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08화
1343화
탈탈탈.
이드는 손에 든 큰 병을 흔들어 최상급 포션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들이부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아직 부족한 것일까. 부관주의 얼굴은 여전히 창백하기만 하다.
완전한 회복을 위해서는 포션과 더불어 충분한 휴식이 필요할 것 같지만, 그렇게까지 해 줄 생각은 없다.
원만한 대화를 위해 회복을 시키긴 했지만, 상대가 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완전히 항복을 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이드가 빈 병의 뚜껑을 닫아 챙기며 부관주를 살폈다.
초점이 분명해진 눈동자에 의문이 어려 있다. 귀한 포션을 아끼지 않고 사용한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
그냥 거칠기만 한 고문을 기대하기라도 한 걸까? 마법사들이란 참 낭만이 없는 족속이다 싶다.
이드가 입을 열었다.
“그만하면 대화에는 문제가 없을 정도로 회복된 것 같은데, 그렇지 않습니까?”
“……포션을 조금 더 써 달라고 하면 염치가 없는 거겠죠?”
“잘 알면서 왜 묻습니까.”
“큭・・・・・・ 쿨럭. 큭큭큭.”
칼 같은 대답에 눈이 동그래진 부관주가 곧 키득거리며 웃다가 기침을 한다.
그러게 뻔한 걸 왜 물어? 그나저나 저 웃음. 설마 구두쇠라고 속으로 욕하는 건 아니겠지? 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덕분에 부관주가 피를 토하며 험해졌던 분위기가 풀어졌다.
쪽쪽쪽.
그리고 그 속에 들려오는 묘한 소리.
“플레타 대장. 지금 뭐합니까?”
이드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소리의 근원지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플레타가 손가락을 빨고 있었다.
쪽쪽쪽.
갑자기 유아 퇴행이라도 일어난 걸까?
다행히 그런 건 아니었다.
“얼굴하고 머리카락에 묻은 포션이 아깝지 않습니까. 더구나 최상급인데. 그래서・・・・・・”
“그렇다고 그걸 찍어 먹어요? 아까 말하던 품위는 어디 갔습니까.”
“최상급이니까 괜찮습니다!”
괜찮을 리가 있냐!
이드는 갑자기 두통이 몰려오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랜만의 두통이지만 전혀 반갑지 않다.
그저 한시 빨리 라미아가 라울을 데리고 돌아오길 바랐다.
동시에 라울의 능력을 새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저 플레타를 능숙하게 다루고 있었다니.
같은 의미에서 플레타 부대의 부대원과 부대장이 참 대단하지 않은가. 저런 인간을 대장으로 두고도 임무를 잘 수행한다는 게.
“이건 신종 고문법인가요?”
손가락에 묻은 포션을 다 빨아먹고 다시 손가락을 뻗을까 말까 눈치를 살피는 플레타의 모습을 본 부관주의 말이었다.
왜 부끄러움은 자신의 몫인지.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죄다.
이드는 내심 진저리를 치며 챙겨뒀던 빈 병을 플레타에 던졌다. 안에는 얼마 안 되는 포션이 조금 고여 있었다.
“그렇게 먹고 싶으면 이걸 줄 테니까, 제발 그만둬요.”
“아하하하. 감사합니다. 저도 남의 땀하고 섞인 포션은 별로였습니다.”
“으이그!”
싱글벙글한 얼굴로 병을 든 채 한 걸음 물러서는 플레타에 이드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마음에 새겼다. 라울이 돌아오면 지금 이 순간을 있는 그대로 전해 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당했던 부끄러움을 바벨에 되돌려 주고 말리라.
그렇게 플레타를 쫓아 버린 이드와 부관주의 눈이 마주쳤다.
짧은 순간 부관주의 눈에 감사의 빛이 떠올랐다. 아무렴 그녀도 침 묻은 손가락이 자신의 얼굴을 닦아 대는 상황을 원하지는 않았을 테니까. 하지만 그런 감정도 이드의 말이 이어지는 순간 이슬처럼 사라졌다.
