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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754화


1189화

통신구에 빛이 꺼졌다.

그 앞에선 황녀와 에단이 내심 혀를 내둘렀다.

‘혼돈의 파편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래도 마스를 그 하나 보다 가볍게 여기시다니.’

혼돈의 파편의 위험성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간 체감하며 살아온 마스의 힘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던 탓이다. “언제까지 멍하니 있을 참인가요?”

그런 두 사람을 깨운 것은 검후였다.

“아앗! 지, 지금 갑니다!”

이드와 검후의 뜻을 알았으니, 이제 그에 따라 움직일 때였다.

문을 나선 두 사람. 그 중 에단은 에린을 찾았다.

이드는 영혼의 관을 감시하라고 지시했다. 현재 전쟁이 예상되는 만큼, 영혼의 관이 무슨 짓을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에단은 그에 영혼의 관을 찾아낸 요원들을 재투입시켰다.

다만 앞서와 다른 점이라면, 굳이 위험에 발을 들일 필요 없이 안전을 최우선으로 먼 거리에서 대대적으로 확인 가능한 정도로만 살펴보도록 한 것이다.

이 또한 이드의 명령이었다.

영혼의 관은 이미 많은 사람이 노려보고 있을 터. 모자란 정보는 그쪽으로 더하면 된다는 게 이유였다.

굳이 자기 사람에게 위험을 감수시킬 필요가 없었다.

물론 이 정도만 해도 만만한 일은 아니다. 에단 또한 명령만 전달하고 끝내지 않았다. 요원들이 모자람 없이 원만히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할 것이 산더미였기 때문이다.

그가 할 일은 이제 시작이었다.

그런 에단과 마찬가지로 바쁜 또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황녀였다.

궁으로 복귀한 그녀는 곧장 정무를 보고 있는 황제를 만나 통신에서 오갔던 이야기를 왜곡 없이 있는 그대로 전달했다.

“수고했다. 두 분의 뜻이 그러하다면, 그 결정을 존중함이 옳을 것이야.”

잠시 생각에 잠기던 황제의 답은 의외로 간단했다.

아마도 검후와 오해를 풀기 전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다. 혼돈의 파편에 대해 몰랐더라도 황녀가 전해 온 말에 고개를 저었으리라.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혼돈의 파편은 물론이고, 이드가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오래전 제국과 황실을 한 번 구했던 두 사람의 말이다. 아무리 제국의 현 황제라도 무시할 수 없고, 무시할 생각도 없다.

“밖에 있느냐!”

“불러 계시옵니까. 폐하.”

“당장 가서 레오날도 후작을 들라 하라. 그리고 바벨에 내 말을 전할 이도.”

“충.”

기사가 문을 닫고 물러서자 황제는 아직 서 있는 황녀를 보며 말했다.

“앉거라. 이후의 일은 너도 알아야 검후께 전할 것이 아니냐.”

“네. 아바마마.”

순식간에 전령이 되어 버린 모양새였지만, 오히려 기분이 좋은 듯 방긋 웃으며 곱게 자리에 앉는 황녀였다.

이렇게 이드의 말에 안티로스가 바빠졌다면.

카논에서도 이드 때문에 불을 뿜는 사람이 있었다.

전날 파티의 뒷수습으로 정신이 없던 톤 자작은 갑자기 전달된 한 통의 편지를 받아 들었다.

편지를 가져온 것은 피터 자작의 하인.

그에 혀를 찬 그는 곧 편지에 적힌 이름을 보고 와락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역정을 냈다. 에단. 카논에서 이드가 가명으로 쓰고 있는 그 이름이 편지에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는 것만으로 톤 자작을 성질을 긁어 대는 이름을 편지에 쓰기 전.

이드는 에단과 통신에서 분명하고 확실하게 말하는 걸 잊지 않았다.

“에단은 지금부터 삼 년 동안 카논에 출입 금지.”

“예. 예? 아니, 갑자기 그런…….”

