실례지만 좀 나와 달라고.”
……!
누구라고?
순간 존 워스를 노리고 움직이던 자들이 마법에라도 걸린 듯 그대로 멈춰 버렸다.
의심스러운 자가 접근해 매뉴얼대로 움직였을 뿐인데, 상대가 자신들의 정체를 파악했을 뿐 아니라 탑주까지 언급하지 않는가.
거기에 본인이 존 워스? 그 철벽의 검왕이라고?
보통이라면 콧구멍이나 쑤시며 헛소리라고 무시했을 거다. 상대가 휘황찬란한 검강을 뿜어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소름 끼치는 위압감이 느껴지지도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무시할 수 없는 본능적인 무언가가 있었다.
무시하고 제거하려고 했는데, 정말 존 워스라면 그건 그것대로 큰일이다.
소리 없는 소란 속에 그들은 그 자리에 멈췄다. 그리고 존 워스를 치는 대신 이 소식을 빠르게 전달했다. 본인들의 상급자에게.
그런 움직임 속에서 존 워스는 문득 위를 올려다봤다. 별이 새파란, 투명한 하늘이었다.
그러나 그런 아름다운 모습과 달리 그의 마음은 온통 알 수 없는 의문과 답답함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자신이 지금 왜 여기 있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곳을 찾은 목적을 모른다는 뜻이 아니다. 그가 고민하는 것은 그 ‘목적’을 가지게 된 이유였다.
“후우~ 답답하군.”
하늘을 향한 그의 눈동자가 유난히 흐릿했다.
갑작스러운 존 워스의 방문에 영혼의 관에서는 이더비히가 움직였다.
존 워스는 탑주를 찾았지만, 그는 토벌전이 끝난 후부터 연구실에서 두문불출이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방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도 그들에게 탑주는 누가 부른다고 쪼르르 달려가야 할 정도로 가벼운 존재가 아니었다. 그게 아무리 철벽의 검왕이라고 해도 말이다. 정 탑주를 만나려면 페시딘 정도는 나와야 한다는 게 그들의 생각이었다.
“정말 철벽의 검왕이군요.”
이더비히는 결계 너머의 존 워스를 보고는 복잡한 심경을 담아 말했다.
그래도 혹시나 했다.
물론 가짜와 진짜를 떠나, 어느 쪽이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찾아왔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지만 말이다.
아직 세상에 나선 적이 없는 영혼의 관이다. 그 존재를 아는 이들은 제법 되어도 위치는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 또 그중에서도 소수만이 알고 있었다.
그만큼 영혼의 관은 특별하고, 중요했다. 초인 마법의 정수가 모여 있고, 마탑의 미래가 준비된 곳.
생명의 관, 정신의 관과 함께 영혼의 관이라고 불리긴 하지만, 그 속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알 수 있다. 영혼의 관이 언제든 그 이름을 미완의 마탑으로 바꿔 달 수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때는 마탑의 이름도 ‘미완’이 아닌 어떤 것으로 바뀌어 있으리라.
이더비히는 존 워스와의 만남이 끝난 즉시 영혼의 관의 정보가 어떻게 새어 나갔는지를 조사해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결계를 넘었다.
사뿐사뿐 가벼운 걸음으로 존 워스의 앞으로 걸어간 이더비히 그 발걸음이 멈추자 하늘을 바라보던 존 워스의 눈이 그녀를 향했다.
“…… 역시 탑주를 바로 만나는 건 어려운 모양이오.”
“갑자기 불쑥 찾아온 불청객이 만나고 싶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랍니다. 저희 탑주님은 말이죠. 그게 아무리 철벽의 검왕님이라고 해도요.’
담담한 말투 속에 뼈가 있는 이더비히의 말이다. 게다가 영혼의 관에서는 항상 달고 있던 부드러운 미소도 사라진 냉정한 얼굴이다.
그 근본에 있는 것은 삼검왕이라도 상대할 수 있다는, 초인 마법에 대한 자신감이었다.
