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0권 – 1화 : 왕쌍을 베어 진창의 한은 씻었으나

이문열의 삼국지 (개정판) 10권 – 1화 : 왕쌍을 베어 진창의 한은 씻었으나


왕쌍을 베어 진창의 한은 씻었으나

“짐이 이같이 큰 장수를 얻었으니 걱정할 게 무엇 있겠는가!” 

위주는 그렇게 기뻐하며 왕쌍 (雙)에게 은포(銀袍)와 금갑(金甲) 을 내리고, 호위장군을 삼은 뒤 전부 선봉으로 세웠다.

조진은 다시 대도독이 되어 위주의 은혜에 감사하고 조정을 나왔 다. 왕쌍을 앞세운 십오만 정병을 이끌고 농서에 이른 뒤에는 다시 곽회, 장합과 만나 각기 제갈량이 올 만한 길목을 나누어 맡았다. 그때 촉군의 앞머리는 이미 진창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앞서 살피 러 나갔던 군사가 돌아와 공명에게 알렸다.

“진창으로 빠지는 길 어귀에는 벌써 성이 하나 세워져 있습니다. 한 장수가 맡아 지키는데 그 이름은 학소(昭)라고 합니다. 성을 살 펴보니 벽은 높고 그걸 에워싼 도랑은 깊었으며 그 바깥의 녹각도 자못 굳게 보였습니다. 그 성은 버려두고 태백령 고갯길을 따라 기산(山)으로 빠지는 게 나을 듯합니다.”

제법 밝게 살피고 온 말이었으나 공명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진창은 가정 바로 북쪽에 있다. 그 성을 뺏어야만 우리 군사가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는 위연을 불러 성을 치게 하였다. 그곳이 요긴하기도 했지 만, 학소를 얕보는 마음 또한 없지 않았다. 위연 역시 그 성과 학소 를 대단하게 여기지 않았다. 한달음에 성을 에워싸고 들이치기 시작 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위연이 아무리 힘을 다해 들이쳐도 그 작은 성은 꿈쩍도 않았다. 며칠이나 잇달아 헛된 힘만 쏟고 성을 떨어뜨리지 못한 위연은 하는 수 없이 공명에게 돌아가 말했다. 

“정말로 그 성을 쳐부수기는 몹시 어려울 듯합니다. 달리 대책을

세우십시오.”

그 말을 들은 공명은 전에 없이 성을 냈다. 알던 정보던 정 없이 위연을 끌어내 목 베라고 소리쳤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어쩔 줄 몰 라 허둥대고 있을 때 문득 한 사람이 나와서 말했다.

“제가 비록 재주 없으나 승상을 따라 다닌 지 여러 해 되었으면서 도 아직 이렇다 하게 세운 공이 없습니다. 바라건대 저를 진창성으 로 보내주십시오. 가서 학소를 달래 승상께 항복해 오도록 하겠습니 다. 그리되면 활에 화살을 잴 일조차 없을 것입니다.”

여럿이 그 사람을 보니 그는 부곡(部曲, 한나라 군대 단위. 여기서는 그저 군인 혹은 사병 정도의 뜻) 은상(鄭祥)이었다.

“네가 무슨 말로 그를 달래겠느냐?”

“학소는 저와 같은 농서 사람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몹시 가깝게 지내왔으니 이제 그에게로 가서 이해로 달래면 반드시 항복하러 올 것입니다.”

은상이 그렇게 대답했다. 공명이 들어보니 될 법도 했다. 위연에 게 내쏟았던 앞뒤 없는 노기를 거두며 은상의 청을 허락했다.

“그렇다면 네가 한번 가보아라. 만약 일이 그렇게만 되면 크게 상 을 내리리라.”

이에 힘을 얻은 은상은 얼른 말 위에 올라 진창으로 달려갔다.

“학백도(伯道, 학소의 자)는 어디 갔는가? 옛 친구 은상이 만나러 왔으니 어서 문을 열라!”

성문 앞에 이른 은상이 성벽 위를 보고 그렇게 소리쳤다. 그 소리 를 들은 군사들이 학소에게 달려가 들은 대로 전했다. 학소는 문을 열어 은상을 성안으로 들이게 했다.

“옛 친구가 웬일로 여길 왔는가?”

은상이 들어오자 학소가 반가워하며 물었다. 은상은 주위에 사람 이 없기를 기다려 숨김 없이 털어놓았다.

“나는 서촉 제갈공명의 장막 안에서 군기(軍機)를 맡아보고 있네. 공명은 나를 귀한 손님같이 대접하고 있는 바, 오늘 특히 내게 명하 시어 자네를 찾아보라 하시더군. 꼭 들려줄 말이 있어 왔으니 한번 들어보지 않겠나?”

그러자 학소가 대뜸 낯빛이 변해 은상의 입을 막았다.

“제갈량은 우리 위나라의 으뜸가는 원수가 되네. 그런데 자네는 촉을 섬기니 모두 각기 그 주인을 위해 일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지난날은 형제처럼 지냈다 해도 이제는 서로 적이 되었으니 다른 소 리 이래저래 할 것 없네. 제발 어서 이 성을 나가게!”

미처 속얘기를 다 털어놓기도 전에 학소가 그렇게 나오자 은상은 급했다. 다시 그에게 좋은 말로 다가가보려 했으나 학소는 벌써 방 을 나가 성벽 위의 망루로 오르고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무슨 명 을 받았는지 위나라 병사 몇이 다가와 은상에게 말에 오르기를 재촉 하더니 끌어내듯 성 밖으로 내보냈다.

얼결에 성 밖으로 끌려나오던 은상이 돌아보니 학소가 성벽 위의 가슴가리개 난간에 기대 있는 게 눈에 띄었다.

“백도 아우야, 네 어찌 이리 나를 박절하게 대접하느냐?”

그대로 떠나기가 아쉬워 은상이 꾸짖듯 소리쳤다. 학소가 차분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우리 위나라의 법도는 형도 아실 게요. 나는 나라의 은혜를 받았 으니 다만 죽음으로 갚을 뿐이외다. 형은 쓸데없이 나를 달래려고 애쓰지 말고 어서 제갈량에게 돌아가시오. 그리고 그에게 어서 빨리 쳐들어오라고 일러주시오. 나는 조금도 두려워하고 있지 않소!” 

그 말을 듣자 은상도 어찌해볼 수가 없었다. 풀죽은 모습으로 공 명에게 돌아가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잘못 짚은 듯합니다. 학소는 제가 제대로 입을 열 기도 전에 성 밖으로 내쫓아버렸습니다.”

그래도 공명은 싸우지 않고 이기는 쪽에 미련을 끊지 못했다. 다시 은상에게 권했다.

“네가 한 번 더 가서 그를 만나보아라. 이해로 그를 잘 달래면 이 번에는 들을지 어찌 알겠느냐?”

공명이 그렇게 나오니 은상은 마다할 수 없어 온 길을 되짚어 갔다. 은상이 성 아래 이르러 다시 학소에게 보기를 청하자 학소가 성 벽 위 망루로 나왔다. 은상은 말고삐를 당겨 말을 세우고 성벽 위를 바라보며 소리쳤다.

