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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55화


1390화

지피지기 백전불태.

전쟁에 나섬에 있어 이 기본적인 마음가짐은 차원을 막론하고 통하는 것이었다.

당연히 바벨도 이런 병법을 모르지 않았다.

문제는 적을 살펴볼 방법이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원한을 가지고 찾아올 적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초인 마법에 대해 연구하고 대책을 세워야 했다.

제대로 된 대응 방법을 찾지 못한다면 바벨이 미래에 받게 될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라울은 매우 진지했다.

이드도 그런 태도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진심으로 나오는 상대는 그에 맞게 상대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

“그런 목적이라면 막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하세요. 어차피 결정권은 비올라에게 있는 것이니 말입니다. 우리가 강제할 일은 아닙니다.”

“아, 감사합니다.”

우려와 달리 쉽게 허락을 받아 낸 라울의 얼굴이 활짝 폈다.

하지만 이드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드가 라울을 향해 손가락 하나를 세워 보이며 말을 이었다.

“단! 그를 데려가는 과정에 있어 어떤 강압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비올라가 바벨로 간다면 그건 순수하게 그의 선택이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가 떠날 생각이 없다면 우리도 그를 내보낼 이유가 없으니까요.”

“명심하겠습니다. 걱정하시는 일이 없도록 제가 직접 관리할 겁니다.”

담담하지만 확실한 경고에 라울이 두 손을 들었다. 결코 무리한 일을 벌일 생각이 없다는 그만의 버릇이었다.

그만큼 라울은 진심이었다. 아무렴 정보를 캐고 나면 쓸모를 다하는 정보원도 아니고.

현재와 미래의 바벨을 위해서 꼭 필요한 비올라를 그렇게 강제해서 어떻게 협조를 받으려고 그런 방법을 사용할까.

‘그것도 문제기는 하지만, 만약 그랬다가는 앞에 선 명예 후작과의 관계가 망가진다. 그건 내가 인정 못해!’

라울은 적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 그의 기억 속에서는 지난밤의 모습이 생생했다. 덕분에 이제는 이드가 얼마나 위험한 사람인지 뼈에 사무칠 정도로 깨닫고 있었다. 자신이 직접 보고 느낀 생생한 체험들은 결코 잊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강력한 힘과 그에 어울리는 차원 높은 전투.

비올라의 적극적인 협력을 얻기 위함도 있지만, 이렇게 위험한 이드와의 관계를 망치고 적으로 돌리는 일은 절대로 사양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직접 나서겠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바벨이 곧 자신이라고 착각하는 멍청이가 실수를 했다가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일은 사전에 막아야지 않겠는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문득 한 가지 걱정이 뒤따랐다.

‘그나저나, 농담이 아니라 정말 명예 후작이 적으로 돌아서는 일이 일어난다면………… 감당할 사람이 있을까?’

오늘은 함께 피 흘린 전우였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그들의 관계는 그렇게 끈끈하지 않았다. 오히려 불편하다면 불편할 수 있는 관계였다. 그저 지금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불편함을 서로 묻어 두고 있을 뿐.

언제 서로를 향해 칼을 들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과연 그때 이드를 상대할 사람이 바벨에 있을까.

역시나 가장 먼저 떠오른 이는 총수였다. 자신이 충성을 맹세한 바벨의 지배자. 그의 초인기와 강력한 초인력을 의심하는 사람은 적어도 바벨 안에서는 아무도 없었다.

그것은 라울 역시 마찬가지였다. 적어도 어제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이드와 존 워스의 전투를 지켜본 지금은 솔직히 총수가 최고라는 말에 자신이 없어졌다.

그렇다고 해서 총수가 이드에게 진다는 말은 아니었다.

‘사실…… 모르겠다.’

답을 포기한 라울이 눈을 감았다. 대신 총수를 믿었다. 총수라면 이드가 적이 되었을 때 잘 싸워 줄 것이라고. 이전의 자신이었다면 비웃었을 행동이었다.

철저히 상황을 살펴 이성적인 판단을 최우선으로 하던 자신이, 아무 대책 없이 총수를 믿겠다고 하는 꼴이라니.

그런 의미에서, 더더욱 이드와의 관계를 돈독히 할 필요가 절실해졌다.

더욱이 꼭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이유도 있다.

라미아와 일리나.

이드도 그렇지만 두 명의 명예 후작 부인이 가진 힘도 결코 만만히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아름다운 것만큼이나 강력한 무력을 보유했다. 일리나는 검후와 동급이었고, 라미아의 마법은 자신이 본 그 어떤 마법사보다 뛰어났다. 특히 라미아의 경우는 바로 옆에서 손짓 하나하나를 지켜보지 않았던가. 바이트 타블렛과 하나가 된 순간은 정말이지.

“후욱!”

그 순간을 떠올린 라울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들이마셨다. 동시에 등골을 따라 소름이 돋았다.

지금도 이럴 정도인데, 당시 바이트 타블렛과 하나 된 그때의 라미아에서 느낀 이질감은 오싹할 정도로 섬뜩했다. 그때의 라미아는 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이었다.

이런 기억은 라울에게 라미아가 이드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무서운 존재라는 생각을 가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흐음. 일단은 믿어 보겠습니다.”

이드는 짧은 순간 몇 번이나 변하는 라울의 기색을 재미있게 지켜보다가 그가 정신을 차린 듯하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차피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그때 움직이면 될 일이었다. 그리고 그때가 오면 바벨은 한 번 한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지 뼛속 깊이 깨닫게 될 것이다.

그렇게 라울과의 이야기가 끝이 났다고 생각한 이드가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난감하다 못해 얼굴이 터질 듯 붉어진 쉴라를 보았기 때문이다. 라미아와 스폴, 거기에 한 발 담근 검후까지.

