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758화
1193화
잠시 후, 콘펌 남작과 톤 자작이 방에서 나왔다.
두 사람은 복도에 서 있는 기사들과 여전히 색유리 앞에 있는 이드를 확인한 후 다가왔다. “실례했습니다. 어쩌다 보니 이야기가 길어져 감찰관을 오래 기다리게 한 것 같습니다.” 콘펌 남작이 푸근하게 웃었다.
방 안에서 화내고, 분노하고, 사정하던 목소리의 주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말간 웃음이다.
이드는 아예 얼굴을 갈아 낀 것처럼 어색함에 없는 그 모습에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저야 직접 안내해 주시는 것만으로 감사할 뿐입니다. 더욱이 이 작품에 빠져 시간 가는 줄도 몰랐습니다.”
“하하하. 감찰관도 작품을 보는 눈이 있으시군요. 저희도 가끔 이 앞에서 시간을 잊고는 합니다. 아, 혹시 만져 보셨습니까?”
“그런 무례는 범하지 않았으니, 걱정 마십시오.”
“그런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한 번 만져 보시라고 한 말이지요.”
오로지 보고 즐기는 것이 그 목적인 예술품의 경우, 손을 대지 않는 것이 작품을 오랫동안 보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터였다. 한데 손을 대라고? 혹시 이 색유리가 금지로 향하는 문일까?
그런 생각이 든 이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을 하고는 말했다.
“흐음. 남작께서 괜히 그런 말을 하시진 않으셨을 것 같고.”
“물론입니다.”
재차 손짓하는 콘펌 남작에 이드가 손을 뻗었다.
그리고 앞으로 나가던 손은 어느 지점에서 보이지 않는 벽에 막혔다. 동시에 색유리 위로 뿌연 막이 생겨났다.
실드 계열의 보호 마법이다.
콘펌 남작이 뿌연 막을 톡톡 두드리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보시는 바와 같이 마법으로 보호하고 있지요. 황제 폐하의 허락을 받지 않는 이상 그 누구도 함부로 만질 수 없습니다.”
“카논의 황제께서 매우 아끼시는 작품인가 봅니다?”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황제께서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마법으로 지키게끔 하신 걸 보면 그럴 것 같은데요. 아닙니까?”
“맞습니다. 하지만 단지 뛰어난 작품이기 때문만은 아닙니다. 아국의 초대 황제께서 직접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분께선 이 궁에 ‘사라나’라는 이름을 붙인 것처럼, 어머님께 드리는 선물로서 손수 이 색유리도 만드셨지요. 당연히 하찮은 비바람에 깨지게 할 순 없는 일 아니겠습니까.”
“과연 그렇겠습니다.”
이번만은 이드도 순수하게 감탄했다.
다른 곳에 정신이 가 있는 중에도 눈이 가던 색유리였다. 직접 보진 못했지만, 유럽에 있는 역사적인 스테인드글라스를 떠올리게 하던 작품이었다. 한데 그게 메이드 바이 황제라니.
제국을 일으킬 정도의 지혜와 용력을 가진 인물이 예술적 재능도 뛰어났다는 말이다.
‘이런 인간을 재능충이라고 하던데.’
그리고 재능충이란 말에 자동으로 따라붙는 말이 ‘극혐’이었더랬다.
물론 이드는 전혀 그렇게 여기지 않았다.
하늘이 내려 주는 재능이 어때서. 어차피 세상이란 불공평한 것이다.
그리고 이드가 이렇게 말할 때면 라미아가 옆에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그죠. 이드가 욕하면 그야말로 누워서 침 뱉기.”
“야!”
“똥 묻은 머가 겨 묻은 머 욕 한다?”
“……”
절레절레.
그렇게 반발했다가 어떤 말까지 들었는지를 떠올린 이드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고, 그 모습에 콘펌 남작이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카논의 초대 황제께서 참으로 대단하다 싶어서 말입니다. 보통은 그 십 분의 일 정도의 재능도 가지지 못한 사람이 많지 않습니까.”
“그래서 대대로 제국의 모든 황제께서 가장 존경하시고 본받고 싶어 하시는 분으로 꼽히고 있습니다.”
“왜 그렇지 않겠습니까. 저도 다른 건 몰라도 그분의 예술적 재능만은 무척이나 부러운 것을요. 혹시 이것 말고 다른 작품도 있습니까?”