“백도 아우야, 내가 충고하는 말을 들어라. 너는 외로운 성에 의지 해 이곳을 지키려 하나 어찌 우리 십만 대군을 당해내겠느냐? 지금 빨리 항복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뉘우쳐도 이르지 못하리라! 너는 어 찌하여 대한을 따르지 않고 간사한 위를 섬기며 또 어찌하여 흐리고 맑은 것을 구별하려 하지 않느냐? 바라건대 백도 아우는 다시 한번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자 학소는 벌컥 성을 냈다. 화살을 뽑아 시위에 얹고 은상을 겨누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나는 이미 앞서 한 말로 내 마음을 정했으니 너는 다시 와서 떠 들 필요가 없다. 어서 빨리 돌아가라! 어서 돌아가면 나는 너를 쏘지 않을 것이다.”

그 기세에 은상은 그만 말문이 막혔다. 목을 움츠리고 말 머리를 돌려 공명에게 돌아갔다.

은상이 돌아가 학소에게 당한 일을 빠짐없이 들려주자 공명이 크게 노해 소리쳤다.

“그 하찮은 것이 너무도 무례하구나! 내가 어찌 그따위 성 하나 깨뜨릴 기구를 가져오지 않았겠느냐?”

그러고는 그곳 토박이를 찾아오게 하여 물었다.

“진창성 안에 인마가 얼마나 되는가?”

“잘은 모르겠으나 삼천 명쯤 될 것입니다.”

그곳 토박이가 아는 대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은 학소를 비웃어 말했다.

“그렇게 작은 성으로 어찌 나를 막을 수 있겠는가? 저희 구원병이 오기 전에 어서 빨리 성을 치도록 하라.”

이에 진창성 공격이 시작되었다. 공명은 군중에 백 대[乘]의 구름 사다리를 세우게 하고, 그 한 대에 여남은 명의 군사를 태운 다음 나 무 널빤지로 몸을 가리게 했다. 그 군사들은 또 각기 짧은 사다리와 고리 달린 줄을 지니고 있었다. 구름사다리를 성벽에 붙임은 안으로 뛰어들 때 쓰기 위함이었다.

북소리에 맞춰 그 같은 촉군의 구름사다리가 일제히 진창성으로 몰려갔다. 학소는 성벽 위에서 촉병들이 구름사다리를 밀며 사방으 로 에워싸고 밀려드는 걸 보자 소리쳤다.

“저 구름사다리가 다가오거든 불 붙은 화살을 일제히 쏘아 붙여라!”

그 말에 성안의 삼천 군사는 모두 불화살을 갖추고 사방으로 나 뉘어 촉군의 구름사다리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공명은 성안에 아무런 준비가 없을 줄 알고 크게 만든 구름사다 리를 앞세운 뒤 삼군을 몰아 성으로 다가갔다. 북소리와 함성만으로 그 성을 삼켜버릴 듯한 기세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구름사다리가 성벽에 가까웠다 싶었을 때 갑자기 성벽 위에서 불화살이 쏟아졌다. 나무로 만든 데다 널빤지까지 댄 구름사다리는 금세 불길에 휩싸였다. 그 안에 타고 있던 군사들이 돌이나 쇠로 된 사람이 아닌 바에야 어찌 타 죽지 않고 배기겠는가. 거기다가 성벽 위에서 다시 돌과 통나무가 비오듯 쏟아 지니 뒤따르던 촉군도 혼이 빠져 쫓겨났다.

그 뜻밖의 광경에 공명은 크게 노했다.

“좋다. 네가 우리 구름사다리를 태웠으니 나는 충차, (성문을 부수는 기구)를 쓰겠다. 어디 이번에도 견뎌내는가 보자!”

그렇게 이를 갈며 그날 밤으로 수많은 충차를 만들게 했다. 다음 날이 되었다. 촉군은 밤새 만든 충차를 앞세우고 다시 사방 에서 성을 공격해 들어갔다.

학소는 얼른 성벽 위로 큰 돌을 옮겨와 거기 구멍을 뚫고(아마도 미리 준비해두고 있었다고 보는 게 좋을 듯하다) 칡을 찢어 만든 밧줄을 끼운 뒤 충차를 향해 날렸다(일설에는 절구통에다 밧줄을 묶어 날렸다고 도 한다). 그 바람에 촉군의 충차는 다시 모조리 부서지고 말았다. 공명은 더욱 화가 났다. 군사를 풀어 흙으로 성 밖의 도랑을 메우 게 하는 한편 요화를 불러 명했다.

“너는 가래와 큰 호미를 든 군사 삼천을 이끌고 성벽 아래로 굴을 뚫도록 하라. 밤중에 일을 해 몰래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도 소용이 없었다. 그걸 미리 안 학소는 성벽 안에다 길게 도랑을 파 촉군이 땅굴을 파고 성안으로 들어와도 금세 눈에 띄게 만들어버렸다.

그렇게 밤낮 없이 서로 싸우며 스무 날이 지났다. 그동안 공명은 짜낼 수 있는 계책은 모두 짜내보았으나 언제 그 성을 떨어뜨릴 수

있을지는 아득했다.

일이 문턱도 넘어보지 못하고 꼬이자 공명의 마음은 괴롭고 우울 했다. 밤잠도 못 이루고 날을 보내는데 홀연 급한 전갈이 왔다. 

“동쪽으로 적의 구원병이 오고 있습니다. 앞세운 깃발에는 ‘위 선 봉대장 왕쌍’이라 씌어졌습니다.”

왕쌍이 누군지는 몰랐으나 구원병이 왔다니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누가 가서 맞싸우겠는가?”

공명이 장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위연이 얼른 나섰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그대는 선봉대장이다. 가볍게 움직여서는 아니 된다.”

공명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나머지 장수들을 돌아보며 물었다. 

“누가 한번 나가보겠는가?”

그러자 비장 사웅(謝雄)이 말 떨어지기 바쁘게 달려 나왔다. 공명 은 먼저 그에게 삼천 군사를 주어 왕쌍을 맞이하러 보냈다.

하지만 공명은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듯 잠시 뒤에 다시 물었다.

“위가 특히 그를 보내 학소를 구하게 했다면 왕쌍은 예사 장수가

아닐 것이다. 사웅 홀로서는 어렵겠다. 누가 다시 가보겠는가?” 

“제가 가보겠습니다.”

이번에는 비장 공기(起)가 나섰다. 공명은 다시 그에게 삼천 군사를 주어 사웅을 뒤따라 보냈다.

공명은 또 성안의 학소가 구원병이 온 걸 알고 뛰쳐나올까 봐 두려웠다. 사웅과 공기가 잘못될 경우 앞뒤로 적을 맞게 될 우려가 있 었다. 이에 인마를 성에서 이십 리나 물려 진채를 세웠다.

첫 번째 출사에서 가정이 한스런 곳이 된 것처럼 이번에는 진창 이 한스런 땅이 되고 말았다. 학소가 잘 버티어준 그 스무 날은 아 직동오와의 싸움이 끝나지 않은 위에게는 천금 같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공명에게는 또 그만큼 뼈아픈 실기(期)가 되었다. 그 때문 에 공명은 두 번째 출사에서도 중원으로는 한 발짝도 들여놓지 못하 고 만다.

한편 삼천 군사를 이끌고 떠난 사웅은 오래잖아 왕쌍과 만났다. 그러나 한낱 촉의 비장에 지나지 않는 그는 애초부터 왕쌍의 적수가 아니었다. 진세를 벌이고 왕쌍과 맞붙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세 합을 넘기지 못하고 왕쌍의 칼에 쪼개져 죽었다.

