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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14화


1049화

이드는 운기행공을 시작한 검후를 보고 의자에 앉았다. “이제 운기가 무사히 끝나는 것만 확인하면 끝이야.”

“고생했어요. 우린 올 필요 없었던 거 아니에요?”

“아니지. 덕분에 내가 얼마나 든든한데, 없었으면 힘들 뻔했어.”

“말은 잘해요.”

식은땀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사람이 말간 얼굴로 힘드네, 든든하네 하면 그 말을 누가 믿을까.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그런데 바로 옆에 그걸 믿는 엘프가 있다. 게다가 이드가 힘들었다면서 몸을 기대자 어깨까지 주물러 준다.

자신에게 기댔으면 옆구리를 꼬집어 줬을 텐데, 아무래도 미리 눈치를 챈 게 아닐까 싶다.

그때 쉴라가 소리 없이 다가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리시는 동안 드실 차와 쿠키를 내어 오겠습니다.”

“그건 집사에게 말하면 됩니다. 쉴라 경도 앉아요.”

은색 기사단장이 해 주는 차 심부름이라니, 황송할 일이다. 여태 검후 말고 그녀에게 이런 대접을 받는 사람은 없었을 거다.

“아니요. 제가 직접 해 드리고 싶어요.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도대체 몇 번인지 모를 만큼 계속해서 감사를 표하는 쉴라다.

별거 아니라고 그만하라고 해도 당최 듣지를 않는다. 그만큼 그녀가 느낀 고마움이 크다는 것이겠지.

곧 쉴라가 직접 쟁반을 들고 돌아왔다.

스폴과 에린도 다녀갔다.

본격적으로 운기행공을 시작한 검후는 저러다 탈수가 오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엄청난 땀을 흘렸다. 그간 혈맥에 쌓여 있던 탁기를 한 번에 몽땅 쏟아 내려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두 시간이 지나자 끝없이 흐르던 땀이 멈췄다. 그리고 다시 한 시간이 흐른 후, 운기를 마친 검후가 눈을 떴다.

그런 그녀의 얼굴에는 탈수는커녕 갓 피어오른 새싹같이 촉촉한 생기가 돌고 있었다.

“휴우. 이제 좀 살 것 같네요. 이전엔 내공이 있고, 없고의 차이가 이렇게 큰 줄 왜 몰랐을까요. 몇 시간 전하고 세상이 완전히 달라 보여요.” 

따악.

한껏 감격 중인 검후를 본 라미아가 손가락을 튕겨 클린 마법을 발동시켰다.

싱그러운 바람이 검후를 맴돌며 땀과 오물을 씻어 주자, 검후의 행복한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이드가 그 모습을 보다 물었다.

“근육통도 이젠 괜찮지?”

“물론이죠. 그런 수치스러운 경험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예요.”

보란 듯 팔랑팔랑 흔들어 보이는 팔의 움직임이 매끄럽다.

이어 이드가 손을 내밀어 검후의 맥문을 잡았다. 마지막 확인으로 내부를 살펴보려는 것이었다.

결과는 예상대로.

봉인은 완벽히 소멸된 듯 흔적도 없었고, 혈맥도 매끈매끈 깨끗하고 탄탄했다. 좀 전에 확인할 땐 적지 않은 탁기가 쌓여 있었는데 말이다. 보통 탈태환골을 하고 나면 운기를 하지 않아도 이 정도로 탁기가 쌓이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검후의 경우에는 봉인을 유지하기 위해 강제적으로 내력의 충돌을 일으켜 에너지를 발생시켜 왔다. 그로 인해 정순하지 못한 탁기가 쌓인 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가짜 휘발유를 사용한 자동차에 그을음이 많이 생기는 것과 같은 거랄까.

그래도 두 시간 동안 흘린 땀에 탁기를 모두 뽑아낸 모양이다.

“대단하잖아. 내력 운용 솜씨가 얼마나 좋으면 혈맥이 단번에 깨끗해졌어.”

“이게 다 이드님 덕분인걸요.’

이드로서는 금시초문의 말에 눈을 끔뻑거렸다.

“나? 내가 뭘 했다고?”

“이드 님이 봉인을 태워 버리신 화기요. 운기를 시작하니, 그 기운이 앞장서서 혈맥에 있던 탁기를 태우던걸요? 전 일부러 그렇게 안배하신 줄 알았는데.”

