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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73화


1408화

아나크렌 제국을 수호하고 있는 국경 요새의 어느 밀실.

검왕은 그곳에서 통신구 너머의 황제를 만나는 중이었다.

황제의 질문으로 시작된 보고는 사건의 규모가 규모이다 보니 중간중간 추가 질문이 더해지긴 했지만, 깔끔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대의 노고가 참으로 컸소.”

“제국과 황제 폐하의 영광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을 뿐이옵니다.”

“하하하. 믿음직하오. 좀 더 자세한 이야기는 대전에서 듣도록 합시다.”

생각보다 짧았던 보고, 그 끝에는 궁으로의 소환이라는 꼬리표가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기꺼워하는 황제의 웃음소리를 끝으로 통신구의 빛이 사라졌다.

대화가 끊어지며 침묵에 휩싸인 방. 창문도 없이 두꺼운 문으로 막힌 방에서는 검왕의 규칙적인 숨소리만이 맴돌았다.

너무도 조용해서 오히려 잡념이 차오를 것 같다.

그 때문일까.

검왕이 그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빛으로 통신구를 노려보고 있다. 그러던 중 목에 가래가 낀 듯 그르렁거리는 목소리가 툭 튀어나온다. 

“뭐냐, 이 기분 더럽게 끈적이는 위화감은.”

검왕은 심각한 얼굴로 황제와의 대화를 떠올렸다.

검왕과 황제의 연결이다. 연결을 담당한 마법사가 최선을 다한 만큼 통신은 매끄러웠고, 보고에 실수도 없었다.

중간중간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들었지만, 예상에서 크게 벗어난 수준은 아니었기에 대답 또한 막힘이 없었다.

모든 보고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이어진 황제의 긴급 소환 명령. 당연한 일이었기에 그 역시 예상하고 있었고, 그랬기에 망설임 없이 명령에 따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끝이 난 통신.

이 과정에서 이상한 점은 정말이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검왕은 이 너무도 당연한 흐름에서 오 년 전 어느 여름밤과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그날은 최근 십 년 중 가장 더운 날이었다. 더욱이 갑자기 쏟아진 소나기에 습도까지 치솟아 늪에 빠진 듯 숨이 턱턱 막혔더랬다.

그야말로 지옥 같았던 밤.

검왕은 자신이 다시 그날의 밤으로 돌아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만큼 기분이 더럽다는 의미였다.

더욱이 그런 기분을 더욱 나쁘게 만드는 까닭은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점이다.

분명 이 위화감은 황제와의 통신 때문인 것 같은데, 정작 거기에서는 어느 하나 수상한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이성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위화감.

경우에 따라서는 그저 기분 탓을 할 수도 있고, 또 보고 전에 마신 와인 탓으로 돌릴 수도 있는 일.

보통 사람이라면 정말 그렇게 넘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검왕은 달랐다. 그는 자신의 직감을 믿었다.

삼검왕 중 가장 셈이 빠르고 이성적이라는 평가와 달리, 그는 자신의 감을 신뢰하는 편이었다.

그건 오랜 시간 경험을 통해 확인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는 검후를 모시며 경지에 이른 무인의 직감이 때때로 예지에 버금간다는 사실을 목격했으며, 그 자신 또한 그와 같은 경험을 했다.

이젠 지나간 옛날이야기지만, 이를 통해 위기를 넘긴 적도 있었다.

더욱이 지금 자신의 입장은 매우 위태로운 상황이 아니던가.

존 워스가 친 사고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언제 자신의 죄를 들고나올지 모를 검후,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이상, 그는 항상 절벽에 매달린 것과 다름없는 신세다. 그렇기에 아무리 작은 위험 신호라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마법사!”

검왕은 즉시 문밖에서 대기 중인 마법사를 불러 통신을 연결했다.

그의 재촉에 가장 먼저 연결된 사람은 마르텔이었다.

존 워스에 이어 검왕까지 자리를 비운 소드 팰러스를 지키고 있는 블러디 혼.

“수상한 낌새? 아니, 전혀 없지. 여긴 평소와 같아. 의심스러운 보고가 올라온 것도 없고, 무슨 일이냐?”

