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21화
1356화
“…….”
이마에 주름을 만든 라울이 침묵했다.
마녀가 죽음을 예언하면 이렇게 들릴까.
한편으로 검후가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불쾌한 기분은 아니었다. 그보다 의문이 앞섰다.
자신이 아는 검후는 시비를 걸기 위해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도 지금과 같은 시점에서는 더더욱.
해서 검후의 말을 곱씹었다.
혼돈의 파편은 과연 어떤 존재이기에 ‘이 전투가 끝났을 때는 영혼의 관이 남아 있지 않을 것’이라고 한 걸까.
그 말을 단순히 해석하면, 저 둘의 전투에 영혼의 관이 무너진다는 말인데 과연 그게 가능할까?
라울은 고개를 저었다.
자신과 바벨이 수집한 존 워스는 그렇게 터무니없는 수준의 인간이 아니었다.
물론 존 워스는 그저 가면일 뿐, 그 뒤에는 혼돈의 파편이 있다는 것은 안다. 그에 대해 말할 때 이드와 검후가 크게 경고하기도 했다. 게다가 일이 일인 만큼, 바벨도 신경 써 조사를 진행했었다. 그리고 과연 그 경고가 옳았다는 판단이 나왔다.
본래 혼돈의 파편에 대해 바벨이 가진 자료는 많지 않았다. 애초에 기록 자체가 극히 적었으니 이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바벨은 최선을 다했고, 결국 정보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들이 얻은 정보는 백 년 전의 것이었다. 당시 발생한 전쟁에서 혼돈의 파편이 등장했다. 바로 저 위대한 마인드 마스터와 함께 말이다. 그렇게 전장에서 모습을 드러낸 혼돈의 파편은 이후 두 차례 더 모습을 드러냈다. 그중 가장 충격적인 등장은 아나크렌 수도에서의 전투였다. 이 전투로 많은 사상자와 피해가 났다.
수도를 습격당한 제국은 이 사실을 최대한 숨기고자 했지만, 그러기엔 목격자가 너무 많았다.
당시 상황을 목격하고 기록한 이들은 수없이 많았다. 특히 제국의 수도였던 만큼 능력자들이 많이 모여 있어 정보의 질도 좋았다.
다만 제국의 눈치로 인해 대부분의 정보는 조용히 묻힐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백 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이젠 이런 일이 있었는지를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다. 자연스럽게 비밀 등급은 해제되었다.
심지어 당시 제국이 직접 작성한 문건조차 쉽게 접근 가능했다. 바벨도 그렇게 이 정보를 손에 넣은 것이었다.
덕분에 바벨은 당시 제국이 혼돈의 파편에게 가졌던 생생한 분노와 두려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바벨은 혼돈의 파편이라는 존재의 위험도를 최상으로 잡았다. 그렇게 혼돈의 파편은 검후와 같은 등급에 놓였다.
‘검후와 동급’이라는 혼돈의 파편.
만약 이드가 알았다면 그게 최선이었냐고 끝없이 반복해 물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바벨에서는 당연한 결정이었다.
일단 검후는 바벨이 상정한 위험도 최상에 놓여 있었다. 검후 개인의 무공도 무시무시하지만, 제국을 비롯해 대륙의 기사들에게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을 보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오히려 한 번도 본 적 없는 혼돈의 파편을 이런 검후와 동급으로 두었다는 부분에서 바벨이 얼마나 유연성 있는 조직인지를 살필 수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만 이러한 과정에서 아쉬움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아무렴, 혼돈의 파편이 겨우 검후와 같은 등급일 리가 없지 않나.
바벨이 혼돈의 파편을 위험하게 본 가장 핵심은 버서커 현상에 있었다. 거의 모든 인원이 초인으로 구성된 바벨에 있어 이보다 위험할 수는 없는, 극독과도 같은 것. 그 위험도는 검후의 영향력 이상이었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무력적인 부분에 대해서는 평가가 미비했다. 아니, 박하다 못해 형편없었다.