장수가 그 모양으로 죽자 촉병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않고 달아나 기 바빴다. 왕쌍은 기세가 오른 위병을 이끌고 그런 병을 뒤쫓았 다. 오래잖아 다시 촉장 공기가 이르렀다. 공기는 쫓겨오는 병을 수습하고 왕쌍과 맞붙었으나 그 또한 왕쌍의 적수는 못 되었다. 두 말이 엇갈리기 세 번도 안 돼 왕쌍에게 베이고 말았다.

간신히 달아난 병들이 공명에게 돌아가 사웅과 공기가 죽은 일 을 알렸다. 공명은 깜짝 놀랐다. 요화와 왕평, 장의 세 사람을 한꺼번 에 내보내 왕쌍과 맞서게 했다.

양군이 마주쳐 둥그렇게 진세를 펼친 가운데 장의가 먼저 말을 몰아 나갔다. 요화와 왕평은 각기 진채 모퉁이에 서서 변화를 살펴보기로 했다.

이윽고 왕쌍이 나와 장의와 어울렸다.

장의만 해도 촉에서는 이름 있는 장수라 여러 합을 싸워도 승패 가 뚜렷하지 않았다. 왕쌍이 꾀를 써서 거짓으로 패한 체 달아나기 시작했다. 장의가 멋모르고 그런 왕쌍을 뒤쫓았다.

싸움을 보고 있던 왕평은 왕쌍이 꾀를 쓰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장의가 적의 꾀에 빠져드는 걸 소리쳐 말렸다.

“뒤쫓지 마시오. 그놈이 계책을 쓰고 있소!”

왕평이 그같이 소리치는 걸 듣자 장의도 금세 정신을 차렸다. 얼 른 말 머리를 돌려 자기편 진채로 돌아오려는데 어느새 왕쌍의 유성 퇴(流星)가 날아와 등을 쳤다.

장의는 몸을 가누지 못해 말안장에 엎드린 채 급히 달아났다. 왕 쌍이 얼른 말 머리를 돌려 그런 장의를 뒤쫓았다. 장의가 위태로운 걸본 요화와 왕평이 한꺼번에 달려 나가 겨우 장의를 구해 왔다. 하지만 그렇게 되고 보니 병의 사기는 말이 아니었다. 왕쌍이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크게 군사를 휘몰아 덮치자 촉병은 싸움다운 싸움도 없이 뭉그러졌다. 왕쌍은 그런 병을 한바탕 마구 죽인 뒤 에야 저희 진채로 돌아갔다.

왕쌍의 유성퇴에 맞은 장의는 싸울 몸이 못 돼 공명이 있는 진채 로 보내졌다. 공명을 만난 장의는 몇 번이나 피를 토하며 말했다. 

“왕쌍은 영웅답기가 맞설 이 없는 장수였습니다. 지금 이만 군사 를 거느리고 진창성 밖에 진채를 세웠는데 그 또한 비범한 데가 있 습니다. 사방에 목책을 벌려 세우고도 그 안에 든든한 성을 쌓고 깊은 도랑을 두른 것이 여간 삼엄하지 않습니다.”

공명은 장수 둘이 죽고 하나가 다친 데다 그런 소리까지 듣자 여 간 걱정이 되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강유를 불러 물었다.

“진창으로 들어가는 길목은 이제 지나가기 어렵게 되었다. 따로 무슨 좋은 계책이 없겠는가?”

강유가 진작부터 생각한 게 있는 듯 대답했다.

“진창성은 굳고 높은 데다 학소의 지킴도 물샐 틈 없습니다. 거기 에 또 왕쌍이 와서 도우니 이제 그 성을 뺏기는 틀렸습니다. 여기에 한 대장을 남겨 물을 끼고 산에 의지해 굳게 지키게 하시고, 다시 좋 은 장수 하나를 뽑아 가정 쪽에서 오는 길목을 막게 하십시오. 그런 다음 대군을 이끌고 기산을 들이치는 계책을 쓰시면 조진을 사로잡 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목소리를 낮추어 공명만 알아듣게 자신의 계책을 말했 다. 듣고 난 공명은 강유의 말대로 따랐다. 곧 왕평과 이회(李)에 게 군사 이천을 주어 가정에서 오는 샛길을 막게 하고, 위연에게도 일군을 주어 진창의 길목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자신은 마대를 선봉으로 삼고 장포와 관흥에게 앞뒤를 돌 아보게 하여 나머지 대군을 딴 곳으로 몰아 나갔다. 샛길을 따라 야 곡으로 나간 뒤 바로 기산을 덮치려 했다. 위의 대도독 조진을 노려 진창에서 허비한 시간을 한꺼번에 되찾기 위함이었다.

그 무렵 조진은 한창 조급에 빠져 있었다. 지난번에 모든 공을 사 마의에게 뺏긴 걸 괴로워하며 이번에는 만에 하나라도 실수가 없게 하려고 온갖 애를 썼다. 낙구(口)에 이르자 곽희와 손례를 동서로 나누어 지키게 하고, 다시 진창이 위급하다는 소리를 듣기 바쁘게 왕쌍을 보내 구하게 했다.

곧 왕쌍이 적장을 베고 공을 세웠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조진은 몹시 기뻐하면서도 쉽게 마음을 놓지 않았다. 중호군대장 비요費耀) 에게 전부를 도맡아 다스리게 하고, 여러 장수들도 모두 험한 길목 을 맡아 굳게 지키도록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가까이 두고 부리는 군사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멀지 않은 산골짜기에서 촉의 세작을 잡아왔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조진은 곧 그 세작을 끌어오게 했다. 조진의 장막으 로 끌려와 무릎을 꿇고 있던 세작이 문득 말했다.

“저는 세작이 아닙니다. 도독을 뵙고 기밀한 것을 말씀드리려 왔 다가 길에 숨어 있던 군사들에게 붙들려 세작으로 몰린 것입니다. 잠 깐 좌우를 물리쳐주시면 제가 온 까닭을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조진이 살펴보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에 그 의 결박을 풀어주고 좌우를 잠시 물러가 있게 했다. 단 둘이 남게 되 자 그가 엄청난 일을 털어놓았다.

“저는 강백약(約, 강유의 자)이 자신처럼 믿고 보낸 사람입니다. 밀서를 감추어 온 게 있으니 보아주십시오.”

“그게 어디 있는가?”

조진이 은근히 놀라 물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속옷에 감추어두었 던 편지를 꺼내 바쳤다. 조진이 뜯어보니 거기에는 대강 이렇게 적 혀 있었다.

‘죄 많은 강유는 백 번 절하며 대도독께 글을 바쳐 올립니다.

돌이켜보면 이유는 대대로 위의 봉록을 먹으며 변성을 지켜 나 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되 이제는 그걸 갚으려 해도 갚을 길이 없게 되었습니다. 지난날 제갈량의 속임수에 빠져 몸은 까마득한 벼 랑 아래로 떨어져 있으나, 옛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이야 아무리 많은 날이 지난다 한들 없어질 수 있겠습니까?