의지가 떠나며 흩어질 기운이기에 신경 쓰지 않았는데, 그런 효용을 발휘했단 말이지. 턱에 손을 댄 이드가 곧 정답을 찾아냈다.

“아무래도 네 정순한 내공이 삼매의 불길이 흩어지기 전에 좋은 연료가 되어 준 모양인데. 이 경우는 운이 좋았다고 할 수밖에 없겠는걸.”

“너무 무책임하신 거 아니에요?”

“뭐, 어쨌든 덕분에 며칠 공을 들여야 할 일이 줄었잖아.”

이드가 좋은 게 좋은 거 아니냐며 웃음으로 대충 넘기려 했다.

그에 검후가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다 곧 이드를 따라 웃음을 터트렸다.

대충 넘기려는 면이 있지만, 이드의 말도 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장의 기분이 너무 좋은 검후였다.

정말 과장 하나 없이 온몸을 묶고 있던 쇠사슬을 벗어 던진 기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앉아 있기는 아깝다. 검후가 검을 찾아 들었다. 이드는 그런 검후를 못 말린다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공을 되찾았다지만, 근육통으로 그렇게 고생을 하고는 다시 검을 찾다니. 정말이지 어지간하다 싶었다.

“또 근육통으로 고생하려고?”

“이제 그럴 일 없어요. 그리고 당장 움직이지 않으면 몸이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도저히 못 참겠는걸요. 말리지 마세요.”

“말린다고 듣지도 않았잖아. 그래도 너무 무리하진 말고, 쉴라 단장이 옆에서 잘 지켜봐 줘요.”

“자신은 없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검후 옆에 붙어 있던 쉴라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검후의 뒤를 따랐다.

그리고 잠시 후, 저택 곳곳에 흩어져 있던 은색 기사단 기사들의 환호성이 들려왔다. 검후의 완전한 귀환이 알려진 것이다.

이후 지하실에 내려간 검후는 그날 늦은 시간까지 방으로 복귀하지 않았다. 내공을 회복한 그녀의 체력이 도저히 바닥을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안티로스엔 수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일강이라 할 수 있는 아나크렌의 수도로서, 평소에도 어마어마한 방문자에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대도시였다.

한데 최근 수일간 안티로스를 방문하는 사람의 숫자는, 정말이지 폭증이라는 말에 걸맞을 정도였다.

갑자기 늘어난 인원이지만 이에 대해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이들이 안티로스를 찾는 이유가 이틀 뒷면 도착할 토벌대를 환영하기 위해서임을 알기 때문이다.

토벌이 성공적으로 끝났다는 보고를 받은 후부터 안티로스에서는 복귀하는 토벌대를 환영하기 위한 행사가 준비되고 있었다. 무엇보다 이 행사에선 황제가 직접 그 공을 치하하는 순서도 있었다.

매년 크고 작은 축제와 행사가 벌어지는 안티로스지만, 이런 큰 행사는 십여 년 만이었다.

그 준비만 해도 벌써 오 일째였으니 더 말할 필요도 없었다.

이에 드문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행사의 규모에 비례해, 준비 기간 역시 볼거리가 넘쳐났기 때문이다. 또 상인들은 이렇게 모인 사람들을 쫓아 한몫 잡으려 했다. 그런 식으로 인파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이로 인해 죽어나는 것은 수도의 치안을 책임지는 담당관과 병사들이었다.

모든 사람이 규칙을 잘 지키는 것은 아니다 보니, 사람 수 만큼이나 사건 사고가 늘었기 때문이다.

이들의 고생 덕분에 안티로스는 이미 전야제라도 시작된 듯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며 흥을 내는 사람들로 흥청거릴 수 있었다.

그런 밝은 분위기에 반해, 창을 통해 수도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황제에게는 고민이 가득해 보였다. 제국의 주인으로서 기뻐하는 백성의 모습은 또 다른 즐거움일 텐데 말이다.

“순수하게 즐길 수 있는 저들이 부럽군.

이마를 꾹꾹 눌러 뜨거워진 머리를 진정시킨 황제는 책상에 엉덩이를 걸쳤다.

황금과 보석으로 치장되어 화려한 책상이지만 황제에겐 고민을 늘리는 골칫덩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렇다.

