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8화
445화
일리나가 살고 있는 푸른 나무 마을은 크게 네 구역으로 나뉜다. 우선 결계가 형성되어 있는 결계지, 그 뒤로 정령의 힘에 의해서 강화된 철목이 빽빽이 들어차서 자연적인 미로와 방벽을 형성한 철목지, 그리고 과수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나무와 향긋한 허브 등 수많은 종류의 꽃과 나물이 분포된 수림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푸른 나무 마을 순이다.
수련장은 그렇게 나뉜 수림지와 철목지의 사이에 위치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수련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은 아니었다. 그저 수련하기 적당한 곳을 골라 오랜 세월 엘프들이 수련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무가 깎여 나가고 땅이 다져지며 자연적으로 형성된 곳이다.
거기에 이왕 형성된 수련장이라 조금씩 손을 더해서 만들어진 게 지금의 푸른 나무 마을 수련장이었다.
“꺄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나름대로 조용한 수련장이었다. 아니, 애초에 수련장이다 보니 아주 조용할 수는 없는 법. 간간히 격렬하게 칼이 부딪치는 쇳소리나 마법에 의한 폭발음이 들리기는 해도 항상 진지하고 의욕이 넘치는 수련장이었다.
오늘처럼 웃음이 넘치는 곳이 아니었다는 말이다.
“채이나?”
[꼬맹이들!]
“아이들이 왜?”
수련장 앞에 선 세 사람은 곧 그 웃음소리의 주인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특히 라미아는 당장 여러 가지 의미의 준비 태세에 들어갔다. 가령 도망을 위한 날갯짓 같은 것 말이다.
“하하하. 이제 왔니? 신혼이라고 너무 문란한 거 아냐?”
아이들도 있는데 못 하는 말이 없다.
‘그냥 무시하자.’
이드는 내심 한숨을 쉬고는 말했다.
“라미아와 이야기할 게 좀 있어서 늦었어요. 그런데 무슨 일이에요? 수련장이라고 들었는데, 왜 아이들이 저러고 있어요?”
이드가 가리키는 곳은 돌로 만든 직사각형 모양의 벽돌이 빼곡히 깔려 있는 연무장 위였다. 반듯하게 다듬은 돌로 만들어진 멋진 연무장이었다. 평소라면 그 위에서 서로의 실력을 겨루거나, 스스로의 모자란 점을 보충하기 위해서 무기를 휘두르는 엘프들이 있어야 마땅했다. 그런데 지금 그곳에는 두 명의 여자아이들에게 쫓기고 있는 남자아이 하나가 있을 뿐이었다. 아이들의 손에는 검 대신 작은 막대기 하나가 들려 있었는데, 그 막대기로 연신 앞서 달리는 남자아이의 머리와 엉덩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아악! 야, 거길 찌르면 어떻게!”
남자아이가 엉덩이 계곡 사이의 중요한 곳을 찔리고는 죽는다고 소리를 질렀다.
“흥, 한 대도 안 맞는다면서? 눈 감고도 피한다면서!”
“없는 말 만들지 마! 내가 언제 눈 감고도 피한다고 했냐!”
그러나 뒤쫓는 여자아이들은 가차 없었다. 덕분에 남자아이는 억울해 죽겠다는 표정으로 어쩔 수 없이 엉덩이 구멍을 가리고 뒤뚱거리면서 뛰어야 했다.
아마 앞서 들린 소리도 이 모습을 보고 아이들과 채이나가 깔깔거리며 배꼽을 잡고 웃는 소리였던 듯했다. 지금도 다시 ‘와’ 하고 아이들의 웃음이 연무장을 채웠다. 그 모양을 보느라고 아이들은 어제 그렇게나 포획을 위해 애쓰던 라미아가 왔는데도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뭐, 보이는 대로. 저 꼬맹이가 잘난 척하다가 된통 당하고 있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아이들과 채이나가 왜 여기 있냐구요.”
“왜. 우리는 여기 오면 안 돼?”
“말 꼬지 말구요.”
“그냥, 아침에 나왔다가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을 보고 무슨 재미있는 일이 있나 싶어서 따라왔지.”
채이나는 연무장의 다른 한쪽에서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크게 웃으면서 연무장 위를 바라보고 있는 성인 엘프들을 가리켜 보였다. 어제 이드를 초대한 윌도 그 속에서 입을 크게 벌린 채 웃고 있었다.
