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드 2부 – 981화
1416화
피식.
계단을 오르던 이드가 웃는다.
그러자 함께 계단을 오르던 일리나의 입가에도 그와 닮은 미소가 떠오른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상이 아니에요.”
“비올라 말이죠?”
“그를 보면 괴짜 마법사라는 말이 나온 이유를 알 것 같더란 말이죠.”
“비올라 마법사가 괴짜란 거죠?”
“그렇잖아요. 사실 뻔히 답이 정해진 일인데. 그걸 가지고 끙끙거리는 꼴을 보면 답답해서.”
이드는 말만 해도 갑갑하다는 듯 가슴을 퉁퉁 두드렸다.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라미아에 끝내 고개를 숙이던 비올라의 복잡 미묘한 표정은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것이었다. 미련 없이 등을 돌릴 땐 언제고, 왜 그렇게나 미완의 마탑에 집착을 하는지. 이드로서는 그 마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눈물을 찔끔거리며 라미아의 가르침을 선택한 결정만 해도 그렇다.
그 당연한 선택에 망설일 이유가 뭐란 말인가.
현재보다 강해지고자 하는 욕구는 마법사나 무인이기 이전에 한 명의 인간으로서의 본능과 같은 것이지 않은가.
전진과 정지의 갈림길에서 망설일 이유가 무엇이냔 말이다.
본래 멈추는 순간, 순식간에 도태되고 만다. 그들이 멈춰도 좋은 경우는 자신이 추구하는 경지의 극한에 이른 때뿐이다.
마법으로 따지면 최소 7클래스, 검사의 경우는 그레이트 소드 중급 이상이 이에 해당한다. 사회적 계급으로 따지면 백작 정도일까.
이 정도는 되어야 잠시 멈춰도 세상에 뒤처지지 않을 수 있다. 오히려 세상의 흐름을 이끌 수 있는 위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막상 이와 같은 위치에 오른 능력자들이 과연 멈추려 할까? 아니, 오히려 반대로 더 위로 오르기 위해 악착같이 매달린다.
그런데 저와 같은 위치에 닿지도 않고서 멈춘다?
그건 포기라는 말과도 같다.
이런 영향이 극단적으로 도드라지는 이들이 바로 무인이다.
시간이 갈수록 정교해지고 유연해지는 지식과 달리 한번 정점을 찍은 육체는 서서히 하락을 시작하고, 단련을 멈추는 순간 급격히 녹이 슨다. 사실 모든 인간이 끝없이 발전할 수는 없다.
각자 타고난 재능의 크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아무리 스스로를 갈아 넣어도 뚫어 낼 수 없는 한계는 있다.
그렇게 한계를 인정한 이들은 ‘은퇴’라는 말로 물러나게 된다. 억지로 남아 봐야 그 끝은 추할 뿐이니까.
하지만 은퇴를 선언하는 본인이라고 좋을 것은 없다.
말이 좋아 은퇴지, ‘자신은 여기까지’라는 공식적인 항복 선언과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렇게 은퇴를 선언할 것이 아니라면 비올라의 선택은 처음부터 하나였다.
애초에 그는 멈춘 적도 없고, 멈춰 설 위치도 아니었으며, 재능이 모자란 것도 아니었다. 재능만 따지면 지금 대륙에서 손에 꼽히지 않을까? 그야말로 모든 지표가 그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그런 그가 끝까지 옛것을 고집한다는 건 그야말로 멍청한 일이다. 무엇보다 그래서야 부관주가 세상에 나왔을 때 그녀를 앞설 수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비올라 또한 이러한 사실을 모르지 않기에 결국은 미완의 마탑에 대한 미련을 포기하고 라미아의 가르침을 선택했다.
눈물을 찔끔거리면서,
동시에 이드는 자신의 모습이 조금 낯설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걸 보면 나도 중원 물이 많이 빠지긴 빠졌나 봐.’
미완의 마탑을 향한 비올라의 집착,
그건 달리 보면 문파를 향한 깊은 충성심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문파에 속한 문도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기본적인 가치관이랄까.
