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2화
509화
코시는 황금빛에서 붉은빛으로 변해 가는 태양을 보며 인상을 찡그렸다.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만은 아니었다. 이번 일이 생각만큼 내키지 않아서였다. 사실 그동안 타르코지 밑에 있으면서 한두 번 해 본 일은 아니었다.
지금에 와서 양심에 눈뜬 것도 아니었다.
그저 모래를 한 주먹 머금은 듯 버석거리는 입 안의 감각이 너무 싫었다.
이럴 때 그는 항상 돈을 잃고는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괜히 불안하고 초조했다. 이런 일을 진행할 때 걸리는 판돈은 단순한 황금 조각이 아니라 자신의 목숨인 경우가 대부분이니까.
하지만 단순히 예감이 좋지 않다고 해서 빠질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이와 같은 일에서 갑자기 빠져 버릴 경우. 정말 그 뒷감당이 힘들었다. 지금까지 타르코지를 옆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정말 자신의 목을 자르겠다고 난리를 칠 가능성이 다분했다. 무엇보다 과감하게 질러야 할 때는 지를 줄 아는 자가 타르코지였다. 아마, 자신의 뒤에 있는 남작 형님의 눈치를 보지도 않을 것이다.
“빌어먹을 인간. 하필 소개를 시켜 줘도 이딴 놈 밑이 뭐야.”
코시는 자신을 타르코지에게 맡긴 이부형제(兄弟)인 남작이 원망스러웠다.
한참 동안 자신의 씨 다른 형제를 씹던 코시는 시간을 가늠하다가 두 마법사와 그들과 함께 달려온 상단의 검사들을 이끌고 쉼터를 나섰다. 코시는 마법사들을 데리고 쉼터가 보이지 않는 곳까지 나와서 상단을 기다렸다.
코시와는 처음부터 소 닭 보듯 하던 검사들은 중간에 몸을 숨길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긴 후였다. 차 한 잔 마실 시간이 흐르자 뿌연 먼지와 함께 상단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코시는 정찰을 나섰다 돌아오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상단 속으로 섞여 들었다.
타르코지의 마차로 다가선 코지가 마차 문을 두드렸다.
“복귀했습니다.”
“들어와.”
안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코시가 마차에 올라탔다.
타르코지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코시를 바라보며 말했다.
“문제는 없었지?”
코시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망설이다가 말했다.
“문제는 없는데, 이번 건은 그냥 넘어가시죠?”
고개를 끄덕이는 코시의 모습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던 타르코지가 얼굴을 찡그렸다.
“일 잘하고 와서 무슨 소리야?”
“그게・・・・・・ 영 느낌이 별롭니다. 입 안이 까끌까끌한 게, 제가 그동안 이럴 때는 꼭 돈을 잃었단 말입니다.”
“……이 새끼가 미쳤나. 큰일에 어디 더러운 도박판 이야기를 가져다 붙여? 너 내 밑에서 이런 일 한두 번 해 봐?”
“여러 번 경험이 있으니 하는 말입니다. 이 일이나 도박이나, 판돈 걸어 놓고 하는 건 마찬가지 아닙니까.”
“……”
타르코지는 자신의 말에 지지 않고 답하는 코시의 모습에 이유를 모르겠다는 표정이 되었다. 평소 자신의 명령을 듣지 않고 중간에서 돈을 조금 빼돌리기는 하지만, 든든한 뒷배를 가진 놈답지 않게 지저분한 일처리를 잘해 오던 놈이 유독 반대를 하고 나서니 여간 찝찝한 것이 아니었다.
코시의 낫선 행동에 타르코지도 평소처럼 무작정 닦달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확실히 준비했잖아. 뭐가 걱정이야? 예감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이유를 말해 보라고.”
코시는 정확한 이유를 묻는 타르코지의 말에 머뭇거리다 결국 신경질적으로 발을 굴렀다.
“……에이 씨.”
정말 기분이 좋지 않아서 도박사의 예감이 속삭이는 소리를 말했을 뿐이니 구체적인 이유가 있을 수가 없었다. 더구나 코시가 무슨 전설적인 도박사도 아닌 이상, 도박사의 직감이라고 당당하게 말하기도 우스운 상황이었다.
타르코지는 한동안 불안한 듯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이던 코시를 내보내고 그가 떠난 자리를 잠시 바라보다 곧 사람을 불러 자신이 내린 명령을 점검하기 시작했다.
“에이 씨, 빌어먹을 놈. 괜히 불안하게 만드네.”
