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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20화


1055화

하루가 지났다.

곧 자신을 찾아올 거라는 검후의 말과 달리, 도망친 라울은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그에 라미아는 이드가 너무 겁을 줘서 그런 거라고 깔깔거리기도 했다.

결국 바벨이 검후를 찾아오는 일의 중요도는 이드와 일행들에게 그렇게 웃어넘길 수준에 불과했다.

심지어 말을 꺼낸 장본인인 검후가 가장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아니, 다른 형태로 반응했다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녀는 라울이 다녀간 당일 밤부터 이드를 붙잡고 회복 훈련을 시작했다.

그렇게 새벽까지 땀을 흘린 검후는 3시간을 자고 일어나서는 은색 기사단을 지하실에 집합시켰다. 케마란과 네리베르를 두려움에 떨게 했던 검후의 수련이 시작된 것이다.

소식을 들은 이드도 잠깐 지하실에 들러 그 모습을 지켜보기도 했다. 과연 두 사람이 무서워 한 만큼은 아니지만, 꽤 강도가 높았다.

그러나 수련하는 기사 중 누구도 힘들다고 징징거리거나 지친 내색을 보이지 않았다. 전날 라울이 다녀가는 바람에 바짝 독이 올랐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련 전에 검후가 했던 말의 영향이 컸다.

“조만간 소드 팰러스로 돌아간다. 그날, 배신자들은 그 죗값을 받을 것이다. 나는 그때 적을 베는 가장 날카로운 검이 너희들이길 바란다.” 

그 말에 은색 기사들은 가슴이 뜨거워졌다.

동시에 각오를 다졌다. 기사로서 이런 주군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다는 것은 수치라고 여겼다.

이어지는 수련은 모두 그날을 위한 준비 과정이니, 당연히 기뻐할망정 고통으로 받아들일 이유가 없다는 마음가짐을 갖게 된 것이다.

그렇게 수련에 집중한 은색 기사단은 물론이고 검후도 바벨과 라울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린 듯했다.

하지만 이드는 검후가 정말 그들의 존재를 머릿속에서 지운 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게다가 이드도 그녀의 주장이 상당히 일리 있다고 여겼다.

그리 생각하는 까닭은 간단했다. 그들이 검후를 납치, 감금하고 있던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단순히 권력에 대한 욕망이나 욕심을 위해서가 아니라, 초인의 폭주를 해결하기 위해 검후를 사로잡았다. 특히 초인의 폭주는 초인뿐 아니라 그레센 전체의 안전에도 영향을 미치는 일이었다.

초인은 세상 모든 곳에 존재한다. 그러니만큼 그들이 미쳐 날뛰면 그 주변에 있던 사람도 그에 휘말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이런 사연이 있기 때문에 검후도 분노를 뒤로하고 바벨과의 만남을 생각한 것이다.

물론 바벨도 이런 검후의 생각을 짐작하고 있으리라. 검후가 이런 결론을 내릴 수 있도록 감금된 그녀에게 이와 같은 사실을 전달한 것이 다름 아닌 바벨이니 말이다.

결국 바벨이 언제 어떤 식으로 찾아오느냐의 문제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같은 날 저녁.

검후와 은색 기사단이 지하실에서 나오지 않는 덕분에 이드가 오랜만에 가족끼리의 식사를 마쳤을 때, 에린이 찾아왔다.

전날 이드가 내린 명령에 대한 보고를 위해서였다.

이드가 직접 차를 내어 주자 감사 인사를 한 에린은 곧 보고를 시작했다. 그녀가 가장 먼저 꺼낸 이야기는 라울에 대한 일이었다.

“주요 길목을 지키고 있지만, 아쉽게도 아무런 흔적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렇겠지. 당당히 얼굴을 들고 다닐 입장은 아니니까.”

“라울이 저택 앞까지 접근할 때까지 수상한 점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점을 감안했을 때, 이후에도 찾아낼 가능성이 매우 적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보면 검은 돌이 가진 능력의 한계에 대해 인정하는 말일 수도 있건만, 에린은 담담했다.

이드도 그녀가 검은 돌의 무능에 대해 말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이건 어디까지나 검은 돌과 라울의 능력에 대한 정확한 비교 분석, 그리고 그 보고일 뿐이었다.

검은 돌이 상당히 크고 유능한 조직인 것은 사실이다. 당장 그 일원인 에린의 분석 능력만 봐도 얼마나 뛰어난가. 하지만 그런 검은 돌이 아무리 유능해도 바벨에 비할 바는 아니다. 규모나 전력, 소속된 인원 및 능력 등 말할 수 있는 모든 면에서 비교 불가다.

