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50화
1385화
타란 백작이 숲의 어둠 속으로 빨려들어 사라졌다. 피오 단장과 충성스러운 기사들이 그 뒤를 따랐다.
저벅저벅.
무거운 발걸음이 천천히 멀어져 간다. 느린 발걸음이지만 그들이 온전히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다만 시야에서 사라졌다고 해서 저들과 검왕의 관계가 완전히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이 순간에도 검왕은 기감을 통해 그들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끝까지 방심하지 않는 모습이 훌륭하군. 역시 좋은 기사들이야.”
검왕은 타란 백작의 기사들이 진심으로 마음에 들었다.
그들은 자신을 상대로 도망치지 않았고, 목숨을 다해 명령을 따랐으며, 동료의 시신을 소중히 했다.
용기, 충성심, 동료애까지 모두 좋았다.
그리고 지금은 선두에 선 타란 백작의 등 뒤에서 두꺼운 벽이 되어 혹시 있을지 모를 자신의 기습을 대비하는 자세까지.
따로 피오 단장의 명령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야말로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다. 평소 얼마나 진심으로 훈련에 임했는지를 잘 보여 주는 증거다.
동시에 기사들을 이렇게 키워 낸 타란 백작에게도 생각이 닿았다.
“타란 백작도 듣던 것 이상으로 뛰어났지. 저대로 마스에 두기에는 아까워. 탐나는 인재들이야.”
오랜 시간 소드 팰리스를 책임져 온 검왕에게 있어 처음 보는 기사들을 평가하고 점수를 매기는 것은 굳어 버린 습관과도 같았다.
그런 그의 기준에서 타란 백작과 기사들이 받은 점수는 최고점에 가까웠다. 그야말로 무엇하나 모자람이 없었으니까.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유불리함에 있어 상황 판단의 아쉬움일까. 하지만 그건 개인의 성향에 따라 달라지기에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정하기는 어려운 일.
그렇기에 검왕은 진심으로 저들이 탐났다.
가능하다면 자신의 기사로 두고 싶었다. 영광스러운 권좌를 꿈꾸는 그에게 저와 같은 인재는 황금보다 귀했기 때문이다.
물론 타란 백작에 있어서는 끔찍한 소리였다.
그에 있어 오늘 이후로 검왕은 존경의 대상도 목표도 아닌, 두 번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은 끔찍한 악몽일 뿐이었기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떠나기 전 검왕의 말을 들었다면 납검했던 검을 다시 뽑아 죽든 살든 결판을 내자고 달려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다행인지 불행인지 타란 백작은 검왕의 말을 듣지 못하고 멀어져 갔다.
잠시 후, 타란 백작과 기사들이 검왕의 검왕이 미치는 범위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검왕이 쩝 하고 입맛을 다셨다.
방심하지 않은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
비록 격하의 상대라 해도. 그러한 태도가 그를 검왕으로 불리게 만들었으니까.
또 그게 아니라도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타란 백작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자신이 숲속에서 추격과 짧은 전투를 반복하는 사이, 저 멀리서 들려오던 폭음과 마나 파동.
그건 검왕이라 불리는 그에게 있어서도 두려울 정도의 힘이었다. 만에 하나 그것이 자신에게 향한다면?
그런 생각 중에 어떻게 방심할 수 있을까. 사실 지금도 기감을 최대로 뻗어 내는 중이다. 덕분에 내력이 지속적으로 소모되었고. 그래도 다행이랄까.
영혼의 관을 습격한 자들은 자신에겐 크게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곳의 전투가 끝이 났음에도 접근하는 기척이 없는 것을 보면・・・・・・
“다행이라고? 빌어먹을…….”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각을 이어 나가던 검왕은 스스로 떠올린 단어에 한심함을 느꼈다. 어떤 적을 상대로도 당당했던 자신이, ‘다행’이라니. 검후를 배신하는 순간조차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었는데! 자신도 모르는 사이 스스로가 많이 약해져 있음을 알아차린 검왕은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새벽이 지나 아침이 밝아 오는 하늘은 아름다웠다.
