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4화
531화
에단은 두 아가씨의 갑작스러운 관심에 당혹했지만 곧 정신을 차렸다.
각각 독특한 매력과 성격을 지녔지만, 누가 봐도 예쁘다는 이야기를 들을 만한 미모를 가진 아가씨들이었다.
한쪽은 야생화와 같은 매력을 가졌고, 한쪽은 정원의 장미와 같은 매력을 가진 아가씨다. 에단은 수도에 머물면서 여러 여자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그중에도 이렇게 매력적인 여성들은 없었다.
에단이 가진 남자의 본능이 척수반사처럼 작동했다.
“연무장에서 봤던 뛰어난 후배님들이네요. 여긴 어쩐 일이죠?”
방금 전까지 이드 앞에서 한없이 쪼그라들어 있던 에단의 목소리가 듣기 좋은 톤으로 낮게 깔렸다. 어느새 한쪽으로 물러선 이드와 라미아가 느끼하다는 표정으로 혀를 내밀었다.
‘나는 이미 트와이스를 떠나온 몸. 레이디 애나, 우리의 인연은 여기까지인가 보오.”
에단은 그의 가방 한구석에 박혀 있을 레이디 애나의 손수건을 떠올리며 작별 인사를 보냈다.
“일전 연무장에서 큰 부상을 당했을지도 모를 때 구해 주셨는데, 따로 감사 인사도 드리지 못해서 인사를 드리고자 찾아 왔습니다.”
“저도 같습니다. 덕분에 하마터면 동기가 크게 다쳤을 상황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두 아가씨가 고상하게 몸을 숙여 보였다.
에단은 당시 죽는다고 소리치던 자신의 모습이 생각나 얼굴이 뜨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런데 이 아가씨들은 당시 자신의 모습을 모르는지 은근한 호감을 보이고 있었다.
“선배로서 후배를 위해서 나서는 것은 당연한 일이죠. 그런데 정말 날 찾아온 것이 맞나요?”
에단은 힐끔 이드를 살피고는 말했다.
누가 뭐라고 해도 현재 소드 팰러스에서 가장 핫한 화제의 중심은 바로 이드였다. 그녀들이 정확히 방을 알고 찾아 왔다면 이 방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녀들은 가장 앞에 서 있던 이드보다 에단에게 먼저 감사 인사를 해 왔다.
두 아가씨가 에단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자 에단은 살짝 의심스러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여기에 머물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찾아 왔어요?”
“록 선배님께 들었습니다. 상황이 마무리된 후에 선배님이 록 선배님의 동기라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그래서 선배님께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 록 선배님께 찾아갔더니 머물고 계신 곳을 알려 주셨습니다. 장기 임무로 수도에 있다가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으셔서 검궁에 머물고 계시다면서요.”
네리베르의 말에 케마란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더했다.
“그리고 말씀 편하게 해 주세요. 록 선배님은 저희들에게 편하게 말을 놓으십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이드가 픽 웃고 말았다. 며칠 전 강제로 이드의 등을 떠밀 때와 같이 록의 수작이 느껴져서였다.
에단이 록에게 이드의 존재를 어필하고 싶은 마음에 등을 밀 때처럼, 록도 두 아가씨를 통해서 이드에 대한 정보를 얻고 싶은 것 같았다.
[끼리끼리 어울린다는 말이 지금처럼 들어맞기도 힘들 것 같아요.]
‘인간은 너무 생각이 복잡한 것 같아요.’
‘그러게요. 마음 편하게 사는 게 좋을 텐데.’
세 부부 사이에 이어진 가족 채팅방에 수준 낮은 수작질에 열을 올리는 두 사람에 대한 글을 주르륵 쏟아냈다.
에단은 그 내용은 알지 못했지만 분위기를 읽었다. 무엇보다 록이라는 친구의 의도는 그가 가장 잘 알 수 있었다.