정확히 따지면 무림 한정이 아닌 동양권 전체의 가치관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문파에 속한 제자라면 존장을 모심에 성심을 다하고, 문파를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아야 했다.
물론 존장과 문파의 도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더 강하게 압박을 받는 쪽은 제자들이었다. 세상의 일이란 것이 아래쪽에 의무를 강요하는 게 일반적이다 보니, 이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가치관은 정사마의 구분이 없었다. 제자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한 자를 욕하는 것은 사파나 마도라고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 대한 처벌이 더 무시무시했다.
개인보다는 조직을 우선하는 가치관.
썩 유쾌해 보이지 않는 가치관이지만 반대로 이것이 있었기에 구대문파를 중심으로 한 유서 깊은 문파들이 그 오랜 세월 동안 유지되었다.
이드 역시 한때는 무림에 속한 한 명의 무인으로서 이런 가치관을 지극히 당연하다고 여겼다. 스승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라면 그도 누구에게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레센과 지구의 다양한 문명과 가치관을 접한 지금은 어떤가.
당장 미완의 마탑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비올라를 이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가.
과연 무림인이 보기에 비올라와 자신. 어느 쪽이 정상으로 보여질까를 생각하면 그 답은 뻔해 보였다.
‘이거, 중원으로 돌아가면 적응이 쉽지 않을지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이전이었다면 언제 돌아갈 수 있을지, 과연 스승님들과 누님들을 다시 볼 수 있을지 기약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혼돈의 파편 둘을 소멸시켜 차원의 인에 흡수했다.
여섯이던 혼돈의 파편은 이제 넷이 남았고, 로드와 함께 드래곤들이 돌아오면 남은 넷의 처리도 그야말로 시간문제. 말 그대로 고향이 코앞이라는 느낌일까.
그러나 이드는 곧 기대감에 부푸는 마음을 갈무리했다. 아직 무엇도 확실히 정해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레센으로 날아온 것처럼 미래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니 설레발을 떨어서 좋을 것이 없다. 괜한 설레발은 필패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그보다, 꼬리에 꼬리를 문 생각이 너무 멀리 나갔다.
대화를 하다 말고 딴생각으로 빠진 자신을 바라보며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일리나에게 미안했다.
“오랜만에 둘이서 데이트나 할래요?”
이드가 일리나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그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인 일리나. 그녀는 연인과 함께하는 일을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다.
“라미아도 좋아할 것 같은데요.”
“라미아는 다음에 하면 되죠. 지금은 비올라를 상대하느라 시간 없을 거예요.”
“……”
설마 그럴 리가 있나.
비올라가 뭐라고 이드와의 데이트를 뒤로할까. 아마 알았다면 당장 비올라를 뻥 차 버리고 달려올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일리나는 굳이 무어라 더 말하지 않았다. 이드와 단둘이서 하는 데이트는 그녀에게도 오랜만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자신들에게 남은 시간은 많다. 그러니 라미아는 다음 기회를 잡으면 된다.
내심 그렇게 스스로 정당화한 일리나는 자신의 결정을 입 밖으로 냈다.
“전에 갔던 디저트 가게에 다시 가고 싶어요.”
“좋아요. 오늘 데이트 코스는 거기서부터 시작해요. 거기 디저트는 저도 한 번씩 생각났거든요.’
이드는 일리나의 의견을 기껍게 반겼다.
이렇게 가고 싶은 곳을 정해 주면 자신도 굳이 고민할 필요가 없어서 좋았다. 두 아내를 만족시키기 위한 데이트 코스 탐색은 이드에게도 상당히 고생스러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라미아나 일리나는 그런 부분에 있어 유난스럽지 않았고, 무엇보다 취향이 확실했다.
하지만 아내를 사랑하는 남편으로서 두 사람이 최대한 즐거웠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라면 모든 데이트에 그렇게 신경을 쓰기는 어렵다는 것일까.
