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55화
1190화
당신의 요청을 허락한다. 두 시간 후에 와라.
단 두 줄 뿐인 편지 봉투에 적힌 이름까지 더해도 세 줄.
“톤 자작, 알고 봤더니 편지를 잘 쓰네요.”
“농담……?”
“진담. 보세요.”
이드가 손에 든 편지를 들었다.
그러자 펼치는 것과 동시에 내용의 이해가 끝날 수 있을 정도로 전하고자 하는 핵심 내용만 담은 글이 펼쳐졌다.
거기엔 귀족들이 버릇처럼 사용하는 쓸데없는 미사여구는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잘 포장된 문장에 꾹꾹 눌러 담은 상대의 심리를 파악할 귀찮음이 사라진 것이다.
편지 하나 맘 편히 읽기 힘든 현실이라니.
그에 비해 이 편지는 얼마나 좋은가.
“내용이 한눈에 들어오고, 뜻 전달 확실하고. 오해할 구석도 없이 감정이 그대로 실린 문장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편지잖아요.”
물론 단점이 없는 건 아니다.
적혀 있는 내용에 비해 종이 낭비가 너무 심하다. 지금 종이의 반의반만 사용해도 충분히 적을 수 있는 양인데 말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대상단의 주인을 상대로 종잇값 걱정을 하는 이드에 에단은 굉장히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느끼며 겨우 대답을 내놓았다.
“그・・・・・・ 렇긴 합니다. 감정 전달 하나는 확실하네요.”
대충 휘갈겨 쓴 필체에는 온갖 짜증이 다 묻어 있고, 문장은 시종 아랫사람을 대하듯 반말과 명령조로 일관되었다. 이걸 보고 있노라면 이 편지를 작성할 당시 톤 자작의 기분이 어떠했을지가 손에 잡힐 듯 훤했다.
“그렇죠. 반대로 이런 내용을 몇 시간 전에 보낸다는 점은 감점 요소죠.
“그거야. 너희도 당해 보라는 심보가 담긴 것 아니겠습니까?”
피터는 편지를 건네받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 무례로 따지면 전날 톤 자작에게 전달된 이드의 편지도 이에 못지않았다. 라울에게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고 초주검이 되어 올라와 정신없는 와중에도 ‘이건 아닌데’ 하고 여겼을 정도니까.
톤 자작을 편들 마음은 절대, 1도 없음에도 그랬다.
내일 당장 황궁에 들어가고 싶다니. 상식적으로 들어줄 수 없는 청이었다.
경우에 따라선 무리한 요구라는 점을 들어 톤 자작이 요청을 거부할 수도 있었다. 평소의 피터라면 우선 그런 식으로 이드에게 말했을 것이다. 하지만 바로 직전, 이드와 마찬가지로 라울을 통해 마스와 제국의 전쟁 가능성을 전해 들은 피터는 그럴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시작될지 모를 전쟁을 앞에 두고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피터는 말없이 이드의 편지를 톤 자작에게 전달시켰다. 그리고 하루가 지난 오늘, 톤 자작의 답신이 도착했다.
두 시간 후로 일정을 촉박하게 잡아 놓은 편지. 마치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무시되거나 거부당할 수도 있었는데. 이만하면 괜찮지 않아요?”
이드가 탁자에 올려진 편지를 보며 느릿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무리하게 톤 자작을 압박한 데엔 오로지 전쟁이 코앞이라는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단 저희로서는 최상의 결과이긴 합니다.”
이드의 말에 답하듯 피터가 몇 장의 종이를 편지 옆에 올려 두었다.
전날 이드가 무리한 편지를 쓰면서 얻어 낸 결과물이었다.
사실 이드의 요구는 톤 자작이 뭉개 버리면 끝나는 일이었다. 물론 이드로서는 그래도 큰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내기를 아는 사람이 한둘도 아니고, 다음에 다시 요구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기실 그가 아니라도, 시간을 들이면 황궁에 들어가 볼 방법을 찾는 건 어렵지 않다. 당장 이드가 작정하고 밤에 움직이면 끝날 일이기도 하고.
뭐, 그 경우 카논무파의 무공을 익힌 대상을 찾는 건 어렵게 되겠지만 말이다.
