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70화
1305화
쉴라의 눈이 향한 곳.
원래는 상급 기사 페르다슈가 적 초인을 상대로 싸우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지금 그곳에 서 있는 것은 페르다슈가 아니라 검후였다. 그녀는 검을 든 적 초인을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중이었다.
“검후께서 나서셨다면・・・・・・ 페르다슈 경은?”
불길한 기분에 바쁘게 전장을 살피는 쉴라.
그리고 찾아낸 페르다슈는 후방으로 자리를 옮겨 치료를 받고 있었다.
붉게 물든 파츠 아머와 창백한 안색.
그렇지만 다행히도 중상은 아닌 듯, 허리를 곧게 펴고 앉은 그녀의 눈에는 여전히 전투 의지가 꺼지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페르다슈 옆에서 함께 치료를 받고 있는 산드라의 모습도 보였다.
누가 그새 그녀를 옮겨 놓은 것일까.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아끼는 부하들이 무사하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내린 쉴라가 전장으로 다시 눈을 돌렸다.
그야말로 적 초인을 압도하고 있는 검후.
심지어 나선 것은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그 옆의 전장에선 일리나가 온몸이 검게 물든 초인을 상대로 난화십이식을 뽐내는 중이었으며, 그 옆에선 플레타와 라울이 또 다른 초인을 상대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이들이 나서면서 상대를 잃은 상급 기사들이 스폴을 도와 적과 싸우고 있었다.
“다행이야.”
쉴라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하며 걱정하던 사태는 정말 일어났다. 갑자기 전투력이 강해진 것은 자신이 상대하던 초인만이 아니었다.
자칫 그들을 상대하던 상급 기사들이 위험할 수도 있었던 상황.
하지만 어떻게 알았는지 검후와 일리나, 그리고 베이몬의 침묵으로 인해 힘이 상당히 줄어들었을 플레타와 라울까지 나섰다. 그 덕에 상급 기사들이 당하는 상황을 막을 수 있었고.
물론 치료 중인 페르다슈와 산드라를 보면 상황을 완벽히 통제한 것은 아닌 듯하지만. 부상은 입었을지언정 죽지 않았으니 그것만 해도 충분히 성공이 아니겠는가.
“저분들께서 나서셨다면………”
쉴라의 눈이 다시 후방을 향했고, 그녀는 이내 이드를 발견할 수 있었다.
후방의 안전을 온전히 이드가 책임지는 것이다. 이런 쉴라의 눈길을 알아차린 듯 이드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다행히 상급 기사 중에 사망자는 없으니, 안심해도 좋습니다. 상급 기사들이 상대하던 초인들도 곧 정리될 겁니다.]
[민망합니다. 제가 미숙한 탓에 검후님과 일리나 님이 직접 나서는 일이 벌어진 것 같습니다.]
[글쎄요. 검후는 오히려 좋아하던걸요.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입니다.]
정말이다.
산드라 경이 갑자기 늘어난 적의 전투력을 감당하지 못해 날아가고, 다른 초인들에게서도 비슷한 모습이 비치는 순간. 검후는 마치 새끼가 다친 어미의 얼굴을 하고서 뛰쳐나갔다.
또한 그 순간. 이드는 놓치지 않고 보았다.
다급한 중에 검을 뽑아 드는 검후의 손이 가볍게 일렁이는 모습을 말이다.
이에 대해 이드는 자세한 언급을 하지 않았지만, 쉴라는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랫동안 검후를 모셔 온 그녀로서는 검후의 반응이 손에 잡힐 듯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저는 이대로 스폴 경을 지원하도록 하겠습니다.]
[쉴라 경의 판단대로 하면 됩니다. 다만, 조심하는 것이 좋을 겁니다. 한 번 일어난 일은 두 번도 발생할 수 있어요. 언제 또 적의 전투력이 상승할지 모릅니다.]
휘휘휭-
높이 떠올랐던 몸이 떨어지며 바람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쉴라는 그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려오는 이드의 전음을 들으며 허공을 차 스폴을 향해 방향을 꺾었다.
