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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42화


1377화

“구중천!”

묵직한 목소리는 산사에서 울리는 범종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진짜 대단한 일은 존 워스의 기합이 아니라, 그의 세 자루 검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손에 든 검이 섬세하게 검형을 깎아 나갔다. 

쉬쉬쉭!

섬세하면서도 웅장함이 담긴 검로를 따라 아홉으로 갈라진 요새의 벽이 깎였다.

수많은 검영으로 이루어진 벽은 뒤틀리고, 깨지고, 녹아내리며 새로운 형상을 만들어 나갔다.

그러는 사이 그의 머리 위를 돌던 두 자루 검도 분열을 시작했다. 흔들림 없이 고고하게 서서 둥근 원을 그리는 검의 모습은 마치 왕관 같았다. 다시 말하면 존 워스의 머리에 왕관이 씌워진 것이다.

그것은 고작 보기 좋은 모습을 위한 것은 아니었다.

쿠구구구구ᅳ

둥글게 원을 그리는 검의 왕관은 눈에 보일 정도의 경력을 뿜으며 광자 검강을 밀어내는 역할을 했다.

존 워스의 마지막을 장식할, 최후의 일격을 준비할 시간을 위해서.

그리고 그에 필요한 시간은 결코 길지 않았다.

아무렴 이드를 앞에 두고 여유를 부릴 정도로 존 워스가 멍청하진 않았다.

쉼 없이 검형을 깎아 나가던 존 워스가 검을 멈춘 순간이었다.

쩡!

맑은 쇳소리와 함께 검형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나타난 것은 길이 십 미터, 폭 삼 미터의 거대한 검이었다. 그것도 한 자루가 아닌 아홉 자루의 거검.

이런 크기라면 오우거도 들고 휘두를 수 없을 것이다.

어디 오우거 뿐인가. 전설속에 등장할 어지간한 거인들도 사용하기 힘든 크기다.

그러니 이건 절대 거인을 위한 검은 아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듯 아홉 자루의 거검에는 검자루가 없었다.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검신뿐!

그리고 이런 거검을 마주한 이드의 감상은.

‘엉성한데?’

실망스러웠다.

실로 압도적인 크기의 검이지만,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아무리 형태를 바꿔 봤자 그 근본은 검강이요, 내공일 뿐이다.

차라리 진짜 쇳덩이를 두드려 만들어 낸 검이었다면 순수하게 감탄이라도 했을 테지만, 눈앞의 거검은 덩치를 키웠을 뿐 오히려 검강의 치밀도가 떨어진다.

그렇기에 의아했다. 저 존 워스가 자신의 마지막이라면서 꺼내 든 최후의 검이 겨우 이런 것이라고?

“흐흐. 벌써 실망하긴 이르다.”

이러한 이드의 표정을 정확히 읽어 낸 존 워스가 어쩐지 오만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이드를 향한 그의 눈은 진득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동시에 존 워스가 들고 있던 검을 머리 위에서 원을 그리고 있는 검들 사이로 집어넣었다.

쿠구궁!

깊은 떨림과 함께, 검에서 뿜어지던 경력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며 광자 검강을 밀어냈다.

그러나 그 직후,

존 워스가 들고 있던 검을 포함해 아흔아홉 자루로 늘어난 검은 곧 뿔뿔이 흩어져 아홉 자루의 거검 속으로 빨려 들어가 합쳐졌다. 그와 함께 이드로부터 엉성하다는 평가를 받은 거검의 존재감이 변했다.

고오오오-

서늘한 예기와 함께, 하늘을 찌르는 산악 같은 압도적인 존재감을 뿜어내기 시작한 거검.

그것은 어딜 어떻게 봐도 강기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실존하는 검처럼 보였다.

즉, 다시 말해 검강의 치밀도가 극한에 달했다는 것이다.

어쩌면 저 거검, 파괴되지 않는다면 이대로 천년만년 저 형상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런 거검의 변화에 이드는 솔직히 감탄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이것은 어떻게 봐도 무공의 영역이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공이나 마법보다는 신의 기적에 가까운 결과물이었다. 당연 이런 대단한 결과물을 사용한다면 무언가 엄청난 일이 벌어지지 않을까?

“어쩌면…… 쓸데없는 스위치를 눌러 버린 것일지도?”

