랜덤 이미지

이드 2부 – 635화


1070화

그건 예고 없이 나타났다. 쩌억.

바다를 옮겨 놓은 듯 새파란 하늘. 그리고 그 꼭대기에 걸린, 태양을 반으로 가르는 검은 선.

검은 선은 곧 먹구름 같은 형태로 사방에 번지며 햇빛을 막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산골 농민이 보았다면 신이 노하셨다며 엎드려 빌었을 것이고, 마법사가 보았다면 중간계층 허수 공간의 자연적인 균열 현상을 발견했다며 눈을 번득였을 모습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 현상이 나타난 곳은 망망대해의 한가운데, 보아 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흔들.

거기에 검은 선은 금방 사라졌다.

균열을 발생시킨 힘이 약해서인지, 공간의 복원력이 강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렴 어떤가.

이런 현상이 나타났음을 이 세상 누구도 모르는데.


온몸으로 ‘나 놀랐어요!’를 표시하며 굳어 있던 세레니아가 곧이어 벼락처럼 소리를 질렀다.

“아니! 그런 중요한 일을 왜 이제 말씀해 주시는 거예요!”

뭐, 그래 봤자 몸집 때문인지 그리 큰 음성도 아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도 무섭기보다는 되레 더 귀엽기만 하고 말이다. 당장 그 모습을 보고 숨넘어갈 것 같은 표정을 하는 검후만 봐도 그 귀여움이 어느 정도인지 답이 나온다.

동시에 황녀가 그렇게나 검후를 사랑하는 이유도 납득이 갔다.

‘저렇게 귀여운 모습에 사족을 못 쓰는데, 황녀가 아기일 때 얼마나 이뻐했겠어?’

어쩐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다고 할까? 아마 황궁에 머무르면서 그녀를 끼고 살았으리라.

사실 이런 이드의 짐작은 제법 정확했다. 황녀의 출생 후 검후의 공백은 나름 유명하다면 유명한 이야기라고 할까?

그렇게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던 이드는 자신을 노려보는 세레니아의 눈빛에 정신을 차리고 급히 입을 열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중요한 일들이 있었을 뿐이죠. 세레니아의 생사 확인 같은 것 말입니다.”

“우・・・・・・ 그렇게 말하면 제가 할 말이 없잖아요.”

결국 세레니아의 얼굴이 풀렸다. 대신 뾰로통하니 입술이 튀어나왔다.

몸의 크기를 따라 하는 행동도 어려진 게 아닐까 싶어지는 순간이었다.

“어쩌겠습니까. 그게 사실인데.”

“어쨌든 좋아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래서, 메르시오와 싸운 건 언제인가요?”

“보름 정도 지났으니, 그리 오래되진 않았습니다.”

이드는 대답을 하면서도 새삼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지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제국으로의 복귀에, 은색 기사단과 검후의 수련, 축제, 라울의 방문, 소드 팰러스 잠입까지.

일이 한둘이 아니라 굉장히 바빴던 것 같은데, 실제론 채 한 달도 지나지 않았다.

“보름이면 슬슬 반응이 나올 수 있는 시간인데. 참, 메르시오가 입은 타격이 큰가요? 타격이 클수록 부활하는 시간이 길어지거든요.”

부활 시간이라. 이드는 처음 듣는 소리다.

아무래도 오랫동안 혼돈의 파편과 싸워 오며 알아낸 정보 중 하나이리라.

“그건 걱정할 필요 없을 겁니다. 메르시오가 다시 나타나지는 못할 테니까요.”

“그게 무슨 말인가요?”

이드는 고개를 갸웃하는 세레니아에 차원의 인이 걸려 있던 왼쪽 손목을 두드려 보였다.

“저도 이번에 메르시오를 죽인 후 처음 알았는데, 혼돈의 파편을 죽이면 차원의 인이 그들을 흡수하더군요. 그걸 본 순간 딱 감이 왔죠. 이 지겨운 놈을 다시 볼 일은 더 이상 없겠구나 하고.”

이드는 당시 자신이 얼마나 놀랐는지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차원의 인의 사용법을 알게 되면서 그 비밀을 다 알았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는 사실에 당혹스럽기까지 했더랬다.

이건 뭐 양파도 아니고, 얼마나 더 비밀을 숨기고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이드의 심정과는 별개로, 상황을 이해한 세레니아는 환하게 밝아진 얼굴로 손뼉을 치고 있었다.