짝.
이드의 말에 콘펌 남작이 손뼉을 쳤다. 그 말을 왜 이제야 하냐는 반응이다.
“마침 좋은 생각이 났습니다. 감찰관이 초대 황제 폐하의 작품을 마음에 들어 하시니, 이후 안내를 황궁에 있는 작품을 찾아보는 것으로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거 아주 좋은 생각입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예의상 거절하는 말도 없이 이드가 그 제의를 덥석 물었다.
그에 앞뒤로 선 톤 자작과 콘펌 남작 사이에 짧은 눈빛이 오간다.
특히 콘펌 남작은 내심 자신의 몫이 끝났다는 듯 작게 한숨까지 쉬었다.
‘정말 여기까지다. 더 이상의 협조는 없을 것이오, 톤 자작!’
초대 황제의 작품을 언급하고, 작품을 따라 황궁을 도는 흐름. 극히 자연스럽게 오고 간 대화는 사실 콘펌 남작이 유도한 것이었다. 황궁에 발을 들여놓고 초대 황제의 작품 앞에서 다른 소리를 지껄일 인간은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니까.
그렇게 하면 조금 외딴 곳으로 안내를 하더라도 의심받지 않을 터. 그야말로 말을 꺼내는 순간부터 대답이 정해진 대화였다.
콘펌 남작으로서는 크게 어렵지 않은 일이었음에도 심력의 소모가 컸다. 그도 그럴 것이, 바벨의 감찰관을 금지로 밀어 넣는 일이다. 황궁 방문이야 ‘그분’이라는 말에 허락하고 말았지만, 그 이상은 절대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마지막’이라는 협박을 겸한 톤 자작의 협력 요구에 찝찝함을 참고 억지로 고개를 끄덕인 그였다.
그런데 그런 사정을 모르는 상대가 먼저 말문을 열어 줬으니.
‘쯧쯧. 하필 톤 자작과 얽혀서. 어디 가서나 떵떵거릴 바벨의 감찰관이 불쌍하게 되었군.’
이드에 대한 짧은 동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같은 순간.
이드도 콘펌 남작을 동정했다. 아니, 멍청한 상황 판단에 혀를 찼다.
‘그렇게 자신은 상관없다고 하더니 결국 해 달라는 건 다 해주네. 저런 판단력으로 어떻게 이 살벌한 황궁에서 넘버 쓰리까지 올라온 거야?’ 아니라고 부정하겠지만, 콘펌 남작의 등에는 이미 톤 자작의 송곳니가 꽂혔다. 그 시작이 무엇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 관련되고 싶지 않았다면, 거짓을 아는 순간 발을 돌렸어야 했다. 작은 손해를 각오해서라도 보고해서 선을 끊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못한 순간, 콘펌 남작의 미래는 정해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뭐, 자기들끼리 지지고 볶는 건 알아서 하고, 빨리빨리 좀 갑시다. 말 꺼내기 편하게 초대의 작품에 대한 말까지 꺼내 줬잖아.’
콘펌 남작은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색유리에 대한 이드의 감상은, 사실 오히려 방 안에서 두 사람이 꾸민 계획을 들어 알고 있는 이드가 일부러 꺼내 놓은 말이었다.
황궁에 있다는 금지.
톤 자작은 물론, 이야기를 들은 콘펌 남작까지 그에 관해 언급한 순간 이미 그 안에 발을 들일 이드의 죽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도대체 그만큼 위험한 공간이 어째서 황궁 안에 있는 것일까.
또 카논에서는, 카논의 황제는 어째서 그런 위험한 공간을 없애지 않고 있는 것일까.
이드는 어쩌면 없애지 않는 것이 아니라, 없애고 싶어도 없애지 못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그와 동시에 그 금지라는 게 대체 어떤 곳인지 궁금해졌다.
‘제국 황궁에 그런 걸 만들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있겠어?’
원해서 만들었건, 일부러 만들었건, 그런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굉장히 복잡한 절차가 필요했을 것이다.
황제가 아무에게나 황궁에서 그런 작업을 할 수 있도록 허락했을 리가 없다.