그런 바벨에서 세 손에 꼽히는 실력자가 라울이다. 검은 돌에서 쉽게 찾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럼에도 요원들을 배치한 것은 적에 대한 압박이었다. 혹시 모를 행운에 대한 기대이기도 하고,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준비해 뒀던 주머니를 넘겨주며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계속 수고해 주고, 이건 스톤에게 전해 줘.”

“이건?”

“활동비, 이제 외부 의뢰를 받는 것도 아니니 내가 챙겨야지. 두둑이 넣었어.”

“감사합니다. 허락하신다면 봐도 될까요?”

에린이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듯 물었다.

무려 활동비다. 다시 말해 본인의 급여 역시 들어 있다는 뜻이었다. 궁금한 것도 당연했다. 특히 그 주머니가 주먹만 한 크기임에야 더더욱. 검은 돌 소속 요원의 숫자를 생각하면 실링이나 골덴은 절대 아닐 테고.

“궁금하면 확인해 봐.”

이드의 허락에 살그머니 주머니를 열었을 때다. 입구를 비집고 나온 휘황찬란한 보광이 얼굴과 눈을 찌르는 순간.

“…….”

에린의 입이 힘없이 벌어졌다. 숨조차 멈췄건만, 당사자인 그녀는 깨닫지 못했다. 눈을 어지럽히는 보석의 찬란한 빛에 온 정신이 팔린 탓이다.

‘이, 이게 다 얼마야? 적게 잡아도 검은 돌 십 년 치 수입은 퉁 치고도 남을 것 같은데 어떡해! 너무 황홀해~!’

보석 감정을 해본 적은 없지만, 여자의 감이 외치고 있었다. 주머니에 든 보석 중 어느 하나 최상급이 아닌 게 없다고 말이다.

이런 건 그냥 팔기보다는 경매로 올리는 쪽이 더 제값을 받기 좋았다. 문제는 이만한 물건은 경매에 올리는 것도 일이라는 점이었다. 하지만 검은 돌이 나서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저기 작은 거 하나만 슬쩍해도….

티도 안 날 것 같은데・・・・・・ 그만 보자. 이러다 미치겠다.’

불쑥 치솟아 오르는 마음의 소리에 겨우겨우 주머니를 닫은 에린이 고개를 들었다.

흥분으로 두 볼이 발갛게 달아오른 걸 보면 답은 나온 것 같지만, 그래도 확인을 위해 이드가 물었다.

“모자랄 것 같으면 미리 말하고.”

“설마요. 절대 그럴 일 없습니다. 오히려 넘치도록 주셨어요.”

“넉넉히 넣기는 했지.”

“넉넉한 정도가 아니에요. 검은 돌 역사에 가장 수입이 좋았던 해의 수입 십 년 어치를 모아도 이보단 못할 거에요. 그런데, 정말 이걸 한꺼번에 다 주시는 건가요?”

과연. 저 정도가 검은 돌의 십 년 수입인가. 이드는 새로운 정보를 머리에 집어 놓고는 말했다.

“모자라는 것보다는 넉넉한 편이 낫잖아. 그리고 주머니에 든 보석 중 아무거나 하나는 에린이 챙겨 둬.”

“제, 제가요?”

“그래. 검은 돌과 상관없이, 네가 따로 처리하는 일이 상당히 많잖아. 하는 일이 많은 만큼 더 가지는 게 당연한 거지.”

그 말에 혹시 자신의 속마음을 들켰나 하고 놀란 것도 잠시. 에린은 곧 마음속으로 만세를 불렀다. 자신의 능력을 알아줄 뿐 아니라, 그에 대한 대가도 이렇게 확실히 챙겨 주다니.

에린은 즉시 주머니에서 한눈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던 보석을 꺼내 들고는 극상의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최선을 다해 명예 후작님께 충성하겠습니다!”

“하하. 지금처럼만 해 주면 돼. 그보다 나머지 보고도 듣자고, 토벌대는 어때?”

그에 자신 몫의 보석과 주머니를 따로 잘 챙긴 에린이 몇 번 심호흡을 하고는 답했다.

“토벌대라면 예정대로 내일쯤 도착할 것 같습니다. 안티로스를 코앞에 둔 만큼 특별한 사건이 일어날 일도 없을 테니까요.”

“보통은 그렇겠지.”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완전히 방심하진 않았다.

에린의 말처럼 보통 미친놈이 아니고서야 제국의 앞마당에서, 그것도 토벌대를 상대로 일을 벌이지는 못한다. 하지만 혼돈의 파편이라면 어떤 일이든 벌일 가능성이 있었다.