이제 다행히 촉병이 서쪽으로 나오고, 제갈량은 나를 의심하지 않 기에 특히 글을 올려 말씀드립니다. 도독께서 몸소 대병을 몰아오시 되 적병을 만나거든 거짓으로 패한 체 물러나십시오. 그때 저는 적 군의 뒤에 있다가 불을 지르는 걸 신호로 먼저 촉군의 군량과 마초 를 태워버리겠습니다. 도독께서 그걸 보고 대병을 되돌려 촉군을 치 시면 제갈량을 사로잡기도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하는 것을 감히 공을 세워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려는 뜻이 아니라 오직 지난 죄를 씻고자 함에 지나지 않습니다. 밝히 살피시고 되도록 빨 리 명을 내려주십시오.’


강유의 그 같은 편지를 본 조진은 몹시 기뻐했다.

“이는 하늘이 나로 하여금 공을 이루게 하려고 도우신 것이다!”

그렇게 말하며 강유가 보낸 사람에게 듬뿍 상을 주고 날짜를 맞 추어 만나도록 하자는 말을 강유에게 전하도록 돌려보냈다. 이어 조진은 곧 비요를 불러 가만히 의논했다.

“강유가 밀서를 보내 왔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소.”

조진이 그러면서 강유의 밀서를 보여주자 읽고 난 비요가 말했다.

“제갈량은 꾀가 많고 강유는 아는 게 넓습니다. 혹 이 일도 제갈 량이 시킨 게 아닌지 걱정됩니다.”

한번 해봄직한 걱정이었으나 조진은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까닭 없이 강유를 편들어 우겼다.

“그 사람은 원래가 우리 위나라 사람이었소. 하는 수 없어 촉에 항복했던 것밖에 없는데 또 무엇을 걱정하시오?”

그래도 비요는 의심을 거두지 않았다.

“도독께서는 가볍게 나아가지 마시고 여기 머물러 본채나 지키십 시오. 차라리 제가 일군을 이끌고 강유의 뜻에 호응해보겠습니다. 만약 공을 세우면 그것은 도독께로 돌아갈 것이요, 간계가 있으면 그것은 제가 스스로 당해 막아보겠습니다.”

조진이 듣고 보니 그 말도 그럴듯했다. 곧 비요에게 오만 군사를 주어 야곡으로 보냈다.

비요는 여섯 마장쯤 간 뒤에 군마를 멈추게 하고 사람을 풀어 앞 을 살펴보게 했다. 신시쯤 되어 살피러 간 군사가 돌아와 알렸다. “야곡 길 가운데로 병이 오고 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비요는 얼른 군사를 몰아 앞으로 나아갔다. 알 수 없 는 것은 병이었다. 한번 싸워보지도 않고 물러나기 시작했다. 비요는 꺼림칙한 대로 군사를 몰아 그런 촉병을 뒤쫓았다. 얼마 안 돼 촉병이 다시 밀려왔다. 그러나 비요가 막 진세를 벌이고 맞싸 우려 하자 촉병은 또 물러가버렸다.

그렇게 세 차례를 거듭하고 나니 꼬박 하루가 가고 다음 날 신시 가 되었다. 위병은 하루 밤 하루 낮을 조금도 쉬지 못하고 보낸 셈이었다. 촉병이 금세 공격해 올 것 같아 긴장했다가 달아나고 쫓고 하느라 밥조차 제대로 지어 먹을 틈이 없었던 것이다.

“잠시 여기 머문다. 솥을 걸고 밥을 지어라.”

비요는 한군데 알맞은 곳을 골라 장졸들에게 그렇게 영을 내렸다. 그런데 위병들이 밥을 짓느라 한창 부산을 떨고 있을 때였다. 갑자 기 북소리 징소리가 요란하고 함성이 크게 일며 촉병이 몰려왔다. 산과 들을 뒤덮을 듯한 대군이었다.

비요가 놀라 보는 사이에 촉진의 문기가 열리며 네 바퀴 수레 한 대가 굴러 나왔다. 그 수레 위에는 공명이 단정하게 앉아 있었다. 

“적장은 어디 있는가? 승상께서 보자고 하신다.”

수레 곁에 섰던 촉병들이 위진을 향해 그렇게 소리쳤다. 비요가 말을 달려 나가 공명과 마주섰다. 비요는 문득 강유의 밀서가 생각 나 속으로 기쁜 마음이 일었다. 만약 그게 거짓이라면 공명이 그토 록 애를 써서 자기들에게 계책을 베풀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이 든 때문이었다.

“만약 적병이 몰려오거든 얼른 물러나 달아나라. 그러다가 산 뒤 에서 불길이 일거든 되돌아서서 적을 들이치라. 우리를 도울 군사가 저쪽에 있을 것이다.”

비요는 강유가 밀서에서 말한 대로 좌우의 장수들에게 일러주고 말을 내달으며 공명을 향해 소리쳤다.

“지난날 싸움에 져서 쫓겨간 장수가 이제 무슨 까닭으로 다시 왔는가?”

그러자 공명이 조용히 그 말을 받았다.

“나는 너 같은 조무래기와 입씨름을 하려고 여기 나온 게 아니다. 어서 조진을 불러오너라.”

“조도독은 금지옥엽 같으신 분이다. 어찌 너 같은 역적과 얼굴을 맞대겠느냐?”

비요가 분김에 그렇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 말을 들은 공명의 얼 굴에 노한 기색이 떠올랐다. 문득 접는 부채를 들어 한번 흔들자 왼 쪽에서는 마대, 오른쪽에서는 장의가 두 길로 밀고 들었다.

미리 비요에게 들은 말이 있는 위병들은 얼른 물러났다. 위병이 쫓긴 지 한 삼십 리쯤 됐을까, 홀연 촉병의 등 뒤에서 불길 이 일며 함성이 끊이지 않았다. 비요는 그게 강유가 말한 군호라 생 각했다. 얼른 몸을 되돌려 촉병들에게 덤벼들었다. 정말로 등 뒤에 서 무슨 일이 났는지 촉병들은 그때까지의 기세와는 달리 돌아서서 내빼기 바빴다.

부쩍 힘이 난 비요는 칼을 빼들고 앞장서서 함성이 이는 곳까지 촉병을 뒤쫓았다. 그런데 함성과 불길이 가까워졌을 무렵 뜻밖의 일 이 벌어졌다. 산 중턱에서 북소리 나팔 소리가 하늘을 떨쳐 울리고, 새로운 함성이 땅을 뒤흔드는가 싶더니 두 갈래 군마가 쏟아져 나왔 다. 왼쪽은 관흥이요, 오른쪽은 장포가 이끄는 병이었다. 거기다가 산위에서는 돌과 화살이 비오듯 쏟아졌다.

그 갑작스런 변괴에 놀란 위병은 여지없이 뭉그러졌다. 비요도 그 제야 자신이 적의 계책에 떨어진 줄 알았다. 얼른 군사를 물려 산골 짜기 가운데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하룻밤 하룻낮을 제대로 쉬지도 못하고 뛰어다닌 끝이라 위병은 말과 사람이 아울러 지쳐 있었다. 거기다가 기세가 솟은 관훙이 촉병을 이끌고 힘을 다해 뒤쫓으니, 위병은 저희끼리 밟고 밟히며 골 짜기와 낭떠러지에 떨어져 죽는 자만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이 었다.

