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41화
1376화
‘너무해?’
입꼬리가 살짝 말아 올린 라미아가 조소를 띠었다.
지금 그녀는 바이트 타블렛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접속 심도가 깊어지며 부분적인 융합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당연히 이런 현상은 언제든 멈출 수 있었다.
게다가 외부와 완전히 단절된 것도 아니었기에 여전히 밖의 소리를 듣고 볼 수 있었다.
이드와의 연결은 두말할 필요도 없을 정도.
그런 이유로 라울이 하는 말도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이 남자. 저런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진짜 너무한 경우를 아직 못 봤나 보네.’
산전수전 다 경험한 노련한 웃음을 입가에 달고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겨우 이 정도로 우는소리를 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지 않은가.
물론 누가 보더라도 현재 이드와 존 워스가 보여 주고 있는 전투는 전율스러울 정도로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지금이 메르시오 때보다 규모가 크고 강렬하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존 워스와의 전투는 치밀하고 치명적이지만, 힘의 집중으로 인해 전방위적인 방출은 작았다.
게다가 검과 무공이라는 수단으로 인해 전투 방식이 상당히 인간적이었다. 뭐, 이에 반박할 사람은 셀 수도 없이 많겠지만 적어도 라미아가 보기에는 그렇다는 소리다.
이걸 보고 너무하다는 라울. 과연 그가 메르시오와의 전투를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궁금했다.
물론 바벨의 간부인 만큼 그도 정원에서의 전투에 대해서 알고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직접 보는 것과는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하지만 아직 기회는 많아.’
오늘 존 워스를 완전히 소멸시키더라도 아직 남은 혼돈의 파편이 넷이나 된다. 바벨이 이드와 손을 잡기로 한 점도 있지만, 그렇지 않아도 어차피 그들이 초인인 이상 혼돈의 파편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일.
라울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진짜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자신을 인간의 틀에 끼워 넣은 ‘존 워스’와는 다른, 세상을 뒤집어엎을 것 같은 진짜 혼돈의 파편으로서의 진면목을 말이다.
과연 그때는 라울이 무슨 말을 하고, 어떤 반응을 보일까.
제법 궁금한 라미아였다.
그러나 정작 지금 라울이 놀라고 있는 이유 속에 자신도 포함되었다는 사실은 자각하지 못하는 그녀이기도 했다.
‘일단 이드도 슬슬 끝이 보이는 것 같고, 나도 늦을 수는 없으니, 힘을 내자!’
이드를 기다리게 만들 수는 없다.
그렇게 마음먹은 라미아가 외부를 향해 있던 감각의 일부를 온전히 바이트 타블렛으로 쏟아부었다.
이런 라미아의 의지를 따라 마나가 움직였다.
마음이 향하는 곳으로 기가 움직이는 것은 무인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었다. 마나의 민감성만 따지면 오히려 마법사가 가장 뛰어나다.
스파팟!
라미아와 바이트 타블렛을 연결하는 마법진을 따라 마나가 흘러가며 마나 광이 발생했다. 마나 광은 바이트 타블렛을 타고 하늘 끝까지 뻗어 나갔다.
그 흐름은 순식간이었지만, 찰나에 바이트 타블렛의 표면으로 드러나는 빛은 아주 신비로웠다.
산 위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일행들이 하나같이 입을 벌려 감탄할 정도로 말이다. 물론 마법사들은 더 정신이 없었다.
“기록! 기록해!”
“마나 패턴 관측한 사람! 누구 없어?!”
그렇게 마법사들을 광기에 빠트린 마나는 순식간에 바이트 타블렛의 끝에 도달해서는 일순간 시공을 넘었다.
바이트 타블렛이 닿아 있는 진리의 서, 다른 말로는 아카식 레코드로 흘러든 것이다.
그곳은 한없이 광활한 공간이었다. 동시에 실존하지 않는 개념적인 공간이었다. 천계와 마계보다 더 상위에 존재하는, 함부로 정의할 수 없는 차원이었다. 방향을 가늠할 수 없는 공간.
라미아의 마나는 그러한 공간을 바이트 타블렛의 안내를 받아 이동했다.