“그렇구려. 그럼 내 앞에 있는 레이디가 어떤 분인지 내게 알려 주겠소?”
“영혼의 관 부관주 이더비히. 제 이름이랍니다.”
“아름다운 이름이오. 우선 갑작스러운 방문에 대해 정식으로 이더비히 부관주께 사과드리겠소.”
그 말과 함께 정중히 사과하는 존 워스다. 그렇지 않아도 머리가 복잡한데,
괜한 자존심 싸움으로 일을 어렵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에 선택한 방법이었다. 반대로 기습적인 사과에 놀란 이더비히의 표정은 순간이지만 흔들렸다.
철벽의 검왕이 사과라니.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의문도 일었지만, 동시에 날카롭게 섰던 경계심이 한풀 꺾이는 것도 사실.
“사과는 받겠습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철벽의 검왕께서는 영혼의 관의 첫 손님이시니까요.”
“그거 영광이구려.”
존 워스가 의외라는 듯 놀랐다. 그가 알기로는 미완의 마탑을 이루는 세 관이 세워진 것 자체가 수십 년이 되었기 때문이다.
한데 첫 손님이라니?
그러나 이더비히의 말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영혼의 관이 중요한 시설이라는 사실을 증명하는 바이기도 했다. 그만큼 꼭꼭 숨겨 두었었다는 의미니까.
단순히 생각하면 서로에게 영광일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새로운 마법 계통을 만들어 낸 마탑과 삼검왕의 일인이 서로에게 있어 첫 손님과 첫 방문자라니 말이다.
물론 정작 당사자들은 그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그럼 이제 탑주님을 찾으신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어요? 아니면 안에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것도 괜찮습니다.”
“탑주께서도 다망한 듯하니, 굳이 폐를 끼치고 싶지는 않소. 어디까지나 간단히 물건만 전하는 것이 내 목적이었으니 말이오.”
존 워스는 말과 함께 주먹 두 개 크기의 금속 상자를 꺼냈다. 그와 함께 물러나지 않고 대기 중에 있던 마법사들이 바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열어도 되겠소?”
“물론이죠. 무려 철벽의 검왕께서 옮겨 오신 물건인데요. 어떤 대단한 것인지 매우 궁금하군요.”
반면 이더비히의 반응은 태연했다.
그녀의 말에 존 워스가 상자를 열며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상자에서 미끄러져 나온 물건은 급격히 커지더니 바닥에 떨어졌다. 금속 상자에 확장 마법이 걸린 듯했다.
쿠웅.
묵직한 무게감과 함께 발끝으로 전해지는 진동. 그건 가운데가 뚫려 있는, 평범해 보이는 원형의 석판이었다.
그러나 석판을 본 이더비히의 눈꼬리는 파르르 떨렸다. 물건의 정체를 바로 알아본 것이다.
“콘티에롬…….”
누가 뭐래도 초인 마법의 정수를 담은 물건을 부관주인 그녀가 모를 리가 없다. 그게 아니라도 그녀는 랜달이 모든 정성을 쏟아 완성하고자 하던 콘티에롬을 직접 본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한데 그런 콘티에롬이 어째서 랜달이 아닌 존 워스의 손을 거쳐 돌아온 것인가. 순식간에 수십 가지 가설이 떠오른다.
하지만 눈앞에 존 워스가 있는데 그런 가설에 집중할 이유가 무엇인가.
빠르게 놀람을 가라앉힌 이더비히가 차분한 목소리와 함께 살짝 무릎을 굽혔다.
“우선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전해 주신 물건은 확실히 저희 마탑의 것이랍니다. 하지만 의문이로군요. 어떻게 랜달 부관주님의 소유인 콘티에롬을 철벽의 검왕께서 옮겨 주시게 되었는지, 서로를 위해 알 수 있을까요?”
“간단하오. 우린 한시도 검후에게서 눈을 뗀 적이 없었소.”