비요도 끝내 무사하지는 못했다. 죽을힘을 다해 달아나던 비요는 한군데 산언덕 초입에서 한 떼의 군마와 마주쳤다. 바로 강유가 이 끄는 병이었다.

“나라를 저버린 역적 놈을 믿은 게 잘못이다. 네놈의 간사한 계책에 빠지다니!”

강유를 알아본 비요가 이를 갈며 소리쳤다. 강유가 껄껄 웃으며 받았다.

“내가 사로잡으려 한 것은 조진이었는데 네가 잘못 걸려들었구나. 어서 말에서 내려 항복하라!”

그러나 비요는 아무런 대꾸 없이 말 배를 걷어차고 한 갈래 길을 앗아 산골짜기로 달아났다. 문득 산골짜기에서도 하늘을 찌를 듯 불 꽃이 치솟는 게 보였다. 더 나아갈 수 없게 된 비요가 머뭇거리는 사 이에 등 뒤에는 벌써 뒤쫓는 군사가 다가오고 있었다.

비요는 마침내 빠져나갈 길이 없음을 알았다. 잡혀 죽거나 항복하 느니보다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편이 낫다 싶어 제 칼로 제목을 찔 렀다. 대장이 그렇게 죽는 걸 보자 나머지 위병들은 더 싸울 마음이 없었다. 모두 무기를 버리고 촉에 항복하고 말았다.

공명은 그 기세를 몰아 곧바로 기산 아래 이른 뒤에야 진채를 내렸다.

그리고 싸움 중에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는 한편 강유에게 무거운 상을 내렸다.

“조진을 잡아 죽이지 못한 게 실로 한스럽습니다.”

상을 받기 부끄럽다는 듯 강유가 그렇게 말했다. 공명 또한 아쉬움을 감추지 못하며 탄식처럼 그 말을 받았다.

“큰 계책을 작게 쓰고 말았으니 실로 아깝구나!”

한편 조진은 비요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가볍게 강유를 믿 은 걸 뉘우쳤으나 소용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더 큰일은 눈앞에 밀 어닥친 촉의 대병이었다. 다시 곽회를 불러 적을 물리칠 계획을 의 논했다. 곽회가 조심스레 말했다.

“아무래도 조정에 이 일을 알리는 게 옳을 듯합니다.”

조진도 달리 좋은 수가 없었다. 손례와 신비에게 표문을 주어 위 주에게 갖다 바치게 했다.

병이 다시 기산으로 나왔으며 조진은 군사를 잃고 장수가 꺾였 다는 말을 들은 위주는 깜짝 놀랐다. 곧 사마의를 불러들여 말했다. 

“조진은 이번에 다시 싸움에 져 군사를 줄이고 장수를 꺾였다 하 오. 촉병이 또 기산으로 나왔다니 어찌하면 적을 물리칠 수 있겠소? 좋은 계책이 있으면 들려주시오.”

사마의가 별로 걱정하는 빛도 없이 대답했다.

“신은 이미 제갈량을 물리칠 계책을 세워두었습니다. 번거롭게 군 사를 움직이고 위엄을 떨쳐 보이지 않으셔도 병은 저절로 물러갈 것입니다.”

“그게 어떤 계책이오?”

위주가 궁금해 물었다. 사마의가 차근차근 늘어놓았다.

“일찍이 신은 공명이 다음에는 반드시 진창으로 나올 것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특별히 학소를 뽑아 진창으로 보낸 것도 그 때문이었는데 이제 정말로 그리되었습니다. 만약 제갈량이 진창 을 지나는 길로 오게 된다면 군량을 운반하기에 매우 편합니다. 그 런데 다행히도 학소와 왕쌍이 지키고 있어 감히 그 길로는 군량을 옮기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밖에 다른 길이 있긴 하지만 모두 좁아 그리로 군량을 옮기기에는 매우 어렵습니다. 신이 헤아리기로 촉병 은 잘해야 한 달치의 군량을 가졌을 뿐이니 급히 싸워야 이로울 것 이나 우리는 오래 끌며 다만 지키기만 하면 됩니다. 이제 폐하께서 는 조진에게 조서를 내리시어 좁은 길목과 험한 산마루를 굳게 지킬 뿐 나가 싸우지 말라 이르십시오. 그리하면 촉병은 한 달도 안 돼 절 로 물러갈 것입니다. 그때 빈틈을 보아 적을 들이치면 제갈량도 사 로잡을 수 있습니다.”

조예는 그 말에 막혔던 가슴이 확 뚫리는 듯했다. 그러나 사마의 가 전과는 달리 직접 나서려 하지 않는 게 이상했다.

“경은 모든 일을 미리 꿰뚫어보는 밝음이 있으면서 어찌하여 스 스로 군사를 이끌고 나가 적을 치려 하지 않으시오?”

사마의가 빙긋 웃으며 까닭을 밝혔다.

“신이 몸을 아끼고 목숨을 무겁게 여겨서가 아니라 실은 신이 이 끄는 군사로는 동오의 손권을 막고자 이렇게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러 가지로 미루어 손권은 오래지 않아 스스로 천자를 참칭稱)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폐하께서 그를 칠 것이니, 그게 두려워 그가 반드시 먼저 쳐들어올 것입니다. 신은 바로 그 때문에 군사를 쉬게 하며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 위주와 사마의가 그 일을 더 깊이 얘기하고 있는데 문득 근시가 들어와 아뢰었다.

“조도독이 다시 군중의 사정을 알려왔습니다.”

그러자 사마의는 한 번 더 위주에게 당부하듯 말했다.

“폐하께서는 당장 사람을 조진에게 보내 일러주시는 게 좋을 듯 합니다. 무릇 촉병을 뒤쫓을 때는 반드시 그 허실을 살펴서 하라 하 십시오. 무턱대고 적의 땅 깊이 들어갔다가는 제갈량의 계책에 빠지 고 말 것입니다.”

이에 조예는 곧 조서를 내려 태상경 한기로 하여금 조진에게 전하게 했다.

“결코 싸워서는 아니 된다. 오직 삼가 지키기만 힘쓰라. 병이 스 스로 물러가기를 기다려 그때 들이치면 된다.”

그런 경계의 말이었다. 사마의는 그것도 모자란다 싶었던지 떠나 는 한기를 성 밖까지 배웅하며 가만히 당부했다.

“나는 이번의 공(功)을 자단(丹: 조진의 자)에게 양보하려 하니, 공은 자단에게 가서 이 뜻이 내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천자께서 조 서로 내린 것임을 분명히 해주시오. 지키는 게 가장 나은 계책임을 일러주고 아울러 적을 추격할 때는 모든 일을 꼼꼼히 살펴 하라고 전해주시오. 성질이 급하고 공을 서두르는 사람을 보내 적을 뒤쫓게 해서는 결코 아니 되오.”

“알겠습니다.”

한기도 사마의의 참뜻을 알아듣고 그대로 전할 것을 다짐했다.

한기가 조진의 진중에 이른 것은 조진이 장수들을 장막에 모아놓 고 한창 의논에 빠져 있을 때였다.

“태상경 한기가 천자의 지절(節)을 받들고 왔습니다.”

그 같은 전갈을 들은 조진은 진채를 나가 한기를 맞아들였다. 한 기는 천자가 내린 조서를 읽어주고, 사마의가 시킨 대로 거기 딴 사 람의 뜻이 들어 있다는 걸 전혀 내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그걸 알아보는 눈이 있었다. 천자의 조서를 받은 조진이 다시 곽회와 손예를 불러 그 일을 의논하려 하자 곽회가 빙 긋이 웃으며 말했다.

