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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22화


1357화

“하아~ 미치겠네.”

그야말로 돈 주고도 볼 수 없는 전투를, 그것도 특등석에 앉아 보고 있으면서도 온통 다른 곳에 정신이 가 있는 라울. 애인이 떠나가도 이렇게 질척대진 않을 것 같은데.

그 모습이 더욱 마음에 들지 않은 검후가 대놓고 혀를 찼다.

“남자라면 깔끔하게 포기할 줄 알아야지. 쯔쯧.”

지금까지 그녀가 보아 온 라울은 똑똑하고 상황 판단이 빠른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부관주에 대해서는 어째서 저렇게 미련을 떠는지.

하는 꼴을 보고 있으려니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물론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자신이 그의 입장이었어도 아깝기는 할 테니까.

하지만 아까워하는 것과 포기를 모르고 미련하게 구는 건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남자답지 못해도 상관없습니다. 바벨이 도약할 기회를 다시 잡을 수만 있다면.

“그게 어렵다니까. 이대로 나갔다가는 목숨이 아홉 개라도 부족할걸.”

어디 문제가 목숨뿐일까.

당장 자신들을 가두고 있는 결계를 빠져나갈 방법도 찾아야 했다. 최소한 이곳에서 나가야 부관주를 찾든 말든 할 것 아닌가. “으으!”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지 라울이 앞머리를 쥐어뜯었다.

당연히 그래 봤자 없던 방법이 짠하고 나타나지는 않았다.

대신.

검후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성공했다.

계속 혼자서 앓는 소리를 내는 라울의 모습에 더 참지 못한 검후가 빽 하고 소리를 지른 것이다.

“알았어! 알았으니까, 그만 좀 닥치게! 짜증 나서 더 이상은 못 들어 주겠으니까!”

“아시겠다니…… 혹시 무슨 방법이 있는 겁니까?”

검후의 말속에서 작은 희망을 본 것일까. 라울의 얼굴에 묘한 기대가 떠올랐다.

“없다면? 포기할 수는 있고?”

“……정말 방법이 없다면 포기합니다.”

“흥! 분명히 말하지만, 그냥 들어가면 죽을 거야. 하지만 보호자가 있다면 이야기가 다르겠지?”

“보호자…… 라고요?”

이 나이 먹고 보호자라니?

검후는 시시각각 표정이 변하는 라울을 보며 내심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천연덕스러운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이상한가? 원래 애들이 위험한 곳에 갈 땐 보호자가 함께하는 법이라네.”

“그・・・・・・ 제게 보호자를, 아니, 호위를 붙여 주시겠다는 말입니까?”

“호위가 아니야. 보호자지.”

절대 굽히지 않겠다는 듯 ‘보호자’라는 단어를 계속해서 주장하는 검후에 잠시 이마를 짚은 라울이었다.

“……좋습니다. 그럼, 어떤 분을 보호자로 붙여 주겠다는 말씀이신지?”

묻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 답은 뻔하다고 생각했다.

자신보다 약한 사람이 보호자가 될 수는 없는 일.

그런 의미에서 보호자 자격이 있는 사람은 세 명이다.

검후와 두 명의 후작 부인,

그 중 검후는 누군가의 보호자가 될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녀가 움직이면 은색 기사단 전체가 움직이고, 은색 기사단이 움직이면 플레타 부대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야 위험에 대한 통제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검후는 라울의 눈이 라미아와 일리나를 향하자, 그녀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라미아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라미아 명예 후작 부인이 보호자가 되어 준다면 최소한 죽을 일은 없을 것이네.”

“저 말인가요?”

“어차피 명예 후작 부인도 더 올라가야지 않습니까. 바이트 타블렛을 확보해야죠.”

“그렇기는 하지만…….”

굳이 라울의 보호자가 되어 줄 이유는 없는데?

가늘게 떠진 라미아의 눈이 그렇게 말하는 것 같다.

그러자 검후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결정은 명예 후작 부인이 하는 겁니다. 부탁을 하는 건 어디까지나 자작이지요. 나는 전혀 강요하지 않아요.”

그러면서 얄밉게 두 손을 드는 검후의 모습에 쉴라는 생각했다.

검후께서 즐기고 계신다고.

