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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898화


1333화

부관주가 여기에 있는 이유.

‘백번 생각해도 나지.’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 말고는 없다.

이 자리에 플레타가 있기는 하지만, 아무렴. 바벨에 볼일이 있었다면 플레타가 아니라 라울에게 가는게 맞지.

힘쓰는 일 말고 바벨에서 플레타가 가지는 영향력이란? 글쎄, 삼대가 모인 집안의 4살짜리 막내 정도가 아닐까?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아무것도.”

미미한 영향력과 달리 눈치는 빠른 것 같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눈을 돌린 이드가 부관주를 향했다. 마침 이쪽을 향하고 있던 부관주의 시선과 마주쳤다.

“이드 명예 후작 각하.”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나온 자신의 이름.

역시 목적은 자신이다.

“소문으로만 듣고 이렇게 직접 뵙는 건 처음이로군요. 조금 더 좋은 자리에서 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쉬울 따름입니다.”

“동감입니다만, 어쩔 수 없죠. 그나저나 경치가 좋습니다?”

“・・・・・싫어하실 줄 알았는데요?”

“전혀요. 용암이 흐르는 땅보다 백배 낫습니다. 탁 트인 지평선과 수평선에 눈도 시원하고.”

어디 명소 좋은 관광지에 놀러 온 것처럼 주변을 돌아보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부관주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한다.

왜 그렇지 않을까.

당장 보기에는 좋아도, 이곳은 엄연히 전장이다. 그것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꾸민.

그런데 그런 전장으로 끌려온 상대가 여유롭다 못해 저리 태연하니, 그녀로선 이해하기 힘든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이런 모습도 잠시, 부관주의 눈빛은 곧 차갑게 가라앉았다.

지금의 상황에서도 저런 여유를 보인다는 것은 그만큼 자신의 실력에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렇게 납득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집된 이드에 대한 정보와 영혼의 관에 들어서 보인 모습을 보면, 그것이 충분히 근거가 있었다. 해서 경계심은 무럭무럭 커졌다. 물론 이드는 부관주가 그러거나 말거나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딱히 유의미한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드는 태연하게 말했다.

“그래도 아쉽긴 하군요. 이 좋은 걸 일행들과 같이 봤다면 더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일행들을 다시 모아 달라고 하면 무리한 부탁일지?”

“네, 무립니다. 하나같이 너무 대단한 분들이시라, 제가 감당이 어려워서요. 부디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양해를 바라는 말과 달리 부관주의 표정은 아주 철벽이다.

이드는 그런 부관주의 모습이 제법 흥미로웠다.

그녀 스스로 모두를 온전히 감당할 수 없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현재 영혼의 관은 1층과 2층을 제외한 다른 세 개 층은 제대로 사용도 해 보지 못하고 뚫린 상태였다.

그야말로 적이 코앞에 들이닥쳤다고 해야 할까?

당연히 이런 상태에선 없는 전력이라도 짜내야 옳았다. 코앞에까지 밀려온 적에게 약한 모습을 보여선 결코 안 되었다.

없어도 있는 것처럼,

회심의 한 수를 감춘 것처럼.

그렇게 최대한 몸을 부풀려 적이 쉽게 달려들지 못하게 해야 했다.

하지만 부관주의 말은 그런 일반적인 모습과 달랐다.

부관주를 바라보는 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여자, 무슨 꿍꿍이지.’

분명 어떤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것 같은데.

잠시 부관주가 감춘 속내를 꿰뚫어 보려는 양 눈을 빛내던 이드가 툭 던지듯 말했다.

“부관주가 허락하지 않는다면, 내가 직접 할 수밖에 없군요.”

말과 함께 일대를 살피는 모습은 마치 전문 철거인이 견적을 뽑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건 명백한 도발이었다.

네가 해 주지 않는다면 내가 부순다.

이런 모습에 부관주의 눈빛이 잠시 흔들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하면 코웃음을 쳤을 것이다.

파이어볼 같은 단순한 공격 마법도 아니고, 사전 준비가 필요한 공간 마법이다. 그걸 파괴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파훼 방법을 모른다면 평생 그 안에서 늙어 죽어야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드는 이미 그 공간 마법을 붕괴시킨 전적이 있었다. 그것도 단 몇 번의 칼질로.

“……할 수 있다면 시도해 보셔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쉽지 않을 겁니다.”

“쉽지 않다. 라. 그럼 불가능하다고 보지는 않는 모양입니다?”

“…….”

슬쩍 입꼬리를 올리는 이드의 말에 부관주가 입술을 잘근 씹었다.

별거 아닌 말이었지만, 그 속에 든 상대에 대한 두려움과 경계심을 미처 감추지 못했기 때문이다.

앞서 감당하기 힘들다며 스스로의 모자람을 밝힐 때와는 전혀 다른 반응.

‘오호, 이것 봐라.’

이드는 그 차이에 주목했다.

그사이, 순식간에 냉정을 회복한 부관주가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이 세상에 완전은 있을 수 없으니까요. 그저 멈추지 않는 변화만이 있을 뿐이죠. 공간 중첩 소환진 또한 그렇습니다.”

“내가 파괴한 것과 다르다는 겁니까?”

“약점이 드러난 마법을 다시 내놓을 정도로 저는 멍청하지 않거든요.”

“확실히…… 공간의 균열이나, 교차점의 위치가 아까와 바뀐 것 같긴 했습니다. 그게 그렇게 쉽게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닐 텐데. 마법 실력이 대단하십니다?”

“제가 바로 영혼의 관 부관주이니까요.”

그렇게 말하는 부관주의 얼굴엔 당당함과 자랑스러움이 드러났다. 그것은 영혼의 관에 대한 자부심일까, 초인 마법에 대한 자부심일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것도 직접 손을 섞으면 알게 되지 않을까?