“이것은 결코 폐하의 뜻이 아닙니다. 틀림없이 사마중달의 견식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조진이 알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곽회가 까닭을 밝혔다.

“천자의 조서에 담겨 있는 그 말에는 제갈량이 군사 부리는 법을 깊이 알고 있는 이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틀림없이 사마중달의 말 을 천자께서 들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매우 옳은 말입니 다. 제가 보기에 오랜 세월 뒤까지 촉병을 막아낼 수 있는 사람은 반 드시 사마중달일 듯합니다.”

그러자 조진이 실쭉해서 물었다.

“그건 그렇고, 아직 촉병이 물러나지 않고 있는데, 이제 어찌하면 좋겠는가?”

“왕쌍에게 가만히 영을 내려 군사를 이끌고 샛길마다 순초를 돌게 하십시오. 그러면 적은 감히 군량을 운반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게 해 적의 군량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물러나는 적을 들이치 면 됩니다. 기세를 타고 적을 뒤쫓으며 짓두들기면 크게 이길 수 있 습니다.”

곽회가 사마의의 뜻을 잘 살려 그런 계책을 내었다. 그때 곁에 있 던 손례가 말했다.

“제가 기산으로 가서 거짓으로 군량을 운반하는 체하며 적을 꾀 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수레에다 마른 풀과 땔나무를 가득 싣고 그 위에 유황과 염초를 부어 군량처럼 꾸민 다음, 농서에서 군량을 가져왔다고 헛소문을 퍼뜨려볼까 합니다. 병은 군량이 없는 까닭 에 그 소리를 들으면 틀림없이 덤벼들어 뺏으려 할 것입니다. 그들 이 덮쳐오기를 기다렸다가 안으로는 수레에 불을 지르고 밖으로는 복병이 달려 나와 들이치면 우리가 이길 수 있습니다.”

곽회의 계책과는 달리 손례의 말을 들은 조진이 기쁜 얼굴로 말했다.

“그것 참 좋은 계책이오!”

사마의가 멀리 앉아 시키는 대로 해야 된다는 데 시무룩해 있던 조진에게는 그보다 더 나은 계책이 없어 보였다.

조진은 곧 손례에게 군사를 떼어주며 그가 말한 계책을 써보게 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곽회의 말도 들어, 왕쌍에게도 몰래 진창 의 모든 샛길을 살피란 영을 내렸다. 곽회는 곽회대로 군사를 이끌 고 기곡과 가정의 여러 길목을 돌며 그곳을 지키는 군사들을 다잡았 다. 그밖에 조진은 또 장요의 아들 장호(張虎)를 선봉으로 삼고, 악진의 아들 악침을 부선봉으로 삼아, 으뜸되는 영채를 지키게 하고 나가 싸우는 걸 금하였다.

그때 공명은 기산의 진채에 머물면서 연일 군사들을 보내 싸움을 걸었으나 위병들은 굳게 지킬 뿐 나올 생각을 안했다. 공명은 답답 한 나머지 강유를 불러놓고 의논했다.

“위병이 굳게 지키면서 나오지 않는 것은 우리가 군량이 없는 걸 헤아린 까닭이다. 지금 진창을 지나는 길로는 전혀 군량을 운반할 수 없고 나머지 다른 샛길도 많은 군량을 나르기는 매우 어렵다. 내 가 셈해보기로 우리 군량과 말먹이는 기껏해야 한 달을 이어가기 힘 드니 이제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공명이 그렇게 걱정하며 강유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강유라고 무 슨 뾰족한 수가 있을 리 없었다. 서로 마주보며 답답해하고 있는데 문득 군사 하나가 들어와 알렸다.

“위군이 농서에서 수천 수레의 군량을 옮겨오고 있는데, 지금 기 산 서쪽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그 군량을 지키는 장수는 손례라고 합니다.”

그러자 공명이 좌우를 둘러보며 물었다.

“손례는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을 헤아릴 수 있게 하는 일로는 이런 게 있습니다. 하루 는 손례가 위주를 따라 대석산에 사냥을 간 적이 있는데, 갑자기 사 나운 호랑이 한 마리가 뛰어나와 위주에게 덤볐습니다. 그걸 보고 말에서 뛰어내린 손례는 칼을 뽑아 그 호랑이를 한칼에 베어 죽였습 니다. 그 때문에 그는 상장군에 올랐고, 지금은 조진이 매우 믿는 장수가 되어 있습니다.”

마침 거기 있던 위나라 출신의 장수 중에 하나가 그렇게 손례의 사람됨을 들려주었다. 공명은 그 말을 듣자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렇다면 이번의 군량 운반은 위장들이 우리가 군량이 모자라는 걸 노려 쓴 계책이다. 수레에 실린 것은 결코 양식이 아닐 것이다. 틀림없이 마른 풀 따위 불이 잘 붙기 쉬운 것들이 실려 있다. 내가 평생 화공을 잘 쓰는 걸 보고 그것들이 이 계책으로 나를 꾀려 한 것이다. 그래서 내가 군량을 뺏으러 나가기만 하면 바로 우리 진채 를 들이치려는 수작이다. 이제 오히려 저것들의 계책을 거꾸로 이용 하는 계책을 써야겠다.”

그러고는 마대를 불러 명했다.

“너는 삼천 군마를 이끌고 지름길로 위병들이 군량을 쌓아둔 곳으 로 가라. 그러나 적의 영채 안으로는 들어가지 말고 바람머리 쪽에 다 불만 놓아라. 그 불길이 수레에 옮아 붙으면 위병들은 틀림없이 우리 진채로 쳐들어올 것이다. 우리가 군량을 뺏으러 가느라 진채를 비워둔 줄 알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또 대비가 있다.” 

공명은 그 말과 함께 다시 마충과 장의를 불렀다.

“너희들은 각기 오천 군사를 이끌고 적의 영채 밖 멀찌감치 에워 싸고 있다가 마대와 함께 안팎에서 협공하도록 하라.”

공명의 계책은 거기서도 끝나지 않았다. 마대, 마충, 장의 세 사람 이 모두 영을 받고 물러나자 공명은 다시 관흥과 장포를 불러 말했다. 

“위병의 으뜸가는 영채는 사방으로 통하는 길가에 있다. 오늘 밤 기산 서쪽에서 불길이 일면 그곳의 위병들은 반드시 우리 진채를 급습하러 올 것이다. 너희들 둘은 그들의 진채 좌우에 숨어 있다가 그들이 진채를 나가거든 얼른 덮쳐버려라.”

그다음은 오반과 오의였다. 공명은 그들에게도 분부를 내렸다. 

“너희 둘은 각기 한 떼의 군마를 이끌고 우리 영채 밖에 숨어 있 다가 위병이 오거든 그 돌아갈 길을 끊으라.”

실로 물샐틈없는 계책이었다. 공명은 그 모든 배치가 끝난 뒤 기 산 높은 곳에 자리 잡고 앉았다. 자기가 펼친 계책대로 이루어지는 가를 살펴보기 위함이었다.

