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42화
1177화
“무공 익힌 초인 처음 봅니까?”
“네, 그렇습니다.”
이드는 어수룩하기까지 한 해쉬의 대답이 의아했다.
“초인도 무공을 익힐 수 있어요. 꽤 알려진 사실일 텐데. 해쉬 경이 몰랐다니 의외로군요.”
톤 자작의 기사로서 수도에 머무르는 동안 보고 듣는 것도 많았을 텐데 말이다.
어쩌면 카논 제국은 무공을 익힌 초인이 아나크렌보다 적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하긴, 공짜로 편하게 얻은 힘이 있는데 굳이 사서 고생할 자들이 얼마나 될까.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지금 주입된 내공이 해쉬 경의 것과 충돌할 위험은 없으니, 그건 안심해도 좋습니다. 무극신기는 특별하거든요.”
“……알겠습니다.”
해쉬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제 이 내력의 역할을 알려 주죠.”
“역할……말입니까?”
“설마 아무 이유도 없이 다짜고짜 주입했을까요.”
“・・・・・・・ 이상하긴 했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타인의 내공을 받아들인다고 해서 특별히 좋은 점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외부에서 주입된 내력이 일시적인 부스터 효과를 가져올 수는 있지만, 그 시간은 매우 짧다. 오히려 위험 대비 효용성이 극히 떨어지기 때문에
중상을 입었을 때처럼 특별한 상황이 아닌 이상 굳이 그런 일은 잘 하지 않는다.
그러한 점은 중원이나 그레센 모두 동일했다.
그에 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후후후. 그건 해쉬 경의 말대로 일반적인 경우고, 무극신기는 다릅니다.”
해쉬의 척추를 따라 아문혈에서 대추혈까지 자리 잡은 무극신기는 기본적으로 신경의 신호 전달 속도를 강화하는 역할을 한다.
이 과정에서 무극신기는 척추를 따라 길게 뻗은 신경을 대신해 뇌와 신체 간의 신호를 주고받는다. 이때 속도는 신체 상태에 따라 최소 두 배에서 많게는 다섯 배까지 빨라진다.
그로 인해 무극신기를 주입받은 사람은 세상이 느려진 것 같은 감각을 가지게 된다. 간단히 말해 더 자세히 보고, 더 빨리 움직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무극신기가 신경을 대신하기 때문에, 예민한 신경에 부담이 가해져 발생할 부작용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장점이었다.
“그냥 해쉬 경이 장비한 아티팩트와 비슷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간단하죠?”
설명을 마친 이드의 말에 해쉬가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그게 동의의 의미는 아니었다.
그런 것이 쉽게 가능했으면 사람들이 미쳤다고 그 비싼 아티팩트를 얻으려 하겠나.
“간단한 건 아니지만, 일단 이해는 했습니다. 제가 더 빨라졌다는 말씀이죠? 좀 전 대결에서의 바인 이상으로요.
“정확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제 명령해 주십시오. 이 힘으로 무엇을 하길 바라시나요?”
확실히 바인 보다 해쉬가 머리가 좋은 것 같다.
“이 검으로 상대의 머리를 치세요.”
“죽이란 말씀입니까? 차라리 목을 치는 쪽이 깔끔하지 않을까요?”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물론 검으로 머리를 치면 죽겠지만, 이드가 원하는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설명이 부족했네요. 정확히는 머리가 아니라, 저 링을 치세요. 검의 어떤 부분으로 때려도 되고, 심지어 강도도 상관없습니다. 오로지 검과 저링이 접촉만 하면 됩니다. 아티팩트에 무극신기가 끌어 올려 준 속도까지 더해진다면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도비드라고 했던가요? 그 기사의 생사는 온전히 해쉬 경의 몫이에요.
이드는 그 말을 끝으로 해쉬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려 보이고는 물러났다.
그 사이 톤 자작도 아티팩트에 대한 자랑을 마치고, 마지막 문제의 붉은 링을 기사의 머리에 직접 올려 주고 있었다.
“해쉬 경은 잘 챙겨 줬어요?”