백 년 전 혼돈의 파편이 제국의 수도를 뒤집긴 했지만, 바벨의 정예가 나선다면 어렵지 않게 처리할 수 있었으리라.
바벨의 판단은 그러했다.
오만이나 자만 같은 것은 아니었다. 이런 평가가 나온 것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었다.
그중 가장 핵심적인 이유는 개인이나 조직, 그리고 국가가 가지는 무력의 수준이 월등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객관적인 자료도 있었다.
전략가들은 말했다. 현재 대륙은 과거에 비해 최소 세 배 이상의 전력 차가 난다고.
당연하게도 이러한 차이를 만든 것은 무공과 초인이었다.
또 무공과 초인 연구로 인해 발전하게 된 마법까지.
마찬가지로 제국에서 백 년 전과 같은 일이 벌어진다면 제국은 별다른 피해 없이 혼돈의 파편을 제거할 수 있다.
바벨은 그렇게 본 것이다.
그야말로 명명백백한 오판이었지만, 정작 이런 결과를 내놓은 바벨은 그걸 몰랐다.
검후와 동급인 만큼 무력도 같은 수준으로 보아 줄 수도 있다. 하나 검후가 감금된 걸 보면 알 수 있듯, 그래 봤자 무적은 아니다.
거기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간다고 해도 이야기는 크게 바뀌지 않는다.
그렇게 판단했다.
분명 그게 옳다고 확신했는데, 틀렸단다.
‘검후보다 강력한 존재? 그게 말이 되는 일인가?’
납득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지난 백 년간 대륙 최강은 누가 뭐래도 검후였다. 그녀보다 강력한 존재란 상상하기 어려웠다.
굳이 찾자면 저기 전투를 벌이고 있는 이드 정도다. 그가 보여 준 힘은 분명 대단했으니까. 당장 오늘 밤 이드의 손에서 해결된 일이 얼마인가. 어느 하나 만만한 것이 없었지만, 이드는 그 모든 걸 너무나 손쉽게 처리했다.
그 능력을 보자면 검후와 충분히 비견할 수 있기는 할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혼돈의 파편도 같은 선에 놓을 수야 있다. 당장 저 앞에서 벌어지는 전투를 보면 누가 압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저 정도로, 영혼의 관이?
무엇보다 지금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은 새로운 세계를 구성한 거대한 결계 안이다. 마법적인 방법이 아닌, 순수한 무력으로 이 결계를 넘으려면 얼마나 큰 힘이 필요할까.
라울은 계산하기를 포기했다.
아무튼, 이런 상황에 전투의 결과로 이 결계는 물론이고 영혼의 관까지 무너진다고? 오히려 가혹할 정도의 과대평가가 아닐까?
그렇다고 속마음을 그대로 내놓을 수는 없는 일. 라울은 단어를 골랐다.
“그 말씀은・・・・・・ 명예 후작이 그만큼 대단하다는, 그런 말씀이신지?”
“하하하. 말을 돌리다니, 자작답지 않군. 그렇지만 틀린 말은 아니네. 명예 후작의 무공은 굉장하지. 분명히 말해 나는 상대도 되지 않을 정도야. 그리고 혼돈의 파편은 그런 명예 후작이 전력을 다해야 상대할 수 있는 놈들이지. 자네도 모르지는 않을 텐데. 화원을 붕괴시킨 거대한 늑대, 메르시오를.”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건 특별한 경우가 아닙니까.”
메르시오.
그 이름에 라울의 표정이 굳었다.
그를 직접 마주한 경험은 없다. 오로지 마법 영상을 통해서 그 존재를 목격했을 뿐이다. 그것도 한창 싸움이 진행된 시점의 영상들. 영상 속 메르시오는 그야말로 파괴의 화신이었다.
그는 정신의 관을 붕괴시켰고, 검후가 갇혀 있던 화원을 초토화했다. 특히 그 화려한 화원을 돌무더기로 만든 모습은 소름이 돋을 정도로 인상 깊었는데.
신화나 전설에나 나올 것 같은 거대한 늑대의 모습은 정말이지. 아무에게도 말한 적은 없지만 라울은 그 모습을 보고 순간 아름답다고 생각해 버렸을 정도였다.