“역시 이드 님을 기다린 게 정답이었어요. 저희가 아무리 연구해도 소멸시킬 방법을 찾지 못했는데, 이미 이드 님은 그 방법을 가지고 계셨다니. 이렇게 기쁠 수가 없네요.”

“운이 좋은 거죠. 실제 차원의 인이 각성하지 않은 상태일 때는 혼돈의 파편을 소멸시킬 수 없었으니까요.”

“운이면 어떤가요? 결과가 중요하죠. 이제는 놈들을 찾아서 소멸시키기만 하면 끝난다는 거잖아요.”

마치 이보다 좋은 일이 어디 있냐는 듯 기뻐하는 세레니아. 그 모습에 이드는 그녀가 어지간히도 혼돈의 파편에 시달렸구나 하고 생각했다. 하긴, 아무리 죽여도 다시 살아나는 적이라니.

그런 놈들과 싸우는 일이 얼마나 피곤할지 상상만 해도 괴로웠다. 특히 혼돈의 파편은 어느 하나 만만한 자가 없는 만큼 매번 싸움에 목숨을 걸어야 하지 않는가.

이쪽은 목숨을 걸고 싸우는데, 상대는 죽어도 부활하면 끝이라니. 이보다 더 허탈할 수가 있을까.

그 끈질긴 악마도 한번 소멸시키면 최소 수백 년은 얌전한데 말이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이미 죽어 버린 메르시오가 아니었다.

“그럼 이제 혼돈의 파편을 없애 달라고 말씀하신 이유에 대해서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우리가 이야기하던 문맥상 그게 드래곤들이 다시 돌아오는 일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요.”

“정확하세요.”

그리 답한 세레니아는 허공에 손가락을 찍었다. 그러자 그 자리에 하나의 행성이 나타났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들어오는 건 그레센 대륙이었다.

자신들이 사는 별을 처음 두 눈으로 확인한 검후와 쉴라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머리를 들이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세레니아가 한 번 더 손가락을 찍자 별을 중심으로 뿌연 회색의 공간이 나타났다. 지구에서는 별 밖엔 상식적으로 우주가 있다. 한데 저건 아무리 봐도 우주라는 느낌은 아니었다. 이드가 설명을 바라는 눈빛을 보이자 세레니아가 말했다.

“저와 드래곤들은 별 안의 내계에서 밀려나, 여기 이 부분. 차원과 차원의 틈 사이에 존재하는 외계 공간에 있어요.’

그렇게 말하며 회색의 공간을 짚어 보인 세레니아.

“그 말은, 세레니아가 저들이 어떤 함정을 만들었는지 안다는 겁니까?”

이드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분명 이 사념체는 세레니아가 함정에 빠지기 전에 남겼을 터였다. 그런데 그 이후의 세레니아가 어디에 있는지를 어떻게 안단 말인가. 그건 적의 음모를 예측하지 않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이드의 짐작은 정확했다.

“제가 함정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정확히 말하면 그들이 준비한 건 단순한 함정이 아니라, 하나의 의식이었어요. 당시 혼돈의 파편은 초인의 성질을 바꾸려 했고, 그 방법으로 외계에서 별의 내계로의 강제력 간섭이라는 수단을 사용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이 방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요소가 있는데, 그게 바로 외계로 향하는 통로예요.”

거기까지 말한 세레니아가 계속 이었다.

“외계에서의 간섭을 위해서는 당연히 거기에 직접적인 힘을 투사해야 하는 게 전제 조건이거든요. 그러니 저와 드래곤들로서는 그 통로를 닫는 걸 가장 우선해야 했죠. 동시에 저는 강제력 간섭이라는 계획이 실패할 경우 이 의식이 저희에 대한 함정으로 변형될 것이고, 그때는 이 통로가 굉장히 문제가 될 거라는 것 또한 알 수 있었어요.”

당시 드래곤들의 전력은 혼돈의 파편보다 우월했다.

하지만 그건 순수한 힘 대 힘으로 부딪혔을 경우고, 이처럼 혼돈의 파편이 거대한 의식을 통한다면 그건 또 이야기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혼돈의 파편에서도 그렇게 발현한 힘을 드래곤에 대한 공격용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럴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령 방법을 알았다 해도 모든 드래곤을 처리할 수도 없다. 드래곤들이 바보도 아니고, 가만히 당하고 있을 턱이 없으니 말이다.

그에 혼돈의 파편은 드래곤을 직접 공격하는 형태가 아닌, 드래곤이 더 이상 자신들에게 간섭할 수 없는 방법을 찾았고, 의식을 통해 증폭된 힘으로 세레니아와 드래곤들을 외계로 쫓아내 버린 것이다.

