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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드 2부 – 984화


1419화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난 첫인상부터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았어.”

잠시간 검왕에 대한 의미 없는 불만을 토로해 보지만.

이래 봤자 아무것도 해결되는 건 없다는 걸 아는 이드가 곧 감정을 풀어내고 말했다.

“그래서? 황제는 어떻게 하겠대?”

“아직 궁에는 알리지 않았어요.”

“어째서? 황제에게 알려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하지 않아? 시간이 지날수록 검왕은 점점 더 멀어질 텐데.”

“왜 모르겠어요. 하지만 심증만으로 황제를 움직일 수는 없어요. 아무렴 제국의 황제라면 그래선 안 되죠.”

다짐하듯 말하는 검후다.

누가 황제에게 심증을 근거로 의견을 낸다면 비웃음을 당할 것이다. 어쩌면 황제를 농락한다고 노여움을 살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의견을 낸 사람이 검후라면 어떨까.

분명 황제는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깊이 고민해 행동할 것이다. 특히 지금과 같은 경우라면 더욱 망설이지 않으리라.

그러나 검후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었다.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라면 무겁게 움직여야 한다고 말이다.

황실의 어른으로서 옳은 판단이기는 했다.

“그럼 어쩌려고? 그냥 이대로 둘 거야?”

“공식적으로 검왕이 모습을 감췄음이 확인되기 전까지는 그럴 생각이에요.”

“정말…… 괜찮겠어?”

생각보다 담담한 대답에 이드는 그녀의 진심을 살폈다.

검후의 의심이 맞는다면 검왕은 이 순간에도 그녀와 안티로스로부터 도망치고 있을 것이다. 그야말로 두 번 다시 없을 기회가 멀어진다는 말이다. 검왕에 대한 처분을 결정하고 심란해하던 검후를 봤던 이드로서는 지금의 그녀 모습이 거짓말 같았다.

이렇게 검왕을 놓친다면 과연 언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운이 좋아 그의 행적을 발견하더라도, 과연 그때라고 황제의 소환에 응하기는 할까.

어림도 없는 소리. 모르긴 몰라도, 대답보다 검이 먼저 튀어나올 것이 뻔했다.

아니나 다를까.

검후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사실 별로 괜찮지 않아요. 어떻게 아무렇지 않겠어요. 내 실수를 바로잡을 기회가 멀어져 가는데.”

“멀어지면 잡으면 되잖아. 나도 도울게.”

제국에서는 더 이상 혼돈의 파편을 찾을 수 없다고 생각되는 지금, 이드는 제국에 괜한 찝찝함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검후는 고개를 저었다.

“참 힘이 되는 말이네요. 하지만 늦었어요. 이렇게 의심스러운 점이 드러날 정도라면…… 검왕이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보다 훨씬 전일 거예요. 어쩌면 황제가 소환 명령을 내렸을 때 이미 저라는 존재를 눈치챘을 가능성도 있어요. 정말 그렇다면 그는 아마 지금쯤・・・・・・ 알죠?”

“칫……”

이드가 혀를 찼다.

검후가 생략한 말을 이미 들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는 검왕이 이미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갔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높은 확률로 제국 땅에 있지 않으리라고.

이드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동감했다.

하룻밤 만에 제국의 국경을 넘은 인간에게, 며칠의 시간 여유가 생겼다. 다시 국경을 넘을 시간이 차고 넘쳤다는 말이다.

그리고 검왕이 자신을 죽이고자 하는 이쪽의 계획을 알아차렸다면 무조건 국경을 넘었을 것이다. 이후 이어질지 모르는 자신에 대한 추적을 뿌리칠 가장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제국의 위세가 좋아도 남의 나라 땅을 구석구석 뒤지고 다닐 수는 없는 일. 자국 땅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추적 난이도가 다섯 배 이상 뛸 터였다.

물론 꼭 그것이 아니라도 검왕의 입장에서 제국은 영 불편한 장소임이 분명했다.