의문이 가득한 눈이 한둘이 아니지만, 이드는 답하지 않았다. 아무렴 생각 없이 사용한 ‘에단’이라는 이름에 원한을 쌓았다고 말하는 건 좀 미안하지 않은가.

그런 과정을 거쳐 편지에 적힌 이름이지만, 사실을 알지 못하는 톤 자작에겐 그저 보기만 해도 이가 박박 갈리는 존재일 뿐이었다.

그렇게 으르렁거리며 편지를 꺼내 읽던 톤 자작은.

쫙, 쫘악. 쫘아악.

편지가 그 당사자라도 되는 양 정성 들여 아주 꼼꼼하게, 조각조각 찢어서는 던져 버렸다.

온 방 안을 흩날리는 종잇조각과 함께 톤 자작이 노성을 터트렸다.

“감히! 감히 내게 이딴 편지를 보내다니! 어쩌다 내 꼴이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말 좀 해 봐!”

“・・・・・・면목 없습니다.”

마침 그 분노를 앞에 두게 된 솔론 단장이 고개를 숙였다.

팔랑.

그와 함께 머리와 어깨 위로 떨어진 종이들이 미끄러져 내렸다. 파티의 일도, 지금 편지도 그가 잘못한 것은 없다.

그러나 성난 주인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고개를 숙이는 정도는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처구니가 없다. 어처구니가 없어! 엄정했던 카논의 법은 어디로 갔기에 내게 이런 편지가 전달된단 말인가!”

덕분에 조금은 진정된 톤 자작.

그에 솔론 단장은 기회를 노렸다. 일단 뭔가 하려 해도 무슨 일인지 알아야 할 텐데, 그 내용이 적힌 편지가 종이 눈이 되었으니.

어쩌겠나. 기회를 노려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야지.

“……무엇이 자작님을 그렇게 노하게 한 것입니까?”

결국 그는 과감히 악어 입속에 손을 밀어 넣었고, 다행히 씹히지 않았다.

“누구의 편지인지는 단장도 알 것이고, 놈과의 내기 조건을 기억할 테지?”

“황궁…… 말씀이군요.”

당연히 안다.

사실 상대가 조건으로 황궁 방문을 걸었을 때, 내심 헛웃음을 흘렸었지 않던가. 톤 자작이 능력이 없는 것도, 돈이 없는 것도 아닌데. 겨우 황궁을 봐서 무엇이 남는다고.

“그래. 놈이 편지에 적은 것이 그것이야. 내기에 졌으니 조건을 이행하라고. 감히 내게 요구했단 말이야.”

솔론 단장은 무어라 답하지 못했다.

그날 내기를 아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내기에 졌다면 당연히 패자는 승자가 원하는 것을 내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톤 자작이라도 단단히 망신을 당할 뿐 아니라, 어쩌면 그 힘이 한풀 꺾여 버릴지도 모른다. 아무리 재미를 위해 시작되었다지만, 그 많은 사람이 보는 중에 이루어진 내기다. 그걸 지키지 않는 것은 귀족으로서 여간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다.

아니, 그런 거추장스러운 걸 떠나서 톤 자작은 상인이다.

거대 상단의 주인이 계약을 어긴다면 누가 그 상단을 믿고 거래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거대한 상단을 가진 가문의 기사단장으로서 솔론 단장도 그런 점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런 솔론 단장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톤 자작은 씨근덕거리며 화를 내기 바빴다.

“웃긴 소리지, 감히 바벨의 이름만 겨우 빌어 쓰는 천한 평민 따위가 황궁에 발을 들이겠다니 말이나 될 일이냔 말이야. 안 되지, 암, 안 될 일이고말고, 단장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나?”

“그렇습니다. 하지만 당시 내기를 들은 귀가 한둘이 아닙니다. 혹여 무시할 경우 좋지 못한 말이 돌까 걱정입니다.”

“…..빌어먹을! 젠장! 왜 이렇게 된 것이냐고!”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은근한 목소리에 담긴 뜻이 무언지 톤 자작이 어떻게 모를까.