이드는 때늦은 후회를 했다.

어디 그라고 요새 안에 꽁꽁 숨어 있던 존 워스가 이런 거창한 최후의 수단을 감추고 있을지 상상이나 했겠는가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도 든다.

“과연 이걸 휘두를 시간이 남아 있을까?”

이드는 깊은 눈으로 존 워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어느새 수많은 광자 검강에 휩싸여 있었다. 끝없이 그를 향해 모여드는 빛무리까지 더해져 그의 모습은 흡사 천사가 강림한 것처럼 보였다. 이건 모두 그를 광자 검강으로부터 지켜 주고 있던 경력이 사라졌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이드의 눈이 가늘어졌다.

빛에 휩싸인 존 워스, 지금 저 모습은 보기에는 화려해 보일지 몰라도, 당사자 입장에서는 끔찍한 순간이었다.

그를 감싼 빛 알갱이 하나하나가 그의 몸을 쉼 없이 관통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광자 검강 하나의 크기는 작다. 너무 작아서 그 하나로는 심장을 관통해도 느낌도 없고, 부상도 없을 정도다.

그러나 이런 광자가 한데 모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한데 모인 광자 검강의 위력은 실로 끔찍하다.

그건 이미 존 워스 주변을 흔적도 없이 분쇄하는 것으로 충분히 증명되었다.

돌도, 금속도, 풀도 뭐 하나 견디고 남아나는 게 없었다.

그런데 존 워스는 아직 오연히 팔을 들어 올린 자세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눈은 여전히 투명하게 빛나며 이드를 시야 안에 두었다.

광자 검강에 미세한 구멍이 뚫려 진작 동태 눈으로 변해야 했을 텐데 말이다.

그건 모두 파괴와 거의 동시에 재생이 일어나고 있기에 가능한 현상이었다.

앞서 몸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재생속도였다. 어쩌면 마지막 카드를 꺼내 든 만큼, 뒤를 생각할 이유가 없기에 모든 수단을 퍼 올려 쓰는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 어찌 되었든 그걸 지켜보는 이드로서는 퍽 가슴 답답한 모습이었다.

‘지독하게 질기고 질긴 것들.’

분명 피해가 없는 건 아니다. 또 저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가 준비하고 있는 마지막 카드를 완성할 때까지는 견딜 수 있을 듯 보였다.

전투에 있어 그런 점은 매우 중요하다.

그가 준비한 마지막 수단으로 인해 이드가 쓰러진다면 존 워스는 살게 될 테니까.

“하지만 그럴 일은 없지. 와라!”

까딱까딱.

이드가 재촉하듯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존 워스가 준비한 구중천이 어떤 형태의 공격인지 짐작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좀 치사하긴 하지만 광인멸혼류가 유지되고 있는 이상, 이대로 시간만 끌어도 존 워스는 죽을 것이고 이드는 이기게 된다.

물론 등 뒤에 라미아를 지키고 있는 이드로서는 그것도 결코 쉬운 방법은 아니지만 말이다.

감사하게도 존 워스는 이런 이드의 재촉에 곧바로 반응했다.

그에게도 남은 시간이 많지 않다는 방증이었다.

스윽.

하늘을 향해 있던 존 워스의 팔이 내려온다.

동시에 검결지를 쥔 손끝이 이드를 향하는 순간이었다.

쿠콰콰콰콱!!

천검의 요새가 변형되어 만들어진 아홉 자루의 거검이 회전하며 바람을 휘감더니, 길쭉한 회오리바람을 만들어 냈다.

아홉 자루 거검은 그 회오리바람 끝에 매달려 검날을 번뜩이기 시작했다.

쿠어어어어-

동시에 회오리바람이 거검의 날에 잘려 나가며 정체를 알 수 없는 동물의 울음소리를 만들어 냈다.

이드를 향해 흉악한 혓바닥을 날름거리는 아홉 개의 머리와 울음소리.

“……히드라? 아니, 이건 히드라보다는 일본의 구두룡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는데.”

하지만 이드가 알기로 그레센에 용은 없다. 오로지 드래곤만 있을 뿐.

혹시 존 워스는 용의 존재를 알고 저러한 형상을 만들어 낸 것일까. 브리트니스를 통해 무의식적인 피드백을 받기라도 한 것일까? 어찌 되었든, 그러한 아홉 마리 용이 뿜어내는 힘은 엄청났다.