자신도 저지르고 나서야 감히 무례를 범했다고 후회했는데, 이번에는 친구라는 놈이 비슷한 수작질을 벌이고 있는 것이다. 에단은 급히 헛기침을
하고 말했다.
“크흠. 그렇다면 말을 놓지. 그런데 그때 후배들을 도울 수 있었던 것은 나보다 마스터의 도움이 더 컸다.”
에단의 말에 케마란은 바로 이드에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그러나 네리베르는 그녀와 달리 이드와 에단을 살피더니 말했다.
“혹시 어떤 도움을 주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선배님. 이분에 대해서는 제 동기들에게 따로 듣지 못했습니다.”
똑 부러지는 네리베르의 말이었다. 연무장에서 피를 보며 살벌하게 싸우던 모습이 가짜라도 되는 것처럼 나란히 행동하던 모습과 다르게, 이제야 각자의 성격이 나오는 것 같았다.
“급박한 상황 변화에 모두 대비하지 못하고 있는데 마스터께서 날 연무장까지 점프할 수 있도록 도와주셨지. 그렇지 않았으면 나도 두 사람을 도울 수 없었을 거야.”
차마 이드가 자신을 집어 던졌다고 말할 수 없었던 에단의 설명이었다.
네리베르는 그 설명이 있고서야 납득하고 치마를 잡아 올리며 감사를 표했다.
이드는 난감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당시의 상황은 두 사람을 돕기 위해서라기보다는 에단에게 짜증을 푼 것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다만 결과가 두 사람에게 도움이 되었을 뿐이다.
“두 분께, 아, 물론 일행분들께도 보답을 드리고 싶습니다.”
두 아가씨의 말에 에단이 이드의 눈치를 살폈다.
‘끙. 이거 좋은 기회인데. 마음 같아서는 달콤한 와인과 함께 진지하고 의미 있는 시간을 나누고 싶지만…………… 안 되겠지?’
에단은 아쉬움에 침을 삼켰다.
이드는 에단이 눈치를 보는 모습에 내심 끌끌거리며 말했다.
“선배가 후배를 돕는 건 당연한 일이죠. 보답은 필요 없습니다. 이렇게 직접 찾아와 인사를 해 주는 것만으로 저와 에단은 충분히 기쁩니다.”
이드의 말에 내심 망설이던 에단이 허무한 눈빛으로 높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이럴 줄 알았으면 먼저 나서서 거절할걸.’
자신이 나섰다면 작은 끈이나마 남겨 둘 수 있었는데, 이드가 먼저 나서면서 그럴 여지도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이미 지난 일. 에단은 이드에게라도 점수를 따자는 생각에 이드 옆에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끝까지 이미지 관리에서는 손 놓지 않는 에단이었다.
그러나 이드의 말에 두 아가씨도 순순히 물러나지는 않았다.
하기사 연무장에서 봤던 두 아가씨의 성격을 보자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이라고 말하면서 잠시 쉽게 물러나지 않던 케마란이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혹시 지금 어딘가 나가시는 중이신가요?”
“제 아내가 방 안에만 있는 것이 너무 갑갑한 듯해서 잠시 산책을 할 생각입니다.”
이드의 말에 케마란의 표정이 활짝 폈다.
“다행이네요. 그렇다면 제가 소드 팰러스의 안내를 해 드리겠습니다.”
“아, 그럴 필요는 없어요. 에단이 안내를 해 줄 테니까.”
정확히는 일리나가 좋아하는 정원에서 기분을 풀 생각이었다.
“아니요. 록 선배님께 듣기로 에단 선배님은 몇 년 만에 이곳에 돌아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동안 소드 팰러스가 바뀐 곳이 많아서 모두 알고 계시지는 못하실 테니 제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가령 내성에 있는 시장과 상점 구역은 삼 년 전에는 없었으니까요.”
“어, 시장하고 상점이 생겼어?”
