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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634화


1069화

고개를 끄덕이는 세레니아. 이드는 여태까지의 정보를 토대로 단어 하나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함정.

혼돈의 파편과 관련한 어떠한 사건으로 세레니아를 비롯한 드래곤이 나설 수밖에 없는 일이 생겼고, 그 결과 그들이 사라졌다. 그렇게 생각하고도 남았다.

다만, 아직 모든 의문이 풀린 건 아니었다.

아무리 함정에 빠졌다 한들, 6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드래곤의 전멸.

까득.

꽉 다문 이 때문에 턱 옆이 불룩하게 튀어나왔다. 꺼내기 싫은 말이지만 꼭 확인해야 할 일이기에 질문을 던졌다.

“그럼 지금, 세레니아 님 본인과 다른 드래곤 분들은 살아 있는 겁니까?”

순간 방에 있던 모든 사람이 숨을 삼켰다.

궁금하지만 차마 말로 꺼내지 못했던 의문.

다행히 세레니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 본체에 숨이 붙어 있는 건 확실해요. 매우 멀어서 희미하긴 하지만, 그 존재가 느껴지거든요. 이 사념체를 백을 기반으로 만든 이유 중 하나죠. 하지만 저 말고 다른 드래곤들이 살아 있는지까지는 알 수 없어요.”

“그걸로 충분합니다. 당신이 살아 있다면 다른 이들도 무사할 겁니다. 드래곤들은 강하니까요.’

“맞아요. 우린 지상 최강의 종족이죠.”

이드의 말에 세레니아가 방긋 웃으며 긍정했다.

라미아가 갑자기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것은 그때였다.

“잠깐만요. 지금 백을 기반으로 사념체를 생성한 이유 중 하나가 생존 사실의 확인이라고 했잖아요. 그럼 혹시 영력을 증폭하면 세레니아의 본체와 접속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요?”

“좋은 방법이지만, 아쉽게도 불가능해요. 이 사념체는 처음 만들어질 때부터 외부 간섭에 저항하도록 설계되었거든요.”

그건 반지도 마찬가지였다. 세레니아가 얼마나 철저하게 외부의 간섭에 대비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드가 역시나 하는 얼굴이 되어 물었다.

“그것도 혼돈의 파편 때문입니까?”

“그렇긴 하지만,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이에요. 비밀에 싸인 보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니까요.

“같은 인간으로서 부정하기 힘든 말이네요.”

그 말에 방에 있던 사람들이 쓰게 웃었다.

호기심, 탐구욕 등 온갖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하지 말라는 짓을 하는 인간이 어디 한둘이던가.

역사에 남겨진 큰 사건 중 그 대부분의 시작이 인간이었다. 당장 혼돈의 파편을 봉인에서 풀어낸 것도 카논의 마법사이지 않던가.

“그렇게까지 조심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당연히 이드 님께 오염된 정보를 전달하지 않기 위해서죠. 혹시 혼돈의 파편과는 충돌이 있었나요?”

세레니아의 질문에 거대한 신랑의 모습을 한 메르시오를 떠올린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메르시오와는 만나 봤습니다.”

“그 정도면 운명이군요. 이전에도 혼돈의 파편 중 가장 처음 만난 것이 메르시오였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랬다. 메르시오와는 꽤 질긴 악연이었다. 뭐, 이제 그 악연도 끝이 났지만. 세레니아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혼돈의 파편이 무엇을 노리는지, 세상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셨나요?”

“아니요. 묻는다고 친절하게 설명해 줄 놈은 아니잖습니까. 다만 무언가를 계획하고 있고, 그게 초인과 관계가 있다는 건 짐작하고 있습니다.”

“휴우~ 다행이네요.”

“뭐가요?”

“이드 님이 벌써 다 알아내셨으면 어쩌나 했거든요. 다행히 제가 남긴 정보가 쓸모가 있겠네요.

이드는 말과 함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세레니아의 모습이 참 고마웠다.

“오히려 제가 감사할 일이죠. 그럼・・・・・・ 세레니아 님과 드래곤들이 왜 움직였는지부터 알려 주시겠습니까?”

물론 혼돈의 파편의 목적이나, 계획도 궁금하다.

하지만 세레니아와 드래곤들이 어디에 있는지, 무얼 하는지 지금 전혀 모른다.

만약 그들이 좋지 않은 상황에 처했고, 세레니아의 사념체를 통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면 그들을 구하는 게 먼저가 아닐까. 

“그럴까요? 하지만 그걸 설명하기 위해서는 한 가지 이야기를 먼저 해야 해요.”