“크흠. 그럼 우리 이야기부터 시작해 보죠. 미완의 마탑 탑주.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가장 핵심적이고 중요한 질문.
첫 질문이 그것일 줄 몰랐을까. 부관주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꼭…… 대답해야 하나요?”
“그러는 게 서로에게 좋지 않을까요? 다음엔 포션을 쓰지 않을 겁니다. 부관주도 알겠지만, 그거 상당히 비싼 겁니다.”
“명예 후작은 그분이 이곳에 있다고 확신하시는 모양입니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지 않고서야 무려 부관주씩이나 되시는 분이 이렇게 직접 전장에 나오지는 않았을 것 아닙니까.”
“습격을 받았으니, 반격하는 건 당연하지 않을까요?”
“아니죠. 우리는 아직 끝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생명의 관도 그렇고 정신의 관도 그랬습니다. 부관주가 중간에 달려 나오는 경우는 없더군요.”
“……그 말을 들으니 새삼 명예 후작이 원망스럽네요.”
6“원망해도 상관없습니다. 그리고, 잠깐이지만 내가 본 부관주는 상당히 이성적으로 보였습니다. 패배가 뻔한 싸움에 나설 사람이 아니었다는
말이죠.”
“……”
“영혼의 관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뭘까요. 바로 초인 마법과 그것을 연구하는 마법사들이 아닙니까? 그 둘만 있다면 어디에서든 영혼의 관을 다시 일으킬 수 있을 겁니다. 굳이 싸울 이유가 없는 거지요.”
단숨에 달려 나가는 말에 부관주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오른다.
이드의 말에 어디 하나 틀린 부분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 탑주가 없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사실 탑주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그에게 탈출을 권했을 터였다.
말 그대로 질 싸움은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네요.”
“그런 겁니다. 그런데 부관주는 질 걸 알면서도 나섰지요. 설마 우리를 상대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진 않았을 겁니다.”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묘하게 비틀린 목소리로 답하는 부관주에 이드는 단박에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이군요. 아무튼, 이성적인 부관주가 비이성적인 결정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가령 탑주의 명령 같은 거 말입니다.”
내 말이 틀렸다면 반박해 봐라.
그렇게 말하는 이드의 눈길에 부관주의 고개가 떨어졌다.
이 이상 억지가 통하지 않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전부 추측이지만 이드의 말은 어디 하나 틀린 것이 없었다.
지금 부관주가 이드와 대면하고 있는 이유도 오로지 탑주를 위해서다.
그것이 아니라면 굳이 싸울 이유가 없었다. 누가 마법사에게 기사와 같은 정정당당함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속으로 시간의 흐름을 세어 본 부관주가 긴 숨을 내쉬었다. 숨을 따라 포션으로도 다 치유되지 못한 비릿한 피 냄새가 뭉클 묻어 나온다. “그분을 찾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그건 탑주가 영혼의 관에 있다는 말과도 같은 질문이었다.
그녀에게서 좀 더 자세한 답을 원한다면 듣기 좋은 이야기를 해 주면 된다. 가령 탑주와 영혼의 관 소속 마법사들의 안전 같은.
하지만 이드는 굳이 거짓말을 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야 할 이유도 없었다.
부관주를 잡았다. 탑주로 향하는 가장 큰 가림막을 정리한 것이다.
“그에 대한 결정은 내가 아니라 검후님이나 바벨이 할 겁니다. 내겐 그에 대한 결정권이 없어요. 나는 어디까지나 요청에 의해 이곳에 온 것이니까. 정 궁금하면 저기 플레타 대장에게 물어보면 됩니다.”
그 말에 두 사람의 눈이 자연스레 플레타를 향했다.
그에 빈 병을 내려다보며 입맛을 다시던 플레타가 수염이 난 턱을 긁었다.
그가 든 병은 정말 깨끗하다. 포션의 물기가 흔적도 없다.
도대체 무슨 방법으로 그걸 다 빨아먹은 걸까? 궁금하지만 어쩐지 알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플레타가 조금은 바보 같은 얼굴로 말했다.