에단이 놀라서 물었다. 그가 있을 때 소드 팰러스 안에 상점이나 시장은 없었다. 보통 필요한 물건은 검궁을 통해서 사거나 소드 팰러스를 나가서 구해야 했다.
“네. 아마 구경할 만하실 거예요. 수도에만 있는 상점들도 많이 들어와 있거든요. 식사도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마스터.”
제법 끌리는 제안이었다. 에단이 혹한 표정으로 돌아보자 이드는 일리나를 바라봤다.
그녀의 요청으로 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저는 좋아요.”
일리나의 허락이 떨어졌다.
“그럼 부탁할까요.”
“맡겨 주세요.”
케마란이 가볍게 웃으며 대답했다. 네리베르가 작게 혀를 찼다. 좋은 기회를 뺏긴 기분이었다. 항상 다툼이 끊이지 않는 두 사람이지만 공통점도 많았다.
그중 하나가 빚을 지고는 그냥 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특히 귀족으로서 빚을 남겨서 좋을 것이 없다는 교육을 받은 네리베르는 그런 경향이 특히 더했다.
“저도 동행해도 될까요?”
틈을 봐서 작게라도 보답을 할 생각이었다.
그 생각은 어떠하든지 두 아가씨와 함께하게 된 에단이 기뻐하며 허락했다.
소드 팰러스는 찾아오는 사람도 많고, 나가는 사람도 많아서 인구가 유동적이었다.
그래도 평균적으로 소드 팰러스 안에 2만 명 정도의 사람이 머물러 있는데, 이 숫자는 전문 행정인을 비롯해서 하인들을 포함한 숫자다.
결코 적다 할 수 없는 숫자로, 소드 팰러스 자체가 하나의 커다란 도시라고 봐도 틀리지 않았다.
케마란이 안내하는 상점가는 내성과 외성의 경계점에 있었다. 정확히 따지면 내성이다. 본래는 외성에 만들어져야 했지만, 사방에서 칼을 휘둘러대고 매일매일 무언가가 부서져 나가는 덕분에 상인들과 상점과 상품의 안전을 위해서 내성에 자리하게 되었다.
이 상점가에서는 거의 취급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제국에서도 수도와 공작령에만 들어선 고급 상점도 빠지지 않고 들어와 있었다.
그런 유명한 상점들이 인정할 만큼 소드 팰러스에 구매력이 있다는 뜻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소드 팰러스를 찾는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유명한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돈에서 자유로웠다. 그들을 지원하는 사람도 많았고, 그들이 벌어둔 돈도 많았기 때문이다. 기사만이 아니다. 검사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오로지 검 한 자루 말고 믿을 곳이 없는 그들이라도, 수련하면서 잡은 몬스터를 판매해서 제법 큰돈을 들고 있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상인들이 가장 신경 쓰는 것은 바로 미래의 가치이기도 했다.
소드 팰러스 출신으로 세상에 나가는 사람들은 열에 아홉 출세가 보장된다고 볼 수 있었다. 소드 팰러스에서 수련한 만큼 실력도 믿을 수 있고, 무엇보다 그들보다 먼저 가 있는 선배들이 그들을 끌어 주기 때문이다.
상인 입장에서는 그런 사람들에게 미리 자신들의 이름을 알릴 수 있는 기회는 놓칠 수 없는 것이었다.
덕분에 상점가는 볼거리가 풍성했다.
미래를 계산한 상인들은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행색에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친절했다.
“와아, 소드 팰러스가 많이 변했구나.”
상점가를 한 바퀴 둘러본 에단이 혀를 내둘렀다. 수도에 있는 번화가 못지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드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며 말했다.
“쯔쯔쯧. 이래서야 널 믿고 소드 팰러스에 온 게 잘한 짓인지 정말 후회되려고 한다. 여기 출신이라면서 왜 이렇게 모르는 게 많아?”
“마, 마스터~!”