특히 토벌대의 도착과 함께 터질 거라고 예상되는 문제 중 하나, 존 워스가 혼돈의 파편이라고 확신에 가깝게 의심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게 간단한 보고가 끝이 날 때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이드 님. 저예요.”

검후였다.

“들어와.’

이드의 허락에 문이 열리고 방으로 들어선 검후, 그녀는 무언가를 말하려다 에린을 보고는 말을 아꼈다.

“어서 오십시오. 검후 님. 그럼 보고는 마쳤으니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이드 님.”

그 모습을 알아차린 에린이 자연스럽게 물러났다.

그러자 검후가 혀를 빼물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손님이 있는 줄 모르고 실수할 뻔했네요.”

말과 함께 혀를 쏘옥 빼무는 검후의 모습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귀여웠지만, 이드에겐 그저 한심할 뿐이었다.

“그러게 제발 체통 좀 지켜라. 최근 우리만 있을 때 네가 하는 꼴을 에린이 봤으면 기절을 했을 거다.”

“칫, 사람이 편히 있을 때도 있어야죠. 어떻게 계속 무게만 잡고 있어요?”

불퉁한 모습으로 불만을 말하는 검후의 모습. 그건 마치 십 대 초반의 철부지 소녀를 연상시켰다.

그리고 그게 최근 이드 일가와 있을 때 보이는 검후의 모습이었다. 그래도 이틀 전까지는 다 큰 아가씨 정도의 모습은 보였는데. 어쩐지 점점 어려지는 모습이, 저러다 처음 만났던 꼬맹이 때 모습까지 나오는 게 아닌가 싶어 걱정이 되는 이드였다.

“그래서 이번엔 또 무슨 일이야? 지하실에서 기사들 굴리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지금 시간이 몇 신데요. 기사들 수련은 벌써 끝났다고요. 이제 제가 수련할 시간이에요.”

“설마 오늘도 상대해 달라고?”

“당연하죠. 약속하셨잖아요.”

“아니, 그래도 매일은 아니지. 어제도 새벽까지 상대해 줬잖아. 오늘은 천천히 그걸 소화해야 하는 거 아냐?” 

설마 이렇게 매일 끌고 다닐 생각인가. 불길한 예감에 이드가 미간을 모을 때,

검후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하고는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말했다.

“그 정도야 낮에 기사들을 수련시키면서 소화했죠. 이드 님이 보기엔 어떨지 몰라도, 제가 바로 검후라고요.”

우쭐한 검후지만 이드는 그녀의 노력과 재능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드는 전날 새벽까지 검후의 전투 감각을 살리는 한편 혈도를 자극하고, 그녀가 원하던 검초에 대한 가르침을 주었다.

한데 재능이 뛰어난 수재도 며칠은 노력해야 제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을 하루 만에, 그것도 기사들까지 가르치며 소화했다니 말이다.

‘어쩐지 사람들이 왜 그렇게 기를 쓰고 재능 있는 천재를 제자로 들이는지를 알 것 같은 기분이네.’

놀람 반 대견함 반. 이드는 거기에 승부욕과 닮았지만, 확연히 다른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검후. 내가 검후님을 몰라봤네. 가자. 내가 오늘은 아주 눈물을 쏙 빼 줄 테니까!”

“호호호. 기대되네요.”

아니, 그걸 왜 기대해? M이야?


그렇게 검후에 잡힌 이드가 지하실로 끌려가던 그 시각.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방에 페시딘이 홀로 앉아 있었다. 깊은 사색에 빠진 듯, 그의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팔걸이를 따각거리며 두드렸다. 무려 검왕이 깊은 생각에 빠진 순간이다. 누구도 그 순간을 절대 방해할 수 없을 것 같은 분위기.

하지만 그런 ‘절대’란 없다고 말하듯, 예고도 없이 문을 벌컥 열어젖히며 마르텔이 나타났다. 그는 어두운 방을 확인하고는 쯧쯧 혀를 찬 뒤 손가락을 튕겨 마법 등을 켰다.

“이럴 줄 알았지. 자넨 이게 문제야. 고민이 있으면 같이 풀어야지. 혼자 끙끙거린다고 해결이 되나?”

“하아. 또 방해인가?”

“방해가 아니라, 자네 고민을 덜어 주려고 온 거야.”

“자네가 무슨 수로?”

퉁명스러운 페시딘의 반응에 커다란 술병을 흔들어 보이며 마르텔이 말했다.

“당연히 이 술로. 자, 우선 한 잔 쭉 들이켜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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