충분히 즐긴 것 같으니 슬슬 쉴라를 구해 주고 저택으로 들어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 잠시만!”

그런 이드를 라울이 붙잡았다.

“아직 용건이 남았습니까?”

“염치없지만 명예 후작님의 도움을 받고 싶은 일이 하나 더 있습니다.”

“일단 들어 보죠.”

자신이 바벨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있나?

이드가 그런 생각을 할 때, 라울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흘러나왔다.

“라미아 명예 후작 부인의 협력을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내가 아니라 라미아의?”

확인차 묻는 말에 라울이 재차 라미아의 이름을 언급한다. 이드는 다른 사람과 함께 깔깔거리고 있는 라미아를 바라보고는 팔짱을 꼈다.

비올라에 대해 말할 때와는 자세와 태도부터 달랐다. 당연한 일이었다. 비올라는 어디까지나 남이지만, 라미아는 자신의 아내이며, 가족이다. 그녀의 일은 곧 자신의 일이나 다름이 없다.

“뭐, 대충 짐작은 가지만, 이유를 들어 봅시다.”

“저희가 설마 명예 후작 부인을 모시고 멍청한 짓을 진행하겠습니까. 짐작하신 그대로입니다. 초인 마법. 그것의 연구를 위해 명예 후작 부인의 협력을 바랍니다.”

“그 말을 벌써 꺼낼 필요가 있습니까? 비올라가 바벨로 가겠다면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은데.”

“아닙니다. 명예 후작 부인의 협력은 비올라 마법사가 바벨로 오는 것과 관계없이 무조건 추진해야 할,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와 함께 라울의 짧은 설명이 이어졌다.

우선 핵심은 초인 마법이다.

라미아는 초인 마법사는 아니다. 그러나 초인 마법에 있어 누구보다 정통하다. 비올라를 통해 초인 마법을 분석했고, 미완의 마탑의 세관을 거치며 가장 많은 자료를 얻었다. 무엇보다 바이트 타블렛을 가장 깊이 연구한 사람이 라미아다.

“그건 비올라도 마찬가지입니다만?”

물론 알고 있다.

하지만 비올라와 라미아의 마법에 대한 깊이는 비교하는 것조차 우스울 정도로 차원이 다르다. 아는 것이 많은 만큼 넓고 깊게 보이는 법.

오늘 밤 자신이 지켜본 라미아라면 비올라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초인 마법에 대해 잘 알 게 분명했다. 그런 지식은 초인 마법에 대한 대책을 만들어야 하는 바벨에 있어 꼭 필요한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이미 라미아 안에서는 초인 마법에 대한 대응책이 나와 있을 수 있었다. 호기심을 빼면 시체나 다름없는 마법사라면 새로운 지식이 들어온 순간 자동으로 그것을 분석하고, 그에 대한 대응 방법을 만들었을 테니까.

그리고 이런 속성은 마법의 경지와 상관없이 마법사라면 누구나 똑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비올라에 대한 스카우트와는 관계없이 꼭 필요한 일이다.

“흐음. 이해했습니다. 그럼 처음부터 라미아에 협력을 구했으면 되는 일 아닙니까? 비올라가 꼭 필요할 것 같지는 않은데?”

“하하. 명예 후작 부인의 협력은 아직 약속받지 못했지 않습니까. 그리고 협력을 받기로 하더라도, 어떻게 명예 후작 부인을 계속 붙잡고 있겠습니까.”

“그렇기는 하죠. 우리도 놀고만 있는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이드는 라울이 말하지 않은 진짜 이유에 짐작이 갔다.

그들로서는 라미아만 믿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더욱이 라미아를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도 알 수 없다.

혹시 대책이라고 내놓은 중에 함정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이건 상대를 얼마나 믿느냐의 문제 이전에, 조직이라면 가져야 할 당연한 의심이었다. 그리고 이런 의심을 해결할 가장 좋은 방법이 바로 교차 검증이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 바벨에 속한 마법사가 초인 마법을 익힌다면 가장 좋은 일일 것이고 말이다.

‘나쁘지 않아. 우리도 그런 관계가 이어진다면 바벨을 조금 더 편하게 이용할 수 있을 테니까. 문제라면 라미아가 좀 고생해야 한다는 건데. 선물이라도 미리 준비해 둘까?’

이리저리 재어 봐도 거절할 이유가 없다.

내심 결정을 내린 이드가 앞서와 마찬가지로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하죠. 혼돈의 파편이 아직 남아 있는 만큼, 앞으로도 바벨과의 협력은 중요하니까. 하지만 라미아가 협력을 할지 말지는 오직 그녀의 결정에 달린 겁니다. 충고하자면 라미아의 취향은 귀금속 쪽입니다.”

“아, 어떤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빙긋 웃는 이드에 맞춰 라울의 얼굴에도 음흉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 라미아의 진짜 취향은 귀금속이 아닌 맛있는 요리와 디저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지금은 그 맛을 온전히 느낄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이드는 라울에게 귀금속을 추천했다.

“또 부탁할 일은 없겠죠?”

“하하. 적어도 오늘은 없습니다.”

“다행이군요. 슬슬 배가 고파졌으니, 쉴라 단장을 구하고 우리도 들어가서 배부터 채우도록 하죠.”

“……저는 여기서 응원하고 있겠습니다.”

“허락한 거 무를까요?”

“그럴 수야 없죠. 거기 숙녀분들!”

째려보는 이드에 라울이 냉큼 앞으로 나섰다.

물론 그런 그도 부름과 동시에 그를 향하는 네 쌍의 눈길에는 움찔하고 말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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