그렇다. 메르시오는 매우 특별했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 베히모스 같은 환상의 존재, 아니면 드래곤 같은 초월종이었습니다.”
“그렇지. 따지고 보면 혼돈의 파편이란 존재가 그러해, 그리고 저기서 명예 후작이 싸우고 있는 존 워스도 그런 존재지. 혼돈의 파편 말이야.”
“……”
“왜? 메르시오는 인간이 아닌 모습이었고, 존 워스는 인간의 모습이라서 다른 것 같나? 착각하지 마라. 저기 있는 존 워스는 어디까지나 가면이야. 그 뒤에 거대한 늑대가 아니라, 드래곤이・・・・・ 아, 이건 실례. 아무튼, 다른 어떤 것이 정체를 숨기고 있을지 모르는 일이란 말이네.”
검후는 듣지 못할 누군가를 향해 사과했다.
아무렴 분명 실수이기는 했다. 지금 드래곤이 누구 때문에 중간계에서 쫓겨나 고생하고 있는데.
아무튼, 검후의 이런 강력한 주장에 라울은 입술을 깨물었다. 반박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메르시오가 혼돈의 파편이고, 존 워스 또한 혼돈의 파편이라면 그 능력도 동급으로 봐야 한다는 검후의 말은 분명 틀리지 않았다. 바벨, 그리고 라울 입장에서는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말이었다.
신랑의 형태를 한 메르시오는 라울로서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견적이 나오지 않은 그런 존재였으니까.
하나 확실한 것은, 대량의 사상자가 발생할 거라는 사실이다.
그런데 모든 혼돈의 파편이 메르시오와 같다면……
“혹시….. 혼돈의 파편의 정체는 드래곤인 것입니까?”
답답한 심정을 담아 던진 라울의 질문.
결국 검후는 보는 사람이 많다는 것도 잊고, 파안대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그에 라울의 표정이 이상해지건 말건, 숨이 찰 정도로 웃은 검후가 라울의 어깨를 잡았다.
“자작. 내가 그대와 바벨의 모든 잘못을 용서할 테니, 그 조건으로 지금 그 발언을 나중에 드래곤 앞에서도 해 주게. 꼭이네!”
“……어쩐지 거절해야 할 것 같군요.”
“아깝군. 자네가 모든 드래곤의 적이 되는 꼴을 볼 수 있었는데.”
진정 아쉬워하는 검후에 라울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모든 드래곤의 적이라니. 장난으로는 너무 지독하지 않은가.
하지만 덕분에 하나 알게 된 사실도 있었다.
혼돈의 파편과 드래곤이 적대 관계에 있다는 것.
‘어떤 형태인지 알 수 없지만, 검후가 드래곤과 연결이 되어 있었다니.’
새삼 검후를 납치 감금했던 지난 사건이 떠올라 식은땀이 나는 라울이었다.
과연 그녀에게 먼저 사죄를 청한 것은 얼마나 지혜로운 일이었나.
그나저나, 설마 혼돈의 파편의 일에 드래곤까지 엮여 있을 줄이야.
라울은 문득 지난 백 년 동안 드래곤이 한 번도 목격되지 않은 이유가 혼돈의 파편에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기에 이르렀다.
우연히도 완벽한 정답이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하나는 알겠습니다. 혼돈의 파편이 저 드래곤들과 동급이라는 거로군요. 그렇지 않고서야 적대 관계가 성립되지 않을 테니까요.”
“정확한 판단이네. 사실 이 땅에 살고 있는 생명이라면 모두가 혼돈의 파편의 적이지.”
“……”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보폭으로 성큼성큼 넓어지는 스케일에 라울은 입을 닫았다.
물론 무시할 수 없는 일이기에 머리에 담아 두긴 해야 할 테지만, 지금 고민하기에는 너무 큰 문제들.
우선 눈앞의 일부터 해결한 후에 생각해 볼 일들이었다.
지금 당면한 문제는 부관주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