쿠구구구구-

이건 회오리에 지붕이 날아가는 정도가 아니었다.

광인멸혼류에 반들반들하게 깎인 땅이 들썩이더니, 결국에는 뜯겨 나간다.

뜯겨 나간 흙은 곧바로 회오리바람 속으로 흡수되고, 투명하던 용은 점점 검은색으로 변해 갔다.

그야말로 악룡의 포스를 유감없이 내뿜게 생겼달까?

아홉 용의 공격도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놈들이 이드를 향해 입을 쩍 벌리며 달려들었다.

벌어진 입의 지름은 대략 이십 미터. 그 주변에 일렁이는 바람까지 포함한다면 약 삼십 미터가 공격 범위다.

콰콰콰콱!

이드가 훌쩍 몸을 피하는 순간, 이드가 서 있던 주변이 초토화된다.

하나 그건 그야말로 시작일 뿐이었다.

아홉 마리의 용이 동시에 공격해 들어왔다.

놈들은 각자 혹은 뒤엉키며 이드를 노렸다.

수십 미터의 덩치에 느릴 거라고 착각하면 오산이다.

놈들은 진짜 회오리처럼 자유롭고 재빨랐으며, 무엇보다 그 움직임이 예측 불허였다.

쿠콰콰콱!

찌이익!

사방에서 빗발치는 공격에 이드의 등쪽 옷자락이 길게 찢겨 나갔다. 조금만 늦었으면 옷자락이 아닌 살이 찢겼을 것이다. 아홉 개의 방향으로 서로 다르게 몰아치는 바람은 그만큼 사납고 흉흉했다.

그 사이에 바윗덩이를 집어 던지면 산산이 부서질 만큼.

이런 가운데, 그나마 이드가 마음대로 운신할 수 있는 이유는 만류일품의 경신법 덕분이다.

세상의 모든 흐름에 올라탈 수 있기에 미친 회오리바람도 탈 수 있었던 것.

하지만 그걸 오랫동안 유지하기에는 쉼 없이 이빨을 들이대는 용 대가리도 문제지만, 바람이 너무 사나웠다.

치지지직!

바람을 올라탄 신발 바닥이 마찰열로 인해 조금씩 타들어 간다.

뭐, 신발이야 없어도 그만이긴 하다.

이드는 비교적 얌전한 바람 한 줄기에 올라타서는 검을 휘둘렀다.

그에 검로를 따라 은하수가 펼쳐진다.

기존에 펼쳐 놓았던 은하수는 아홉 마리의 거친 용틀임에 깨진 상태.

은하수의 별빛이 바람결을 따라 뿜어졌다.

까가가가강!

한데 뭉친 광자 검강이 레이저처럼 주변을 둘러싼 용의 몸을 베어 냈다.

불꽃이 튀고, 용의 몸이 수 미터가량 쩍 갈라지지만, 그뿐이다.

광자 검강이 지난 자리는 금방 회복된다.

그리고 이런 공격에 오히려 더욱 날뛰는 아홉 마리의 용.

대미지는 전혀 없는 듯하다.

‘광자 검강으로는 너무 가볍나.’

광인멸혼류는 섬세하고 날카롭다. 또 화려하고 재빠르다.

그에 비해 너무 가벼운 것은 분명 단점이다.

쩌저저저정!

몇 번 더 은하수를 형성해 보지만, 결과는 크게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성질이 사나워진 놈들이 이리저리 몸을 꼬며 이드를 감싸고 돌았다. 이드가 했던 대로, 이번엔 놈이 이드를 포위하려는 것 같다.

‘순순히 당해 줄 순 없지.’

이드는 즉시 광인멸혼류의 별 무리를 고정한 다음, 압축해서 쏘아 냈다.

쩌어억!

그에 이드를 둘러싼 공간이 쩍 갈라지며 검은 하늘이 비쳤다.

그 순간, 중단전에서 뻗어 나온 내력이 십이정경을 내달려 검 끝에서 폭발했다.

폭발의 결과물. 그것은 검은 봉황이었다.

‘패황멸천붕.’

고대로부터 내려오기를 용을 잡아먹는 것은 봉이라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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