검푸른색은 점점 물러나고, 힘이 넘치는 붉은색이 자신의 영역을 거침없이 넓혀 가는 모습은 언제 봐도 기분이 좋다.
자신과 검후의 관계도 저래야 했다. 그랬다면 자신이 검후를 배신하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검후라는 괴물은 세상의 이치를 벗어났다.
나이를 먹어 가는 자신과 다르게, 어느 순간 점점 젊어지기 시작한 그녀를 보며 검왕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라면 자신이 소드 팰리스의 주인이 될 기회는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당연히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무언가를 잃게 되었을 때의 상실감이란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른다.
검왕 역시 그랬다. 자신이 겪은 후에야 권좌를 두고 일어나는 수많은 다툼과 반란을 마음으로부터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었으니까.
아마 자신의 입장을 안다면 황제라 해도 죄를 물을지언정 탓할 수는 없을 거라고 확신한다.
그렇기에 검후에 대한 배신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저 미안했다. 자신을 믿고 따르던 기사들이 사실을 알았을 때 실망할 것이.
그렇기에 검왕은 준비 중이었다. 기사들의 실망을 줄이기 위해. 그리고 반격에 나설 검후를 다시 찌르기 위해서.
타란 백작의 짐작대로 바벨과 검후를 엮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꼭 그 이유 때문만은 아니다. 바벨 말고는 없단 말이지. 마스의 분노를 무시하고 영혼의 관을 기습할 간 큰 놈들은 훗.”
비록 직접 보지 못했지만, 확신은 가지고 있었다.
자신과 타란 백작을 붙여 놓은 수법도 교묘했다. 일단 그 진한 안개부터 그렇다.
그런 건 검왕도 처음이었다. 비도 오지 않았는데 그런 지독한 안개라니.
지금 생각하면 분명 부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거기에서는 마법의 냄새가 나지 않았다.
그만한 규모로 만들어 내려면 대규모의 마나를 소모할 필요가 있음에도 말이다.
대신, 초인기라면 인공적인 느낌 없이 안개를 일으키는 것이 가능했다.
타란 백작에게 했던 말은 그런 이유에서 나온 확신이었다.
혹시 모르겠다. 지금까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비밀 단체가 있다면 그들일 수도.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비밀 단체라니. 그런 건 아이들에게 들려주는 동화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사실 진짜 바벨이 아니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모두가 바벨이라고 생각하면 그것이 사실이 될 테니까.
또한 의심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이는 합리적인 의심에서 나온 답이었으니까. 어쨌든 자신에게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바벨이 아닌 검후였다.
검후만 가져다 붙일 수 있다면 바벨이 아니라 고블린이어도 상관이 없었다. 그 자리에 검후가 있어도 이상하지만 않다면 말이다.
“그녀라면…… 어쩌면 정말 저기에 있을지도. 그래도 이상하지 않은 사람이긴 하지. 후후. 음.”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검후였다.
평소 그녀의 행동과 성격을 떠올린 검왕은 자신도 모르게 곤란한 웃음을 짓다가 흠칫하고 만다.
그리고 인정해야 했다. 최근 들어 검후에 대해 떠올리는 시간이 급격히 많아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말이다.
검후를 배신하기 전에는 이랬다. 계획을 세워 실행하기 한 달 전에는 일 분 일 초도 쉬지 않고 오로지 검후만을 생각했다.
하지만 검후가 쓰러진 후.
소드 팰러스에서 그녀가 사라진 뒤로는 그녀를 떠올리는 일이 없었다. 간혹 그녀에 관한 이야기가 나와도 그저 한 귀로 흘릴 뿐이었다. 그에게 그녀는 이미 죽은 사람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것이 이드가 검후를 구출했다는 소식을 들은 후 바뀌었다. 소식을 들은 그날은 온종일 검후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답답한 마음에 쉬지 않고 독주를 마셨다. 한편으로는 지독하게도 후회했다.
그날 바벨에게 검후를 넘긴 게 잘못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녀를 죽였어야 했다. 자신은 어째서 죽지 않은 검후를 죽은 사람 취급했던 것인가. 그녀의 능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으면서.