아무튼, 그렇게 결정권을 넘겨받은 라미아는 잠깐 고민했다.

무슨 이유로 검후가 이런 부탁을 하는 것일까? 강요는 아니라고 했지만, 이렇게 다리를 놓은 시점에서 라울을 도와주길 바라는 것은 분명하니 말이다.

그러나 고민은 짧았다.

무슨 이유든, 그다지 어려운 부탁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데려가 줄 생각은 없었다.

아무렴, 무려 보호자다.

단순 동행 이상의 손이 많이 가는 일을 무료 봉사할 수는 없는 일.

“제 일에 방해만 되지 않는다면 동행하는 것도 괜찮기는 해요. 괜찮기는 한데………….”

“지금 그 말씀은, 이 결계를 나갈 방법을 찾으셨다는 겁니까?”

“찾고 말고 할 것도 없어요. 나가는 거야 어차피 시간문제였으니까. 더구나 지금은 쥐구멍까지 열려 있는 상태라서요. 우리도 그걸 이용하면 됩니다.”

별거 아니라는 라미아의 말에 라울의 얼굴이 활짝 피기 시작했다.

특히 라미아가 말한 ‘쥐구멍’이라면 부관주가 도망친 공간 이동을 말하는 것이 분명했다.

그걸 따라갈 수 있다면, 좀 더 쉽게 부관주를 잡을 수 있지 않겠는가.

“면목 없습니다만, 명예 후작 부인께 협력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아까 말한 대로 동행이야 어렵지 않지만, 자작의 안전을 생각하면 일이 좀 복잡해져서요.”

“협력에 대한 대가는 바벨의 이름을 걸고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대가가 중요한 게 아닌데…… 뭐, 좋아요. 단, 명심하셔야 할 부분은 자작의 목적보다 제 목적이 우선이라는 겁니다.”

무엇이 우선인지를 분명히 하는 라미아.

그에 라울은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는지에 대해 작은 회의감이 들었다.

비록 검후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그 역시 충분한 강자였다. 라울의 간부 자리는 카드로 딴 게 아니었다.

다만 이런 회의감은 차가운 이성에 금방 밀려 사라졌다.

스스로에 대한 자부심도 좋지만, 인정할 건 인정해야 했다. 전부를 본 게 아닐지언정, 오늘 본 것만으로도 라미아의 실력은 충분히 인정할 만했다. 그녀는 대단한 마법사다.

당장 결계를 나갈 방법을 모르는 자신과 달리, 라미아는 그 방법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마법을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 차이는 크다.

“……어쩔 수 없지요. 부탁드리겠습니다.”

“좋아요. 그리고, 대가도 무겁게 받을 겁니다. 외상은 없어요!”

떼먹을 생각은 꿈에도 하지 마라!

그렇게 철저한 계산을 지향하는 라미아에 라울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러다 바벨의 기둥뿌리 하나가 뽑히는 것은 아니겠지?

문득 걱정이 밀려왔지만, 여기까지 온 상황에서 발을 뺄 수는 없는 일.

라울이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모쪼록 쿨거래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이런 라울의 말이 끝나기도 전.

투콰쾅!

천둥 같은 폭발과 함께, 집채만 한 흙더미가 날아와 결계 위로 쏟아져 내렸다.

라미아가 한 재산 크게 뜯어 내고 있는 사이, 이드의 전투는 쉼 없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던 것이다.


발끝에서 일어나는 스물세 번의 변화.

그에 따라 이드의 모습이 그 자리에서 퍽 하고 사라진다.

스팟!

그와 동시에 이드가 있던 공간을 베고 지나는 검영.

직후, 검이 지나길 기다렸다는 듯 다시 나타난 이드의 검에서 검강이 뭉클 쏟아져 나온다.

검강은 물에 풀어진 물감처럼 순식간에 공간에 번져 가며 존 워스를 휘감았다.

그에 존 워스 역시 좀 전 이드처럼 공간 이동을 연상케 하는 보법을 이용해 공격을 피해 내고는, 곧장 강맹한 검강을 뿜어 반격했다.

그런 공격을 이드는 또 아무렇지 않게 회피한다. 또는 막아 낸 후 반격한다.

그렇게 미리 정해 놓은 듯 공격을 주고받기를 멈추지 않는 이드와 존 워스.