점검을 마친 타르코지는 괜히 자신의 기분까지 들쑤신 코시를 욕했다. 하지만 코시가 말했던, ‘판돈이 걸린 도박인 건 마찬가지’라는 말이 계속해서 마음에 걸리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이대로 있으면 어차피 모지 상단은 꼴란 놈에게 잡아먹힐 거라고. 그러기 전에 우리도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서 꼴란 놈과 대결을 하든가, 그놈들을 잡아먹어야 하는 거야.”
“결국 대로로 나가지 않고 여기서 야숙을 할 모양이네.”
이드는 밖에서 소리치는 소리를 듣고서 말했다.
그러자 상체를 밖으로 내밀어서 이리저리 돌아보던 에단이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그런데 이거 영 분위기가 이상한데요, 마스터.”
에단은 말과 함께 뒤쪽에서 멈춰 선 상단의 일부분을 가리켜 보였다.
“공간이 없는 것도 아닌데 상단을 둘로 나눴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상단의 절반 이상이 뒤에 남아 둥근 원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드가 타고 있는 마차를 포함한 상단은 좀 더 야숙할 장소의 안쪽으로 들어가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꼭 저들이 출구를 막고 있는 것 같아요.”
그 모습에 일리나도 고민하다 한마디를 더하고는 이드를 돌아보았다.
“목적이 있는 것 같아요.”
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한 말이다. 무엇을 하건 목적이 없는 움직임은 없다. 하다못해 일정한 거리를 왔다갔다 왕복하는 단순한 행동도 답답함이나 고민을 삭히려는 목적이 있으니까 말이다.
“아무래도 타르코지라는 사람이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것 같아요.”
일리나도 에단의 말에 동의하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도 있는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조금 이상해요. 지금 상단의 호위들로는 저희를 잡을 수 없어요.”
에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렇습니다. 마스터나 절 제외하더라도 엘프의 실력에 대해서는 소문이 짜합니다.”
실제 엘프에 대한 많은 이야기에서 세상물정에 어두워 어수룩한 모습으로 당하는 엘프는 있어도 실력이 형편없어서 당하는 엘프는 없었다. 그들은 모두 일당백의 전사로서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타르코지의 반응을 봐서는 목표는 일리나인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엘프의 속도는 유명한 것이었다. 지금 상단이 가진 인원만으로는 그녀를 확실히 잡을 수 있다고 장담을 할 수가 없는 상황인 것이다.
무엇보다 엘프 하면 누구나 떠올릴 수 있는 정령의 도움을 받아 하늘이라도 날아간다면 더욱 방법이 없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뭔가 방법이 있다는 뜻이겠죠. 외부에서 인원을 충당하는 방법도 있을 거구요. 두고 보면 알 수 있겠죠.]
라미아가 별것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사실 그녀의 말대로 정말 별것 아닌 일이었다. 그저 귀찮은 일일 뿐이었다.
전날과 같이 마차로 벽을 만들고 그 안에 천막을 만들었다. 저녁이 준비되고 여행객들이 마차에서 내렸다. 그 사이 해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저녁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낮의 피곤했던 여행으로 모두가 일찍 잠이 든 후였다. 불침번과 보초로 상단의 호위들이 야영지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러던 중 그들 몇몇이 이상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우선 움직인 것은 야영지 입구에 자리 잡은 모지 상단 이외의 상인들이 주로 잠든 곳이었다.
경비를 서던 모지 상단의 호위 한 명이 슬그머니 모닥불로 다가가 허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 속의 물건을 불 속으로 던져 넣었다.
잠시 후 하얀 연기가 모닥불에서 일어나며 야영지 주벽으로 깔리기 시작했다. 이런 일은 이드들이 속한 야영지에서도 똑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수분 후, 이미 입 안에 약초를 우물거리던 일부 인원을 제외하고는 깨어 있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역시 수면향. 비싸기는 하지만 효과 하나는 직빵이란 말이지.”
호위 중 누군가 말했다. 그 말에 그의 곁에 있던 호위가 고개를 끄덕였다. 가격은 비싸지만 이렇게 사방이 탁 트인 공간에서도 약효가 흩어지지 않고 일정 공간에 머물면서 효과를 발휘하는 아주 뛰어난 물건이었다.
그때 그들의 뒤에서 누군가 다가오며 어깨를 두드렸다.
“어이, 잡답은 그만하고 빨리 모여. 해가 뜨기 전에 작업은 마쳐야지.”
“크큭. 작업이랄 건 뭐야. 어차피 세 명뿐인데. 따로 짐을 치울 것도 아니고.”
“흐흐흐흐. 그 말이 아니잖아. 어쩌면 엘프 맛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음흉한 속뜻을 노골적으로 내보이는 말에 수면향에 대해서 말하고 있던 호위가 웃기지 말라는 듯 비웃음을 흘렸다.
“미친놈, 그게 가능할 것 같냐. 상단주가 잘도 그러겠다. 아마 신주단지 모시듯이 모셔서 위에 진상할걸?”