“아, 그렇다고 오해는 마시오. 난 다만 우연히 쉐어 가든 주변에 있었고, 그 덕에 보게 된 거요. 랜달 부관주가 이드 명예 후작과 혼돈의 파편이라는 거대 늑대 사이에 끼어 패배하는 모습을 말이오.”
존 워스는 눈썹을 찌푸리기 시작한 이더비히를 보다 콘티에롬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것은 그가 탈출에 실패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확보하게 되었소. 운이 좋았지.”
“…..그럼 방문하신 이유가 이 소식을 알려 주시기 위한 건가요? 아니면 경고?”
“둘 다 아니오. 그저 주운 물건을 주인에게 돌려주는 당연한 일을 한 거요. 믿을지 모르겠지만.”
“말씀대로 솔직히 믿어지지 않는군요.”
무슨 속셈인지 꿰뚫어 보려는 듯 유심히 존 워스를 살피는 이더비히다.
그에 어깨를 으쓱인 존 워스가 몸을 돌렸다.
“그렇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럼 볼일을 마쳤으니, 이만 가 보겠소.’
미련 없이 돌아서는 존 워스의 등을 보며 이더비히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입술을 물며 중얼거렸다.
“콘티에롬 때문에 찾아왔다고? 정말?”
그녀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철저히 비밀에 싸인 영혼의 관을 말도 없이 찾아온 것만 해도 충분한 위협이다.
한데 그런 방문의 목적이 오로지 콘티에롬 때문이라는 걸 믿으라고?
솔직히 콘티에롬의 반환 따위 마법 통신으로 가져가라고 해도 될 일이 아닌가.
그리고 무엇보다 이해하기 힘든 것은 따로 있었다.
숨겨진 영혼의 관의 위치를 안다는 것은 소드 팰러스 입장에선 다양하게 이용해 먹을 수 있는 카드다. 한데 그걸 이렇게 어이없이 써 버린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과 상황이었다. 덕분에 이더비히의 머리가 복잡해졌다.
만약 떠오르는 아침 해를 향해 사라지는 존 워스도 같은 이유로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과연 그녀의 마음이 조금은 편했을까?
“…..당장 주변을 철저하게 수색하세요.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면 선조치도 허락하겠어요. 그리고 추적조를 짜서………… 존 워스를 쫓아가세요. 발각되지 않는 선에서만 움직이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결계 안에 대기 중이던 마법사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목소리만으로 답했다.
존 워스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키던 이더비히는 그제야 콘티에롬에 관심을 주었다.
그녀에게 랜달의 존재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기껏해야 가끔 얼굴을 마주하는 마법사 정도로, 그 무게감은 영혼의 관의 다른 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랜달이 알았다면 이를 부득부득 갈 정도로 분해할 취급이지만, 이더비히는 당장 랜달의 행방보다는 그가 확보하지 못한 검후에 대한 소식을 탑주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지가 더 고민이었다.
그녀는 머릿속으로 그런 고민을 하는 한편, 동시에 콘티에롬에 대한 검사도 진행했다.
아무리 랜달의 콘티에롬이 확실하다고 해도 외부의 인물이 준 물건이다. 제대로 된 확인도 없이 함부로 들일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렇게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그녀는 콘티에롬을 영혼의 관 안으로 옮겼다.
그 후 콘티에롬은 다시 한번 정밀 검사를 받은 후 랜달의 실패 소식과 함께 탑주에게 전달되었다.
“콘티에롬이라. 과연 랜달이 심혈을 기울일 만한 주제로군. 어쩌면 써먹을 수 있겠어.”
무언가 발견하기라도 한 것일까.
랜달의 실패 소식에 화를 삭이는 것도 잠시. 정신없이 콘티에롬에 빠져든 탑주가 연구실로 사라졌다. 이더비히는 그런 탑주를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그와 함께 닫힌 문 위로 발걸음이 유난히 무거워 보이던 존 워스의 모습이 떠오르는 건 어쩐 일인지.
하지만 랜달 사건을 포함해 그녀가 처리해야 할 일이 한둘이던가. 쓸데없는 생각을 단번에 털어 버리고 돌아서는 이더비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