화가 나 모른 척하고 싶어도 모른 척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일까. 벌떡 일어난 톤 자작이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며 방방 뛰었다.

그래 봤자 상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안 돼!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될 일이야!”

“자작님의 명예가 달린 일입니다.”

“알아. 하지만 놈이 원한 건 내일이야. 날짜에 여유가 있다면 양해를 구하겠지만, 갑자기 외인을 황궁에 어떻게 들이란 말인가!”

“그건…… 무리한 요구입니다.”

“그건・・

어떻게 톤 자작을 달래 보려던 솔론 단장은 난감해졌다.

황궁은 그렇게 쉽게 발을 들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허락받은 자는 넘기 쉽지만, 그렇지 않은 자는 목숨을 걸어도 넘기 힘든 것이 황궁의 성벽이다. 톤 자작이라면 지금이라도 방문이 가능하지만, 그런 그라도 들어설 수 있는 곳은 아주 일부다.

그런 만큼 제대로 구경하기 위해선 사전에 허락을 받을 필요가 있었다.

누구에게? 황제에게!

당연히 이런 절차는 시간이 걸린다. 감히 누가 황제에게 빨리 일하라고 독촉할 것인가. 황제가 원하지 않으면 허락은커녕 서류가 언제 읽힐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황궁을 당장 내일 들어가게 해 달라니.

“일의 어려움을 모르는 자도 아닐 텐데. 어째서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수일 안으로 떠나는 모양이야. 일이 급해지면 당장 내일 밤이라도. 반가운 일인데, 반갑지 않게 되었어.”

복수할 기회가 사라지지만, 그래도 망신을 준 골칫덩이가 스스로 떠나 준다면 반가운 일인데. 그 전에 또 이렇게 머리 아픈 요구를 하다니.

“그렇다 해도 이건 무리입니다. 거절하시지요. 자세한 내용을 안다면 내기를 아는 분들도 놈을 욕하실 겁니다.’

솔론 단장이 차라리 잘되었다며 말했다.

그러나 톤 자작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그는 바닥에 흩어진 종잇조각을 자근자근 밟아 대다 말했다.

“그럴 순 없어. 그런 놈과의 내기에 진 것도 모자라 내 능력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듣게 될 순 없는 일이야.”

“그렇지 않습니다. 이건 누가 봐도 무리한…….”

“아니라니까!”

솔론 단장의 말은 버럭 고함을 친 톤 자작에 막혔다.

그의 눈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상처 입은 짐승. 이미 내기에 진 것으로 한번 구겨진 자존심에, 백작까지 굽실거리게 만든 권력이 또한 번 패배하는 걸 인정할 수 없던 것이다.

이렇게 이성을 잃었다면 그를 보좌하는 입장에선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그저 주인이 이성을 찾기를 바라는 수밖에.

하지만 솔론 단장의 바람이 무상하게 톤 자작의 생각은 엉뚱한 곳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도움을 청해야겠어.”

“도움이라면…… 설마, 그분께? 안 됩니다. 참으십시오!”

톤 자작의 말에 누군가를 떠올린 솔론 단장이 놀라 외쳤다. 톤 자작은 그런 솔론 단장을 밀어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누구 앞을 막는 것이야. 단장은 누구의 기사인가!”

“당연히 자작님의 기사입니다. 지금 제가 막는 것도 자작님을 위해서이고요. 이런 일로 그분을 찾았다간 지금까지 쌓으신 자작님의 공이 무너집니다.”

“흥, 내 공은 그렇게 쉽게 무너질 것이 아니야. 그리고 그분을 찾을 것도 아니니. 물러나게.”

“하면?”

“조금, 아주 조금 그분의 이름을 빌릴 뿐이야.”

“억…….”

솔론 단장은 난생처음 뒷골이 땡긴다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이건 차라리 그분께 직접 부탁한다는 말보다 더 하지 않은가.

허락도 없이 그분의 이름을 빌려 쓴다면 그 뒷감당을 어떻게 하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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