좌우간 그럼에도 편지를 써 톤 자작을 자극한 이유는 간단했다. 최대한 그의 자존심을 건드려 그가 무리한 수를 쓰도록 만든 것이다. 되면 좋고, 아니어도 그만인 그런 수.
그런데 생각보다 더 결과가 좋았던 모양인지, 피터의 얼굴이 밝다.
“톤 자작은 지금 수도에서 가장 끗발 날리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런 톤 자작이라도 황궁을 제 맘대로 드나들 수는 없습니다. 특히 손님까지 대동하는 건 어림도 없죠. 그런 건 황실의 방계나 역사 깊은 대 귀족쯤 되어야 가능한 일이니까요.”
그런데 그런 난관을 톤 자작은 하룻밤 만에 뚫어 내고 황궁의 문을 열었다.
“이건 돈으로만 해결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돈에 더해서 확실한 끈이 없는 이상 들어줄 수도, 들어줘서도 안 되는 일이란 말이지요.”
“그렇겠죠. 황궁은 황제가 거하는 곳. 허락받지 않은 자를 들인다는 건 반역으로 몰려도 할 말 없는 일이니까요.”
당연한 이야기지만 반역으로 몰리면 가문이 박살 나는 건 기본이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그런 위험을 감수할 이가 있을까? 황궁의 문을 열어 줄 수 있을 만한 힘이라면, 이미 쥐고 있는 권력도 작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럼에도 이런 위험한 부탁을 들어주었다는 것은, 대외적으로 알려지지 않은 누군가와의 연결고리가 있다는 뜻이나 다름이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당연하게도 그들 사이의 연결고리라면 카논무파 정도겠지요. 그래서, 누굽니까?”
이드가 묻자 피터가 펼쳐놓은 서류 중 하나를 빼서 최상단으로 올렸다.
“현재 황궁 궁정 내관으로, 황궁에 거하는 황족을 보좌하고 황궁을 관리하는 관리 중 서열 3위의 인간. 매노리 콘펌 남작. 이드 님께 황궁 출입 허가를 내어 준 인물입니다.”
이드는 이어지는 설명을 들으며 매노리 남작에 대한 서류를 들었다.
서류엔 그의 초상화도 첨부되어 있었다.
“황궁에서 가장 먼저 봐야 할 인간이로군. 두 사람이 보기엔 어떤 것 같아요?”
이드가 서류를 내밀며 물었다.
“서열 3위라는 것에 비해서 젊고, 잘생겼네요.”
“하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 규칙을 어겼어요. 역시 얼굴만으로는 인간의 성향을 예측하긴 어려워요.”
라미아와 일리나의 짧은 평가였다.
“하하. 얼굴만 보고 상대의 속을 아는 건 같은 인간도 거의 힘들어요.”
사실 외모로 성향을 예측하기 어렵기는 엘프가 더하다. 인간의 심미안으로 보면 엘프는 모두 아름답고 선하게 생겼으니까.
엘프라고 개중에 범죄자가 없고, 타락한 자가 없는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하긴, 외모를 기준으로 선악을 구분한다면 서큐버스를 천사로 두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언제까지 그렇게 불퉁하게 있을 거예요, 두 사람.”
“그거야, 이드만 다녀온다고 하니까 그렇죠.”
다리를 꼰 채 얼굴에는 ‘나 불만 있소’ 하는 티를 풀풀 풍기며 일리나의 어깨에 기댄 라미아.
옆에 앉은 일리나도 기분 좋은 표정은 아니다.
“이젠 항상 함께 다닌다고 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동행은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단단히 뿔이 나 있을 톤 자작이다.
모르긴 몰라도 리마아와 일리나까지 동행했다가는 대놓고 면박을 주지 않을까 싶다.
“그렇다고 또 라미아만 같이 가는 것도 좀 그렇잖아.”
물론 그렇게 하더라도 라미아의 동행은 어려울 것이 없다. 언제든 모습을 바꿀 수 있으니까. 가장 쉽게는 원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서는 일리나에게 미안하지 않은가.