세레니아의 예측이 정확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일어났던 일을 현재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이 완벽하게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당시의 상황에 대해 남긴 세레니아의 정보와 그녀가 먼 곳에 살아 있다는 확인이 더해지면 세레니아의 예측이 맞았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쉴라가 납득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죄송하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그런데, 질문을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에요.”

“적의 의도를 그 정도로 읽어 냈다면 대응법을 찾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았을 텐데, 어째서 함정에 빠진 것입니까?”

적의 계획을 미리 알았다면 그걸 역이용해서 적의 뒤통수에 칼 정도는 박아 줘야 한다는 것이 은색 기사단장인 쉴라의 지론이었다. 사실 옳은 말이기도 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불태라고 했다.

하지만 적의 목적과 그 방법과 계획까지 알 수 있다면 백전불태가 아니라 백전멸망시켜 버릴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자 세레니아가 왜 그걸 모르겠냐며 폭 하고 한숨을 쉬었다.

“저도 당연히 그러고 싶었죠. 하지만 혼돈의 파편도 만만한 자들이 아니었어요.”

결국 뒤통수를 때리긴커녕 이쪽이야말로 당했다는 거다.

초인의 성질을 바꾸기 위해 준비한 의식을 통해 증폭된 전력은 드래곤들로 하여금 뒤를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의식이 성공하도록 그냥 둘 수도 없었다.

그나마 일말의 기대를 걸고 내계와 외계를 넘나들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대응 마법진도 숨겨 두긴 했지만.

“결국, 돌아온 드래곤이 아무도 없다는 걸 보면 소용이 없었던 거죠.”

“씁쓸하네요.”

이드는 혀를 찼다.

돌진하면 함정이지만, 그렇다고 무시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니. 세레니아가 얼마나 고민을 했을까.

그러나 마주한 사념체로 남은 세레니아의 얼굴엔 그런 느낌이 하나도 없었다.

“피할 수 없었지만, 꼭 나쁜 결과만은 아니었어요.”

“다른 사정이 더 있는 겁니까?”

“사전에 제가 계산한 바에 따르면 혼돈의 파편 역시 최소 셋 이상의 희생이 필요했거든요. 아무렴 저희 드래곤들을 외계로 분리해 두는데 단순히 함정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는 일이죠.”

“맞아요. 한둘도 아니고, 그 많은 드래곤들이라면 충분히 내계로 구멍을 뚫을 수 있었겠네요.”

라미아가 무릎을 치며 말하자 세레니아가 정답이라고 말했다.

“맞아요. 그걸 막기 위해서는 혼돈의 파편도 직접 외계의 입구를 지킬 수밖에 없는 거죠.’

“그러기 위한 최소한의 숫자가 혼돈의 파편 셋이라는 거군요.”

“네. 넷이면 더 단단하게 막을 수 있을 거고요. 무엇보다 혼돈의 파편들이 가진 강력한 힘을 생각하면 둘, 셋으로도 게르만의 계약 내용을 이행할 수 있을 거라고 여길 테니까요.”

여기까지 들은 이드는 자신이 왜 혼돈의 파편에 대한 단서를 그렇게나 찾을 수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저들이 철저히 숨은 것도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실제 이 대륙에서 활동하는 혼돈의 파편 자체가 적었다.

“어쩌면 우린 현재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혼돈의 파편을 발견한 걸지도 모르겠는데?”

그 중 하나는 부활할 수 없도록 죽이다 못해 흡수까지 해 버렸고 말이다.

라미아와 일리나도 이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럴 가능성이 높아요.”

“그럼 세레니아의 요청은 결국 내계에 있는 혼돈의 파편을 죽여 전력의 공백을 만드는 걸 유도하는 거군요?”

“네. 저들 입장에선 둘, 셋 정도의 전력이면 충분했겠지만, 지금은 이드도 돌아온 상태잖아요. 그런 상태로 하나가 제거되었다면, 당연히 전력을 수혈할 수밖에 없고.’

“혼돈의 파편이 수혈할 수 있는 전력이라고는 외계의 경계에서 세레니아와 드래곤들을 막고 있는 혼돈의 파편들밖에 없겠죠.”

세레니아의 말을 받은 라미아가 빙그레 웃으며 말을 끝냈다.

“그렇게 빠진 자리는 당연히 틈이 날 것이고, 그 틈으로 돌아온다는 거군요.”

“보름이 지났으니, 어쩌면 벌써 시도되고 있을 수도 있어요.”

세레니아가 환하게 웃었다.

랜덤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