그리고 오늘은 다행히 그런 부담이 없다.
일단 미안한 마음에 나온 즉흥적인 데이트 신청이기도 했으니까.
두 사람은 저택에 머무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저택을 몰래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알게 모르게 외출 금지가 걸려 있어서 데이트를 위한 외출에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외출 금지의 이유는 다름 아닌 검왕에 있었다.
누구에 의해 영혼의 관 습격이 일어났는지는 퍼지지 않겠지만, 안티로스에서 은색 기사단과 검후에 대한 목격담이 흘러나올 경우.
대전으로의 출두를 명령받은 검왕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따로 검후의 명령이 없었음에도 외출을 금지하고 최대한 활동을 자제하는 중이다.
이런 와중의 데이트 감행이다.
최소한의 눈치도 보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양심이 실종된 인간이 아니겠는가.
당연히 이드도 데이트를 위해 위험을 감수할 생각은 없다. 데이트를 위해 타초경사의 우를 범했다가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특히나 당사자인 검후와 데이트에 따돌려진 라미아.
두 여인네를 생각하면.
‘생각만 해도 오싹하지.’
해서 이드는 역용술을 이용해 얼굴을 바꿨다. 일리나의 얼굴에도 직접 손을 댔다. 신분을 감추고 적지에 침입하는 것도 아니었기에 얼굴을 완전히 바꿀 필요도 없었다. 그저 자신들을 아는 사람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면 충분했다.
“어때요. 이 정도면 괜찮죠?”
“제 언니가 있었으면 이런 얼굴이었을 것 같아요.”
얼굴을 바꾼 후 거울을 본 일리나의 감상이었다. 눈과 입 주변 근육의 위치를 살짝 바꾸었기에 나온 말이었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눈과 입은 사람의 인상을 결정하는 가장 주요한 부분이었으니까. 당장 눈꼬리, 입꼬리의 방향만 달라져도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는 것이 사람의 얼굴이지 않던가.
그럼에도 기본 바탕이라는 것이 있어서일까.
나란히 팔짱을 끼고서 행복하게 거리를 걷는 두 사람을 돌아보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재밌는 사실은 그런 사람들의 대부분이 꿈 많은 나이의 소녀라는 것일까.
느긋하지만 느리지 않게 산책을 즐긴 두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목표한 디저트 가게에 도착했다.
하지만 머무르진 않았다. 산책이 즐거웠던 일라니의 요청에 따라 아이스크림 두 개를 손에 들고 산책을 계속했다. 물론 돌아가서 라미아와 함께 먹을 케이크와 쿠키를 챙겨 두는 건 기본이다.
아무렴 몰래 둘만의 데이트를 즐겼으니, 노여움을 달래기 위한 공물의 준비는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그렇게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걷는 두 사람 옆으로 아이들이 달려 나갔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이 끊이지 않는 아이들이다.
“검왕이 돌아오면 아이들의 저런 모습도 한동안 보기 어려울 거예요.”
“어차피 지나갈 일이에요. 검후가 검왕을 처단하면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평소 모습을 회복할 거고요.”
검왕과 평민들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은 그만큼 넓다.
일리나는 과연 그 말이 옳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곧 아까는 그냥 지나쳤던 질문 하나를 떠올렸다.
“그런데 하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어요. 라미아가 굳이 비올라를 가르치려는 이유가 있나요?”
평소의 라미아를 생각하면 이번 일에 굉장히 적극적인 모습임은 분명했다.
초인 마법과 관련된 초인이 혼돈의 파편에 대한 백신이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더라도 그러했다.
이제 막 피어난 초인 마법을 언제 가르쳐 혼돈의 파편을 상대로 쓴단 말인가.
“글쎄요. 이유라기보단 책임감? 그런 게 있는 것 같아요. 필요에 의해서지만, 자신이 마침표를 찍은 마법이 확실히 꽃피우길 바라는 마음? 그런 거라고 생각해요.”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인 말.
그러나 이드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라미아와 함께한 시간이 결코 짧지 않았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