그에 이드는 하나만 동행하는 것보다 둘 다 남기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황궁 안에서 크게 난리를 피울 것도 아니고, 슬쩍 둘러보고 나오는 거니까. 굳이 우르르 몰려갈 필요도 없어.”
“그・・ ・슬슬 출발하실 시간입니다.”
때마침 옆에서 시간을 살피고 있던 피터가 말했다.
톤 자작이 지정한 때는 편지가 도착한 순간으로부터 두 시간 후, 이미 편지를 살피고, 이드의 황궁 방문에 누가 관련되어 있는지에 대해 살피느라 시간이 제법 지난 상태다.
제국 수도의 넓이를 생각하면 이제 움직여야 할 때였다.
“출발하죠. 그럼 다녀올게요, 일리나, 갔다 올게, 라미아.”
함께 황궁에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굳이 마차를 타고 이동할 필요도 없다. 이드는 두 사람을 두고 곧장 마차에 올랐다.
“혹시 싸움 나면 바로 불러야 해요!”
“라미아가 가면 바로 따라갈게요.”
“…….”
출발하는 마차를 향해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하는 라미아와 일리나의 말에, 이드는 할 말을 잃었다.
저게 과연 잘 다녀오라는 말인지, 아니면 황궁에서 싸울 일을 만들라는 말인지 헷갈렸다. 자신을 어디 가기만 하면 싸움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여기는 것일까.
아무래도 오늘 방문하는 곳이 카논의 황궁인 만큼, 그럴 가능성이 영 없는 건 아니다.
정말이지 생각하지도 못했던 사고가 발생할 가능성도 있다.
그게 아니라도, 과거 혼돈의 파편 중 하나가 게르만으로 활동했던 전력이 있는 만큼. 혼돈의 파편과 엮여 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 할 수도 없다. 그러나 이건 그야말로 만에 하나.
마른하늘에 벼락 맞을 확률보다 작은 가능성이다.
‘그’혼돈의 파편들이 황궁에 무언가를 남겼을까. 이드가 수도에 발을 들인지가 언제인데, 그게 아직 남아 있을까.
카논에 발을 들인 첫날.
로드가 보내 준 탐색기를 작동시켜 수도에 혼돈의 파편이 없다는 것은 벌써 확인이 끝난 상태였다.
다각. 다각.
마차가 잘 닦인 대로를 달렸다. 잘 닦인 대로라고는 하지만 수도 안이다. 덕분에 속도를 내지 못한 마차는 삼십 분 정도 이동한 후에야 비로소 멈췄다.
마차가 선 곳은 황궁이 바로 앞에 보이는 소광장.
그 한편에는 화려한 마차 한 대가, 마차의 문 옆에는 솔론 단장이 서 있었다.
피터의 명령에 마차가 그 옆으로 다가가자, 마차의 창을 가린 커튼이 걷히며 날카로운 눈을 한 톤 자작의 얼굴이 나타났다.
“다행히 늦지는 않았던 모양이오.”
“어떤 분께서 넉넉히 시간을 주셔서 말입니다.”
“흥. 그보다, 미리 말했지만 황궁에 들 수 있는 것은 그대뿐이오. 알고 있소?”
미리 말했는데 어째서 피터 자작이 함께하냐는 뉘앙스였다.
“하하. 전 단지 감찰관님을 여기까지 안내한 것뿐이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제국의 자작이 바벨의 감찰관의 길 안내라니. 귀하는・・・・・・ 제국의 이름을 얼마나 싸게 팔아먹고 있는 것인지 알고 있는 거요?”
“그럴 리가요. 친분이 있는 사람끼리 서로 배려하는 것뿐입니다. 무엇보다 제가 무어라고 제국의 이름을 팔아먹겠습니까.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그런 거라면 최소한 자작님 정도는 되어야 가능하지요. 하하하.”
괜히 말을 꺼냈다 본전도 찾지 못한 톤 자작의 눈에 핏발이 섰다.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일인 사람이 저러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자신과 피터가 단단히 미운털이 박히기는 한 모양이다.
곧 이드는 솔론 단장이 문을 열어 주는 톤 자작의 마차로 옮겨 타고서 황궁으로 향했다.
과거부터 지금까지 통틀어, 카논 제국의 황궁은 첫 방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