“별건 아니다. 없으면 됐다.”

“……자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그보다, 존에 대한 소식은 좀 들었나?”

“아니, 없어. 놈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 지금은 내가 많이 바빠.”

“뭐? 야, 야!”

하고 싶은 말도 많고, 듣고 싶은 이야기도 많은 마르텔이 놀라서 소리쳤지만, 소용없었다. 검왕의 손짓에 통신은 가차 없이 끊어졌다. 

“다음.”

“네, 넷!”

기계적인 검왕의 명령에 다시 통신을 시도하는 마법사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를 써야 했다.

정말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다.

무려 블러디 혼의 통신을 일반적으로 끊어 버렸다. 앞으로 연결할 사람들도 전부 그 이름을 한 번씩 들어 본 거물들뿐이다.

그들에게도 지금처럼 통신을 끊어 버려야 한다면? 나중에 혹시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오게 되는 것은 아닐까?

‘에이, 설마…… 난 그저 검왕의 명령에 따를 뿐이라고.’

하지만 짜증과 화란 그 본질부터 이성과는 거리가 먼 것이 아니던가. 더욱이 모진 놈 옆에 있다가 날벼락 맞는다는 말도 있었다.

결국 마법사는 조만간 다른 일자리를 찾기로 조용히 마음먹었다.

그러는 사이 다시 연결된 통신구에서는 상대 마법사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기는 레이딘 백작가입니다. 누구십니까?”

“나다.”

“아, 검왕님이시군요!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즉시 백작님께 보고하겠습니다.”

이후로도 이와 같은 과정은 다섯 번이나 더 반복되었다. 그중 세 명은 자리를 비워 통신을 할 수 없었다.

좌우간, 그렇게 모든 일이 끝났을 때 마법사는 그야말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워낙 장거리 통신이라 마나의 소모도 소모인 데다, 심력의 소모도 만만치 않았다. 황제와의 통신에서는 자리를 비웠지만, 이번엔 바로 옆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생했다. 물러가도 좋다.”

“알겠습니다. 필요한 일이 생기시면 언제든 다시 불러 주십시오.”

“그러지. 그리고 오늘 자네가 들었던 것은 비밀이네.”

“믿으십시오. 저는 마법사의 금기를 범할 생각이 없습니다.”

감히 검왕을 상대로는 과하다 싶은 발언을 던진 마법사가 살짝 고개를 숙이고는 방을 나섰다. 그런 마법사의 얼굴에는 씁쓸함이 감돌았다. 통신을 담당한 마법사는 작업의 특성상 비밀스러운 대화를 듣는 경우가 많았다. 해서 과거에는 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마법사를 죽이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이에 마법사는 통신구를 만지는 일을 멀리했고, 그에 따라 마탑이 나서서 두 가지 방법을 만들었다.

첫째가 바로 마법사가 통신만 연결하고 자리를 비우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누구와 누가 통신을 했는지에 대한 비밀은 지킬 수 없었다. 그에 두 번째 대책으로 나온 것이 맹세였다.

말이 맹세이지 일종의 계약이었고, 제약이었다.

통신을 담당할 때 마법사는 자신의 마법을 걸고 맹세를 한다. 통신 과정에서 알게 된 비밀을 절대 발설하지 않겠노라고.

대부분의 마법사에 있어 마법은 생명보다 간절한 것.

이런 사실은 모든 식자와 귀족들도 잘 이해하고 있는 부분이었다.

해서, 이때부터 귀족들이 비밀을 지키기 위해 마법사를 죽이는 행위는 많이 줄어들었다.

물론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 역시 맹세를 어겨 자신의 마법을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대단할 비밀이야기도 없었잖아.’

마법사가 들은 대화라고는 그저 간단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주변에 수상한 낌새나, 변화가 있었는지에 대한 확인뿐이었다.

이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는 일이라면, 검왕에게 비밀이 있다? 또 그가 크게 사고를 친 것이 있다?

딱 그 정도가 다였다.

‘검왕이 무슨 사고를 쳤을지는 좀 흥미롭지만, 그뿐. 귀족 중에 큰 사고 한번 일으키지 않은 인간이 어딨냐 말이지.’