“응. 버프 빵빵하게 넣어 줬지. 링에 대해서 자작은 뭐래?”
“훗, 아주 고~~대의 아티팩트로, 기사의 잠재력을 극한으로 끌어내는 능력이 있는 것 같대요. 나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아 연구 중인 귀하디귀한 보물이래요.”
라미아의 말에 이드는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을 흘렸다.
정말 그렇게 귀한 보물이라면 톤 자작이 저걸 가지고 나왔을 리가 없다. 자존심 좀 살려 보자고 꺼내기엔 손해가 더 크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밝혀지지 않은 부분이라. 그거, 중간에 사고가 나도 자기 책임 아니라고 미리 선 그은 거지?”
“물건만 팔면 내 책임 아니라는 거죠. 대상인들이 잘하는 짓이잖아요.”
라미아가 입술을 삐쭉거렸다.
자작이 링을 기사에게 팔아넘긴 건 아니지만 좌우간 몇 마디 말을 끼워 넣는 것으로 책임을 회피하는 게 딱 전형적인 수법이기는 했다. 자신과 라미아도 그에 몇 번이나 당했던가.
이드는 흥분한 라미아를 진정시킨 후 후작의 호위 기사를 향해 준비가 끝났음을 알렸다. 그건 자작 또한 마찬가지.
그에 호위 기사가 앞으로 나섰다.
“마지막 대결입니다. 해쉬 경과 도비드 경은 앞으로 나오시오.”
두 기사를 불러낸 그는 앞서와 같은 주의 사항을 큰 소리로 알린 후 손을 높이 들었다. 그리고 그의 주군인 후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손을 내리며 소리쳤다.
“대결을 시작하시오!”
콰콱!
호위 기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해쉬가 땅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앞선 대결의 바인과 똑같은 모습. 그러나 상대의 반응은 앞서와 달랐다.
“통곡의 벽!”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방패를 앞에 세운 도비드가 시동어를 외치자, 빛으로 된 여러 장의 방패가 나타났다.
쿠웅!
직후 해쉬의 검이 그 위로 떨어지며 굉음이 울려 퍼졌다. 마치 거대한 해머로 성문을 두드린 것 같은 묵직한 소리. 짧은 순간, 두 기사는 그대로 멈췄다.
서로서로 자신들이 가진 힘에 놀라 버려서였다. 그게 본인의 것이 아닌, 아티팩트가 가져다주는 힘이기에 더욱더. 하지만 정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가장 먼저 방패 뒤에 숨은 도비드의 콧수염이 들썩였다.
촤르르륵.
직후 이리저리 겹쳐져 있던 마법의 방패들이 원형을 이뤄 자리를 잡고, 그 가운데서 뜨거운 열이 해쉬를 향해 뿜어졌다. 그야말로 공방 일체의 예상치 못한 기능.
저건 피할 수 없다. 구경하던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해쉬의 양 팔목에서 터져 나온 울림에 뜨거운 열이 아지랑이처럼 스러져 버렸다.
어어 하는 사이 벌어진 공방.
단 한 번의 공격과 방어. 그 사이 아티팩트에서 발동된 마법은 셋. 그것도 신체 기능을 강화하는 마법을 제외한 숫자다.
그게 시작이었다.
이어지는 대결에 쉼 없이 터지는 마법의 빛은 이것이 기사의 대결인지 마법사의 대결인지 헷갈리게 할 정도였다. 그야말로 날 선 검기가 초라해 보일 지경이랄까.
그리고 이 듣도 보도 못한 새로운 방식의 대결에 눈을 떼지 못한 사람들은 감탄성을 쏟아 내기 바빴다.
“정말이지, 오늘 생각지 못한 대단한 구경을 하는 것 같습니다. 허허허.”
“저들이 기사가 아니라 마법사라고 해도 믿겠어요.”
“감찰관과 자작 덕분에 대단한 걸 보게 된 것 같소.”
“이거, 욕심이 납니다. 제 기사, 아니, 제 아들놈들에게 아티팩트를 챙겨 주면 얼마나 강해질지.”