한편 위병은 촉군이 군량을 빼앗으러 올 듯한 기미를 보이자 놀 라 그 일을 손례에게 알렸다. 손례는 손례대로 또 사람을 시켜 나는 듯 그 일을 조진에게 알리게 했다.

조진도 그 소식에 바빠졌다. 으뜸되는 영채로 사람을 보내 그곳을 지키는 장호와 악침에게 이르게 했다.

“오늘 밤 기산 서쪽에 불길이 오르면 촉병은 반드시 자기편을 도 우러 진채를 떠날 것이다. 그때는 군사를 이끌고 나가 이렇게 이렇 게 하라.”

이에 두 사람은 군사들을 높은 망루에 올려 불길 신호가 오르는 걸 살피게 하며 기다렸다.

한편 손례도 촉군을 맞을 채비에 바빴다. 군사들을 산 서쪽에 매 복시키고 촉병들이 군량을 뺏으러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날 밤 이경 무렵이었다. 마대가 삼천 군마를 이끌고 그곳으로 왔다. 사람은 모두 소리를 못 내게 하는 나무막대[枚, 하무]를 물고, 말들은 재갈을 단단히 채워 가만가만 산 서편에 이르러 보니 정말로 위병의 군량이 쌓인 게 보였다. 무언가를 가득가득 실은 수레가 수없이 모여 그대로 한 영채를 이루고 있는데 사람은 안 보이고 꽂아 둔 깃발만 가득했다.

마대는 가만히 바람 부는 방향을 가늠해보았다. 마침 서남풍이 일 고 있었다. 마대는 얼른 군사를 그 영채 남쪽으로 옮기고 그 근처에 불을 질렀다. 불길은 바람에 날려 금세 수레에 옮아 붙었다. 마른 풀 에 유황까지 부어둔 것이라 불길은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치솟았다. 숨어 있던 손례는 병이 저희 영채 안으로 들어와 불을 지른 줄 알았다. 이제는 독 안에 든 쥐다 싶어 군사들을 이끌고 한꺼번에 밀 고 나갔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등 뒤에서 북소리 나팔 소 리가 높이 울리며 두 갈래 군마가 덮쳐왔다. 바로 마충과 장의가 이 끄는 병이었다.

위병은 어느새 그들에게 에워싸여 거꾸로 독 안에 든 쥐꼴이 되 었다. 손례는 깜짝 놀랐다. 얼른 군사를 수습해 벗어나보려 하는데 다시 함성이 크게 일며 한 떼의 군마가 불빛을 등지고 뛰쳐나왔다. 이번에는 마대가 이끄는 병이었다.

마충과 장의, 그리고 마대가 이끄는 촉병들이 안팎에서 들이치니 위병은 싸워볼 것도 없이 대패였다. 불길은 매섭고 바람은 거세 거 기 쫓긴 인마가 어지럽게 흩어지다 보니 죽는 자만도 얼마나 되는지 헤일 수 없을 만큼 많았다. 손례는 불에 데고 창칼에 다친 군사들을 이끌고 간신히 불길을 뚫어 달아났다.

한편 위의 으뜸가는 영채를 지키던 장호는 한밤중에 불길이 하늘 로 치솟는 걸 보자 바로 조진이 일러준 때가 왔다 생각했다. 진채의 문을 크게 열고, 악침과 함께 모든 군사를 끌어모아 진채를 나섰다.

비어 있을 촉병의 진채를 들이치기 위함이었다.

장호와 악침이 촉진에 이르니 사람이라고는 그림자도 하나 얼씬 않았다. 아무리 저희 편 구원을 간다 해도 그렇게 진채를 비워둘 수 는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속은 줄 안 장호와 악침은 얼른 군사를 거두어 물러나려 했으나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진작부터 숨어 기다리던 오반과 오의가 각기 한 갈래 인마를 이 끌고 뛰쳐나와 위병이 돌아갈 길을 막아버렸다. 장호와 악침은 겨우 겨우 촉병의 에움을 뚫고 나가 저희 본채로 달려갔다.

하지만 거기서는 또 놀라운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본채에 쌓아둔 토성 위에서 화살이 메뚜기처럼 날아들었다. 관흥과 장포가 그곳을 차지하고 앉아 퍼붓는 화살이었다.

여지없이 짓뭉개진 장호와 악침의 위병은 하는 수 없이 대도독 조진의 진채로 쫓겨갔다. 그들이 막 그 진채로 들려 하는데 다시 어 디선가 한 떼의 위병들이 쫓겨왔다. 바로 손례가 이끄는 군사들이었 다. 이에 그 두 갈래 군마는 함께 조진의 진채로 들어가 자기들이 제 갈공명의 계책에 빠진 일을 상세히 말했다.

조진은 쓸데없는 공명심에 들떠 얕은 꾀로 공명을 이겨보려다 죄 없는 군사들만 잃었음을 알자 정신이 확 들었다. 삼가며 대채를 지 킬 뿐 두 번 다시 나가 싸우려 들지 않았다.

싸움에 크게 이긴 병은 신이 나서 저희 진채로 돌아갔다. 장수 들은 모두 공명을 찾아보고 저마다의 공을 자랑했다. 그러나 어찌 된 셈인지 정작 공명의 얼굴에는 기뻐하는 빛이 없었다. 말없이 듣고 있다가 문득 위연에게 사람을 보내 무언가 계책을 주고, 이어 나머지 장졸들에게는 진채를 뽑아 돌아갈 채비를 하라는 영을 내렸다. 

“이제 크게 승리를 거두어 위병의 날카로운 기세를 함빡 꺾어놓 았는데 어찌하여 도리어 군사를 거두려 하십니까?”

양의가 알 수 없다는 듯 공명에게 물었다. 공명이 씁쓸한 얼굴로 그 까닭을 일러주었다.

“우리 군사는 양식이 없어 빨리 싸우는 쪽이 낫다. 그런데 적은 굳게 지키고 나와 싸우지 않으니 그게 지금 내가 앓는 병이다. 적은 지금 잠시 싸움에 져서 주춤해 있으나 중원은 사람과 물자가 넉넉한 곳이다. 곧 잃은 군사는 보태고 없어진 물자는 채울 것이다. 만약 적 이 가볍게 차린 기마대로 우리가 양식을 운반하는 길을 끊어버리면 그때는 돌아가려 해도 돌아갈 수가 없다. 이제 위병이 싸움에 진지 오래잖아 감히 촉병을 바로 보지도 못하고 있으니, 그들이 뜻하지 않고 있는 곳으로 나가, 알맞은 때에 물러나는 게 좋다. 걱정되는 것 은 오직 위연이 이끄는 군사들이다. 그들은 지금 진창 길목에서 왕 쌍과 맞서고 있는데 때맞추어 몸을 빼내지 못할까 두렵구나. 하지만 나는 이미 사람을 위연에게 보내 왕쌍을 죽일 수 있는 계책을 일러 주었다. 왕쌍만 죽인다면 위병들은 감히 그들을 뒤쫓지 못할 것이 다. 어서 군사들에게 영을 내려 떠날 채비를 하게 하라. 후대가 먼저 떠나고 선봉이 뒤를 맡는다.”