“그럼 그 실력을 한번 체험해 보도록 할까요?”

평이한 목소리가 마치 전장의 나팔 소리처럼 들린다. 무심히 한 걸음 내딛는 순간 주변의 공기가 굳어지는 것 같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분위기.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부관주가 한 걸음 물러나며 풀린다. 부관주는 고개를 저었다.

“실례. 저는 아직 명예 후작 각하와 나눌 이야기가 남았습니다.”

“・・・・・・ 나는 더 들을 이야기가 없는데요?”

항복…… 하겠다고 한다면 어떻습니까?”

“야! 감히, 네가! 우릴 우습게 봤어!”

생각지 못한 말.

그에 가장 먼저 반응한 건 플레타였다. 뒤에 서서 포션의 효력을 최대한 끌어 올리며 오가는 이야기를 듣던 그가 버럭 소리를 지르고 나선 것. 그럴 만했다.

앞서 라울이 항복을 권할 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거절해 놓고, 이제 와서 항복이라고?

도대체 무슨 차이인가.

라울과 이드,

아니, 그 뒤에 있는 바벨과 아나크렌 제국, 그 차이인가?

자세한 속내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플레타에겐 바벨에 대한 무시로 들렸던 것.

이드는 그런 플레타를 진정시키고는 부관주를 노려봤다.

좀 전에 이쪽이 내민 카드를 거절해 놓고, 이번엔 같은 카드를 자신이 먼저 내민 것이다. 과연 이런 행동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을까? 

“좀 전엔 똑같은 제안을 거절했던 것 같은데. 그런 의미에서 별로 믿음이 가질 않는군요, 지금 발언.”

“그땐 상대가 바벨이었으니까요.’

“이 빌어 처먹을 것들이!!”

이번에야말로 직접 언급된 바벨의 이름에 얼굴이 벌게질 정도로 화가 난 플레타였다. 이드는 다시 한번 그를 진정시키고는 말을 이었다.

“워워! 진정하라니까! 그럼 바벨에는 항복하지 못하겠다는 거라면. 이번 항복은 누굴 향한 겁니까?”

“・・・・・・ 무슨 말씀인가요?”

“부관주가 하는 항복이 내게 하는 것이냐, 아니면 제국에 하는 것이냐 그걸 묻는 겁니다.”

“당연히 제국에……”

무슨 그런 당연한 질문을 하느냐.

그런 심정을 감추지 않은 부관주의 답. 이드는 그것을 중간에 잘라 내며 말을 이었다.

“아니죠. 제국에 할 거라면 내가 아니라 검후님과 대면하고 있어야 하는 게 아닙니까? 아무렴 그분의 결정을 한낱 명예 후작 따위의 결정과 비교할 수는 없는 일 아닙니까.”

이드가 비록 명예 후작이지만, 그가 당장 이 일에 관해서 할 수 있는 일은 부관주의 항복을 제국에 전하는 정도다.

그에 비해 검후는 황제의 뜻을 들을 것도 없이 그 자리에서 부관주의 항복을 받아들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황제도 검후의 이런 결정에 대해 어지간해선 반대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왜 검후 님이 아니라 내게 와서 항복을 하겠다는 겁니까?”

“어라・・・・・・ 듣고 보니 그렇습니다?”

씩씩거리던 플레타가 어느새 숨을 고르고는 의혹 가득한 눈으로 부관주를 노려봤다.

지금 이 상황은 손이 가렵다고 발을 긁는 격이다. 그야말로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뜻.

“생각할수록 이상하네. 항복한다면서? 그런데 우리 일행은 왜 굳이 나눠 놓는 건데? 그게 항복하겠다는 인간의 태도냐?”

“정확한 지적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부관주는 어떻게 대답하시겠습니까?”

“……바벨과는 관련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을 떨어트렸을 뿐입니다.”

“허허, 거참. 그렇게 바벨이 싫었으면서, 얼마 전까지 그들의 후원은 어떻게 받아 온 건가요? 혐오스러워서 죽고 싶었을 거 같은데. 더욱이 초인 마법의 완성에 바벨의 조력도 컸다고 알고 있는데 말입니다.”

돈도 돈이지만, 연구에 필요한 초인을 공급한 게 바로 바벨이라고 했었다.

바벨을 배신한 배신자나 범죄자 등을 연구 대상으로 넘긴 것.

비록 하자가 있는 작자들이었지만, 그들도 엄연히 초인.

초인과 초인기에 관한 연구에 쓰기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부관주의 말은 마치 바벨의 이런 후원을 모두 부정하고 있는 듯하지 않은가.

“명예 후작 각하의 말씀은 틀렸습니다. 제가 바벨을 부정하는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그들이 먼저 저희를 버리고 배신했기 때문입니다. 본래 배신자들과는 함께 숨 쉴 수 없는 법이 아니겠습니까. 제 말이 틀렸나요?”

“……시벌.”

자신을 똑바로 노려보는 부관주.

그 앞에 말문이 막힌 플레타는 짧은 욕설로 답을 대신했다. 아무리 변명을 해 보자고 해도, 협력 관계에서 먼저 등을 돌리고 칼을 꽂은 건은 바벨이었다. 이건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었다.

미완의 마탑이 숨기는 것이 있었다?

그건 이유가 되지 않는다. 숨기는 것이 있을 뿐, 그것이 바벨에 대한 배신은 아니니까. 무엇보다 그 숨기는 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도 없다. 그런 상태에서 바벨이 먼저 정신의 관 토벌에 동참했더랬다.

아마도 라울이었다면 그에 대해 참으로 기발한 변명을 늘어놓았을 수 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플레타에는 그런 말재주가 없었다. 그 전에, 그의 성격에도 맞지 않는 행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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