그리고 닿은 곳.
그곳에는 초인에 대한 모든 것이 있었다.
동시에 새롭게 적히는 부분도 있었다. 바로 바이트 타블렛에 의해 발생하고 있는 현상이었다.
라미아는 그 앞에서 다시 한번 고개를 갸웃했다.
탑주를 통해 들었을 때도 그랬지만, 이렇게 다시 봐도 혼돈의 파편과 존 워스의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초인에게 걸어 놓은 제약은 탑주가 말한 그대로였다. 탑주가 거짓을 말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했거늘.
정말 거짓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어째서 초인의 존재를 지우지 않았을까? 어째서 초인을 혼돈의 파편이 부리는 개로 만들지 않은 것일까?
거기에 더해 초인 마법도 그대로 남았다. 초인을 낳은 법칙에 꼽사리 낀 초인 마법의 형태는 마치 듣기 싫은 잡음 같았다. 특히 초인 마법과 초인 사이의 연결 고리가 약화되어 있었다.
초인 마법으로 초인의 능력을 조율하는 능력이 극히 약해진 모습이 확인되었다.
그야말로 일반 마법과 큰 차별점이 없었다. 이래서야 초인 마법이라는 이름이 유명무실하지 않은가.
지금 이대로 진리의 서에 초인 마법이 적힌다면 하나의 법칙으로 완성될지는 몰라도 그 특성이나, 우수성은 법칙으로 인정되기 전보다 한참
떨어지게 될 것이 확실했다.
‘이것도 당연히 존 워스가 원한 방향이겠지?’
아무렴 탑주가 이런 형태의 초인 마법을 원했을 리가 없다. 초인 마법의 핵심은 초인이 각성한 초인기에 대한 직접적인 간섭과 동시에, 초인기와 같이 유연한 마법의 발동이다.
예를 들면 파이어볼이 그러하다.
세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기초 마법이다. 일반적으로 마법사가 파이어볼을 사용하면 일직선으로 날아가 목표물과 함께 폭발한다.
하지만 초인 마법은 다르다. 초인 마법으로 파이어볼을 사용하면 폭발의 정도를 조절할 수 있고, 불의 형태를 정할 수 있으며, 심지어 불길의 손으로 목표물을 제압할 수도 있는 유연성이 생긴다.
그런데 이제 이대로 초인 마법이 완성된다면 그럴 수가 없게 된다. 다른 학파의 파이어볼처럼 일직선으로 날아가 폭발하고 끝이 나는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알 수 있는 것은 하나였다.
혼돈의 파편은 초인 마법을 원하지 않는다는 사실.
라울에게는 좋은 소식이었다. 그의 걱정처럼 초인 마법에 당해서 초인기를 제거당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초인의 천적이 될 뻔한 초인 마법의 탄생이 저지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라울이 꼭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일이기도 했다. 오히려 크게 실망할수도 있었다.
현재 그는 영혼의 관에서 알게 된 초인 마법들을 바벨에서 이용할 수 있을지 궁리하고 있었다. 동시에 영혼의 관에 속한 마법사를 라미아를 통해 확보함으로써 바벨의 재도약을 계획하는 중이기도 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계획이 모두 물거품이 되게 생겼다. 초인 마법이 완성되는 순간, 초인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들은 이제 아무리 애를 써도 초인이 가진 초인기에 직접 관여할 수 없게 될 테니 말이다.
물론 절대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면 애초에 초인 마법이라는 것을 만들어 낼 수도 없었을 테니까.
대신 초인 마법을 새로 만드는 만큼의 고난과 노력이 필요했다. 또 초인 마법을 낳은 탑주와 같은 프론티어 정신을 가진 뛰어난 천재도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라울의 계획은 실현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 불가능에 가깝다는 소리다.
‘그럼 이 사실은 일단・・・・・・ 비밀로 할까?’
비록 같이 작전에 나서긴 했지만 이런 사실을 자세히 알려 줄 이유는 없었다.
무엇보다 그렇게 했다가는 생포한 마법사들을 팔지를 못하지 않느냔 말이다. 비싸게 팔기로 했는데.
