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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11화


1346화

자칫 집안싸움이 될 뻔한 일이 저절로 해결되었다.

검후의 인색한 평가가 무색하게 라울이 현명하다는 말이다. 욕심에 지지 않을 정도로 이드와 검후 일행을 제대로 보고 있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판단력도 좋고, 눈치도 빠르다.

똑똑한 아군이 함께한다는 건 기뻐해야 할 일.

이드는 기분이 좋았다.

이런 심리는 자연스럽게 말투에 묻어났다.

“남편으로서 듣기 좋은 칭찬이로군요. 하지만 엄살이 심합니다. 바벨의 초인들이라면 분명 어렵지 않게 해결했을 겁니다. 그리고 도움을 받기는 마찬가집니다. 플레타 대장의 활약이 컸어요.”

고자질해야 할 바보짓이 한둘이 아니지만, 지금은 그걸 입 밖으로 꺼낼 타이밍이 아니다.

다음 기회를 생각하는 이드에게 라울이 손을 저어 보였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아무렴 저 친구가 도움이 되었을 리가 없지요. 안 봐도 뻔합니다.”

“아하하하.”

이것도 친구에 대한 굳건한 믿음의 일종으로 봐야 할까.

물론 정답이기는 하다.

이드는 어색한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이렇게 아무렇지 않은 대화 속에서 라울은 내심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명예 후작은…… 내가 어떤 욕심을 내었는지 알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자세히 눈여겨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이드의 태도 변화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골든아이를 가진 라울에겐 그 차이가 보였다.

관찰에서 호의로.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해야 할까. 라울은 직감적으로 그러한 변화가 자신으로 인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았다.

과연 이러한 사실을 모르고 욕심을 부렸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기분 나쁜 소름이 등허리를 타고 뱀처럼 기어 올라왔다.

이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지만, 예상은 어렵지 않다. 상대가 눈치를 챈 만큼 어떻게 굴러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의 결과가 나오는 일은 없었으리라.

라울은 계산 끝에 욕심을 버린 스스로의 결정을 칭찬했다. 하마터면 최고의 아군을 최악의 적으로 돌릴 뻔한 순간이었다.

‘후~ 빌어먹을. 이 작전에서 가장 큰 위기를 넘긴 기분이야. 진땀이 다 나네. 그런데 도대체 명예 후작은 내 생각을 어떻게 알아차린 거지?’

고비를 넘기자 자연스럽게 의문이 떠올랐다.

머릿속에만 담았을 뿐, 입 밖으로 내지 않은 생각이다.

그런 걸 명예 후작은 도대체 어떻게 알았을까.

그저 앞뒤 상황을 통해 짐작했다면 실로 무서운 일.

라울은 이드에 대한 위험도를 거침없이 상향 조정했다.

그러나 과연 골든아이를 가진 라울이라도 상상조차 어려웠을 것이다.

그 뒤에 검후가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표정을 낱낱이 읽어 냈다는 사실도,

만약 이후에라도 라울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굉장히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플레타에게 들었습니다만, 탑주의 위치에 대해 알아내셨다고요.’

라울이 자신의 실수를 감추려는 듯 입을 열었다.

“짐작을 확인한 것뿐입니다.”

이드는 별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지만, 라울의 반응은 달랐다.

“그런 말씀 마십시오. 이번 작전에 있어 탑주를 사로잡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명예 후작께선 그 단초를 잡아 주신 겁니다.”

“뭐, 이제 시작이죠. 그런데 심문을 오래 끌 수는 없습니다. 아시죠?”

말없이 돌아보는 이드에 라울이 고개를 끄덕였다.

“부관주가 시간을 벌고 있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부관주를 향하는 순간, 그녀가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심문을 이어 가고 싶은데.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라울 자작이 말입니까?”

누가 심문을 하건 상관은 없지만,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을까?

내심 일리나와 라미아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었던 이드였다.

그런 이드를 향해 라울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자랑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어떤 경우에도 제 골든아이를 피해 거짓이 통한 경우가 없습니다.”

자랑은 아니라지만 충분히 자랑처럼 들린다.

사실 심문에 있어 참과 거짓을 가리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긴 하다. 그래서 이드도 일리나의 도움을 받으려 했던 것이니까.

과연 초인기 골든아이의 성능이 하이엘프의 권능을 뛰어넘을 정도일까?

그런 순수한 궁금증이 일어난 이드는 라울에게 심문의 권리를 넘겼다.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겁니다.”

“부담 없이 하십시오. 어차피 위에 있는 탑주가 어딜 가진 않을 테니까요.”

그러기 위해 밖에서 미리 조치를 취해 놓지 않았던가.

고개를 끄덕인 라울이 부관주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어쩐지 잔인해 보이는 표정.

그를 마주한 부관주는 최대한 담담하려 애쓰는 모습이지만, 그런 노력이 허무하게도 그녀를 둘러싼 분위기가 애처롭게 떨렸다.

아무리 강하게 마음을 먹어도, 무력한 신체에 가해질 고문이 두렵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특히 그녀는 이미 흉골이 부서지며 피를 토한 경험이 생생한 상태였다.

거기에 더해, 거짓을 가릴 수 있다고 자신하는 라울의 말 역시 부관주에게 있어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얼마나 남았지? 아직 한 시간이 지나지 않은 건가?’

부관주는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애썼다.

아직 약속한 시간을 채우지 못했다.

그러나 얼마 남지 않았음은 확실하다.

‘그래, 조금만 더 버티자.’

그렇게 다짐하는 부관주 앞으로 라울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 불필요한 절차는 건너뛰고, 첫 번째 질문입니다. 탑주는 정확히 몇 층에 있습니까.”