검후를 배신한 그의 죄가 문제였다.

제국인 중 검후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 그녀를 배신한 사실이 밝혀진다면 제국 전체가 그의 적으로 돌변할 것이었다.

그건 곧, 제국에선 더 이상 그 한 몸 누일 땅도 없다는 말과도 일맥상통했다.

‘왜 꼭 나쁜 놈들은 명이 이렇게 긴 건지 몰라.’

기운 없이 착 가라앉은 검후.

그 모습이 안쓰러웠던 이드는 검왕을 향해 부득부득 이를 갈았다.

이렇게 될 줄 알았다면 조용히 숨어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 가서 모가지를 잡고 끌고 오는 것인데 말이다.

이미 지나 버린 일이라 참 답답했다.

아마 검후가 한참 웃고 떠든 후에 검왕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싶다.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이나마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누군가에게 꺼내 보이고 싶었던 거다.

“그래서, 네 생각은 어때?”

“뭐가요?”

“검왕 말이야. 어디로 튀었을 것 같으냐고. 그에 대해서 너만큼 잘 아는 사람도 없으니까, 의견이나 한번 들어 보자. 어디로 갔을 것 같아?”

“왜요. 내가 말하면 직접 가서 찾아보기라도 하려고요?”

“확실하기만 하다면야 못할 것도 없지. 굳이 힘들게 구석구석 뒤지고 다닐 필요도 없어. 그저 한 바퀴 빙 돌면 끝이야. 내 기감은 상당히 정확하거든. 말해 봐. 어딜 것 같아?”

이드는 대답을 재촉하며 주먹을 주물렀다.

그 모습이 마치 동생이 괴롭힘당해 화가 난 오빠를 보는 것 같았다.

검후도 그런 기분을 느꼈는지 키득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럼 어디, 예상 목적지를 추려 볼까요? 가장 먼저 생각나는 곳은 드레인 왕국이네요. 거기 사무스 백작령에 있는 호수를 자주 찾곤 했죠.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라면 드레인 보다는 마스가 몸을 숨기긴 좋을 거예요. 그런데 이건 또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니까. 음, 의외로 일리나스로 향했을지도?”

“좋아. 일리나스 어디?”

“그거야 저도 모르죠?”

이드는 내 알 바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는 검후를 어처구니없는 기색으로 바라봤다.

“그걸 모르면 어떻게 찾아?”

“일리나스를 통째로 뒤지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나오지 않겠어요?”

“・・・・・・ 나오겠냐? 말이 말 같아야 상대를 하지. 너 이리 와 봐!”

“왜요! 난 물어서 답한 것뿐인데!”

자신을 향한 이드의 손을 피해 급히 몸을 피하는 검후. 그에 따라 탁자 위에 얌전히 놓여 있던 찻잔들이 와르르 넘어졌다.

그와 함께 무겁게 가라앉았던 분위기가 한순간에 요란하게 바뀌어 버렸다.

그리고 또 이틀이 지났다.

검왕은 수도에 나타나지 않았고, 벨루토를 지나고 있다는 보고를 끝으로 새로운 소식도 올라오지 않았다.

황제는 벨루토와 그 인근 영지에 명령을 내려 주변을 탐색했지만, 검왕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그곳에 온 적도 없었다는 듯 작은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황제는 즉시 검왕을 찾으라 명하고, 이러한 사실을 검후에게 알려 왔다. 검후의 의심이 사실로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뒤늦게 검후의 의심을 전달받은 황제는 검후의 생각을 존중하면서도 안타까워했다. 검왕은 검후의 적인 동시에 제국의 적이었기 때문이다. 이후 큰 우환이 될 그를 처리할 좋은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는 사실이 아까운 것이다.

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걱정하진 않았다.

현재 제국에는 마인드 마스터 본인이 있었다. 또 드래곤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아니라도, 검후가 있었다.