세레니아가 앙증맞은 손으로 턱을 괴며 말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이드는 왠지 무슨 말이 이어질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별이 낳아, 별의 의지를 잊고 있는 아이들.”

“제가 시르피에게 했던 이야기로군요.”

“메르시오도 비슷한 소리를 했죠. 오히려 세레니아 님이 그런 말을 하셨다고 해서 놀랐었습니다. 역시 초인에 대한 말이었군요?”

“네. 모두 아실 거예요. 혼돈의 파편들은 이 세상의 끝, 진정한 파멸을 가져오는 존재들이죠.

그건 처음 혼돈의 파편에 대해 알았을 때 함께 깨우친 내용이었다. 그런 존재였기 때문에 모든 드래곤들이 나선 것이기도 하고. 

“그렇죠. 그나마 봉인이 풀릴 때 맺은 계약 덕분에 파괴 활동을 멈춘 상태고요.”

“천만다행이죠. 파멸의 봉인을 풀어낸 것도 게르만이지만, 대비할 시간을 벌어 준 것도 그였어요.”

그렇다고 해도 게르만이 죽일 놈인 건 변하지 않는다.

애초에 봉인을 풀지 않았으면 많은 이들이 이토록 고생할 일도 없었을 테니.

다만, 언젠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기는 했다.

차원의 인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이 세계에 잠든 혼돈의 파편을 정리해야 한다. 결국 이드가 중원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도 혼돈의 파편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니만큼 게르만이 아니었다면 이드가 봉인을 풀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물론, 혼돈의 파편이 풀려남으로 인해 세상이 멸망할 수 있다는 걸 이드가 알게 된다면 아마 봉인을 풀지 않았을 테지만 말이다.

뭐, 이제 와선 의미 없는 가정에 불과했다.

이미 게르만은 죽고, 혼돈의 파편은 봉인에서 풀려났으니.

“모든 걸 파멸시키는 혼돈의 파편. 초인은 그런 혼돈의 파편으로부터 세상이 자기 스스로를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 만든 존재예요. 여기서 세상이란 신이 아닌, 우리가 살아가는 이 행성을 말하는 거고요.”

“과연. 그래서 별이 만든 아이라는 거군요. 별이 죽지 않기 위해 만들었다. 라.”

행성은 하나의 유기체로서 살아 있는 생물이다. 그런 주장이 담긴 가이아 이론이 문득 떠오르는 이드였다.

어떠한 형태로든 세상의 기운을 수련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고심할 만한 화두일 것이다.

이드 또한 그랬고, 실제로 많은 부분에 공감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별에서 자신을 죽이려는 혼돈의 파편에 대항하기 위해 초인을 만들어 낸 것 역시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일종의 항체라고 해야 할까?

“초인의 탄생 배경이 그런 것이라면, 그들이 혼돈의 파편만 보면 미쳐 날뛰는 이유도 설명이 되는군요.”

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세레니아는 첫 번째 초인의 탄생을 직접 보게 된 순간에 대해 간단히 이야기하며, 동시에 신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살기 위해 발버둥 치기 시작한 별과 달리, 이 세상을 관리하는 신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들은 철저한 제삼자의 입장에서 지금까지 해오던 대로만 움직인 것이다.

세레니아는 그에 대해 혼돈의 파편과 그레센의 신 모두 창조신에 의해 태어난 존재들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즉, 그들의 임무가 생명을 관리하는 것이라면, 혼돈의 파편의 종언 역시 창조신이 그들에게 내린 역할이라는 의미였다.

정해진 일을 하는데 막을 이유가 없다는 뜻.

“문제는 이런 초인의 등장에 혼돈의 파편이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점이에요. 그들 입장에서도 초인들이 무한정 늘어나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거죠. 한둘이야 위협이 아니지만, 수천, 수만으로 끝없이 증가한다면 그땐 대응하기 곤란할 테니까요.”

“그렇겠죠.”

이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팔짱을 꼈다.

‘어쩌면 이런 방식이 혼돈의 파편을 물리치는 일반적인 흐름일 수도 있겠어.’

그레센이야 자신과 드래곤이 있어 혼돈의 파편과 싸우고 있지만, 그런 전력이 없는 세상이 혼돈의 파편과 싸울 방법은 저것뿐일 터였다.

그리고 그렇게 싸워 혼돈의 파편을 물리치고 나면, 그 시점에 세상은 이미 크게 변해 있을 것이다.