그게 아니었더라도, 마인드 마스터의 후예가 나타난 뒤에라도 손을 썼더라면 어땠을까.
물론 바벨이라면 자신의 요구에 콧방귀를 끼었을 테지만, 그럼에도 그런 후회가 하루에도 몇 번씩 떠올라 괴롭게 했다.
하지만 후회는 언제나 한 걸음 뒤에서 쫓아오는 법. 시간을 거꾸로 돌리지 않는 이상 이미 일어난 일을 바꿀 수는 없었다. ‘신이라면 시간을 돌릴 수 있겠지만, 날 위해서 돌려 줄 신은 없겠지.’
검왕은 스스로 떠올린 생각에 피식피식 웃고 말았다.
자신에게 그런 축복을 내려 줄 신이라니, 배신자를 향해 웃어 줄 신이 누가 있단 말인가. 악마도 배신자는 증오한다고 했다. 천사보다 악마가 약속을 더 잘 지킨다. 평소 친하게 지내던 마법사가 해 줬던 말이었다.
어떤 신의 가호도 받지 못한다니. 유명한, 그리고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배신자들의 기분도 자신과 같았을까.
그러나 목표를 이룰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신의 가호 없이도 수많은 배신자들이 권좌를 차지하고 권력을 손에 넣었다. 그들에게 신의 가호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자신 역시 마찬가지다.
‘신과 악마의 가호 따위? 그야말로 이제 와서의 이야기지. 나를 돕는 것은 오로지 나 스스로뿐이다.’
지금 이렇게 힘을 쓰는 이유도 바로 그래서다. 자신의 계획을 안다면 아마 신은 몰라도 악마는 반겨 줄 것이다.
바벨과 검후를 엮은 게 자신의 배신이 밝혀질 언제일지 모를 그 날을 위해서라면, 타란 백작을 살려 보낸 근본적인 이유는 내일의 전쟁을 위해서였다.
그래, 전쟁이다.
검왕은 전쟁을 원했다. 아니, 전쟁이 필요했다.
오늘 낮까지만 해도 전쟁은 예정되어 있었다. 초인 마법을 독차지하려는 마스와 정의를 실현하려는 제국 간의 전쟁.
그런데 마스가 전쟁을 각오하게 만든 영혼의 관이 공격을 받았다. 직접 보지 않은 검왕은 피해 정도는 모른다. 하지만 예측은 할 수 있다. 수 킬로 떨어진 이곳까지 전해지던 강렬한 마나 파동.
저 멀리 있던 산봉우리가 날아갈 정도의 강력한 마법이 동원된 상황. 그런 요소를 종합했을 때, 영혼의 관의 상태는 어떨까.
‘최소가 반파다.’
그것도 운이 좋은 경우다.
운이 나쁘다면? 미완의 마탑에 살아 있는 마법사를 보기 어렵지 않을까 하는 것이 검왕의 생각이었다.
그러면 마스가 굳이 전쟁에 나설 이유가 사라진다. 그래서는 곤란했다. 전쟁에 돌려질 관심이 자칫 자신에게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럴 경우 황제도 자신을 부담 없이 잘라 내려 할 것이다.
하지만 예정대로 전쟁이 벌어지면 어떨까?
규모가 크든 작든, 어지간한 문제는 전쟁이라는 어마어마한 이슈에 잡아먹히는 법.
당장 검후가 자신의 배신을 밝히더라도 찻잔 속의 태풍 정도로 남을 수 있었다. 아니, 그렇게 만들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황제가 자신을 함부로 잘라 버릴 수 없다는 점이다. 당장 전쟁에 앞서 가장 중요한 전력을 스스로 잘라 버리는 멍청한 인간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배신이라고는 하지만, 딱히 검후가 죽은 것도 아니니 말이다.
그러니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은 제국은 자신을 버리지 못한다.
‘그 반대라면 몰라도・・・・・・’
문득 다시 올려다본 하늘이 아침 햇살에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