팔고 나면 초인 마법이 변했음을 알게 되겠지만, 거래가 끝난 뒤에 일어나는 일까지 신경 써 줄 이유는 없지 않겠나.
당연히 반품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악덕 상인에 빙의한 라미아는 곧 눈앞의 진리의 서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과연 이 중에서 혼돈의 파편이 진짜 바라는 목적은 무엇일까.
넉넉하지 않은 시간.
자신은 어떤 부분을 수정하고 고쳐야 할 것인가.
진리의 서를 살피는 라미아의 머리와 손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빨리! 빨리! 빨리!’
쩡그랑!
유리가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두껍던 요새가 벽이 무너져 내렸다.
찌르르릉!
그와 함께, 요새를 만들어 낸 검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광인멸혼류의 광자 검강 앞에 뽀얀 맨몸을 드러낸 검은, 사방에서 부딪혀 오는 광자 검강에 검신을 가늘게 떨어 대며 검명을 토해 냈다.
위태로운 중에도 검은 단단히 버텼다. 날카로운 검날조차 죽지 않았다. 광인멸혼류 안에 들어간 모든 것이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는데도 말이다. 영혼으로 벼렸다는 존 워스의 말에 모자람이 없는 모습이다.
정확히 어떤 소재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라미아에 못지않게 단단한 것 같았다.
하지만 라미아처럼 재주가 많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요새가 무너진 검은 광자 검강에 포위된 상태로 꼼짝을 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는 사이 두 번째 요새 벽이 무너졌다.
쩡그랑!
“곧 얼굴을 볼 수 있겠어.”
끼이이익-
두 자루 검의 비명이 동시에 겹쳐지자 마치 철판을 긁어 내는 것 같은 소음이 발생했다.
두 자루 검이 존 워스를 감싼 마지막 요새의 벽 주변을 천천히 돌았다. 어떻게든 존 워스를 지키려는 모습이다.
아니, 검의 의지가 아니라 존 워스가 그렇게 조정하는 것이다.
이드는 그 모습을 보면서 광인멸혼류의 별빛을 조정했다.
이제 벽은 하나가 남았다. 하지만 마지막 남은 벽이 가장 두껍고, 단단했다. 존 워스가 직접 쌓아 올린 요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앞선 요새를 무너트린 만큼 무적은 아니다. 결국 시간의 문제.
그러나 이드는 그 시간조차 단축할 생각이다.
휘휘휘휙!
까까까깡!
검결지에 따라 별빛이 뭉치며 자리를 움직였다. 크게 뭉친 별들이 이리자리 자리를 옮기며 요새의 약한 부분들을 두드렸다. 묘한 것은 그렇게 자리를 옮기는 별의 움직임이다. 잠시 멈추는 순간, 별들은 하늘의 수많은 성좌를 흉내 내고 있었다. 이드는 거기에 그치지 않았다. 별빛 사이로 뛰어들어 요새의 벽에 직접 검을 찔러 넣었다.
그때마다 일라이져에서 불꽃이 튀고, 요새의 벽이 출렁였다. 그렇게 몇 번을 두드렸을까. 이드가 문득 입을 열었다.
“당신, 정말 이렇게 겁쟁이처럼 죽을 생각인가? 혼돈의 파편으로서가 아니라, 철벽의 검왕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아?”
“후후. 분명. 틀린 말은 아니야. 내 마지막이 이렇게 초라할 순 없지.”
별것 아닌 도발이었지만, 아픈 곳을 찌른 탓일까.
존 워스는 바로 반응했다. 그와 함께 단단하던 요새가 아홉 조각으로 쩍 벌어지며, 그 속에 숨어 있던 존 워스의 모습이 나타났다.
솨아아아-
순간 광자 검강이 기다렸다는 듯 존 워스를 향해 모여들었다. 커다란 먹이를 향해 모여든 개미 떼 같았다.
피할 수 없는 공격이다. 존 워스도 이를 모르지 않았다.
그는 방어를 포기하고 검을 들었다. 그야말로 화려한 마지막을 장식할 검이었다.
“구중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