“…..•첫 번째 질문은 이미 저분께 답했습니다.”

질문에 대한 대꾸는 빨랐으나, 원하던 답은 아니었다.

그러나 라울은 화를 내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빛이 변했다. 차갑고 깊게 가라앉아 섬뜩한 빛을 내기 시작한 눈동자.

“그럼 두 번째 질문으로 묻지. 탑주는 몇 층에 있나.”

그리고 순식간에 변해 버린 말투.

“…..”

과연 부관주도 이번에는 강단 있는 모습을 보이지 못하고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이런 부관주를 보며 라울이 손을 들었다.


석상처럼 굳어 있는 수십 명의 마법사들.

그들은 한결같이 일그러진 얼굴로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큰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화면이었다. 

“아극・・・・・・ 꺄아아아악!”

화면 속에서 피가 튈 때마다 날카로운 비명이 끊어질 듯 이어지며 마법사들의 고막을 때렸다.

누구도 입을 여는 사람이 없다. 반대로 도저히 참지 못하고 질끈 눈을 감는 이들은 있었다. 하지만 그런다고 해서 외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평소 그들이 신뢰하고 따르던 부관주의 비명은 눈을 감는다고 해서 멈출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다시 묻지. 탑주는 몇 층에 있지?”

몇 번째일까.

똑같이 반복된 질문에 마법사들은 부르르 치를 떨었다.

저 목소리에 답하지 않으면 다시 피가 튀고 비명이 이어지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어질 비명을 예감한 몇몇 마법사들이 더는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찼다.

“더는 못 기다리겠습니다. 당장 가서 부관주를 구하고 말겠습니다!”

“멈춰, 네가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야. 죽는다고!”

그런 마법사들을 주변에 있던 이들이 황급히 잡아 말렸다.

“그렇다고 저 꼴을 보고만 있으라는 겁니까? 부관주를 구해야 할 거 아닙니까!”

“우리도 답답하다. 하지만 지금은 탑주님의 명령을 기다려야 할 때다.”

“젠장. 기다려라, 기다려라! 그러다 부관주가 돌아가시면요!”

마법사가 목이 터지도록 고함을 질렀다.

그리고는 자신의 팔을 잡은 이와 주변의 마법사들을 돌아보며 따지듯이 말했다.

“저는 탑주님이 도대체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저 꼴을 보고도 기다리라는 말씀이 나온다는 말입니까.”

“어허, 자네 말이…….”

“여러분도 그렇습니다. 아무리 기다리라는 말이 내려왔다고 해도 그렇지. 여러분은 정말 이대로 부관주가 죽는 꼴을 보고만 계실 겁니까! 우리가 나서서 부관주를 구해야 하는 거 아니냐는 말입니다.”

분노에 찬 목소리는 간절한 애원으로 변했다.

“…….”

그 심정을 모르지 않는 마법사들은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럼에도 마법사의 팔을 잡은 이는 끝까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우리라고 그걸 모를까. 하지만 잘 생각해라. 지금 우리보다 더 애가 타는 분은 따로 있다. 부관주가 어릴 때부터 그분을 손수 키우고 가르친 분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런 분이 기다리라고 하셨다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탑주라면 부관주를 이렇게 죽도록 버려 두시지 않을 것이다. 분명 부관주를 구하고 침입자들을 물리쳐 주시리라.

그러나 더 이상 힘들다고 생각되는 순간이 온다면 그 때는.

‘망설이지 않는다. 그렇지 않습니까?’

뒷말을 삼킨 이가 한데 모여 있는 장로들을 돌아본다. 조용히 귓속말을 주고받는 장로들의 분위기 또한 무겁기만 하다.

부관주가 전투에 패하는 순간.

탑주를 향해 달려간 것도 저기 있는 장로 중 하나였다.

과연 그는 탑주를 만나 어떤 말을 들었을까.

솔직히 말해 불안한 마음이 큰 것이 사실이다.

탑주가 믿음을 주었다기엔 장로들의 표정이 너무도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만약 이대로 부관주를 포기한다면?

‘바보 같은 소리지. 나라면 여기 있는 마법사들을 모두 포기하는 일이 있더라도 부관주를 살린다. 탑주도 이런 생각은 크게 다르지 않을 거야.’ 

정도 정이지만, 저울의 무게 자체도 부관주를 향해 기운다.

마법사는 그렇게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 가며 탑주에 대한 믿음을 강화했다.

그렇지 않고서는 화면을 넘어오는 비명을 견디기가 너무도 힘들기 때문이다.

마침 장로 중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소리 없이 오가는 눈빛.

말은 없었지만, 눈에 떠올라 있는 간절함의 의미는 같다.

때가 온다면 망설이지 않고 달려나가리라.

‘그때까지 부디 견뎌 주십시오, 부관주,’

그리고 이런 마음은 이 자리에 있는 대부분 마법사들의 생각이기도 했다.

영혼의 관의 부관주, 이더비히 라카비리움.

그녀는 탑주 뿐 아니라 영혼의 관에 속한 모든 마법사로부터도 마음속으로 존경을 받는 그런 마법사인 것이다.


그리고 이런 마법사들의 머리 위.

탑주가 머물고 있던 방에서도 역시 아래층의 마법사들이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영상이 출력되고 있었다. 

“이더…… 비…… 딸아…….”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흐린 눈의 탑주.

그의 목소리는 희미했고,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부관주와는 다른 의미에서 탑주의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의미.

과연 그랬다.

힘겹게 초점을 맞추는 탑주의 눈앞으로 불쑥 하나의 얼굴이 끼어들었다.

“흐음. 역시 정품이 아니라서 그런가. 느리군.’

그것은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한 존 워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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