“물어보니까 네가 오늘 여기서 실력 발휘를 한다며? 그래서 구경하려고 기다리고 있었지.”
“끙. 제가 언제 실력 발휘를 한다 그랬다고.”
이드는 도대체 중간에 말이 어떻게 전해지면 단순히 연무장에 들러 달라는 말이 저렇게 와전될 수 있나 싶었다.
“것보다 이쪽으로 와. 계속 그렇게 멀찍이 떨어져 서 있을 거야?”
채이나의 말대로 이드들은 아직 연무장 주변으로 형성된 무릎 높이의 작은 담장 밖에 서 있었다.
“들어갈 생각이었어요. 그냥 채이나들이 먼저 와 있어서 놀라서 그렇지.”
이드가 그렇게 말하고 막 담을 넘으려는 찰나 채이나가 그런 이드를 말렸다.
“어이, 이드. 어른이 되어서는 모범을 보여야지. 아무리 낮아도 담이 있으면 문으로 들어올 생각을 해야지, 그걸 넘어오면 되겠냐? 저기 문 있잖아.”
과연 채이나가 말하는 대로 이드가 서 있는 곳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 문이 있기는 했다. 멋없는 직사각형 형태의 문틀만 서 있는 특이한
문이었지만, 연무장 주변의 낮은 담장과 마찬가지로, 출입을 통제하는 본래의 목적에 맞지 않는 애매한 모양이었다.
조금 어이없기도 했지만 틀린 것도 없는 채이나의 말에 이드는 볼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 같았다.
“크흠. 모, 못 봐서 그랬죠.”
“짜식. 못 보기는 작다고 얕보면 안 된다. 그거 함부로 넘다가는 혼난다.”
이 작은 담에 혼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뭔가 특별한 점이라도 있나? 이드가 막 돌로 된 담장을 살피려는 순간 조금 무뚝뚝한 마오의 말이 들려왔다.
“어머니도 그냥 담을 넘으시다가 번개에 타격을 받고 마비되셔서 고생하셨습니다.”
“야! 이 아들놈아!”
씨익.
이드는 생각지 못한 정보 제공자에게 엄지를 치켜보였다.
“호오~ 그러셨어요.”
“흥. 그래, 그랬다. 그게 뭐?”
“뭐긴요. 그런가 보다 싶어서요. 하하하.”
어쩐지 손 안 대고 코 푼 것 같은 느낌의 이드였다.
“그런데 푸른 나무 마을에는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나 마법이 활성화되어 있는 공간이 이상할 정도로 많은 것 같습니다. 저희가 머물던 집 안을 비롯해서 마을 곳곳에 아티팩트가 있더군요. 여기 수련장만 해도 꽤 많은 마법으로 유지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마법 물품, 아티팩트의 제작이 힘든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큰 부분은 바로 마법의 지속적인 활성화 유지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아티팩트의 수가 적은 이유도 이 때문이다. 마법적인 기술도 기술이지만, 그보다는 마법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마력을 내포하고 있는 재료가 희귀하다는 것이 근본적인 문제였다.
그런데 마오가 확인하기로 푸른 나무 마을은 마을 구석구석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여러 가지 형태의 마법이 유지되고 있었다. 귀한 마법 재료로 제조된 물건이 아닌데도 말이다. 일반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많은 수의 마법을 유지하려면 도대체 얼마의 마력이 필요할지 짐작도 되지 않는 마오였다.
“그래?”
하지만 마오의 의문과는 상관없이 이드는 그냥 그런가 보다 싶었다. 오히려 편하면 좋은 게 아닌가 하는 단순한 생각이었다.
‘그래, 특히 화장실이 좋았지.’
순간 지저분한 곳에 대한 생각은 그만하라는 듯 라미아가 날카로운 부리로 이드의 머리를 쪼았다.
“많기는 하지. 우리 마을하고는 완전히 다르다니까. 당장 여기 수련장에 사용된 마법을 특별한 재료 없이 마법진만으로 가동시키려면 이 수련장 열 배의 공간이 있어도 모자랄걸?”
“음………… 채이나의 마법 실력이 푸른 나무 마을보다 많이 딸린다는 가설은 어때요?”
“죽을래? 어쨌든 일단 들어와. 계속 거기 있을 거야?”
이드는 채이나의 재촉에 고개를 끄덕인 뒤 일리나의 손을 잡고 문을 향했다.
“혹시 채이나가 이야기하고 있는 거, 세레니아가 한 건가요?”