그 말을 듣자 아무도 물러남을 이상히 여기는 장수가 없었다. 이 에 공명은 그날 밤으로 군사를 물리기 시작했다. 북과 징만 진채에 남겨 밤새도록 요란하게 두드리는 사이에 군사들은 모두 썰물 빠져나가듯 물러났다. 이윽고 북과 징을 두드리던 군사들마저 물러가버리자 촉병의 진채는 그대로 텅 비어버렸다. 단 하룻밤 사이의 일이었다.

한편 조진은 자신의 장막에서 걱정과 고민에 빠져 있었다. 조서를 듣지 않고 섣불리 꾀를 부리려 들다가 적지 않은 인마와 물자를 잃 은 데다, 군사들의 사기마저 떨어져 촉군이 힘을 다해 밀어붙이면 견뎌낼 수 있을지 불안했다. 그런데 문득 좌장군 장합이 군사를 이 끌고 왔다는 전갈이 들어왔다.

장합은 말에서 내리기 바쁘게 조진의 장막을 찾아와 말했다.

“저는 폐하의 뜻을 받들어 특별히 대도독의 형편을 들으러 왔습니다.”

“그럼 중달을 만나보셨소?”

조진이 대뜸 사마의 얘기부터 물었다. 자신에 대해서 사마의가 무 어라고 그러는지 궁금한 까닭이었다. 장합이 주저 없이 대답했다. 

“만나보았습니다. 중달은 제게 이르기를 우리 군사가 싸움에 이겼 으면 촉병은 틀림없이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고 만약 우리 군사가 졌 으면 촉병은 반드시 물러갔을 것이다, 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 군사가 싸움에 이롭지 못했으니 촉병이 물러갔을지도 모르겠 습니다. 도독께서는 병의 소식을 알아보셨습니까?”

“아니, 아직 알아보지 않았소.”

조진은 알 수 없다는 얼굴로 그렇게 대답했다. 그러나 사마의의 말이 꺼림칙해 곧 사람을 풀어 촉진을 살펴보게 했다.

정말로 사마의가 예측한 대로였다. 오래잖아 살피러 간 군사가 돌아와 알렸다.

“촉진은 텅 비어 있고 정기만 수십 개 꽂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알아보니 병이 떠난 지는 벌써 이틀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제야 조진은 자신의 살피지 못함을 후회했으나 소용없는 일이 었다. 다시 한번 자신의 재주가 사마의에게 까마득히 미치지 못함을 한탄하고 괴로워할 뿐이었다.

한편 위연은 공명의 밀계를 받자 그날 밤으로 진채를 뽑아 급히 한중으로 돌아갔다. 곧 세작이 그 일을 알아내 왕쌍에게 전했다. 위연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들은 왕쌍은 가만있지 못했다. 거느린 군사를 모조리 휘몰아 힘을 다해 위연을 뒤쫓았다.

한 이십 리나 뒤쫓았을까, 달리는 말에 거듭 채찍질을 하며 앞을 보니 저만치 위연의 이름이 크게 씌어진 깃발이 보였다. 왕쌍은 벌 써 위연을 잡은 듯이나 들떠 크게 소리쳤다.

“위연은 달아나지 말라!”

그러나 병들은 뒤도 안 돌아보고 달아날 뿐이었다. 왕쌍은 급했 다. 달리는 말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병을 뒤쫓았다. 그를 뒤따르 던 위병들이 등 뒤에서 큰 소리로 왕쌍에게 알렸다.

“성 밖에 있는 우리 진채에서 불길이 오르고 있습니다! 적의 간교 한 계책에 떨어진 게 아닌가 걱정됩니다.”

그 소리를 들은 왕쌍은 뜨끔했다. 급히 말 머리를 돌리고 자기 진 채를 바라보니 정말로 한 줄기 불꽃이 하늘 높이 치솟고 있었다. 그 뜻밖의 사태에 왕쌍은 몹시 놀랐다.

“모두 돌아서라! 어서 진채로 되돌아가자!”

그렇게 소리치고 앞장서서 자기 진채 쪽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왕쌍이 어떤 산등성이 왼편을 돌 때였다. 홀연 한 장수가 말 한 필을 몰아 숲속에서 달려 나오며 크게 소리쳤다.

“왕쌍은 어디로 가려느냐? 위연이 여기 있다!”

그 소리에 왕쌍은 깜짝 놀랐다. 정말로 위연인지 거느린 군사가 얼마나 되는지 알아보기도 전에 겁부터 먹으니 손발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평소에 자랑하던 큰 칼 한번 제대로 휘둘러보지 못하 고 위연의 한칼에 갈라져 말 아래로 떨어졌다.

왕쌍이 그 꼴이 되니 그를 뒤따르던 위병들은 더 말할 나위도 없 었다. 으레 복병이 따라나오려니 하고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기 바 빴다.

하지만 그때 위연이 거느리고 있는 것은 겨우 서른 기에 지나지 않았다. 왕쌍을 죽인 위연은 아무도 따라오지 않는 길을 천천히 말 을 몰아 한중으로 돌아갔다.

위연이 그토록 쉽게 왕쌍을 죽이게 된 경위는 이러했다. 공명의 밀 계를 받은 위연은 모든 군사를 한중으로 출발시킨 뒤 날랜 서른 기 만 뽑아 데리고 왕쌍의 진채 근처에 숨어 있었다. 그러자 오래잖아 세작이 왕쌍에게 병이 떠난 걸 알리고, 왕쌍은 급히 군사를 몰아 그들을 뒤쫓으러 진채를 떠나는 게 보였다. 그때를 기다리고 있던 위연은 거의 비어 있다시피 한 왕쌍의 진채를 들이치고 불을 질렀다. 역시 공명이 미리 헤아린 대로 자기 진채에서 불길이 오르는 걸 본 왕쌍은 허둥지둥 군사를 돌려 달려왔다. 위연은 그런 왕쌍을 뜻 밖의 곳에서 뛰쳐나가 한칼에 베어버렸다. 사람의 심리가 지닌 허점을 노린 교묘하고도 빈틈 없는 계책으로, 위연의 용맹 또한 없어서는 안 될 성공의 요소였다.

위연은 왕쌍을 베고 유유히 한중으로 돌아가 공명을 찾아갔다. 공 명은 다시 그에게 인마를 나누어주고 크게 잔치를 열어 그 공을 치 하했다.

한편 장합은 처음부터 병을 뒤쫓지 않고 자기 진채로 되돌아갔 다. 쫓아봐야 부질없다는 걸 알고 한 일이었다. 그런데 홀연 진창성 의 학소가 사람을 보내 알려왔다.

“왕쌍이 위연의 칼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소식은 조진의 귀에도 들어갔다. 자신이 천거해 선봉대장으로 세우고 진창성의 싸움에서는 공도 적잖은 왕쌍이 그토록 허무하게 죽음을 당했다는 말을 듣자 조진은 괴로움과 슬픔을 견디기 어려웠 다. 그게 병이 되어 더는 싸움터를 지킬 수 없게 되자 낙양으로 돌아 갔다. 장안(長安)으로 이르는 길목은 곽회와 손례, 장합이 나누어 지 키게 했다.

위의 맹장 왕쌍을 죽인 것은 공명의 이름을 또 한번 드높였고, 어 느 정도 진창의 한을 푼 듯도 보인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촉이나 공 명의 승리를 뜻하는 것은 아니었다. 두 번째의 출사도 적지 않은 인 마와 물자만 축냈을 뿐, 병은 결국 한 발짝도 중원으로 들여놓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