한데 이런 두 사람의 모습은 치열하고 사납게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즐겁게 춤을 추는 듯 신명이 느껴졌다.

실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즐겁다니. 신명이 난다니.

누군가는 헛소리하지 말라고 할 것이다.

전투의 여파로 초토화된 주변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냐고.

닿는 순간, 베기도 전에 먼저 갈기갈기 찢어서 부숴 버리는 사나운 검강을 앞에 두고 그런 소리가 나오냐고 말이다.

그런데 사실이었다.

재밌고, 짜릿했다.

존 워스는 몰라도 최소한 이드 자신의 기분은 그랬다.

그간 스스로 갈고닦은 무를 온전히 쏟아붓는 기분은 사나운 검강과 달리 지극히 평온했다. 그래서인지 몸도 마치 구름에 실려 저절로 움직이는 것 같았다.

그야말로 무아지경.

‘이런 걸 보면 나도 어쩔 수 없는 무인인 거야.’

어쩌면 나중에 라미아에게 잔소리를 듣게 될지도 모른다. 혼돈의 파편을 상대로 무슨 감상이 그러냐고.

그럼에도 어쩔 수 없다. 실로 오랜만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싸움은, 그리고 이런 상대는 말이다.

메르시오가 있지 않냐고 할 수도 있지만, 그와 존 워스는 완전히 달랐다.

메르시오와의 전투는 지금처럼 순수한 기량의 겨룸이 되지 못했다.

그것은 메르시오의 전투 방식 때문이었다. 그의 방식은 인간이라기보다는 짐승에 가까웠다.

생각해 보면 당연했다. 일단 외형부터 인간이 아니라 웨어울프였으니까.

게다가 그의 전투 방식도 완벽히 웨어울프의 것이었다.

인간이 익히는 검술처럼 체계적이지 않은, 야성의 날것 그대로의 움직임. 그리고 깊은 무리가 갈무리된 기교보다는 투지가 흘러넘치는 힘 밀기에

가까웠던 전투.

물론 이런 메르시오와의 전투도 나름 즐거웠다. 도대체 어디 가서 그런 신랑을 상대로 싸워보겠나.

하지만 무공을 익힌 이드에게는 근본적인 아쉬움이 남기는 했었다.

그에 비해 지금은 완전히 다르다. 존 워스는 메르시오와는 완벽히 정반대의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었다. 움직임은 세련되었고, 초식은 무서울 정도로 정돈되어 있으며, 마나의 운용은 눈부실 정도로 미려하다. 무엇보다 작은 움직임 하나하나에 깃들어 있는 깊은 무리. 그것은 이드에 있어 너무도 익숙한 것들이었다.

‘세상에, 상상도 못 했다. 다른 놈도 아니고 혼돈의 파편이 무공을 익혀 들고나올 줄은!’

존 워스가 무공을 익힌 거야 세상이 다 알고 있는 일.

그게 아니라도 무공은 이미 대륙 곳곳에 퍼져 있다. 그런 만큼, 혼돈의 파편이 무공을 접할 수 있다는 거야 새삼스럽지도 않은 일이었다. 다만, 무공을 ‘아는’ 것과 무공을 ‘사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다.

무공은 송곳니가 없는 인간이 송곳니 대신 쓰기 위해 만든 것.

하지만 혼돈의 파편은 송곳니는 물론이요, 긴 발톱에 더해 두꺼운 철갑까지 두르고 있다.

굳이 정체가 드러난 상황에 무공을 사용할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무공이 발톱을 휘두르는 것에 방해가 될 소지조차 있었다.

그렇기에 혼돈의 파편이 무공을 익혔을 경우에 대해 크게 고민하지 않았던 것인데, 설마 여기서 존 워스가 무공을 들고나올 줄이야.

어쩐지 허를 찔린 기분이다.

하지만…… 이것도 나쁘지 않았다.

솔직히 반가운 기분까지 들었다.

이만큼 깊이 있는 무공은 중원을 떠나온 후 처음이었다. 초식이 오갈 때마다 흥취가 돋고 추억이 샘솟았다.

이드가 전투를 즐기는 듯 보였던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좋구나!”

이드의 검이 물을 만난 물고기처럼 훨훨 날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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