[어쩌면 산드라 경을 다치게 한 증폭 현상은, 앞서 제가 목을 친 자의 힘을 흡수했기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지 않아도 이쪽에선 그 가능성을 가장 크게 보고 있어요.]
[그럼 마지막에 남은 자가 얻게 될 힘은…………….]
앞서 두 명의 적을 상대해 본 쉴라이기 때문일까. 수 배로 늘어날 적의 힘이 가늠이 된 그녀의 입술이 무겁게 다물어졌다.
대충 예상되는 적의 능력은 그녀가 감당하기도 버겁다는 계산이 섰기 때문이다. 그녀로서는 매우 불쾌한 일이다.
자신이 똑똑하게 처신하지 못한 관계로 검후에 일리나까지 전장에 나서게 만들었는데, 마지막에 나타나게 될 적조차 감당할 수 없는 지경이라니.
‘차라리 힘이 늘어난 적이 무인이었다면 어떻게 상대할 수 있었겠지만, 하필 초인이라서……………’
쉴라는 자신이 상대하고 있는 적이 초인이라는 존재라는 사실이 새삼 아쉬웠다.
힘이 늘어난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 힘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없다면 차라리 없느니만 못하다.
무인과 마법사가 그렇다.
아무리 내공과 마나가 많으면 무엇할까. 그걸 뽑아낼 방법에 한계가 있는 것을.
강력한 내공과 마나를 뽑아 쓰기 위해서는 그만큼 경지가 높아야 했다.
그렇지 못할 경우는 그야말로 오크 목에 진주 목걸이나 다름이 없다.
그런데 이런 무인과 마법사와 달리, 초인은 따로 경지가 중요하지 않다. 그들의 능력은 개발하는 것이 아닌 주어지는 것.
각성하여 저절로 체득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몸에 달린 팔다리를 움직이는 듯 자연스러운 메커니즘을 가진다.
생각해 봐라. 팔다리를 움직이는 데 따로 훈련이 필요하던가?
없던 근육이 생겼으니 그 근육이 가진 힘의 크기에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한 명의 무인인 쉴라의 입장에서, 불합리도 이런 불합리가 없다.
그렇지만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은 따로 있었다. 이번 전투의 마지막을 자신이 처리하지 못하고 검후에게 맡겨야 할 가능성이 크다는 사실. 바로 그 점이었다.
뿌득.
그것이 분해 어금니를 꾹 깨물었을 때였다.
이런 쉴라의 마음을 알고 있다는 듯 이드의 전음이 이어졌다.
[그렇죠. 마지막에 남게 될 초인은 제법 성가신 존재가 될 겁니다. 그래서 이쪽에서도 생각해 둔 방법이 있습니다.]
[방법이…… 있나요?]
[해결 방법이 없는 문제는 없습니다. 그리고, 방법이 있다면 굳이 그런 골치 아픈 놈을 상대할 이유가 없지 않겠습니까?]
당연하다.
이건 자존심을 건 결투장이 아니라, 말 그대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투다. 적의 전력을 깎을 수 있다면 최대한 깎아 내는 것이 최선이다.
[제가 뭘 하면 될까요? 말씀해 주시면 최선을 다해 실행해 보이겠습니다.]
쉴라는 이어질 이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렴 자신의 역할이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굳이 이드가 이런 설명을 해 줄 이유가 없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이드와 일리나, 그리고 검후가 알아서 하면 될 일이니까.
[간단합니다. 신호에 맞춰서 적의 목을 동시에 베어 낼 겁니다.]
[동시에 말인가요?]
[사망자의 힘이 고일 곳이 사라진다면, 사망자의 힘을 흡수할 산 자가 사라진다면, 결국 남은 힘은 의미 없이 흩어지지 않겠습니까?]
쉽게 말해 사망자의 힘을 흡수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것이다. 남은 네 명의 초인이 같은 시간에 죽어 버린다면 그 힘을 누가 흡수할 수 있을까. 순간 설명을 듣던 쉴라의 얼굴에 묘한 허탈감이 떠올랐다.
[・・・・・・ 그걸로 괜찮은가요?]
[괜찮지 않을 게 있나요?]