그녀가 살아 있는 이상, 검왕이 그녀 앞에 서는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날이 온다면 아마도 그때가 검왕의 목이 떨어지는 날일 가능성이 컸다.

무엇보다 환골탈태한 검후에게는 많은 시간이 남아 있는 반면, 검왕은 그렇지 못했다.

황제는 말했다.

시간에 쫓기는 사람은 검왕이라고. 그는 머지않아 스스로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이에 대한 이드의 생각은 간단했다.

“말은 그럴 듯하게 하시지만, 결국 변명이지. 검왕의 추적에 실패한 것에 대한 변명.”

이제 막 시작된 검왕에 대한 추적이다.

하지만 황제는 이미 검왕을 찾을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검후와 생각을 같이하는 것이다.

그만큼 검왕에 대해 잘 알고 있다는 의미기도 했다.

그리고 황제는 저택에 있는 검후를 직접 찾아와 말했다.

“조만간 검왕이 저지른 죄를 밝히고, 그에게 내려졌던 작위와 칭호를 모두 회수할 생각입니다. 그리하면 그가 어디에 있든 매우 곤란한 입장에 처하게 될 겁니다.”

“그럼 그 자리에 내가 있는 것이 좋겠지요?”

“할마마마께서 그렇게 해 주신다면 제게 큰 도움이 되겠지요.”

“날짜가 정해지면 알려 주세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용건이 더 남았습니까?”

잠시 머뭇거리는 황제의 모습에 검후가 편안하게 말하라며 물었다. 그에 황제가 준비했던 말을 꺼내 놓았다.

“도망쳐 버린 검왕은 당장 어쩔 수 없으니, 그냥 두더라도, 소드 팰러스는 이제 정리를 해야지 않을까요?”

“음.”

“자칫 사라진 검왕을 쫓아 소드 팰러스의 기사들이 빠져나가는 일이 생기기 전에 말입니다.”

지금도 소드 팰러스에는 검왕을 따르는 많은 기사가 머물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오색 기사단의 두 기사단과 삼검왕 중 하나로 불리는 블러디 혼.

“마르텔은 아직 소드 팰러스에 있나요?”

“궁을 나서기 직전에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당장 오늘 아침에도 수련 중인 그의 모습이 확인되었다고 합니다.”

“……셋 중 수련에 가장 열심인 사람이 마르텔이었죠.”

“할마마마.”

“황제의 말대로 하겠습니다. 어차피 검왕에게 죄를 물은 이후에는 소드 팰러스도 정리할 계획이었으니까요. 순서가 좀 바뀐 것뿐이겠지요.” 검왕이 도망친 이상, 정리는 최대한 서둘러야 했다.

황제의 우려대로 자칫 머뭇거리는 사이 검왕의 전력만 늘어나게 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짜 이런 일이 일어날 가능성은 사실 크지 않았다.

모르면 몰라도, 알고서 당하는 건 바보다.

당연히 바보가 아닌 황제는 이미 은밀히 소드 팰러스를 철저히 감시 중이었다.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멀리서 대기 중이던 병력이 당장 소드 팰러스를 철통같이 포위하고 나설 게 분명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누구도 원하지 않았다.

당장 명령을 내린 당사자인 황제조차도 말이다.

검후는 자신이 잘 해결할 테니 걱정 말라며 황제를 안심시키고는, 한쪽에 앉은 이드를 돌아봤다.

“같이 가실래요?”

“가야지. 내가 도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소드 팰러스에는 일단 내 제자들도 있으니까.” 사실이 그랬다.

기습과 합공이 아니었다면 검후가 삼검왕을 상대로 패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드의 말에 감사를 표한 검후는 쉴라와 스폴을 향해 명령했다.

“단장.”

“네, 주군!”

“은색 기사단을 준비하라. 집으로 돌아간다.”

“빈틈없이 준비하겠습니다!”

그간의 고생이 떠오른 것일까. 쉴라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옆에 선 스폴의 눈도 붉게 달아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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