물론 그 대상이 검왕이라는 사실이 색다르긴 했다.

기사들의 우상이며, 기사도의 상징과 같은 인물이 사고를 쳤다니. 그를 존경하는 기사들을 조롱하기에 더없는 최고의 이야깃거리였으나. 

‘거기에 내 마법을 걸고 싶지는 않거든.’

쿵.

마법사는 묵직한 문을 닫음과 동시에 자신이 보고 들은 것을 머릿속에서 지워 냈다. 통신구를 담당하며 이젠 익숙해진 작업이다.

저녁쯤이 되면 아마 꿈에서도 오늘의 일이 나오는 일은 없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로 문이 닫히는 순간 검왕의 기억에도 더 이상 마법사는 없었다.

그는 오로지 조금 전 있었던 통신들에 대해 분석할 뿐이었다.

사실 분석이랄 것도 없었다. 그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냥 기우였단 말인가?’

하지만 또 그렇다고 하기엔 연결되지 않은 세 명의 존재가 찝찝했다. 새벽부터 대전으로 불려 나간 대신들.

물론 그 이유는 짐작이 갔다.

황제에게도 들었지만, 녹색으로 빛난 하늘에 긴급회의가 소집된 상태였으니까. 대신으로서 불려 가는 것이 맞다. 혹시 그들이라면 무언가 알고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대전에 있는 그들을 통신구 앞으로 불러낼 수도 없다.

검왕은 고민했다. 그에게 허락된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황제의 소환에 응하기 위해서는 곧 안티로스로 출발해야 했다.

그렇게 검왕이 입술을 질끈 깨물고 있을 때였다.

“고민이 많으신 것 같은데. 제가 그 고민을 좀 덜어 드릴까요?”

분명 아무도 없어야 할 곳에서 들려온 목소리.

“그대가 어떻게…..!”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검왕의 얼굴에 놀라움이 그대로 드러났다.


안티로스에 또 하루가 밝았다.

이드가 머무는 저택에도 평온한 햇살이 찾아들었다.

하루를 온전히 휴식으로 채운 기사들의 얼굴에는 발그레한 생기가 감돌았다.

보통 밤낮이 바뀌면 체내 시계에 혼란이 생기기도 하는데, 단련된 기사들에게는 그런 것도 없었다.

낮에 잠을 자고 저녁을 먹고 다시 잠든 기사들은 맑은 새벽에 일어나 수련장으로 모여들었다.

검후에 의해 완전한 휴식을 허락받아 놓고는 스스로 수련장을 찾은 기사들.

그건 오랜 시간 몸에 새겨진 습관이었다.

무엇보다 저택에 갇힌 상태에서는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몸이 근질근질한 그녀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만만한 것이 검이었다.

더욱이 현재 그녀들은 무공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이 한껏 자극된 상태였다. 평생을 노력해도 닿을 수 있을까 싶지만, 그녀들도 검후와 일리나처럼, 그리고 이드처럼 되는 것이 목표고, 꿈이었다.

“흐뭇해 보인다?”

이드는 창 너머 기사들을 살피는 검후의 모습이 참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을 가르치던 스승의 모습이 그랬고, 지구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던 선생의 모습이 저랬지 않았나 싶다.

“귀엽잖아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라고 했는데, 맹랑하게 내가 내린 명령을 어기고 저러고 있는데, 제 기분이 어떻겠어요?”

“어떤데?”

“너무 대견해 죽겠어요. 저래야 내 아이들이지.”

“지금 얼굴을 봐서는 아침 식사도 필요 없을 것 같다?”

“네, 배불러요. 그래도 아침은 먹을 거예요.”

“크큭, 그 나이가 돼서도 식탐은 있나 보지?”

“이 나이니까 더 챙겨 먹어야죠”

그것도 옳은 소리기는 하다.

이드는 창틀에 엉덩이를 걸치고는 저 멀리 황궁을 보고는 말했다.

“검왕이 소환에 응했다더라?”

“…..”

“곧 볼 수 있겠지?”

“……아마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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