없다. 오히려 없어서 문제다. 동시에 네 명의 목을 치는 것으로 마지막에 나타날 강력한 초인을 막을 수 있다니.
그 방법이 이렇게 쉬워도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내심을 짐작한 것인지, 이드가 말을 이었다.
[이건 결코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가 저만한 능력을 가진 초인들의 목을 동시에 베어 낼 수 있겠습니까.]
이드의 말이 옳았다.
지금
자리에 있는 이가 일리나와 검후, 그리고 쉴라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남은 한 자리를 차지한 플레타와 라울은 두말할 것도 없고.
아무리 그들이 온전치 않은 상태라고는 해도, 대륙을 아우르는 바벨의 간부다. 완전치 않은 상태에서도 상급 기사 이상의 전력을 낼 수 있는 인물이 바로 그들이다. 거기에 그들이 가진 경험과 기상천외한 초인기가 더해지면 쉴라라고 해도 쉽게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바로 이런 이들이 모였기 때문에 동시 참수 작전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혹시 불안한 자리가 나와도 이드 님이 있으니 문제도 없고.’
결국 자신만 잘하면 될 일이다.
[내 신호를 기다리세요.]
필요한 이야기는 다 들었다. 고개를 끄덕인 쉴라가 외쳤다.
“스폴 경을 제외한 기사들은 뒤로 물러나라! 이자는 나와 스폴 경이 상대한다!”
“충!”
어느새 스폴과 상급 기사들이 적과 싸우고 있는 전장에 도착한 쉴라. 그녀가 전장에 난입하며 내린 명령에 상급 기사들이 신속하게 물러났다. 그렇게 빈 공간으로 뛰어든 쉴라의 검에서 폭발하듯 검화가 뿜어졌다.
“이것이 난화십이식이다!”
“저쪽도 준비가 된 것 같고.”
이드는 폭풍처럼 혈화의 검식을 뽐내는 쉴라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다른 전장을 살폈다.
검후와 일리나의 상태는 크게 눈여겨볼 것이 없었다.
두 사람의 실력은 확실히 적 초인을 압도하고 있었다. 이드가 신호를 주기만 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상대의 목을 베어 낼 수 있었다.
다만 다른 사람들과 타이밍을 맞추기 위해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드가 신경을 쓰는 것은 플레타와 라울, 그리고 지금 막 쉴라가 난입한 두 개의 전장이었다.
그 두 곳의 전투 상황에 따라 신호의 타이밍을 잡을 것이다.
“역시 저쪽은 이드가 나섰어야 했던 거 같아요.”
라미아가 말하는 ‘저쪽’은 플레타와 라울이 싸우고 있는 전장이다.
“어쩔 수 없지.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리는데.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고.’
비록 시간은 걸리겠지만 두 사람이 손발을 맞춘다면 충분히 상대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기에 상대를 양보한 이드였다.
“그래도 너무 느려요.”
“하하하. 그건 어쩔 수 없잖아.”
퉁명스러운 라미아의 감상에 이드는 어색하게 두 사람의 편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라미아의 말도 사실이었다.
현재 이드가 신호를 보내기 위한 타이밍의 중심에는 플레타와 라울이 있었다. 현재 네 개의 전장 중에서 아군의 전투력이 가장 떨어지는 곳을 바로 저 두 사람이 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전력을 발휘할 수 없어도, 저 두 사람이라고 봐봐. 슬슬 상대를 몰아가고 있잖아.”
이드는 플레타와 라울의 전장을 살피며 눈을 번뜩였다.
그와 함께 다른 세 개 전장의 상황을 살핀 그의 입에서 전음이 떨어져 나왔다.
[5, 4.3.]
하나하나 시간을 두고 점점 줄어드는 숫자.
그것의 의미를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밀어붙여! 플레타!”
“스폴 경!”
“으아아! 이 빌어먹을 기사 놈들!”
[1. 지금!]
서걱! 퍼억!
서거걱!
섬뜩하게 빛나는 네 개의 칼날,
그와 함께 떠오른 네 개의 머리.
남아 있던 네 명의 머리가 떨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