“나도 같은 마음이오만, 어디 구하기 쉬운 물건이어야 말이지요.”
아쉬워 한숨을 쉬는 어떤 이의 말에 모두 입맛을 다셨다.
기회는 물론 권력이든, 재력이든 능력이 되어야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아티팩트이기 때문이다.
더욱이 지금 눈앞에 벌어지는 대결과 같은 모습을 보이자면 아티팩트 한두 개로서는 어림도 없을 게 분명했다.
물론 후작과 같이 능력이 되는 사람들은 달랐다.
“렌, 가문에 아티팩트가 몇 개나 있지?”
“시중에 나온 아티팩트를 모두 사들여 지금 당장!”
“자작과 바벨에 조용히 구매 의사를 물어보도록 하게.’
힘 좀 쓴다는 톤 자작도 귀하게 모시는 권력자들. 오랜만에 강렬한 구매 충동을 느낀 그들의 지갑이 활짝 열리는 순간이었다.
좀처럼 모자란 것 없어 보이던 그들에게도 지금 대결은 새로웠다.
아티팩트는 언제나 만약을 위해 준비하는 용도였다. 한데 그걸 공격적으로 사용했을 때 설마 저 정도의 위력을 보일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일종의 고정 관념이랄까.
그리고 지금, 그 고정 관념이 깨어졌다. 가성비가 비록 극악을 넘어 헬이지만, 그러면 어떤가. 그들은 하나같이 그 정도는 웃으면서 지불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그렇게 권력자들의 구매욕이 무럭무럭 자라는 사이.
대결은 절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자신과 상대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진 두 기사의 검이 물 만난 물고기처럼 마법진을 뚫고 뛰쳐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두 기사의 이런 기량도 그들을 강화해 주는 든든한 마법의 힘이 있기에 가능했다.
그 말은, 곧 해쉬 쪽에서 서서히 승기를 잡기 시작했다는 의미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아무렴 드래곤의 소장품이 일개 자작의 소장품보다 못하다는 게 말이나 될 일인가.
‘지금 나는 도비드 경보다 두 수 이상 더 빨라. 승기를 잡았어. 이대로 머리를 친다.’
‘빌어먹을. 뭐가 저렇게 빨라! 기세가 넘어갔다. 이대로는 진다.’
그리고 이런 사정은 누구보다 싸우고 있는 본인들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에 도비드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는 지금이 바로 링을 사용할 때라고 여겼다. 대결 전 자작은 경고를 담아 당부했다.
결정적 순간이 아니면 사용하지 말라고. 부작용이 있으니, 사용할 땐 최소한의 시간을 지켜야 한다고 했다. 시간을 넘겼을 때 일어나는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했다.
자작이 그렇게 경고할 정도라면 정말 위험한 물건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뭐! 어차피 이 싸움에서 지면 내 기사 인생도 끝장이야!’
아티팩트의 성능 때문이라는 말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자작이 과연 자신을 그냥 둘까.
바인과 해쉬가 무슨 꼴을 당했는지 눈앞에서 뻔히 보고서 누가 아무렇지 않을 수 있을까.
‘패배할 바에야 몇 달 쉬는 것이 백배는 나아!’
그에 결심을 굳히고 머릿속으로 자작이 알려 준 주문을 외우는 순간.
팟.
붉은빛이 내리꽂히는 것 같은 환상을 본 직후, 도비드의 시야에 비치는 모든 것이 핏빛으로 물들었다.
동시에 속에서 치솟아 오른 뜨거운 기운이 입으로 뿜어져 나왔다.
“크하아…….”
그와 같이 심상치 않은 변화에 해쉬는 바짝 긴장했다.
한눈에 보기에도 도비드의 모습이 심상치 않게 변했기 때문이다. 피눈물이 흐를 것 같은 눈만 봐도 누구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해쉬 경. 지금부터는 시간이 지날수록 위험해질 수 있어요. 그러니 최대한 빠르게 링을 노려요.”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이드의 전음이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