“혼돈의 파편이 움직이기 시작했으니, 세레니아 님과 드래곤들도 그에 대응했겠군요?”

가끔씩 찾아오던 세레니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일리나가 물었다.

“좀처럼 쉽게 끝날 수 없는 전투였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혼돈의 파편에게 불리하다는 건 확실했죠. 언젠가 이드 님이 돌아오실 것이고, 초인의 숫자도 계속 늘어날 테니까요. 저들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마음이 조급해지기라도 한 건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찾아냈죠.”

“초인의 성질을 바꾸는 것이요?”

별은 초인을 낳으며 힘과 함께 오직 한 가지 의지만을 심었다.

‘혼돈의 파편을 제거하라.’

정작 본인들은 알지 못하는 초인들의 의무.

간단하고 직관적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 곳곳에서 초인들이 폭주를 하게 된 이유였다.

혼돈의 파편 입장에서 보자면, 온 사방에 날벌레가 가득하게 된 셈이다.

게다가 그중 몇몇은 제법 아픈 독침까지 가지고 말이다.

그런데 드래곤들 때문에 이런 날벌레를 정리하기도 힘들어서 놈들의 숫자가 늘어나는 걸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본래 목적에 따라 세상을 부수자니, 계약이 걸린다.

획기적인 꼼수는 바로 그런 상황에서 나왔다.

원리는 간단했다. 초인이 가진 혼돈의 파편에 대한 무조건적인 공격성을 제거, 또는 방향을 바꾸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초인을 조종하다니. 정말 가능한 겁니까?”

자신이 끼어들 자리가 아니라는 생각에 조용히 듣고만 있던 쉴라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 그녀의 이마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촉촉하다. 세상의 존망이 거론되는 스케일에 아무리 은색 기사단의 단장이라도 기가 질린 것이다.

“가능해요. 물론 별처럼 쉽게 할 수는 없어서 복잡한 절차가 따라야 하겠지만요. 우리는 67년 전에 이런 일이 이뤄지고 있음을 알아차렸고, 토의 결과에 따라 몇 가지 준비를 해 둔 후 그들의 계획을 막기 위해 공격했죠. 그 결과는……훗.”

힘없이 웃는 세레니아에 아무도 답하지 못했다.

그 후 지금까지 아무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니, 무슨 말이 필요할까.

“그래도 절반은 성공한 것 같아 다행이에요. 이드 님의 말씀을 들어 보면 초인의 성질을 바꾸는 건 막은 듯하니까요.”

“글쎄요. 일단 막긴 했지만, 포기한 눈치는 아닌 것 같은걸요?”

라미아의 말에 세레니아가 그녀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요?”

“미완의 마탑이라고 있어요.”

이어 라미아는 미완의 마탑에 간섭한 혼돈의 파편의 흔적에 대해서 설명했다.

“지금까지는 그들의 정확한 목적을 알기 힘들었는데, 이제 알겠네요. 혼돈의 파편이 미완의 마탑을 이용해서 초인의 성질을 바꾸려는 거에요.” 

탑주와 마탑에 소속된 마법사들이 바라는 바는 그게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혼돈의 파편이 작정한다면 일개 마법사들이 눈치챌 수 없을 것이다. 실제로 탑주도 이드가 언급하기 전에는 정신의 관에 메르시오가 드나들고 있음을 알지 못했으니까.

“그렇군요. 포기한 게 아니군요. 하지만 이드 님이 있으니 괜찮겠죠?”

이드는 자신을 향해 신뢰 어린 시선을 보내는 세레니아를 보며 말했다.

“세레니아 님이 본체로 돌아오시면 더 쉽게 처리할 수 있겠습니다만. 그런 의미에서, 뭔가 돌아오실 방법이 없습니까? 방금 이야기를 들어 보면 무턱대고 돌진한 건 아니신 듯한데.”

“우후후. 역시 알아차렸나요?”

“드래곤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세상 그 어떤 사람보다 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요.”

그레이드론에게서 드래곤 하트와 지식을 얻은 이드이기에 할 수 있는 말이다.

“맞아요. 그런 의미에서 요청드리겠어요. 이드 님. 빠른 시일 내에 혼돈의 파편 중 하나를 제거해 주세요. 그래서 저희 드래곤들이 돌아올 수 있도록!”

마나석을 밟고 벌떡 일어선 세레니아가 이드를 향해 손을 내밀며 요청했다.

그에 그녀가 내민 손에 손가락을 마주하며 이드가 시들하게 말했다.

“・・・・다행이군요. 마침 메르시오를 제거해 놨거든요.”

“……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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