일리나의 집에서 이드가 편하게 사용하는 모든 물품은 ‘made by 세레니아’라고 들었던 이드였다. 마오의 이야기에 자연스럽게 생각이 그쪽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아니요.”
“일리나, 이야기는 이쪽에 와서 해 줘요. 우리도 궁금해요.”
일리나가 대답하자 채이나가 소리쳤다. 그녀의 말대로 일리나는 그녀의 곁으로 다가가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세레니아 님이 아니세요. 함께 오셨던 라일로시드가 님과 그분의 지휘를 받아서 마을분들이 함께 제작한 거예요.”
“그렇겠지. 한두 개가 아니니까.”
채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진 한두 개 그리고 마는 수준의 작업이 아니었다. 그녀와 마오가 확인한 것만도 50개가 넘는다. 라일로시드가가
작업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드래곤인 그가 그런 사소한 일을 일일이 하는 광경도 쉽게 상상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그분이 일리나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셨나 봐요. 보통 이런 작은 부분까지 세세하게 챙겨 주시는 분들이 아닌데.”
정확히 말해서 일리나보다는 그 뒤에 있는 이드를 생각한 일일 테지만 채이나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감사한 일이죠.”
“그런데 이거 마력 조달은 어디서 하는 거예요? 적잖은 마력이 필요할 텐데.”
마력은 특정한 목적을 위해서 마나를 가공한 형태를 지칭한다. 마법의 발동을 위한 마나의 준비 단계라고도 할 수 있겠다.
마력을 작게 먹는 하위 마법도 있고, 연비가 나빠 마력 먹는 하마로 불리는 상위 마법도 있다. 어쨌든 이곳 전체에 들어갈 마력의 총량을 생각하면 마나석 몇 개로는 도저히 유지할 수 없는 규모다.
“그건 걱정 없었어요. 오히려 마력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죠. 저희 마을의 아티팩트는 모두 넘치는 마력의 소모를 위해서 만들어진 거예요.”
어쩐지 지금까지의 이야기와는 선후가 바뀐 말이었다.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 마력을 확보하는 것이 아니라, 마력을 소모하기 위해서 마법을
사용한다는 말이 아닌가.
“무슨 마력인데요?”
이드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의 반전에 없던 관심마저 생겨나는 이드였다.
그렇게까지 해 가면서 마력을 소모시켜야 할 일이 대체 뭐가 있을까.
혹시 모르겠다. 마르지 않는 마나의 샘이라는 드래곤하트라도 있다면 말이다. 하지만 드래곤하트가 있다곤 해도 그게 마력을 소모시켜야 할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필요한 곳에만 한정적으로 사용해야 할 것이다. 끝도 없는 마력을 퍼 올리기는 하지만, 그것은 드래곤하트가 내포하고 있는 마나가 그만큼 크고 거대하기 때문이지 드래곤하트의 마나가 무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마력을 꼭 사용해야 한다는 듯 말하는 일리나와는 전혀 맞지 않는 내용이었다.
“라일로시드가 님이 손봐 주신 봉인이요.”
“아, 그 악마요?”
“네, 그 악마의 마력을 그렇게 소모시켜서 자연 소멸 시킬 계획이라고 말씀하셨어요. 하지만 너무 급작스러운 마력 변동은 봉인은 물론이고 봉인의 내외부에 모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꾸준히 마력을 소모시키는 방법을 택하게 된 거죠. 그 일환으로 결계를 보강하는 것과 더불어 마을에 다양하고 편리한 마법들을 많이 설치해서 마력을 소모하도록 해 주셨어요. 저희 집에 설치된 마법들도 봉인에서 뽑아낸 마력으로 활성화되고 있는 거예요.”
처음 등장하면서 마을에 입힌 피해를 이런 식으로 강제로 보상하고 있는 악마였다.
“역시 드래곤. 그런 방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생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직접 만들어 내다니 말이야.”
“라일로시드가 님 말씀으로는 완전히 실체화되지 않은 악마라서 가능하다고 하셨어요. 완전히 실체화되었다면 불가능했을 거라구요.”
“호호. 정말 절묘한 순간에 봉인된 모양이네요.”
“위험한 순간이었죠.”
너무 일찍 봉인이 형성되었다면 악마가 탈출했을 수도 있고, 늦었다면 봉인 마법이 소용없었을지도 몰랐을 일이다. 채이나의 말대로 정말 절묘한 순간에 봉인된, 어찌 보면 재수 없는 악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