당장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수십 장의 보고서는 토벌대에서 올라온 것이었다. 개중 몇 장의 보고서는 황제가 따로 빼 두었다.

보고서의 작성자는 발터 백작.

청색 깃털 기사단의 단장이며 제국 초인 기사들의 강력한 지지를 받는 제국의 기둥으로, 황제가 믿고 쓸 수 있는 신하 중 하나다.

다만 그런 신하가 오늘은 황제를 괴롭게 하고 있었다. 문제는 보고서의 내용이었다.

발터가 적은 보고서에는 제국의 자랑이며 동시에 중요한 기둥이라고 할 수 있는 소드 팰러스의 검왕에 대해 적혀 있다.

단순히 이름을 언급한 정도가 아닌, 철저하고 노골적인 비난을 담고서. 심지어 말미에 가서는 소드 팰러스의 세 검왕 중 철벽의 검왕을 범죄자로 취급하고 있었다. 그것도 황제의 명령으로 행해지는 토벌대를 향해 검을 든 범죄자 말이다.

사실 보고자가 발터만 아니라면 치졸한 음해로도 쓰지 못할 헛소리로 넘겨 버릴 내용이었다.

또 반대로 보고자가 발터기 때문에 그냥 넘길 수 없는 내용이기도 했다.

보고서에는 존 워스를 향한 발터의 분노가 글로 차갑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건 어떻게든 사실을 밝혀 처벌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엿보이는 부분이었다.

현재 아나크렌 제국의 권력 구도를 보면 소드 팰러스를 견제하기 위해 황제가 초인파에 힘을 실어 주고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 이 보고서는 헬파이어 급의 파괴력을 가지고 있었다.

황제가 원한 견제는 적당히 힘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지, 헬파이어가 터지는 게 아니었다.

토벌 대상인 정신의 관과 손을 잡고 토벌대를 공격하다니. 그 피해가 아무리 청색 깃털 기사단에 집중되었다고 해도, 공론화되는 순간 제국이 통째로 뒤집어질 어마어마한 사건이었다.

사실 이뿐이라면 황제가 어떻게든 컨트롤이 가능했다.

소드 팰러스와 초인파는 정치적으로도 대립하는 집단인 만큼 서로를 향한 많은 음해와 공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즉, 확실한 증거가 없다면 진실을 규명하는 과정에서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있었으니까.

발터도 이런 부분을 염두에 둔 것인지, 보고서에 적은 내용에 대한 증거를 첨부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적색 기사단의 증언 말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그들의 증언이라면 아무리 소드 팰러스라도 거짓이라고 주장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상황이 그 정도가 되면 황제가 하기에 따라 소드 팰러스를 존경받는 기사의 성지가 아닌 지탄받을 배신자의 땅으로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제국을 위해서 소드 팰러스는 버려서는 안 돼.’

황제로서는 견제하고 있지만, 제국으로서는 절대 버릴 수 없는 카드가 소드 팰러스였다. 황제가 고민하는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과연 적색 기사단이 소드 팰러스가 손가락질당하는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서까지 증언을 해 줄 것인가 하는 것도 의문이었다. 누가 뭐래도 소드 팰러스는 적색 기사단의 둥지와 같은 곳이니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걸 없던 일로 묻어 버리기에는 발터의 분노가 심상치 않으니. 황제로서는 실로 진퇴양난이 아닐 수 없었다.

“검후께서 계셨다면 고민할 문제도 아니었는데, 소드 팰러스의 권한에 대한 축소 작업을 좀 더 서두를 것을…”

고민이 깊어질수록 남는 건 후회뿐이었다. 황제는 곧 도망치듯 다시 창가로 갔다.

오후가 되자 하나둘 등이 밝혀지기 시작한 거리는 더욱 화려해지고 있었다. 자신은 이리 고민이 깊은데 말이다. 그래서일까. 그저 자신이 보살피고 다스려야 할 백성일 뿐인 저들의 모습이 오늘은 유독 부럽기만 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저들 속에 있고 싶구나.”

만약 그를 모시는 자들이 들었다면 질겁하고 반대할 소리를 하는 황제였다.

그런 황제의 집무실에 곧 불이 밝혀졌다. 색색으로 화려한 거리와 달리 어딘가 우울해 보이는 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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