피할 수 없는 진실에 에단이 애절하게 이드를 부르자 일리나가 큭큭거리며 웃었다.
“크흠. 제가 차와 디저트를 대접하겠습니다. 저 가게가 소드 팰러스에서 가장 맛있는 집이거든요.”
차마 선배의 망가지는 모습이 보기 힘들었는지 케마란이 나섰다.
케마란이 소개한 가게는 그녀가 자신한 대로 유명한 곳인 듯 사람이 가득했다. 맛도 소드 팰러스에서 제일이라고 할 만해서, 일리나는 얼굴을 붉히며 하얀 케익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선배님과 이……………분은 정확히 어떤 관계이신가요?”
이드가 자신의 케익을 일리나에게 넘겨주는 모습을 바라보며 네리베르가 물었다. 에단과 다르게 소드 팰러스의 선배가 아닌 듯한 이드가 이름조차 밝히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크흠. 이분은 내가 임무 중에 크게 감명을 받아 내 평생의 마스터로 모시기로 충성을 맹세한 분이다. 다만 함부로 신분을 논할 수 없는 위치에 있으시기에 이름을 말해 줄 수는 없다.”
에단이 분명히 선을 그었다. 이드의 이름을 밝혔다가는 금방 마인드 마스터에 대한 이야기가 튀어나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현재 소드 팰러스는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에 대한 관심이 전혀 식지 않은 상태다. 그 상태에서 이드의 이름이 나온다면 그냥 넘어가기는 힘들다.
소드 팰러스에 있는 사람 중에서 마인드 마스터의 이름이 이드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칫, 도대체 누구이기에?”
네리베르는 내심 혀를 찼지만 에단의 단호한 말에 더 이상 물어볼 수는 없었다. 이름 정도 알지 못해도 큰 문제는 없다 싶었다. 케마란도 그녀도 손가락만으로 케마란의 링스피어를 튕겨 낸 에단에게 더 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단은 오랜만에 젊은 아가씨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동안 아래위로 깨지며 쌓인 스트레스를 조금씩 풀어냈다.
그러던 중 케마란이 말했다.
“그럼 소드 팰러스에 처음 오신 것 같은데, 평소 보고 싶거나 가 보고 싶었던 곳이 있으신가요? 제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아버지와 제국을 떠돌던 경험으로 소드 팰러스의 구조를 머릿속에 완전히 새겨 놓은 그녀였다.
“소드 팰러스에 대해서 아직 잘 몰라서 딱히 보고 싶은 곳은 없네요. 대신, 화원에는 꼭 한번 가 보고 싶네요.”
고개를 흔들던 이드가 방을 나서기 전 했던 이야기가 떠올라 무심코 말했다. 당연히 케마란이 화원에 들여보내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없이 한 말이었다.
이드의 대답에 케마란이 순간 굳은 듯 한참 동안 이드들을 바라보았다.
‘음? 이것 봐라.’
생각지 못한 케마란의 반응에 이드의 눈이 반짝였다.
“혹시………… 방법이 있나요?”
“화원이 어떤 곳인지는 알고 있으세요?”
“소드 팰러스 출신으로 그것도 모를까. 하지만 그곳이 금지인 것도 아니고, 무엇보다 지금 검후님께서는 수련을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우신
“상황이지.”
검후의 실종에 대해서는 소드 팰러스에서 대내외적으로 그렇게 공지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검후님은 드물기는 하지만 귀한 손님들은 직접 만나기도 하셨으니까.”
그 또한 사실이다. 이름 높은 기사나 특이한 기술을 개발하여 소드 팰러스를 찾은 사람의 경우, 검후가 직접 불러 만나기도 했다.
에단의 말에 케마란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했다.
“어쩌면 네리베르가 안내해 줄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야, 너어!”
화원이라는 단어에서부터 날카롭게 눈을 반짝이던 네리베르가 갑자기 튀어나온 자신의 이름에 케마란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