그러자 음흉하게 웃던 호위가 손가락을 까닥이며 군침을 흘렸다.
“너야말로 모르는 소리 마라, 등신아. 이번에 작업하는 엘프에게 상단주가 홀딱 넘어갔다는 이야기도 못 들었냐? 모르긴 몰라도 위에 넘기지는 않을 거다.”
…………어쨌든 이러나저러나 너하고는 상관없잖아?”
“으흐흐흐. 그래도 상단주가 급하면 바로 일 치를지 모르잖아. 먹진 못해도 구경이라도 해야지. 이럴 때 아니면 엘프의 그 환상적인 알몸을 언제 구경하냐?”
“에라이, 변태 새끼야!”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에 그의 곁으로 다가왔던 호위 중 누군가가 소리쳤다. 순간 여기저기서 낄낄거리는 음흉한 웃음들이 흘러넘쳤다.
퉁퉁.
마차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붉은 와인 잔을 뱅글뱅글 돌리고 있던 타르코지가 고개를 들었다.
“준비를 마쳤습니다.”
타르코지가 손에 든 와인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알았다.”
타르코지는 대답을 하고는 비단 위에 올려둔 팔찌 두 개를 손에 찼다.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한 아티팩트였다.
마차를 내린 타르코지의 눈이 코시를 찾았다.
“상태는 어때?”
무엇에 대한 상태인지 말하지 않았지만 지금 이곳에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상대의 상태를 정확히 아는 사람도 없었다. 코시가 고개를 저었다.
“모릅니다.”
타르코지의 눈초리가 올라갔다.
“그런 것도 잘 살피지 않고 뭐했냐?”
“엘프가 있는데 어떻게 살핍니까? 전 그 정도 실력은 없다고요. 그리고 연기 피운 후에는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는데, 괜히 살피다가 경계심만 올릴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헛, 그놈. 갑자기 똑똑해졌는지 말은 잘한다.”
“제가 원래 말은 잘했지 말입니다.”
확실히 말재주는 좋았다. 눈치도 빨랐다. 그렇지 않고서는 상단주가 몇 번이나 주의를 줬는데도 허위 보고를 하고, 돈을 빼돌려서 도박을 하지는 못할 것이다.
“크큭. 그렇지. 그럼 가 보자. 잘 자면 조용히 끝나는 거고 아니면, 좀 시끄러워지겠지. 모지 기사단은?”
“불러 뒀습니다. 오는 중일 겁니다.”
코시는 대답을 하면서도 기가 막혔다. 귀족 가문도 아니고, 고작 중소 규모의 상단에 기사단이라니. 특히 귀족 가문에서 잠시나마 머물렀던 경험이 있는 코시가 보기에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코시와 모지 기사단은 일적인 일이 아니면 서로 투명인간처럼 대하며 지내고 있었다.
“잘했다. 가자.”
타르코지의 말과 함께 그를 중심으로 호위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코시가 바로 따라오지 않고 한발 뒤떨어져서 따라왔다. 타르코지가 그 모습에 인상을 썼다.
‘저 새끼가.’
순간 코시가 마차에 찾아와 이야기했던 말이 생각났다. 하지만 다른 호위가 있는 상황에서 그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쯧, 적당히 해라!”
“예. 적당히 따라가고 있습니다.”
내용을 알 수 없는 말이 오고갔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하루 이틀이 아닌 호위들은 그저 듣지 못한 척을 했다.
타르코지가 거창하게 가자고 말했지만 사실 이드들이 머물고 있는 천막은 코앞이었다. 세 사람에게 배정된 천막은 두 개였다. 이드와 일리나, 그리고 라미아가 사용하는 천막과 에단이 사용하는 천막 두 개다. 단순히 보면 혼자 사용하고 있는 에단이 편해 보이지만, 실제 주변 사람들은 이드를 부러워할 뿐 에단을 부러워하지는 않았다.
두 개의 천막 주변으로 모여든 호위들이 다른 천막을 끌어다가 한쪽으로 모았다. 수면향에 취해 있어서 안에 있는 사람들이 깨는 모습은 없었다.
두 개의 천막이 호위에 둘러싸였다. 호위들의 시선이 타르코지를 향했다.
타르코지는 괜히 코시를 한 번 돌아보고는 크흠 하고 침을 넘겼다.
“천막을…….”
그리고 막 천막을 치우라고 말하려는 순간, 묶여 있던 천막 안쪽에서 하얀 손이 불퉁한 목소리와 함께 튀어나왔다.
“젠장. 오려면 빨리 오든가 아니면 아예 새벽에 오지, 왜 이렇게 어중간한 시간이야? 사람 잠 시간 애매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