‘가능성을 따지면 황제의 직계나, 황제의 명령을 받는 황궁 마법사, 그리고 황제의 명령이 통하지 않는 통제 불능의 존재 정도가 가능한 일이지.’
그리고 이드는 마침 이 중 황궁 마법사와 통제 불능이라는 두 가지 조건을 만족하는 존재를 알고 있다.
‘어쩌면 게르만이 남겨 놓은 흔적일지도.
만에 하나 정말 게르만이, 아니, 게르만의 행세를 하고 있던 혼돈의 파편이 만들어 놓은 금지라면, 어쩌면 그들의 목적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어서 보고 싶군요. 가실까요?”
“그럽시다. 내가 안내하겠소. 아, 혹시 꼭 보고 싶은 곳이 있다면 말하시오. 내 안내해 드리리다.”
죽이기 전에 마지막 자비라도 베풀겠다는 걸까.
그렇다면 감사히.
이드는 환한 미소로 반기며 말했다.
“가능하면 고위 귀족분들과 인사를 나누고 싶군요. 그리고 뛰어난 실력으로 유명한 황제 폐하의 기사단도 보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흐음. 오늘은 대전 회의가 없어 감찰관이 뵙고 싶은 분은 몇 계시지 않을 것 같습니다. 대신 팔콘 기사단과의 만남은 가능할 듯합니다. 그나저나, 바벨에도 저희 팔콘 기사단의 명성이 들어간 모양입니다?”
“황제 폐하의 기사니까요.”
사실 ‘팔콘 기사단’이라는 이름은 지금 처음 듣는다.
하지만 황제를 가장 가까이서 지키는 기사다. 고르고 골라 뽑았을 테니, 충성심과 실력의 뛰어남은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아무렴 황제도 자신의 최후의 방패 같은 자들을 정치적인 문제만으로 뽑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테니까.
“가십시오. 제가 팔콘의 부단장과는 제법 친분이 있습니다. 하하하.”
“그것참 좋은 일이군요.”
인맥을 자랑하는 콘펌 남작의 말에 맞장구를 친 이드는 곧장 사라나 궁을 나서는 콘펌 남작의 뒤를 따라 황궁을 가로질렀다.
과연 황궁이라고 할까.
그사이 중간중간 제법 이름 있는 귀족들과 마주칠 수 있었다. 대전 회의가 없어 주요 귀족들의 방문이 적다는 콘펌 남작의 말이 전혀 실감나지 않을 정도였다.
이드는 톤 자작과 콘펌 남작을 중계로 그들과 인사를 나누고, 악수했다.
그때마다 그들의 내부를 살핀 것은 당연하다. 이드는 그중에서 카논무파로 확인된 사람들의 이름을 마음속에 적어 두었다.
황궁의 일이 끝나면 이 이름들을 피터에게 일러 주겠노라 생각하며,
다만 아쉬운 한 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톤 자작과 콘펌 남작처럼 무공은 익히지 않았으면서 카논무파의 무리에 속해 있는 것으로 의심될 만한 인물은 짚어 낼 수 없었다는 점이다.
어떻게 된 것이, 마주치는 인간들마다 서로 몇 년 만에 만나는 것처럼 반가워하는지.
그것도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친인이라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정치적인 표현들로서 말이다.
아무리 이드라도 철저히 가면을 쓴 정치꾼들의 인사말 속에서 진짜 친인을 가려내는 건 어려웠다.
이렇게 헷갈릴 때는 차라리 포기하는 것이 옳았다. 정확하지 않은 정보는 도리어 혼란만을 가져오게 될 테니까.
그러는 와중에도 이드는 중간중간 초대 황제의 작품이라는 것도 구경할 수 있었다.
색유리를 봤을 때도 그랬지만, 초대 황제의 작품은 진짜 훌륭한 예술품이었다. 그렇게 몇 개의 작품을 본 뒤에 그는 어떤 남자를 마주하게 되었다.
“만나서 반갑소, 에단 감찰관, 본인은 팔콘 기사단의 부단장, 베론 베베디요.”
이드는 그렇게 팔콘 기사단 부단장의 손을 잡을 수 있었다.
‘황제가 고르고 고른 부단장까지 카논무파라는 말이지. 과연 콘펌 남작이 친하다고 한 이유가 있네.’
겉으로 미소를 지어 보인 이드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