“큼, 일단 가능하면 생포가 목표입니다. 그리고 생포된 탑주는 바벨로 데려가야죠.”
“…….”
그리고는?
말 없는 재촉에 플레타가 눈을 끔뻑거렸다.
“그게 끝입니다만? 바벨로 옮기는 것으로 제 할 일은 끝나는 겁니다. 나머지는 바벨에서 알아서 하는 거죠. 제가 관여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참견할 영역이 아니라는 말인데.
참으로 속 편한 소리이지 않은가.
라울이 함께하는 작전이라서 머리를 비운 것일까? 아니면 원래 머리를 비우고 사는 것일까. 참으로 신기한 인물이 아닐 수 없다.
저런 인간을 대장 자리에 그대로 둬도 괜찮은 거냐, 바벨!
‘뭐, 내가 걱정할 일은 아니니까.’
이드는 플레타의 말을 짧게 정리했다.
사실 바벨의 정확한 속내야 이드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대략적인 짐작은 가능했다.
또한 검후의 결정에는 자신의 의견이 매우 크게 반영될 것이다. 아니, 검후라면 이드가 원하는 대로 따라줄 것이다.
“좀 믿음이 가진 않지만, 들은 대로입니다. 순순히 항복한다면 탑주의 안전은 보장받을 수 있을 겁니다.”
“결국 확답을 해 주시진 않으시는군요.”
“말했다시피 그에 대해서는 내게 결정권이 없으니까요. 어차피 내 목적은 탑주가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관심도 없고.”
“그렇다면! 명예 후작이 원하는 걸 내어 드린다면, 그렇게 한다면…..
간절하게 이어지는 부관주의 말에 플레타가 움찔하는 모습이 보인다.
서로 간에 신뢰랄 것도 딱히 없기는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저렇게 믿음이 부족해서야.
내심 혀를 찬 이드가 부관주의 말을 끊었다.
“내가 원하는 건 내가 얻어 낼 수 있습니다. 혹시나 기대하는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그러니 쓸데없는 기대는 접고 내 질문에 대한 대답을 해 주기 바랍니다. 부관주는 지금 그런 제안을 할 입장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아 줬으면 좋겠군요.”
“……”
“제가 한 번 더 손을 볼까요?”
쉽게 입을 열지 않는 부관주.
그 사이로 플레타가 슬그머니 얼굴을 들이민다. 살짝 붉은 얼굴을 한 그의 한 손에는 빈 병이 달랑거린다.
설마 포션에 취하기라도 한 건 아니겠지.
그런 쓸데없는 의심이 들어서려는 때였다.
“・・・・・・ 이곳 최상층에 계십니다.”
부관주의 입에서 쥐어짠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순간 두 눈을 마주친 이드와 플레타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히 최상층 어디에 있는 거지요?”
“최상층은 온전히 탑주께서 사용하고 계십니다.”
“그럼 바이트 타블렛도 거기에 있겠군요?”
탑주에 이어서 언급하는 바이트 타블렛. 그에 부관주가 의혹 어린 눈빛으로 이드를 바라본다.
탑주도 탑주지만, 미완의 마탑 소속도 아니면서 바이트 타블렛에 대해 알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복잡한 것 같다.
“혹시 명예 후작이 원하는 것이・・・・・・ 바이트 타블렛입니까?”
“내가 찾고 있는 것과는 좀 다르긴 하지만, 비슷합니다. 바이트 타블렛에 붙어 있는 것이니까요.”
‘바이트 타블렛에 붙어 있는 것?’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부관주의 의혹이 깊어진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 대해 더 깊이 파고들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탑주께선 최상층에 계시지만, 거기까지 쉽게 닫지는 못할 겁니다. 영혼의 관의 어떤 곳보다 중요 장소인 만큼 철저하게 보호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아. 그 정도면 됐습니다. 어떤 식으로 보호되고 있는지는 몰라도, 그런 건 우리가 알아서 합니다. 마침 해결해 줄 사람도 도착했고.”
이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번쩍이는 빛과 함께 공간이 갈라졌다.
파아아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